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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09 (오순열다섯) 굳세어라 금순아 시 125; 사 35:4-7 약 2:1-17; 막 7:24-37
시 125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 35:4-7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약 2:1-17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막 7:24-37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앗, 늦었다. 얼른 세수하고 머리감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반쯤 마른 듯 한 머릿결, 헐렁한 티셔츠, 희끄무레한 몸빼 같은 바지, 헉, 하얀 고무신, 밭메다 오셨나요?
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의 리듬을 따라 감상에 젖고, 브라질 산 원두 향으로 방안을 가득 메운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머릿결과 화사한 얼굴, 우아한 드레스에 코사지 까지. 연주회장 가시나요?
두 사람 같지만 한 사람입니다. 혹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교회 가장 변화무상한 분입니다. 대부분 외적 이미지가 비슷한데 비해 박모 집사님은 마치 심리테스트를 하는 듯합니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그것을 즐기는 듯합니다. 오늘도 설교의 소스를 제공해 주셨으니 꼭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우리는 박집사님의 내공을 잘 압니다. 그러나 집사님을 모르는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본다면, 이웃교회에만 가더라도 연주회 가시나요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부자 권사님이실 거야라고 생각하고, 밭메다 오셨나요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겉으로,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는 그것을 악이라고,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이나 작금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래서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하나 봅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도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2-3)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똑같이 야고보는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에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차별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로인해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부자는 믿음에 가난하게 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상속할 것이 없게 하셨다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다소 극단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으로 묘사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정의이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공의, 정의,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나라는 전혀 존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불의와 불의의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며,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다 약속 받은 것이 전혀 없는 부자로 가득할 것입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부자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문제는 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역사 속에 주인공이고 주체가 되는 이들을 엑스트라와 객체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하나님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있는 자가 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경계해야겠습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우리를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가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이 부자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역사 속에 주인공이고 주체가 되는 이들을 엑스트라와 객체가 되게 한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무너뜨린 자가 부자입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부자 흉내를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남들이 하니깐 나도 따라하는 것입니까?
『불안증폭사회』에서 심리학자 김태형 저자의 말을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실제로는 서민이면서 마음으로는 중산층을 지향해서 그렇다고 치부해버리기 힘들 정도로 한국인들의 남 따라 하기는 좀 유별난 구석이 있다. 사실 미국인들만 하더라도 남들이야 고기를 먹든 컵라면을 먹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고, 유럽인들 역시 남들이야 중형차를 타든 대형차를 타든 버젓이 경차를 타고 잘도 돌아다닌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떻게든 남들을 따라잡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멀쩡한 핸드폰을 최신모델로 바꿔대고, 읽지도 않을 거면서 베스트셀러는 무조건 사들이고, 남들이 대부분하는 일이라면 자기도 꼭 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p180-181)”
어쩌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남을 따라 부자 흉내를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 있긴 한데 가르쳐 드릴까요? 맨 입에 되겠습니까만, 여러분의 정성을 담은 물 한잔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아주 쉬운 일입니다. 너무 쉽다고 비웃진 마십시요. 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여러분, 이웃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대안이고 다른 방도입니다.
우리의 악이 차별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차별하지 않는 것, 곧 동등성입니다. 평등한 대우입니다. 저의 한쪽 눈에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야야 니는 왜 그 모양이고, 왜 그래 삐딱하노라고 하며 괜찮은 눈에 비교해 주눅들게 하고 무시하고 차라리 빼버리겠습니까?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쪽 눈이 혹이라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고 돌봐주고 아낄 것입니다. 그렇게 내 몸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돌보고 함께 하는 것,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할 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요 눈만 괜찮았다면, 요 눈만 잘생겼다면, 하면서 암묵적인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곁으로는 사랑하지만 속의 진정성을 묻는다면, 글쎄요. 그럼에도 전자처럼 진정한 마음으로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것이고 잘하는 것이며, 최고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차별이 왜 악인지 알겠습니다. 장애가 있는 눈에게 니 왜 그 모양이냐며 무시하고 차라리 확 빼버릴까 하는 순간, 유기적으로 연결된 온 몸이 고통당하고 신음하다 급기야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그를 고통과 신음에 가두어 놓고, 죽일 뿐 아니라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만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10절 이하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합니다. 그 차별을 간음이나 살인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범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12절을 그냥 넘어 갈 수 없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우리의 삶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 심판은 무자비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우리에게 강력한 실천을 요구합니다.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모른척하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만 그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 입니까?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부디 죽은 하나님을 믿지는 마십시오. 부디 하나님을 죽이지 마십시오. 부디 무자비한 심판을 받지 마십시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외면하기라 여간 쉽지 않습니다. 온통 차별로 가득합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이 말한 것처럼 “어떻게든 남들을 따라 잡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고가의 음식을 먹어야 하고, 중대형차를 타야하고, 멀쩡한 핸드폰도 최신모델로 바꿔야 하고, 읽지도 않을 베스트셀러를 사야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차별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요즘 스마트 폰에서는 게임문자가 자주 뜹니다. 하루에도 여러 통씩 날아옵니다. 게임업체가 인간의 심리를 잘 이용한 듯합니다. 아는 사람끼리 서로 점수를 공유하며 경쟁을 부추겨 빠져들게 하는 것으로 의식 있는, 승규가 큰아빠라고 부르는 집사님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거 다운받지 않고 모르면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게임 방법도 아주 쉽고 단순해서 아이들에서 40-50대를 비롯해 중년을 넘은 이들까지도 빠져 듭니다. 게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급음식, 고급 승용차, 최신 핸드폰, 베스트셀러, 게임, 등이 차별과 무슨 상관 있습니까? 무한 경쟁과 그 속에 녹아든 가치관이 결정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하니깐, 그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이러다 왕따 당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조바심, 이러다 내가 소속된 어떤 곳에서, 모임이나, 단체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공포 등등,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 됩니다.
마가복음으로 넘어 갑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살리려고 한 여인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 여인은 이방여인인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이 헬라인에 대한 차별이 어느 정도 였던지, 예수도 발 앞에 엎드린 그 여인을 개라고 취급합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지지는 않는다.” 의아합니다. 차별이 범죄라고 들었는데,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요? 예수는 그리스 철학이 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물든 그녀, 그럼에도 그녀는 딸을 살리고자 처절한 간청을 합니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딸을 살리고자하는 간절함, 딸의 생명을 살리고자하는 절규, 그 마음이 차별의 벽을 허물어뜨린 사건입니다.
세상이 온통 죽음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차별입니다. 고기를 먹든, 라면을 먹든, 경차를 타든, 고급승용차를 타든, 구식이든 최신 핸드폰이든,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메여 있습니다. 차별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갈라놓았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갈라놓았습니다. 장애와 비장애를 갈라놓았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갈라놓았습니다. 주류와 비주류를 갈라놓았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놓았습니다. 남과 북을 갈라놓았습니다. 우리는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이유입니다. 힘써 지켜야 합니다. 투쟁해야합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굳세어라 금순아. 굳세게 사십시오. 여러분, 이제 이런 시 한편을 읊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바꿔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나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이사야도 이렇게 시를 읊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마가교회 창립1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우리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앞으로 또 10년 20년, 100년을 내다보는 이즈음에 우리는 그 길을 위해 굳세게 나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중재기도
하나님 여기 정성껏 예물 드렸습니다. 혹 교회마저 차별에 물들었습니까?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높이 평가되고 중직을 맡게 되니 말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다 하신 주님이시지 않습니까? 귀한 예물이 쓰이는 곳에 하나님나라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위탁의 말씀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차별이 없는 곳입니다.
굳세게 사십시오.
여러분, 생명 살리는 일만이 차별을 없앱니다.
굳센 교회로 세상을 섬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