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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妻鹤子(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다)
아침 시냇가에서 학을 만나니(사실은 해오라비지만), 친구들과 간 소주 항주 여행이 떠오른다. 타계한 박홍식 친구 부인 생각난다. 그와 항주 서호(西湖) 고산(孤山)에서 북송 때 시인 임화정(林和靖)이 불었던 피리를 불면서 놀았다.
<시인의 고향, 소주 항주 여행>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上有天堂,下有蘇杭)는 말이 있다. 도대채 소주 항주가 얼마나 좋길래 이럴까? 나는 소동파와 백락천이 서호(西湖)에서 연꽃을 적시는 봄비 속에, 매화 조각한 유람선의 둥그런 창가에 미인 앉히고 풍류를 즐겼다는 서호는 살아생전 내눈으로 꼭 한번 봐두고싶었다. 그런데 동창 부부 10명이 소주 항주 3박4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이런 말 있지 않던가? ‘꽃을 즐기는 데는 마음 푸근한 벗이 있지않으면 않된다. 청루(靑樓)에서 가기(歌妓) 얼굴 보는 데는 재미있고 멋있는 친구를 얻지않으면 않된다. 달을 감상하는 데는 냉철한 철학을 가진 벗이 있지 않으면 않된다. 눈 내리는 풍경 기다리는 데는 미모의 벗을 얻지 않으면 않된다.' 여행 친구로 동기동창보다 더 좋은 친구 어디 있겠는가?
상해는 위도가 제주도 보다 남쪽이라 길가에 유도화(油桃花)와 야자수가 서있다. 황포강 강변에 프랑스 영국풍 석조건물이 많다. 한 때 ‘동방의 파리’란 명칭으로 불리다가, 아편과 매음 때문에 ‘동방의 창녀’라는 곱지않은 이름으로 불린 곳이다. 임시정부 터를 찾아가니, 마당로(馬當路)라는 곳은 60년대 서울 달동네 같다. 화장실은 골목의 공동화장실을 쓰고, 수도가 골목에 있어 빨래가 만국기마냥 골목에 걸려있다. 낡은 목조 2층 청사는 바닥 면적이 15평 쯤 된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딛고 이층 집무실로 올라가, 김구선생이 기거한 초라한 나무침대 본 후 윤봉길 의사가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한 홍구(虹口)공원 둘러보았다.
그리고 본토 중국요리 맛보기 위해 근처 요리점에 갔는데, 요리가 탁자 가운데 놓인 둥근 유리판 위에 차례로 나온다. 채소나 스프 등 처음엔 전채(前菜)가 나오고, 그 다음 오리, 돼지, 소고기가 삶고, 튀기고, 졸이고, 별미로 변해 나오고, 마지막에 국수와 밥이 나온다. 술은 공자 가문 전래의 ‘공부가주’(公俯家酒)인데, 독하면서 순하다. 식사하면서 음식 담긴 둥근 유리판을 손으로 돌릴 때다.
‘제 앞쪽으로 돌려주시겠읍니까?’
‘반대 쪽으로 살살 돌려주세요.’
작난끼가 동한 남자들은 친구 부인 보고 살살 돌려달라고 하고, 부인들은 그 말에 까르르 까르르 배를 잡고 엎어진다.
상해는 원래 양자강 하구에서 잡히는 게발의 밑부분에 부드럽고 까만 털이 빽빽한 ‘털게’로 만든 요리가 유명하다. 살아있는 게를 술에 담아먹는 ‘취해’(醉蟹), 껍질 채 푹 졸인 장초청해(醬炒靑蟹), 게 껍질에 게살과 알을 채워 쪄먹는 부용해투(芙蓉蟹鬪), 게살과 두부를 졸인 해분두부(蟹粉豆腐) 등 다양한 요리가 있다.
그 밖에 뱀장어 찜 홍소하만(紅燒河鰻), 해삼을 삶아 만든 하자대오삼(蝦子大烏參), 자라를 간장에 졸인 홍소빙당갑어(紅燒氷糖甲魚), 상해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고기만두 소롱포(小籠包)가 유명하다.
공부가주에 거나하게 취해서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소주(蘇州)로 갔다. 이층 열차에서 창밖을 보니 넓은 들판에 뛰엄뛰엄 농가가 보이는데, 빈부 격차 없는 공산사회라 집의 크기가 다 비슷하다. 대개 지층에는 가축을 기르고 이층에 사람이 산다. 집집마다 사각 연못을 파놓고 거기 자라와 새우를 기른다. 소주 항주는 끝없는 평야 곡창지대고, 거기 풍년이 들면 11억 중국 전체가 굶지않는다고 한다.
마르코폴로가 ‘동방의 베니스’라 부른 소주는 수 양제가 북경서 여기까지 판 운하가 시내 가운데를 지나간다. 서쪽 태호(太湖) 물은 양자강(長江)으로 흘러가고, 소주는 쌀과 차, 비단과 물고기가 풍부해서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리운다. 여기가 실크로드 출발지다. 이곳을 중국의 문필가 위치우위(余秋雨)는 '물은 너무나 맑고, 복사꽃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먹거리는 너무나 달고, 여인은 너무나 곱다' 하였다.
호텔에서 아침 먹고 버스로 한산사(寒山寺) 갔더니 거기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가 있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울음 울고 하늘엔 서리만 가득한데,
강가 단풍 숲 고기잡이 배 불빛만 수심에 찬 내 눈에 비치고
고소성 밖 한산사 야반의 종소리 나그네 뱃전에 들려오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眼.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이 시는 일견 평범한 시 같은데, 시를 쓴 사람 때문에 유명해진 시다. 당나라 때 장계(張繼)라는 사람이 과거에 재수 삼수 몇 번 낙방하고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고기잡이 배들의 불빛 비치는 ‘풍교’라는 다리 근처서 한산사 종소리를 들으며 쓴 시가 이 시다.
소주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도읍지다. 시내 곳곳 운하에 다리를 놓아 이끼 낀 다리 아래 배가 다닌다. 길거리엔 태호에서 건져온 태호석(太湖石)이 보이는데, 구멍이 뻥뻥 뚫어진 그 괴석 서울에 하나 가져오면 돈 좀 되겠다 싶다. 사람들은 옛부터 ‘강남 정원은 중국 제일이요, 소주 정원은 강남 제일’이라 해왔다. ‘졸정원’(捽政園)에 들렀는데, 이곳은 북경의 이화원(梨花園), 청도의 피서산장(避西山莊), 소주 유원(留園)과 더불어 중국 4대 명원(名園) 중 하나다. 명나라 왕헌신(王獻臣)이란 사람이 관직 은퇴 후 조성했는데, ‘채소밭에 물주고 채소 팔아 끼니 마련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우애 있는 것, 이것이 못난 사람의 일’이라는 반악(潘岳)의 시에서 '졸정원'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졸정원은 정원의 반 이상이 호수다. 도영루(倒影樓)는 물 속의 꺼꾸로 선 나무 그림자 감상하는 누각이요, 향원당(香遠堂)은 먼 호수의 연꽃 향기 맡는 누각이다. 견산루(見山樓)는 산 바라보는 누각이요, 원앙관(鴛鴦館)은 손님 접대하는 누각이다. 백향목(白木香) 숲 따라가면 계수나무는 꽃을 피우고, 태산목은 하늘을 가렸는데, 작은 오솔길은 정자와 누각 사이로 이어진다. 누각은 꽃무뉘 새겨진 화창(花窓)을 통해서 경치 조망토록 되어있다.
대(臺)는 멀리 조망하기 위한 축조물이다. 첨성대 서장대 수어장대 등이 그것이다. 누(樓)는 대 위에 사방이 탁 트이게 지은 건물을 말한다. 경희루 영남루 광한루가 이것이다. 정(亭)은 경치 좋은 곳에 휴식하기 위해 건립한 집이다. 포석정 백제 왕궁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이 이것이다. 각(閣)은 2층 이상 집을 말한다. 창덕궁 후원의 서향각(書香閣)이 이것이다. 이밖에 당(堂), 헌(軒), 재(齋)는 선비의 거처나 공부하는 장소이다.
졸정원 본 후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호구’(虎丘)로 갔다. 우리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호구는 30미터 남짓한 나지막한 언덕인데, 입구에 작은 운하가 지나가고, 꽃과 기념품 파는 행상이 많다. 나는 ‘쿠리’가 메고가는 가마를 재미삼아 타고갔는데, ‘시검석’(試劍石)은 합려가 검 제작 명인 간장(干將)과 막사(莫邪) 부부에게 명하여 다섯 자루 검을 만들고 검의 성능을 시험한 바위다. ‘천인석’(千人石)은 합려의 무덤을 만든 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들 부차가 공사에 동원한 인부 천명을 독살한 너럭바위고, 검지(劍池)는 3천개 칼과 아버지 시신을 묻은 곳이다. 곁에 있는 정자도 반갑다.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유명한 손자를 기념하는 손무정(孫武亭)이다. 천하명필 왕희지 안진경도 여길 다녀갔는지 암벽에 그들 친필과 낙관이 새겨져있다.
그런데, 백락천은 양자강 하구 분포구(盆浦口)란 곳에서 희미한 달빛 속 등불 밝힌 배에서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여인은 비파로 얼굴을 반쯤 가려 은근한 멋을 풍기며,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데 곡조는 소리를 이루기도 전에 정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한소리 한소리에 슬픔이 서려, 평생 불우한 정을 하소연하는 듯, 아미를 약간 숙이고 심중의 무한한 사정을 말하는 듯, 배는 소리에 취한 듯 조용하고, 다만 강물 위에 가을달이 유난히 희게 보이더라고 했다.
나는 백락천의 ‘비파행’(琵琶行) 읽으면서 언제 꼭 한번 비파 타는 여인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 있는데, 나에게 안복(眼福)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비단공장에서 패션쑈를 한다. 거기서 천2백년 전 양자강 분포구(盆浦口)에서 희미한 달빛 아래 등불을 밝힌 배에서 비파로 얼굴을 반쯤 가리어 은근한 멋을 풍기며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던 여인 상상해볼 수 있는 모델들 만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옥같이 흰 피부에 화려한 비단을 감고, 구슬같이 맑은 눈에 아름다운 미소를 띄면서 내 앞을 왔다갔다 하는 걸 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무릅을 치면서, 하오!(好) 띙하오!(頂好)를 몇번이나 외쳤다. 여인은 눈빛이 천량인데, 백락천은 눈빛은 말하지 못하고, 다만 여인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연에 자기 소매가 축축히 다 젖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미인의 눈빛을 작심을 하고 원도 한도 없이 쳐다본 후, 소주를 기념하는 비단 마후라를 네개나 샀다.
항주(杭州)에 가서 저녁을 먹고 10위안을 내고 택시로 골동품 시장에 나갔다. 도자기와 흑단(黑檀) 자단(紫檀)과 옥과 대리석 인재(印材) 싫컷 구경했다.
나는 청화백자 한 점과 청동으로된 관운장 좌상 하나를 샀다. 청화백자는 오래된 것처럼 색깔을 누렇게 변색시켜놓고 진품이라고 60위안 내라고 했지만, 가짜다. 관운장 좌상은 청룡도 칼날과 관운장의 긴 수염 한올 한올까지 세밀히 조각된 것이지만 값이 문제다. 어떤 집은 4백위안, 어떤 집은 2백위안 내란다. ‘뚸샤오첸’(多少錢)? 얼마냐고 전자계산기 숫자로 흥정하고 ‘뿌야오’(不要) 안산다고 돌아서면 팔을 잡는다. 중국에서 쇼핑 재미는 깍아도 깍아도 한정없이 내려가는 그 재미다. 4백 위안에서 시작한 걸 청화백자 관운장상 둘을 1백위안(元)에 샀다.
이렇게 골동 두 개 품에 안고 의기양양하게 5위안 내고 인력거 위에 높이 앉아, 밤거리 복잡한 인파와 인력거꾼이 인파 속을 죽어라고 페달을 밟는 걸 내려다보면서, 나는 ‘모정’에서 월리엄홀덴이 그랬던 것처럼 멋지게 담배 연기를 품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시인묵객의 고향, 서호(西湖) 구경을 나섰다. 섬은 물 속에 잠겨있고, 안개 속에 시민들이 태극권을 하고있다. 배로 호수를 유람했는데 둘레 40리, 깊이 1미터, 서호 절반이 연꽃으로 덮혀있다. 남송시대는 부자들 등용선(燈龍船)이나 누선(樓船)이 기생들 태우고 유람선 불빛으로 물을 수놓던 것이 서호 밤풍경이었다고 한다. 거기 백낙천이 만든 백제(白提), 소동파가 만든 소제(蘇提) 두 제방은 서호 물속에 잠길 듯 말듯 뻗어있다. ‘맑은 날 서호보다는 비 내리는 서호가 좋고, 비 내리는 서호보다는 눈 내리는 서호가 좋고, 눈 내리는 서호보다는 밤의 서호가 좋다’는 말 있다고 한다.
마침 여행사 가이드가 서호의 시를 읊어주기에, 내가 서울서 미리 준비한 두보(杜甫)의 ‘강남춘’(江南春)으로 화답했다.
천리 꾀꼬리 울음 속에 푸른 숲에 붉은 꽃 비치고, 강촌 성곽의 술집 깃발은 나부끼는데,
남조시절 4백80개의 절, 수많은 누대가 실비 속에 젖고있네.
(千里鶯啼綠暎紅 水村山郭酒旗風
南朝四白八十寺 多少樓臺煙雨中)
그러자 손님들이 흥이 난 모양이다. ‘배 위에서 직접 시를 읊어주니, 고량주 한잔에 10위안씩 받아도 다 사먹고 싶소.’ 한다. 여기서 잠시 곱고 문학적 재능 많던, 서호 명기(名妓) 소소소(蘇小小)와 산책하는 기분으로 ‘서호 10경’을 둘러보자.
첫째는 소동파 백락천이 만든 물 위에 걸친 아취형 돌다리에 눈 쌓인 모습.
둘째는 호수 안에 외로히 떠있는 고산(孤山)의 누대에 뜬 가을 달.
세째는 연꽃 활짝 피는 5월 술집 뜨락에서 피어난 술 향내가 정원의 연꽃 향기와 함께 바람에 떠다니는 기막힌 분위기.
네째는 소동파가 만든 여섯 개의 아름다운 다리 아래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는 늘어지고, 하얀 북숭아 꽃잎이 살짝 물 위에 떠 있는 경치.
다섯번째 추석날 배를 띄우고 달과 인공섬인 소영주(小瀛洲) 석등에 켜진 불이 셋으로 보이는 모습.
여섯번째 서호 남쪽 호반의 정원에 모란꽃이 활짝 피고, 화려한 색 뽑내는 비단잉어 노니는 모습.
일곱번째 남녂 골짜기에 운무가 끼어 마치 구름에 봉우리가 꽃혀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
여덟번째 석양의 남병산(南幷山) 정자사(淨慈寺)에 울려퍼지는 종소리.
아홉번째 우뚝 솟은 영봉산(靈峰山) 뇌봉탑(雷峰塔) 너머로 지는 저녁 노을.
열번째 물 오른 버들잎이 봄바람에 살랑일 때 듣는 꾀꼬리 울음소리.
호수 속에 나지막한 섬 고산(孤山)은 북송 때 시인 임화정(林和靖)이 은둔한 곳이다. '성긴 그림자 기울어 얕은 물가 더욱 맑은데, 그윽한 향기 살포시 황혼 무렵 달에 걸렸네‘. 매화를 읊은 천하절창 여기서 나왔다. 임화정은 항주 고산(孤山)에 은거했는데, 두 마리의 학을 길렀다. 항상 작은 배를 타고 서호(西湖) 근처의 절들을 찾아 노닐었는데, 혹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동자가 문 앞에까지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서 새장에 있는 학을 풀었다. 그러고 나면 한참 후에 임포가 배를 저어 돌아왔다.
근처에 장사꾼이 풀피리를 팔고있다. 이건 임화정이 학을 부를 때 쓰던 피리다. 임화정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고 살았다. 거기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 나왔다. 내가 흥이 나서 1위안 내고 피리를 하나 집어들자, 마침 옆에 있던 제약회사 박홍식 전무 부인이, ‘일 위안 양꺼!’ 이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잽싸게 자기도 공짜 피리 하나 집어든다.
거기 서호 근방에 1백50년 역사를 지닌 ‘누외누’(樓外樓), ‘산외산’(山外山),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멋진 이름 주가(酒家)들이 있다. 시간이 없어 거기서 닭을 연꽃잎과 함께 풍로 증기로 찐 규화계(叫化鷄)나 양념한 돼지고기 요리 ‘동파육’(東坡肉) 시켜놓고 부드러운 소홍주(紹興酒) 마시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내 당장 서울 가서 집 팔아 여기 항주로 이사 올란다’ 내가 이렇게 투덜거리자, 토건업 하는 전춘식사장이 ‘김교수, 우리 내년 봄에 꽃 필 때 한번 더 오자’ 다정히 위로해준다.
임어당 전기소설 무대인 전당강(錢塘江)에 가보니 12월인데 개나리꽃이 피고 파초잎 푸르다. 벽돌로 쌓은 육화탑(六和塔) 구경하고, 동진(東晋) 때 인도 승려 혜리(慧理)가 창시한 영은사(靈隱寺) 둘러보았다. 중국 선종(禪宗) 10대 사찰 중 하나로, 한 때 승려가 3천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현관의 운림선사(雲林禪寺)란 현판은 청 강희제 글씨라한다. 신도들이 빗자루처럼 길다란 향다발에 불을 부쳐 다녀 도량이 온통 향연기에 쌓여있다.
대웅보전에는 19미터 높이의 향나무에 금도금한 석가모니불이 계시는데, 입술과 눈동자가 여인처럼 고혹적이다. 그렇게 이쁘고 큰 부처님 처음 보았다. 법당 뒤에서 신라스님을 만났다. 신라 왕족 김교각스님 등신불(等身佛) 불상이 있었다. 그 시절 신라는 왕족 형제는 한사람이 출가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교각스님이 얼마나 출중했으면 등신불로 모셔졌을까. 반갑기도 했지만 해로(海路)로 그 먼 항주까지 온 것도 불가사의 하다.
절 앞에는 자단(紫檀)으로 만든 끝이 둥근 젓가락 천축쾌(天竺筷)와 백단향으로 만든 부채 항선(杭扇)을 팔고 있다. 여기가 용정차(龍井茶) 본고장이다. 절 근처 길가에 다원(茶園)이 많다. 다원 입구에 희고 붉은 산다화가 피어있다.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의 시 '처용단장(處容斷章)'을 생각하며 여행의 끝을 마감했다.
이번 여행은 고등학교 후배인 여행사 사장 덕에 호강한 셈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상해서 정통 중국요리에다 독하면서 순한 ‘공부가주’(孔府家酒) 맛 보았겠다, 소주에서 미인 보고 원 풀었겠다, 서호(西湖)에서 시(詩)를 논하며 놀았겠다, 항주에서 그 가격 흥정한 일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번지는 청화백자와 관운장 좌상 묵직하게 가방에 챙겨넣었겠다, 소소한 것까지 모두 만족스럽다. 이렇게 마음 끝없이 흐믓한데. 아시아나 항공기가 내맘을 아는 것처럼, 구름 위로 한없이 올라가더니, 시속 8백 킬로 속도로 고도(高度)를 힘차게 달린다.
(1998년 가을)
첫댓글 1998년 가을 여행 잘 다녀 왔습니다.옆에 있는것 같아요.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