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61
7월24일[연중 제16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OZtkxH527g
(오병웅 베드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내 코도 석 자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기적이나 표징에 연연하고 집착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에 박수치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 한 가지! 활기차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의 관건은 성령과 성모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일상성, 충실성, 지속성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더 이상 말끔히 치유시켜 주겠다, 신비로운 현상을 보여주겠다, 지금 바로 여러분의 눈앞에서 기적을 일으키겠다, 순식간에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주겠다고 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자들은 대부분 이단이요 사이비 지도자들입니다. 그대신에 정통 가톨릭 교회 가르침은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고통을 겪고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더불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절대로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지루하고 힘겹더라도 한걸음 한 걸음 주님께로 나아가자고 격려합니다.
우여곡절 속에서 겨우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면서도 주님께로 향한 시선을 떼지 말자고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니, 서로가 서로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손잡고 함께 가자고 등을 두드립니다.
사실 우리가 보고자 노력해야 할 표징과 기적은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이 녹아 들어있습니다.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매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니, 성사 그 자체가 기적이요 표징입니다.
절대 용서 못 할 상황이지만 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 이 시대 표징이요 기적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꺼이 견뎌내고, 그 고통이 나와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배경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강렬한 표징입니다. 내 코도 석 자지만, 더 코가 길게 빠져나와 있는 사람의 코를 닦아주고자 손을 내미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실 기적입니다.
+++++++++++++++++++++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2)기쁜 얼굴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제가 수사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교육시키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아이들 사이에서 숨 가쁘게 움직여야 하는 활동수도자들입니다. 영성생활에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짜릿한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매일 주어지는 일상적인 전례나 미사, 성무활동 안에 들어있는 보화를 찾으십시오. 미사 때 제발 졸지 마십시오. 금쪽같은 묵상시간 제발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깨어있으십시오. 집중하십시오. 몰입하십시오.
몸과 마음, 눈과 귀, 외적인 태도 등 모든 기능을 총동원해서 미사에 푹 잠겨 드십시오. 미사의 동작 하나 하나, 전례의 표지 하나 하나, 경문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미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시오.
매일의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요,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아침, 저녁기도는 우리를 순간순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가장 은혜로운 도구 중의 도구입니다.
매일의 미사, 그것보다 더 큰 은총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되풀이되는 홍해의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를 온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부디 타성에 젖은 얼굴로, 귀찮은 얼굴로, 짜증나는 얼굴로, 그저 주어진 의무이니 온다는 얼굴로 미사에 오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이니만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감사와 감동의 마음으로, 깨어있는 자세로 미사에 오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보여 달라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요나 예언자의 표징에 대해서는 수백, 수천 번도 더 들어온바 이므로 스토리를 너무나 잘 꿰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빤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요나 이야기(하느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결국 고래 뱃속까지 들어가 보고 나서야 회개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멸망한 니네베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십니다.
하늘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태도 역시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영원한 상급을 선물로 주십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이승에서도 고달프지만, 다른 세상에서 겪게 될 고초가 클 것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조상들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베푸셨던 자비와 사랑, 진노와 벌을 생각하면 답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입니다. 굳이 ‘이거다’하는 징표를 요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니네베 사건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영적생활,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어둠과 슬픔, 나약함, 방종한 습관 등으로 인해 괴로울 때도 그 모든 감정들을 감추지 말고 솔직히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우리가 믿는 바대로 우리를 짐스럽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인다 하더라도, 또 어떤 좋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 할지라도, 오늘은 우리가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께 더 잘 봉사하도록 배려된 하루임을 잊지 마십시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BulLp35qB0
++++++++++++++++++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것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라고 야단치십니다. ‘지혜’를 배우지 않으려고 하며 표징부터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마치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표징은 성찬의 전례입니다. 성체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은 도외시하며 성체 안에서 예수님만 만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먼저 왜 하느님께서 성체가 되셔야 했는지를 이해해야 표징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배우려고 하지도 않으며 표징만 요구하는 세대는 그래서 절개 없고 악한 세대입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들은 행복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압니다.
누구든 자신 안에 가진 것으로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지혜는 표징을 인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표징이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주는 선물인데, 그 선물을 인식하려면 그 사람 자체가 자신을 죽이고 부활하는 삶이 참 행복이라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만이 표징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일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체 안에서 표징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은 죽음과 부활의 연속입니다. 그것이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1조 이상의 자수성가한 초대형 부자 21명의 공통된 습관 다섯 가지가 『억만장자 시크릿』에 나와 있습니다. 왜 하늘은 이들에게 그러한 축복을 주었을까요?
그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매일 하는 것은 일찍 일어나기, 운동(건강 유지), 독서, 명상, 규율 만들기입니다. 다른 책들도 다 이와 대동소이합니다. 더 들어가는 것이 있다면 이웃에 대한 배려, 혹은 선행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매일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일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이들은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발전을 거부합니다. 변하지 않으며 행복은 하려 합니다. 뱀의 소굴에서 천국을 느끼겠다는 심산입니다. 운동하는 노력이 없다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운동은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미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시대에 상관없이 30%는 꾸준히 운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 지혜로운 자들은 규칙적인 운동을 합니다. 혹은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고 시간 낭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활임을 압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같은 계열의 정점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절개 없고 악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진 것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죽음과 부활을 살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매일 기도를 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선행을 해보십시오. 십자가가 완전한 표징으로 보이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것에 어느 정도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을 찾게 됩니다.
폴란드의 억만장자 ‘미하일 솔로포프’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먼저 억지로 싫어하는 일부터 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가 때문에 억지로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제 안에 있는 게으름뱅이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 게으름뱅이는 계속 이렇게 투덜댑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난 것 같아. 바빠서 시간이 없어. 몸이 좋지 않아...’ 하지만 저는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 돼. 너 자신을 속이지 마. 넌 그냥 게으름을 피우려는 것뿐이야.’ 그리고 운동을 하러 갑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결단력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지닌 사람들은 벌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준비가 된 이들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자신처럼 행복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이 100달러로 석 달 안에 100만 달러를 버는 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10만 원으로 시작하여 석 달 안에 어떤 사람은 10억, 어떤 사람은 100억 가까지 불리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무수한 어려움을 겪고 왜 이런 챌린지를 하는지 눈물까지 흘립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이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세상 탓을 하며 불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온갖 핑계를 댑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생을 하는데도 우리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체를 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에서 지혜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면 성체를 영해도 그 안에서 예수님을 볼 눈을 가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표징은 ‘요나’의 표징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나와 니네베 사람들에게 설교했더니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속에서 사흘을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는데도 대부분 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표징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표징은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거부하면 표징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찾았듯, 우리도 이 세상에서 지혜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은 지혜를 갖게 하고 지혜는 진리를 차지하게 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38-42: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38절) 하며 유혹을 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39절) 라는 말은 하느님을 유일한 신랑으로 알고, 사랑받는 배필로 사는 삶을 버리고, 즉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버리고 악과 거짓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간음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게는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리를 꼬투리 잡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이다.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쓰러지고, 표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알려는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불신앙 속에 갇힐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4).
예수께서는 요나가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이, 당신이 고난을 받고 사흘째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시한다고 하셨다. 유다인들은 니네베 사람들에 비교되면서 책망을 듣는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기는커녕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기에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1절) 하신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2절). 여왕은 여인의 몸으로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 긴 여행을 하였다. 지혜를 원하는 것만큼 힘이 생겼다. 그녀는 서둘러 솔로몬에게 가서, 그의 말을 직접 들으려 했다. 그의 명성만 듣고도 그를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지혜를 하찮게 여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니 주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떠나고 만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을 보아도 요나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고, 두 사람은 종이기 때문이다. 이 종들의 말에 다른 민족들도 귀를 기울이는데, 주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의 말과 행위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삶을 노력해야 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이탈리아 성지순례에는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부가 같이 온 분들 많았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이 많이 온 것입니다. 38명 중에 부부가 12명이고, 학생이 7명이었습니다. 19명이 부부와 학생이니 전체 순례자의 딱 절반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대부분은 자매님들이 많았습니다. 형제님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못 오기도 하고, 학생들은 공부가 먼저라 못 오기도 했습니다. 순례는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몸이 떨릴 때 가면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쁜 중에도, 공부가 중요한 데도 성지순례에 함께하시는 분들을 보니 하느님나라에 보물을 쌓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에 기름을 준비해 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다섯 배로 늘린 충실한 종처럼 보였습니다. 저도 올해 성지순례를 5번 다녀왔습니다. 1월에는 이스라엘과 과달루페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요르단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 터키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저도 가슴이 떨릴 때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표징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표징의 인물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10가지의 표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는 10가지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10가지 표징을 보았지만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표징은 이정표는 될지언정 표징이 목적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에 목말랐던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천지사방에 표징이 있습니다. ‘의혹’의 눈으로 보면 지금 여기에 예수님이 계셔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게 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문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니느웨의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전하여라.’ 요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갔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병자들,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수많은 번제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신기한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볼 수도 있겠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거센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거든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8-42)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말한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마르 8,11; 루카 11,1)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라는 우리말 번역만 보면 그들이 겸손하게 청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뜻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켜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아주 오만한 태도로 요구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요구한 것은 신기한 기적을 구경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 또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마태 27,63), 진짜 메시아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또 만일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어떤 기적을 일으키신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또 다른 ‘속임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기적(표징)을 보고 더욱 깊은 믿음을 갖게 되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기적을 보아도 그 일이 기적이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기적(표징)은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확신을 주기 위한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 이야기를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도들에게 요구하였다. ‘당신들이 메시아라고 선전하는 예수가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표징으로 증명해 보시오.’ 사도들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도들에게 다시 요구하였다. ‘예수가 정말로 부활했다는 증거가 무엇이오?’ 사도들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고, 사도들을 비웃으면서 떠나버렸다.”>
예수님께서 요나 예언자의 일을 언급하신 것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 뒤에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또는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에게 표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게 되는 것’이 곧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믿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말씀만 듣고서도 회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유죄다.”라고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는 말씀은,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준 예언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요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열왕기 상권을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솔로몬의 지혜와 업적을 직접 본 다음에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이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려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1열왕 10,9)
예수님께서 ‘스바 여왕’을 언급하신 것은, “스바 여왕은 구원의 복음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솔로몬의 지혜를 보고서도 하느님을 찬양했는데,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직접 들은 너희는 왜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는 말씀은, 솔로몬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의 은총을 받은 인간일 뿐이지만, 메시아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솔로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청하는 사람들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반대자들입니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께 표징을 청합니다. 그들의 말은 그저 놀라운 일을, 기적을 보고 싶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오늘 복음은 기적이나 표징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곰곰이 헤아려 보게 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표징이 믿음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기적이나 표징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체험한 이들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실 표징 또한 요나와 비교됩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표징은 죽음과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그 어떤 표징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구원을 위한 하느님 업적의 절정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 사건의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신앙인의 참된 모습은 그저 경탄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입니다. 비록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감각적으로 쉽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믿음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부활에 참여하고 구원을 받는 것보다 더 큰 표징은 없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봐서 뭐하려고?>
언제부터인가 가톨릭 신앙 공동체도 기적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만연하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 전체 차원의 장엄미사가 있거나 큰 규모의 행사가 벌어지면 공연히 하늘을 쳐다보느라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들이 목격된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늘에 십자가 구름이 나타나지 않나, 이번에는 신기한 햇무리나 무지개가 보이지 않나 하는 기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피눈물을 흘린다는 전라도 어디의 성모상을 ‘친견’하기 위해 버스를 대절해서 내려가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것을 목격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은혜받았다고 하는 약하고 어긋난 신앙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의 세력에 묶인 이들, 부자유한 이들,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해방하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그분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구름이 나타난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피가 스며나는 성상을 보고 온들 그것이 우리에게 치유가 될 리 만무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
[청주교구 여성국 요셉 신부님]
<표징>
요즘 여러 매체에 점 보는 광고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보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또 한동안 경기가 침체되어 살기가 어려워져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무속의 시장 가치가 수 십 조 원에 이르고 있고, 이 시장이 점점 커져간다니 실로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나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점을 봤다며 고해성사를 하시는 분들이 심심찮게 있고, 많은 교우분들이 점보는 것에 대해서 묻곤 합니다. 그런 교우들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으면 점을 다 봤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점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점만 보지 않는다고 다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 신앙 곳곳에 기복적인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점점 우리 사회는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복적인 점을 보고, 우리 신앙인마저도 신앙생활 안에 기복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오늘 예수님의 탄식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유지해야겠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한다는 탄식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하루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늘 같은 날짜에 오던 용돈이 이번 달에는 오지 않았다며, 혹시 자식이 송금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확인차 전화하신 듯하였습니다. 자식은 바쁜 일 때문에 용돈을 보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하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 나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별것 아닌 일에 신경 쓰게 했다며 더 미안해하십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자식은 약간의 용돈으로 표현합니다. 받은 사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마음입니다.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하셨다 해도 부모님은 자식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표징을 보여 주어야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려 표징을 일으킨다고 수군거렸던 그들이(마태오 복음 12장 24절 참조), 이번에는 더 큰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실체라면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표징일 뿐입니다.
표징은 실체보다 더 크거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그 표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어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안부를 묻는 수화기 너머 자식의 목소리가 부모님께는 또 다른 표징이 될 수 있듯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표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의지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과 기적이 먼저입니까?
표징을 먼저 요구하는 우리라면, 점집을 찾아가 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며 원망하고 돌아서는 우리는, 용돈을 주지 않는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라며 떼쓰는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표징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한 때는 표징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는 주님의 강한 음성을 가슴에 담고 이제는 초연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 합니다. 보여 주실 때는 보십시오. 그리고 삶을 바꾸어 증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믿음이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한 후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행할 때 표징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신다면 어디서나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소시오패스라고 들어봤을 것입니다. 소시오패스는 타인의 모든 것을 다 빨아먹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이 소시오패스의 숫자는 적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글쎄 자그마치 전체 인류의 4%나 된다고 된다고 하니, 참 많은 사람이 소시오패스를 만나 고통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소시오패스를 치료하기가 특히 어려워서, 이들을 직접 치료하기보다는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데 신경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소시오패스에게 피해를 볼까요?
피해 보는 사람은 대부분 능력이 좋고, 성실하며, 착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소시오패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감탄할 것이 없는 사람이 주로 소시오패스에게 이용당한다고 합니다. 소시오패스는 성실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이용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정신과 의사는 스스로에게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자기에게 감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나’를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커질수록 그 감탄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어쩌면 소시오패스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도 자기들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표징에 대한 평가를 자기들이 하려고 합니다.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음에도 자기들만을 위한 표징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의 이런 억지 요청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시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위선자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기에 미리 당신의 신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사랑의 길로 다시 돌아오길 눈물 흘리며 기다리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스스로에게 감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악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으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마태오 12,38-42 (요나의 표징)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당신>
당신 멀리서 바라보다
당신 가까이 다가가서
당신 곁에서 머무르다
당신 안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당신을 보고
비로소 당신을 알고
비로소 당신을 느끼고
비로소 당신이 됩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억수로 내리는 하늘의 비를 보며>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주님께서 표징을 일으켜 보여주시기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 시대를 성찰해봤습니다.
지금 밖은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이지요.
이 비를 보면서 우리는 비 걱정 곧 수해 걱정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 비를 내리는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이 비를 내리는 하늘의 뜻을 보지 않고, 회개하라는 비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비가 뚝 그치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 곧 하늘에서 내리는 이 비 외에 다른 표징은 없다고 하실 겁니다.
우리의 요구를 하늘이 들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하늘의 이치와 하늘의 뜻을 우리가 오히려 알아야 한다고, 이 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뜻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들어주실 수 없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리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너희가 회개하라고 또 말씀하실 겁니다.
폭우와 기상 이변을 멈추게 해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폭우와 기상 이변을 자초하는 우리의 죄악들,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드는 과소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편의주의,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수없는 욕망을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회개와 겸손한 믿음-
저에게 단 하나의 강론을 뽑으라면 저는 지체없이 31년전인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의 대축일 종신서원 미사시 강론을 뽑겠습니다. 31년전이니 그동안 참 많은 수도형제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주제로 한 강론이었고 셋째 대목을 나눕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새롭게 들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좋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인 패거리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모인 은총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좋아서 살기로하면 벌써 공동체는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구원받기로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같은 그 어둡고 단조로운 회색빛 세월을 얄팍한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달콤한 인간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근원적인 고독에 부닥쳤을 때 속수무책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외모를, 마음을, 재주를, 자리를,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만이 영원하기에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보며 우리의 삶은 어둔밤 물위를 걷던 베드로와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없이는 온갖 유혹의 바다, 쾌락과 탐욕의 바다, 환상의 바다를 건너 주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성 쁠라치도를 구해 낸 것은 성 마오로의 지극한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불신과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베드로를 질책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젊음이 순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연륜이, 있는 자리가 성숙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구나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초발심의 자세가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대목에 대한 나열이었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반드시 앞에 붙어야할 말마디는 더불어요,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어야합니다. 내달 8월1일부터 6일까지 포르투칼 수도 리스본에서는 세계 젊은이들의 날 행사가 있고 교황님은 물론 전세계에서 60만 명의 젊은이들이 모일 거라 합니다.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 제목이 “타인들과 함께 기쁘게 걸어라” 였고 그 뒤에 “결코 혼자(never alone)’가 아닌 말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도반 형제들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참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어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님의 강론중 한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더불어 자라는 밀과 가라지들(Wheat and weeds growing together)”
최후 심판의 날까지 가라지와 더불어의 삶,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요 삶의 신비입니다. 제가 꼭 강조했어야 했는데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밀의 성장에 함께하는 가라지도 필수입니다. 가라지없는 밀만의 세상, 환상이요 결코 영적진보도 없습니다. 가라지와의 영적전쟁중 영적진보입니다.
더불어 믿음의 여정,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더불어 여정중 고군분투하는 믿음의 전사, 모세요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인 두분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는 믿음이 부족한 더불어 여정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우리 믿음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추격하는 파라오의 군대와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을 쏟아놓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있는 모세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놔두시오.’하면서 이미 이집트에서 말하지 않았소.”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의 리더십은 얼마나 결정적인지 배웁니다. 리더십(leadership)은 펠로우십(fellowship)인데 공동체가 잘 따라주지 않으니 모세의 리더십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는 모세에 이어 즉시 하느님께서 모세를 격려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모세와 늘 함께 하는 더불어의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이집트의 파라오 군대도 하느님 수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두 대목, “주님께서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어쨌든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모세도 함께하던 백성도 회개와 더불어 믿음도 새로이 배웠을 것입니다. 새삼 믿음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날마다의 공동전례기도수행이 참 좋은 믿음의 훈련이 되고 이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성장하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로 두분의 대조가 우리에겐 위로와 힘이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없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전생애가, 특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빛나는 표징인데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미 요나의 표징은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됨을 봅니다. 이어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면서 거듭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믿음이자 참나의 발견입니다. 평생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믿음의 모범인 예수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다음 두 말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빛나는 표징은 없습니다. 자랑스럽게도 주님을 모시는 우리 역시 빛나는 하늘 나라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2,39)
<요나의 표징인 회개!>
오늘 복음(마태,12,38-42)은 요나의 표징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요나서 1장~3장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나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1,2)
하지만 요나는 주님의 이 부르심을 피해 타르시스로 도망갑니다. 그곳으로 가는 중에 큰 폭풍을 만나, 주님의 뜻을 거역한 자신의 잘못을 알고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1,12)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는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고, 그곳에서 요나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승의 배 속에서 제가 부르짖었더니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요나2,3)
주님께서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나를 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 사십일이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3,4)
타락한 니네베는 요나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시려고 했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참으로 멋진 니네베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십니다. '회개하느냐 회개하지 않느냐?'를 보십니다.
우리 안에는 '회개하는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TVN8hi7KnA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 39)
회개를
만드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개는먼저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말씀만 있고
회개가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절실한
고백의 시작은
언제나 절실만
우리의 회개입니다.
말씀을 더욱
살아있게 하는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여전히
계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우리 삶으로
되찾아 기쁘게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의 실격은
원칙과 신념이
사라진
지조의 실격입니다.
역겨운 삶의
어리석음을
포기하듯
우리가
하느님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앞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뉘우침이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진정한
사람의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으신 마음을
지조없는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회개입니다.
나쁜 마음을
버리고 똑바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만들고
행복을 만드시는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절실한
말씀을 듣습니다.
몸과 말과
생각과 마음을
빛이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악한 짓들이
선행의 실천으로
악행을 극복하는
회개의 맑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입니다.
회개가 있기에
사람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나의 입장이 아닌
주님의 입장에서
만나게되는
지극한 사랑
회개입니다.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