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 153〛
죽음에 대한 희화적 성찰로 인간 존재를 탐구
극단 《문화판 모이라》의「119 옆 낙원빌딩」
연극평론가 김 문 홍
희비극 형식을 통한 인간 존재의 탐구
극단 《문화판 모이라》의 「119 옆 낙원빌딩」(김숙경 작 연출, 110분, 2023. 3. 22〜3.26,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역설적 대비를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일종의 희비극이다. 이 작품은 2018년의 초연 이래 5년 만에 희곡의 일부 수정 보완을 통해 다시 선을 보이는 작품이다. 2018년의 텍스트가 「나는 죽는다」라는 제명으로 죽음이라는 비극적 양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희극적 형식을 대비시켰다면, 「119 옆 낙원빌딩」으로 제명을 바꾼 이번 공연은 삶과 죽음의 희화적 대비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역설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차이를 보인다.
2018년의 공연은 무대 디자인과 장치가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주인공 ‘덕수’의 삶에 대한 고뇌와 죽음에 대한 욕구가 장면과 사건들의 물리적 결합으로 일관했다면, 이번 공연은 디자인과 장치가 사실주의적인 구체성을 띠고 죽음에 대한 비극적 요소와 삶에 대한 희극적 요소가 화학적 결합을 보였다는 차이를 보인다. 당시의 공연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강했다면, 이번 공연은 삶과 죽음의 평균률적 대비로, 작가의 시각이 보다 유연화되었다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번 공연은 그 때의 공연에 비해 비극적 형식보다는 희화적 요소가 다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총 4막 14장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1막이 4장, 2막이 6장, 3막이 4장, 4막이 1장으로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막에 프롤로그가 4막에 에필로그가 내포되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16 번의 암전이 있어
서사적 장면 전개가 연속성보다는 단절감을 보여, 관객이 작중 인물에 대한 정서적 일치로서의 동화(同化)보다는 객관적 거리두기로서의 이화(異化) 효과로 감동의 효과가 적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주제로서의 장면과 사건의 진전은 사실주의적 형식인데, 작가가 인간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사극적 인식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잦은 암전으로 관객이 극 속에 몰입되지 못하고 정서적 단절감으로 주제의 내면화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주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죽음의 역설로 삶을 조명하다
2018년의 작품이 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이 강했다면 이번 작품은 죽음에 대한 역설로 오히려 삶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죽음이라는 부정적 화두로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긍정을 강조하고 있다. 초연의 작품에서 죽음의 칙칙하고 음습한 색깔을 거두어 내는 대신, 이번 공연에서는 오히려 삶의 긍정적 측면이 보다 돋보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작가의 현실 인식이 부정보다는 삶에 대한 긍정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이 작품에는 삶과 죽음의 풍경이 명확하고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없는 삶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의 유무를 대변하고 있는 인물은 상만(강원재 분)과 이영(이태경 분)이다. 상만은 그저 삶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 없이 그저 물리적인 수명의 연장에 급급하고 있다면, 이영은 이미 남동생의 자살이라는 죽음에 대한 겅험으로 인간 존재에 대해 성찰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두 인물의 인식을 은유하는 대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영 : 부러워. 어떻게 저렇게 삶에 열중할 수 있나. 아침부터 밤까지 , 일말의 회의 도 없이, 한 점의 허무도 없이. 혹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같이 살면.
상만: 노화예방에 특효야. 기가 팍팍 순환되거든. 모든 건 순환이 문제야. 우리 몸은 피만 팽팽 잘 돌면 아무 문제가 없어. 우리 건물 4층에 사는 사람은 피가 걸쭉해지는 병 에 걸려 풍 맞았잖아. 너도 조심해. 하루 종일 죽치고 컴퓨터 보면 황천행 급행 티켓 끊어 놓은 거니까.
낙원빌딩의 건물주인 상만은 매일처럼 건물 옥상에서 건강을 위한 기체조를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없이 단순하게 물리적인 수명 연장에만 급급하고 있는 현실 순응의 인물이고, 국수집을 운영하는 이영은 동생의 자살에 대한 방관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불면증 환자이다. 401호에 살고 있는 덕수(배진만 분)는 벚꽃이 만개했을 때 목숨을 버렸으면 하고 죽음에 대한 동경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벚꽃이 만개했을 때 죽고 싶다는 것은 삶의 절정에서 아름답게 자신의 인생을 끝내고 싶다는 뜻으로,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그것에 초연한 인물로 은유되고 있다. 그렇게 삶에 집착하고 있던 상만은 난데없는 멧돼지 출현으로 계단을 헛딛고 굴러떨어져 죽음에 덜미를 잡혀 버리고 만다. 교통사고를 당한 남편을 살리기 위한 돈이 절실해 덕수의 죽음을 도와주던 청소아줌마 혜자(김아름 분)는 들고 있던 약봉지(죽음)을 다 쏟아버리고 만다, 그것은 곧 죽음을 동경하던 덕수를 삶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극적인 반전이 되고 만다.
피시방에서 죽치고 사는 10대 순정(한혜민)은 죽음을 보는 신묘한 능력을 지닌 채 늘 비누방울을 날리고 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비누방울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상징으로 덕수의 죽음에 동경을 은유하고 있는 주제를 암시하는 일종의 오브제이다. 이 작품에서 삶과 죽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로, 어떻게 보면 삶과 죽음의 모습을 암묵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일종의 서사적 화자에 가깝다. 낙원빌딩 옆에 위치한 119 소방대는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차 있는 낙원빌딩에 대한 안티 테제로,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존재에 대한 보호막이며 구원적인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역설적 대비로, 그래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낙관론적인 희비극이다. 즉, 죽음을 통해 삶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2018년의 초연 작품이 죽음에 대한 명상과 성찰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대비로 오히려 삶의 풍경을 더 강조하고 있다.
통일성의 결여로 극적 동화를 단절시키는 아쉬움
김숙경의 희곡은 언제나 단아한 형식으로 삶과 사회에 대한 인간 조건을 명상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이전의 그의 작품과는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전의 작품이 사실주의적 형식으로 삶과 인간 조건을 은유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 경향과는 조금 다르게 다소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여타의 작품이 내적인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면, 이번 작품은 다소 차갑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좋게 생각하면 삶에 대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 다소 아쉽게 생각한다면 삶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이 강하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의 다소 아쉬운 부분을 거론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내용과 형식이 다소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내용은 사실주의적 경향을 취하고 있다면 연출의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실주의와는 결이 다른 서사극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용은 삶과 죽음의 대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하고 역설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사실주의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형식은 인물과 상황에 대한 객과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서사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내용과 형식의 어긋남에서 관객은 감동이라는 교시적 태도에서 멀리 물러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잦은 암전과 주제에 대한 통일성의 문제이다.
평자가 생각하기에는 사실주의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일관해 관객에게 교시적 기능으로서의 깨달음과 감동을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번 작품은 너무 잦은 암전으로 관객이 작중 인물에 동화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암전되었을 때 삽입되는 장면 전환의 음악 역시 관객의 극적 환상을 차단하고, 사용되는 음악 역시 변화가 없어 단조롭다. 작가와 연출자로서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암전을 사용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냉철하게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을지 모르지만, 일반 관객은 서사극적 형식으로서의 객관적 거리두기보다는 사실주의적 태도로 동화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희곡에서 서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장면과 사건은 주제에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즉, 주제와 큰 관련이 없는 장면과 사건은 관객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119 소방대의 주민에 대한 방화 교육의 장면은 주제와 큰 관련이 없어 생략해도 되는데 구태여 보여주는 의도가 조금 생뚱맞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셋째는 주제 전달에 대한 작가의 극적 형식 결정의 모호함이다.
이전의 초연 작품은 죽음에 대한 명확한 초점의 선명도를 유지하며 죽음에 대비되는 삶의 삶의 풍경을 인용했다면, 이번 공연은 죽음보다는 오히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쪽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오히려 죽음 쪽에다 초점 심도를 두고, 그것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삶을 대비시키는 초연 작품의 연출 콘셉트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작품은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너무 희화하여 오히려 죽음에 대한 주제의 초점 심도가 약해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공연장 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공연장인 부산시민회관은 400석 규모로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는 프로시니엄 아치로, 이번 작품의 소재로는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는 ‘제4의 벽’을 허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오히려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지 않는 소극장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덟 명의 배우가 모두 한꺼번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극장 공연도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이제는 한번쯤 변혁을 꾀해도 좋다
그러나 언제나 재미를 좇는 상업적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채, 단아한 형식과 품격으로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로 관객에게 깨달음을 주는 작품을 시종일관 고집하는 극단
《문화판 모이라》의 작업 태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출해 내용과 형식의 일관성을 고집하는 콘셉트에 대해서는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극단 《문화판 모이라》는 이 시점에서 변혁을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극단이 창단된지 올해로 9년 째가 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희곡의 내용과 형식에 변혁을 꾀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명상과 통찰보다는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신랄하고 통쾌한 주제의식을 시도하고,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지금까지의 미시적 사실주의 태도를 지향하고 보다 더 연극적인 강한 형식에 방점을 한번 쯤 찍어보는 것도 자기 변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극단 《문화판 모이라》의 향후 앞으로의 10년의 향배에 관심을 가지고, 예의 주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성 연출가가 드문 연극계의 현실에서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서슴지 않는 자세와 태도에 큰 박수를 보낸다. 출연진의 소통과 앙상블로 멋진 공연으로 관객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을 준 극단의 쾌거를 축하한다.
(2023.3.25)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