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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소동과 빨간 쌍놈
1918년 여름, 쌀값이 1.8리터 당 50전까지 상승하였다. 같은 해 봄에는 24전이었기에 두 배 이상으로 올라간 셈이다.
1차대전 말기 과도한 물가상승 때문에 실질임금이 전쟁 전의 70%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러시아 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정부가 군대를 파견한다는 정보에 지주나 미곡상은 투기적으로 사재기를 했고, 이것들이 겹치면서 쌀값이 폭등했다.
폭동의 발화점은 토야마・우오즈(魚津)시였다. 어촌의 주부들이 토야마현 쌀의 현외 반출을 저지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운동의 불씨는 한순간에 전국을 휩쓸었고, 같은 해 9월 19일에는 전국 1도(道) 3부(府) 32현(県)으로 확산되었다.
일어선 민중은 쌀을 합당한 가격에 팔 것을 요구하며 쌀가게를 습격했다. 미곡거래소나 사채업자, 지주 등도 겨냥하였다. 정부는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나 전국 500곳에서 비슷한 폭동이 일어났다.
고베에서도 소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이자 한 남자가 바로 움직인다. 이름은 혼고 츠요시(本郷強). 고베 카와사키조선에서 배를 만드는 노동자로, 노조 선배한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던, “빨간 쌍놈”이었다.
그는 토야마에서 쌀소동이 일어나자 당시 고베의 대오야붕으로 알려진 토미나가 소쥬로(富永惣十郎, 일설에 의하면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오야붕인 오오시마 히데키치의 오야붕, 토미나가 카메키치(富永亀吉)와 동일인이라고 함)를 찾아가 호소했다.
"서민들이 고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와주는 게 의협(義俠) 아니냐. 미곡상에 쌀값을 적당한 선으로 억누르도록 해달라"
말을 듣는 듯 마는 듯하던 토미나가 오야붕이었지만 결국 꼬붕 여러 명과 함께 쌀가게를 돌아다니며 60킬로 당 5엔에 판매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조직도 "60킬로 당 5엔"이라는 가격을 하청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하여튼 한동안은 적당한 가격에 쌀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진 자일수록 돈의 유혹에 약한 건지 쌀 사재기 현상은 금방 고베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8월 11일 저녁, 고베 중심가 미나토가와 공원(湊川公園)에 모인 500명 남짓의 군중이 어느새 1,000명까지 늘어났다. '타나카'라는, 야쿠자 혹은 그에 가까운 세 명의 쌍놈의 선동 아래 아리모토 미곡점(有本米店), 스즈키 상점(鈴木商店) 사원 기숙사를 찾았지만, 경찰의 설득에 해산하였다.
하지만 한 번 불이 붙은 소동에 대한 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자칫하면 굶어 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 민생을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지경에 대한 한(恨)이 있었을 것이다.
12일에는 상업자본의 상징적 존재이자 고베를 대표하던 스즈키 상점을 습격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토미나가 오야붕과 담판을 지었던 혼고 츠요시는 조선소에서 같이 일하던 나나노 야스타카(七野安隆, 통칭 “야스”. 역시 야쿠자였거나 가까운 것으로 추정됨)와 함께 스즈키 상점에 야키우치(焼き打ち, 불을 붙여 파괴하는 일)를 실행한다.
(스즈키 상점이라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야쿠자 조직인 아카시구미(明石組)에 경비를 의뢰하였는데, 이는 '야쿠자'라고 해서 오로지 서민 편만 드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야쿠자의 전통적 생업 중 하나인 “요진보(用心棒)”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 아카시구미의 행태가 바로 요진보, 즉 사설 경비원이다)
시내 중심부에서는 쌀가게를 비롯, 쌀 매점을 하고 있는 지주나 사채업자를 습격하고 있었다. 폭동을 선동한 것은 야쿠자 아니면 야쿠자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야마구치구미 조직원이자 장례 인부와 영화관 요진보(用心棒, 사설 경비원)를 생업으로 하던 오츠마 토쿠이치(乙馬徳一, 혹은 오쿠마 토쿠이치)가 있었다. “야마구치구미 사천대왕” 중 하나로 꼽히던 와타나베 토오키치(渡辺藤吉)는 고베의 대자본인 효고관(兵庫館)을 습격한 인사 중 하나였다. 고베 쌀소동이 전적으로 야마구치구미에 의하여 선도된 것은 아니지만, 야마구치구미가 하층사회와의 관계에서 공감을 느끼며 행동을 같이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조심해야 할 것은 폭동이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야쿠자에게 폭동은 거친 기질과 폭력 성향을 발휘할 좋은 기회다. 나카시(항만노동자)를 하던 어떤 야쿠자는 군중과 함께 탄바 미곡점(丹波米店)과의 교섭에 임하였는데, 익일 오전에는 주점을 돌아다니며 “내가 이번 쌀소동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젊은 조직원들한테 주는 수고비 겸 경비비로 맥주를 내놔”라며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14일에는 신카와(新川) 지구에 있는 건어물상이나 채소가게가 약탈당했다. 12일 소동을 이끌던 야마구치구미 조직원 사카이데 요시노부(坂出敬信)는 헌옷방을 털며 돌아다녔고, 야마구치구미 조직원 야마모토 츠루마츠(山本鶴松)는 후쿠하라 지구의 유곽을 털고 다니었다. 당시 야쿠자가 놓여 있던 역사적 환경을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쌀소동은 9월 중순까지 이어졌고, 전국에서 2만 5,000명 이상 검거, 7,786명이 기소되면서 종식되었다.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수상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2. 내무대신(内務大臣) 토코나미 타케지로(床次竹二郎)과 “원외단(院外団)”
생김새가 행운의 신, 비리켄(ビリケン)을 닮은 데다 출신 계층이 릿켄(立憲, 입헌)적이지 않았다는 뜻이 겹쳐 일명 '비리켄 재상(ビリケン/非立憲 宰相)'이라 불린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수상 자리에서 물러서고, 하라 타카시(原敬)가 다음 수상 자리에 올랐다. 사상 처음 작위(爵位)가 없는 수상이라 “평민재상(平民宰相)”이라는 불렸다.
하라 내각이 안고 있던 정책과제 중 하나는 '빈곤층을 중심으로 민중을 관리하는 방안'이었다. 쌀소동이 근대화 이후 일본이 겪은 첫 민중폭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은 일본근대사 전체적 관점에서 봐도 “민중소동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 폭동이 다발한 시기였고, 쌀소동은 그 정점이었을 뿐이다)
과격화되는 민중소동에 있어서 야쿠자역할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정부는, '어떻게 야쿠자를 체제 안에 편입해야 하는가' 또한 중요한 정책과제로 여겼다. 야쿠자가 18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 걸쳐 벌어진 자유민권운동(메이지 신정부 출범 후 국회개설, 헌법제정 등을 요구한 대중운동)이 과격화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야쿠자의 일부는 근세 에도시대적 전업 도박꾼이었기에 정부는 도박꾼이기만 하면 감옥에 보낼 수 있는 '도박꾼처분규칙'을 제정, 대규모 단속을 통해 구형 야쿠자를 일소했다. 이는 훗날 “도박꾼 대(大)가지치기(원어로는 博徒大刈込(바쿠토 오오카리코미))”라 불린다(그만큼 야쿠자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된 일대 단속작전이었다).
문제는 쌀소동에서 민중을 이끌고 날뛴 야쿠자 중에는 도박꾼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도박꾼 단속으로는 그들을 민중에서 분리하기 어려웠다.
하라 내각의 고민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국회 안(내)뿐 아니라 바깥(외)에서도 움직인다.
당시 일본에는 국회의원이 아닌 당원으로 구성된 “원외단(院外団)”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국회 바깥(외)의 정치를 맡았던 이들은 당 간부의 호위 뿐 아니라, 선거 시 유권자한테 투표를 “권유”하며 반대 정당의 연설회를 방해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도박꾼 대 가지치기”를 전후하여 자유당(自由党, 민권운동가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창설한 정당)이 설립한 유우이츠칸(有一館, 유일관)은 정치단체라기보다 “실력”부대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무술 연수장이었다. 유우이츠칸의 관주 나이토 로이치(内藤魯一)에 의하면, “단도직입, 장렬(壯烈) 귀신으로 하여금 울게 할 정도의 자객(刺客, 살인을 일삼는 자) 양성소”였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야쿠자에게 딱 맞는 활약의 무대다.
하라 내각에서 내무대신(内務大臣)을 맡은 토코나미 타케지로(床次竹二郎)는 “야쿠자를 활용할 길”을 깨닫고 있었다. 도쿄제국대학 법대를 졸업, 오쿠라(大蔵, 재무) 관료를 역임하여 내무성(内務省)으로 옮긴 그는 미야기, 오카야마, 야마가타, 효고 등지에서 근무한 경험을 통해 “생”대중, “생”민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잡지 “일본인”을 주재하던 국수주의자이자 세이유카이(政友会, 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인 요네다 미노루(米田穣)에게 접근한다. 도박꾼이나 토건하청업자 등 “장사(壯士(기개와 힘이 센 이)”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민중, 특히나 가난한 국민들을 정부 측으로 조직화하기 위하여 국수주의나 우익사상 아래로 야쿠자를 조직화시키는 구상을 현실로 옮긴 것이다.
3. 대일본국수회(大日本国粋会)의 발족
토코나미 타케지로의 의뢰를 받은 요네다 미노루는 관서지방의 대오야붕 36명을 도쿄로 불러 모임을 갖는다. 교토・후시미(伏見)를 나와바리로 하던 대오야붕이자 “후시미의 수나고가와(砂子川)”로 유명했던 니시무라 이자부로(西村伊三郎)가 제청하여, 카와이구미(河合組) 카와이 토쿠사부로(河合徳三郎), 죠슈야(上州家)의 우메즈 칸베에(梅津勘兵衛), 도시다잇카(圡支田一家)의 시노 신타로(篠信太郎) 등이 결집하였다.
관서・관동의 쟁쟁한 장사, 오야붕들이 뭉치어 만들어진 조직이 대일본국수회(大日本国粋会)다. 총재직은 오오키 엔키치(大木遠吉) 백작(伯爵)・사법대신(司法大臣)이 맡았고, 고문은 재야 우익인사의 거물로 지목되던 토야마 미츠루(頭山満)가 맡았다. 회장에는 무라노 츠네에몬(村野常右衛門) 의원, 이사장에는 나카야스 신자부로(中安信三郎) 의원이 각각 취임하였다. 정치가 대규모로, 그것도 대놓고 야쿠자와 손을 잡은 순간이다.
강령을 보면 대일본국수회가 우익단체와 야쿠자의 통합단체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황실을 중심으로 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며,
“경신송조(敬神崇祖, 일본의 신(神)을 존중하며 조상을 숭상함)의 마음을 고조시킬” 것
“의기(意氣), 임협(任侠)을 본령(本領, 근본이 되는 강령・요점)”으로 여기며,
“혈약작법(血約作法, 피를 가지고 맹세하였듯이 꿋꿋한 약속으로 만들어진 법도)”에 대한 존중・유지
야쿠자와 우익은 원래 확연히 다른 존재였으나 현재는 종종 동일시된다. 내막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대일본국수회 발족이 야쿠자와 우익을 헷갈리게 하는 요인 중 하나임은 틀림이 없다.
대일본국수회에 근대 야쿠자의 선구적 존재인 치쿠호의 요시다 이소키치(吉田磯吉)가 참가하지 않은 점은 중요하다. 요시다 이소키치는 켄세이카이(憲政会, 헌정회) 소속의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반(反)세이유카이”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민세이당과 인연이 있는 야쿠자 중에 참가하지 않았던 야쿠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일본국수회가 '야쿠자 조직이 대대적으로 정치와 관계를 갖게 된' 계기가 됐음은 틀림없으나, 조직 자체의 성격은 세이유카이(정우회)계 원외단(院外団)의 확대판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야쿠자 조직을 원외단으로 이용했던 유효성은 뚜렷하였다. 1921년 켄세이카이는 대일본국수회 창립에 애를 쓴 토건계 도박꾼 카와이 토쿠자부로(河合徳三郎) 오야붕을 설득하여 새로운 단체를 만들게 하였다. 바로 야마토민로카이(大和民労会)다.
1926년에는 전국의 테키야(的屋, 노점상)계 야쿠자가 결집하여 대일본신노오카이(大日本神農会)를 결성, 원외단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노동분쟁이나 소작쟁의, 피차별민에 의한 차별철폐운동 등 사회운동에 대한 개입・파괴를 했다. 우익사상을 표방한 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공격 대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20년대의 추세였다. 당시 야쿠자 사회는 “원외단 전성시대”를 누렸던 것이다.
한편, 야마구치구미는 대일본국수회에도 야마토민로카이에도 합류하지 않았다.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으로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산업화가 달성된 이면에서 빈부격차가 커지며 시민의식이 향상되는 가운데, 뿌리 깊게 사회적 차별이 남아 있는 상황. 계급・계층 간 갈등이 속속 분출되고 대립하는 세상에서 야쿠자, 그리고 야마구치구미는 어떻게 갈 길을 찾았을까? 다음에 우리가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4) ~ 하몬(破門, 파문), 제츠엔(絶縁, 절연), 죠메이(除名, 제명)】
야쿠자 사회에서는 법도를 어긴 이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린치”, “사형(私刑)”으로 대표되는 신체적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야쿠자계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고 이번에는 사회적 제재에 대해 간단하게 짚어보도록 합시다.
사연에 따라 쫓아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답니다. 먼저 “일정 기간 야쿠자로서 활동할 길을 차단하는”, 비교적 가벼운 “하몬(破門)”입니다. 즉 “파문”이지요. 불교에서 교단이나 종파에서 내쫓음을 이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스승이 제자를 문하에서 내쫓는 것을 이르는 그 단어입니다. 야쿠자 사회에서는 오야붕에게 창피를 주거나 오야붕이나 조직에 대한 반항・저항으로 여겨지는 짓을 저질렀을 때에 “하몬”된다고 합니다.
하몬 처분이 내려지면 조직은 다른 조직들에 '하몬장(破門状, 파문장)'을 보내고 처분 대상자를 하몬했다는 뜻을 전합니다(그때 “하몬장”이라는 글자가 붉은색으로 나올 경우 하문에 이른 이유가 더 중대함을 나타냅니다). 하몬장을 받은 각 조직은 하몬당한 자와 일체의 관계를 갖는 것을 삼갈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하몬을 당하게 된 야쿠자는 사실상 야쿠자를 계속할 수 없지요.
다만 하몬의 경우 상당한 기간이 지나고 하몬당한 자가 깊이 반성하고 있음이 인정되며, 유력한 오야붕이 중매를 서줄 때에는 하몬 처분을 내렸던 조직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제츠엔, 죠메이는 복귀의 가능성이 없는 점에서 하몬보다 더 엄격한 제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츠엔, 죠메이를 각각 한자로 쓰면 “絶縁(절연)”, “除名(제명)”. 일견 제츠엔이 더 무거운 처분인 것처럼 보이는데 두 가지에는 확연한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제츠엔, 죠메이의 경우에도 각각 “제츠엔장(絶縁状, 절연장)”, “죠에이통지(除名通知, 제명통지)”가 각 조직에 송부되고 하몬과 똑같이 일체 관계를 삼갈 것이 요구됩니다.
하몬과 달리 야쿠자 사회에서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츠엔, 죠메이를 당한 야쿠자는 다시 카타기(堅気, 일반인)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야쿠자를 그만둔 이를 사회가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죠. 게다가 제츠엔, 죠메이 처분이 내려질 정도면 그 원인이 중대하므로, 보복을 각오하거나 적어도 경계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편안한 일상생활을 보내기는 꽤 어렵겠지요.
법도 위반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야쿠자를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죠세키(除籍, 제적)라는 제도죠. 야쿠자를 그만두고 싶은 조직원이 오야붕에게 신청, 승인이 되면 조직이 다른 조직에 “죠세키 통지”를 송부합니다. 물론 일반 회사조차 원활한 퇴사가 어려울 때가 있는 세상, 야쿠자가 조직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해서 '응 오키'라는 답을 듣기 어려운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