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환영과 환경 경영
루이 부뉘엘Luis Buñuel 이 1974년에 만든《자유의 환영Le Fantome de la Liberte》을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거실에 마련된 변기 위에 바지와 치마를 내리고 앉아 사람 한 명이 하루에 싸는 똥이 0.5kg이며, 오줌의 양이 1.5kg이나 되며, 이를 세계인구 40억에 곱셈을 해 대충 하루에 이 지구별에 쏟아지는 똥과 오줌의 양이 60억 kg 정도가 된다면서 20년 후 미래의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면이 조금 더 지나면 우리는 한 인물이 화장실에서 은밀하게 식사를 하는데 누군가 노크를 하자, 섬뜩한 표정으로 놀라지만, 밖에서 노크한 사람은 더 놀라고 마는, 그러니까 우리가 맨날 먹고 싸는 일의 자유에 대해 전도되어 돌아오는 환영이 다시 한 번 전도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음을 관객의 자리에서 웃어넘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6달러를 내면 한 번 서 볼 수 있었던, 그러니까 뒤샹의 샘(Fountain)을 경험(ready-made)해 보았더라면, 전도된 형식에 어떻게 대상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전도된 형식에서 대상이 의미화를 가질 수 있을까? 에 대해 좀 고상한 생각들을 잠시나마 하게 되었을까? 부뉘엘의 변기 위에서 이뤄지는 대화 즉, 환경 문제와 화장실에서 뜯는 닭다리의 모양새가 우리에게 기괴하게 보여도 그냥 웃고 넘기기 힘들고, 뭔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만 같다면, 적어도 먹는 문제와 싸는 문제가 자유의 환영과 함께 변기 속으로 사라져줘도 편안하지 못한 곳의 권역으로 이미 발을 들여놓은 셈일 게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나의 의문, 도대체 매일 매일 물-내림에 의해 변기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수십 억 톤의 똥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더 한 가지, 온갖 것들이 믹스되어 가공되는, 셈할 수도 없는 문제의 가공식품과 세계의 똥의 역학적인 상관관계를 따져보면, 이제 우리 인류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가공할 똥의 양만이 아니라, 그 똥의 질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덧붙여 나는 오늘날 자유의 환영이라는 문제가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이미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도대체 금호 아시아나라는 항공 회사의 기업 이미지 전략이 다름 아닌 ‘환경 경영’이라는 것이 당신은 믿어지는가? 지구 대기 오염에 있어 최대 원흉元兇이라고 할 수 있는 항공기 매연과 환경 경영이 적절한 조합일까? 이들의 광고 전략은 진정 포스트-부뉘엘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실망스러운 것은 이들의 환경 경영 전략이라는 것이 본사 직원들 헌혈 시키고 고아원 찾아가 밀린 빨래를 해주는 것 또는 밥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아이의 혓바닥이 천연세제라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즉 환경 경영이라는 변기 위에 앉아 피를 뽑아가며 피가 모자라 죽어가는 병원의 환자를 걱정하고 빨래를 하지 못해 더러운 옷을 입고 살아갈 고아원의 아이들을 걱정하지만, 정작 항공기가 내뿜는 매연은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금지된 초현실적인 부뉘엘의 세계가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 이미지 광고들이 생산해내는 환영이 아닐까? 본디 자본주의 체제에서 환경을 ‘경영’할 수 있어도 환경을 위한 경영을 할 수 없다는 나의 가치관은 너무 부정적이고 사회 부적응적인 것일까?
아님, 먹지도 싸지도 말자는, 게다가 해외여행이나 해외출장, 해외로 신혼여행 가려고 항공기는 타지 말자는 건가? 나로선 이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이나 전망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늘 아침엔 출근하기 전, 20개월 된 아이와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다가 ‘토마스와 친구들’이라는 아동용 프로그램에서 연신 토마스라는 기차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내품는 매연을 가리키며 ‘아빠 저 연기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지?’ 라고 물을 것만 같은(우리 애는 아직 말을 하지 못한다) 미래의 아이를 상상하다 회사로 향하는 자가용의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고다르Jean-Luc Godard 가 1983년과 1985년에 각각 제작한《카르멘이란 이름Prenom Carmen》,《탐정Détective》과 같은 영화 속의 인물들이 속해 있는 세계와 비슷한 것 같다. 은행강도 때문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너무 심각한 상황에서 고작 배우가 내뱉는 대사란, ‘시간은 멈추지 않아’ ‘인생은 짧아’ 따위의 말들이 아닌가? 등장인물들의 출현은 내러티브와는 전혀 무관하게 등장하고 퇴장하며 해결해야할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발생한 상태 그대로이지만, 이와 관련되어 있어야 할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는 그러한 문제로 부터 가능한 가장 무관한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간혹 이뤄지는 성적 장면은 배우들이 성기가 그대로 노출됨에도 정작 그들은 본인들의 성적 쾌락으로부터 무관해보이기 때문에 이들의 성적 행동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동기는 영원히 모호하며 행동의 결말은 끊임없이 뒤로 미뤄져 있어 전혀 에로틱하다거나 포르노그라피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든 일체의 관념은 그 대상을 둘러치고 있는 미장센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발견해야할 정념적인 주체들의 감성 따위는 애초에 싹이 말라 있다. 때문에 드니 아르캉Denys Arcand의 일련의 정치 풍자적인 연작들(미제국의 몰락, 야만적 침략, 무지의 시대)과 같은 신랄하고 파괴적인 배우들의 언설이 난무하는 영화가 오히려 대단히 온건하고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의 잠정적인 결론은 ‘자유의 환영’이란, 이미 너무 예쁘게 정돈이 잘 된 테제라는 것이다. 즉 환영이 자유라는 형식 속에서 대상화되고 의미화 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그것이 환영임을 자각했을 때 이미, 자유는 환영이기를 멈춘다는 것이다. 자유란 환영이 담길 수 있는 형태를 스스로에게 되돌려주지 못하거나 이 양태가 포개짐을 우리가 알지 못할 때만 자유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 환영을 횡단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가 환영을 포기한 대가로 지불해야할 것들은 너무 크고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자유의 환영’이나 ‘환경 경영’이라는 말은 내게 ‘동그란 네모’나 ‘네모난 동그라미’와 같은 말로 들린다. 따라서 순전히 언어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런 말들은 모순이 어딘가 새겨짐이 가능한 방식을 통해 가공할 폭력들을 생산하며,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폭력들에 무력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