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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분제를 찬찬히 살펴 보면~
노비 말고는
<직업>이 신분의 등급을 결정합니다.
그러면~
직업을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효?
그렇습니다만~
여기엔 지배계층의 숨겨진 간악한 독식 전략이 있습니다.
그들의 전략은
신분이 위로 상승하는 직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높게 만든 수단이 뭐냐면~
지식의 보급을 억제하고 제한하는 것으로써
쉽게 글자 즉 학문을 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일반 백성에게 사용하게 함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는 것이고~
그 당시 조정에서 훈민정음 반포를
극구 반대한 이유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지식보급 차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슴다.
사실 한글 이게
월드와이드로 좋은 글 축에 들지는 못합니다.~
ㅋ~
3800여 년 전에
그리스에서 호메로스 서사시가 나왔죠.
이것을 쓴 고대 그리스 문자를 연구한
언어학계의 의견은
지금의 영어보다 더 발전된 문자로 평가하고~
그런 글을 쓸려면
1만년 정도
문자의 발전이 있어야 무난히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쇼킹한 평가를 한다고 합니다.
세계최초 금속활자인 우리나라 <직지>는
1377년 고려 말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만들었죠.
홍보를 많이 해서 국민이 많이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 기술로 불교 경전이나 인쇄하고~
대중의 지식보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상으로 별볼일 없는 거라요.
직지 발견 이후 직지보다 13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금속활자 <증도가자>가 발견되었지만
그것 역시 별볼일 없구요.
직지보다 70여 년 뒤에
독일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쿠텐베르크 성서>가 나왔죠.
유럽에서는 그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 주장하면서~
크나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걸로 존나 책을 마구 찍어 돌려서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함에 있어
혁신적 기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동서양을 왕래하는
엄연한 실크로드라는 무역로가 존재하였고~
또 직지 개발 후에
유럽에서 상인들이 우리나라를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활자 기술을
우리나라에서 가져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결정타지
배낀거냐 최초냐 따지는 건
기분상의 문제일 뿐, 별 의미 없는 거라욤.
후후훗~
음...
고려시대에는 국민 5% 정도가 노비였습니다.
조선 건국 후 세종이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바꾸고
양천교혼(상민과 노비의 혼인)을 허용하고
일천즉천원칙(어미 아비 중 천민이 있으면 그 자식은 천민이 됨)을
적용한 결과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60%까지 노비였다고 함다.
노비 양산...
누구를 위한 정책입니까...
세종은 자신이 한 결정이
훗날 나라가 망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 경영 정책은 결국 나라가 망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
이것은
이 시대의 특징인
<빠른 지식 보급과 정보 공유>의 영향 때문입니다.
세종 일천 명이 나에게 덤벼도
컴과 인터넷 온 상태의 나 한명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ㅎㅎㅎ~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며
매매나 증여,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는 화폐경제가 크지 않았고
토지와 노비가 재산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노비의 자식은 어미 노비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남자노비 소유주는
양민 여자와 혼인시킬려구 노력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양민 여자가 낳은 자식은
아비인 남자노비 소유주에게 귀속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건이 이렇다 보니
늙은 총각 노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고
삼삼하게 생긴 남자노비는
주인 마님이 심심풀이용으로 대리고 있기 딱 좋은 여건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살았습니다.~
ㅋ~
사실 노비들은
양반들의 생활속 손과 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양반들은 사실상으로
노비 없이는 단 며칠을 견딜 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잘 챙기고 나름 존중해 주는
양심있는 사대부 가문이 많았다고 함다.
노비의 재산적 가치를 살펴 봅니다.
복잡하니 대략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조선전기 말의 가격은 지금 가치로 대략 일천이백만원 정도...
남자 노비 가격 400만원 정도,
여자 노비 가격 900만원 정도,
이건 상품의 중간치 가격입니다.
ㅋ~
노비의 소유주는
개인 또는 관청이고, 사노비 공노비로 구별하고,
노비의 주인은
노비에게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지만
다만 의식주의 책임은 져야 합니다.
거주 형태에 따른 노비 구분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노비를 솔거노비,
주인과 거주지가 다른 경우를 외거노비라 함다.
노비는 솔거노비 보다
외거노비를 원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실제로도 압도적으로 외거노비가 많았다고 함다.
외거노비 방식은 주종 쌍방 윈윈 전략입니다.
외거노비는
노동력을 팔아서 돈으로 주인에게 상납하고
개인의 능력대로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함다.
또는
약정한 주인의 토지를 노비의 책임 하에 경작해서
주인과 나누는 방식도 있다고 함다.
외거노비는 능력 껏
개인 재산을 불릴 기회가 있다고 함다.
솔거노비는 집안일을 하는데~
개인재산을 만들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합니다.
그 시대 사회 풍경을 상상해 보면~
주종관계는 관찰을 해야 보이고
외견상으로는
대다수의 노비들은 걍 일반적인 서민가정의 모습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노비의 성에 대한 여건
노예와 노비는 개념적으론 같지만
그 처우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함다.
노비를
입히지도 않고
목에다 개줄을 채워 기둥에 묶어 놓고
키우는 삽살개 하고 그짓도 시키고
이건 아니구욤.
노비 성문제는
노비 개인의 자유의사가 존중됨이 준칙이었습니다.
성문제는 특수성이 있어~
본인 의사에 반하여 강제하는 것은 문제가 많았기에
노비 개인의 자유의사를 사회가 용납하는 것이죠.
그러나
여건이 노비다 보니
성에 대한 침해가 불보듯 뻔하죠.
여자 노비도 줄을 서서
주인의 첩실로 대접받고 사는 경우도 있고,
혼인한 여자 노비까지 공개적으로
첩처럼 대리고 자는 개차반 주인들도 있었다구 함다.
노비의 혼인과 이혼을 주인이 결정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있고요.
노비의 남편은
아내의 주인에게 말하기를~
아내가 힘들어 한다고~
조금 살살 박으라고 뇌물을 주기도 했답니다.
ㅜㅜ
팔팔삼삼한 남자노비는
제 하기에 달렸지만 주인마님 주인아씨들에게
사랑을 받는 경우도 흔했다고 함다.
누구누구끼리 그 <끼리> 라는 말이 있자나욤.
신분제로 살지만
피가 같은 사람끼리라 같이 살다 보면~
사람끼리 발생하는 일들은 다 생기고욤.
그렇다 보니 양반가에서는
가문마다 노비 경영기법이 중요하게 다루어 집니다.
노비에게 절대 웃음을 보이지 마라 즉
위엄으로 지배력을 지키라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요령도 있었다구 함다.
ㅋ~
이 노비제도는 17세기 후반 즈음부터~
점진적으로 와해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함다.
도망도 도망이지만 돈 주고 면천 가능했고,
족보 사서 하루아침에 양반으로 탈바꿈하는
기문둔갑술이 성행했다구 하고,
돈 많은 노비가
가난한 양반들 보다 더 잘사는 현상도 보였다고 함다.
조선시대 신분제도 사회를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돈 앞에 얼마든지
신분제도가 무력화 되는 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ㅎ~
글이 좀 길어지는데욤.~
여러 번 쓰기 싫어서 걍 계속 고~ 합니다.
ㅋ
끝으로 노비 이야기 하나 해드리죠.
세종 아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선빵으로 제거하고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하는 사건 계유정난으로
탄탄한 지배계층이었던
사육신 가문의 여자들 180여 명의 여성들이
한순간에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들은
아내, 딸, 여동생과 가족, 누나와 가족, 어머니,
그 형제의 가족들입니다.
다행히 아무도 자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수양은 이들을 신하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과정이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 중 몇가지만 씹어 볼까효...
ㅎ~
박팽년(세종 사돈)의 아내는 영의정 정인지에게 하사~
박팽년이 죽을 당시 39세~
그의 아내 옥금은 쓸만한 나이? ㅋ~
거기에 더하여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
김종서의 딸 숙희와 며느리 내은비도
같이 주었다고 함.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박종우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와 딸 백대는 한명회에게~
하위지의 아내와 딸은 권언에게~
유흥부의 아내는 권반에게~
이개의 아내는 강맹경에게~
등등등~
노비를 분배할 때
모녀 노비는
갈라서 분배하지 않고 함께 지내도록 분배를 한 것은
나름의 배려로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라면~
향후 모녀가 출산하는 아이의 아비가
동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거넹~
ㅜㅜ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있고욤.~
밝혀지는 경우가 희소할 뿐~
노비가 출산한 아이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는 허다 하니
그렇게 묻히는 거죠.~
비극입니다.
가임기 여자 노비는 출산 압박을 크게 받습니다.
어떻게든 주인의 재산을 불려야 견딜 수 있었다고 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남자 노비들과 헛간 같은 곳에서
아기를 만들면~
정말 여자가 견딜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욤.~
공해 때문에 풀은 죽어도
그 장소에서 사람은 잘 산다고 하더니~
모진 게 사람의 목숨인 것은 맞는 거 같아효.~
ㅜㅜ
또
노비를 몇명씩 하사받은 신하들이
지들끼리 하사받은 노비를 바꾸자고
하기도 한다는군요.~
ㅋ~
좌의정 신숙주는
폐위시킨 단종의 왕비 18세 정순왕후를 달라고 수양에게
주청하였으나 거절 당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그러나 신숙주는 조완규의 아내와 딸
그리고 최면의 누나를 하사받았다구 함다.
노비를 하사받을 산하가
그 대상을 미리 살짝 검열을 하고서는
외모가 수려한 여자에게
<나에게로 와서 나의 첩이 되어라> 하며 종용하기도 했는데~
지명을 당한 이 여성 이름이 지금 가물가물하는데~.
사육신 형제의 아내로 기억합니다.
사건발발 직후
그녀는 감옥에 유치되고
남편은 사형을 기다리던 중
남편으로부터 혈서를 건내 받았다고 함다.
부부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보여지더군요.
혈서의 내용은
우리가 비록 이렇게 되었지만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살지 말자는 말을 했다고 함다.
살아남아서 노비가 된 여성들이 사는 여건은
특별한 경우가 없고 모두 대동소이랍니다.
역적이 된 이 남자는
죽을 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내의 용모를 감안한 당부를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타임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넋두리죠.
아내의 답장 내용은
해와 같이 밝은 날이 올거라고 했답니다.
다음 날 남편이 죽고,
그녀는 그녀를 점찍은 주인에게 답하기를
주인을 잘 모시고 살겠다고 하면서~
첩으로 살겠다는 내락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
죽은 남편이 아직도 생각나느냐고 첩에게 물었더니~
이미 잊었으니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말아달라는 청을 하더라는~
나는 누구의 입장도 배척하지 않으며~
그 개개인 나름의 사정들을 자연의 순리 안에서 봅니다.
특히 최상위 계층 귀족부인이~
하루아침에 노비의 신분으로 첩이 된 여자가 맘에 듭니다.
콕 찝어서 말하면
변심이 맘에 든다기 보다~
삶에 대한 열정이 크고,
감당하기 벅찬 당면한 현실에 맞서서
용납이 어렵지만 주어진 환경과 타협하고~
죽도록 싫어도 부딪힌 사람들과
최선을 다해 어울려 지내는 것으로
험악한 현실을 타개하여 나가는 그 의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후훗~
노비 이야기...
잼난 이야기가 많지만~
범죄 사건 또는 센세이션이 주류을 이룹니다.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좋을 둣 합니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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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하셔 올려주신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안녕하세효?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저의 글을 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러 열람을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퍼서 나르는 거 딱 질색임다.
ㅋ
그리고 카페에서 주목을 끌 능력은 있지만 그럴 뜻이 없습니다.
걍 이야기꾼들만 보면 족하고 안봐도 괘안습니다.
글을 쓰면 시간 떄우기 조아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건승하세효.~
꾸벅~
노비의 역사
잘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잠시나마 휴식하는 좋은 시간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유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