성녀 아녜스
성녀 아그네스(또는 아녜스)는 1197년 또는 1198년에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아시시에서 귀족 출신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의 딸로 태어나 카테리나(Caterina)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의 언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족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 생활을 시작한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이다. 성녀 클라라는 1212년 3월 1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그로부터 16일 뒤에 성녀 아녜스 또한 불과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와 언니가 머물고 있던 산탄젤로 디 판초(Sant’Angelo di Panzo) 성당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성녀 클라라가 수도 생활에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더 심해졌지만, 수도 생활을 향한 성녀 아녜스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두 딸을 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그녀의 아버지는 강제로라도 성녀 아녜스를 집에 데려오려고 12명의 무장한 남자들과 친척을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가려 했지만, 성녀 아녜스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어냈다. 결국 하느님의 힘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고 느낀 친척들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수도복을 받으며 아녜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언니와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해 준 수도원 규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클라라 수도회(Ordo Sanctae Clarae, OSC)로 불리게 된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Povere Dame di San Damiano)의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인 오르톨라나와 막내 여동생인 베아트릭스(Beatrix)도 성녀 클라라와 성녀 아녜스가 생활하는 수도 공동체에 합류하였다.
그 후 성녀 아녜스는 1219년경 성 프란치스코가 피렌체(Firenze) 근교 몬티첼리(Monticelli)에 세운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 수도원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언니와 함께 생활하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아녜스는 만토바(Mantov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등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언니를 도와 클라라 수도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친절하게 자매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1253년 8월 몬티첼리에 있던 성녀 아녜스는 성녀 클라라가 중병으로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를 간호하기 위해 아시시로 돌아왔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 8월 11일 선종한 성녀 클라라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언니의 장례식을 치른 성녀 아녜스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 16일 성녀 클라라를 뒤따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시신은 성 다미아노 성당에 묻혔다가 1260년 아시시에 새로 지은 성녀 클라라 대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에 안치되었는데, 그녀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녀 아녜스에 대한 공경은 1753년, 그녀의 천상 탄일 500주년을 맞아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XIV)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안에서 축일을 기념하도록 허락하면서 승인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6일 목록에 아시시의 성녀 아녜스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그녀가 움브리아 지방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수녀원에서 꽃다운 청춘을 이어가며 언니인 성녀 클라라의 발자취를 따랐고,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온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11월 19일로 옮겨 성녀 아녜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