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3.5.월남푸캇 비행장에서 미국의 노스웨스트 민간여객기를타고 대구동촌 비행장에 내리니 베트남 뜨거운 곳에서 왔기에 퍽으나 추웠습니다 그리고 임관후 처음으로 3주간의 휴가를 얻었습니다 외할머님과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해완형님의 산소에 월남 전쟁터에서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살아서 잘돌아 왔습니다 하면서 산소에 무릅꿇고 성묘를 드리고나니 아무것도 할일이 없었습니다 실탄은 4발을 맞았지만 외할머님과 조상님들덕에 아무탈없이 살어서 돌아온게 한없이 고마웠답니다 날마다 어머니한테 " 이무정한놈아 월남전쟁터까지 까리데감서 (가면서) 애미애비한티 (어머니 아버지) 간닷소리도 (간다는 소리도) 안허고 가는놈새끼가 어디가 있다냐 이망헐놈아 앳기놈의 새끼이 " 그소리를 날마다 들으면서 어머니가 조르시는데로 이런저런 월남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 거그서도 밥이랑 히먹는다냐 (해먹느냐) 김치랑 고추장 된장도있고 " 등등 마치 어릴때 호롱불을 켜고살때 작은누나와 둘이서 어머니에게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듯이 이제는 어머니가 나에게 월남이야기를 날마다 물으시면서 궁금해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자기와동갑인 구상리양반네 사랑방으로 가셔서 놀으셨다는데 어머니덕에 월남이야기를 듣고싶어서 아예 집밖으로 나가시지를 안으셨습니다 지금처럼 승용차가 보편화되지도 안했기에 어지간한곳은 거의다 걸어다닐때 였습니다 집에와서 5일만엔가 중학교때 걸어다녔던길 등계물 - 재넘어 - 띠밭머리 - 상평리 - 당고개재 - 호남중학교 - 대흥리다리를 걸어가 보았습니다 띠밭머리에서는 아버님의 생각에 목이울컥 했습니다 젖이없는 나에게 우유를 먹이신다고 90kg짜리 쌀한가마니를 집에서부터 지게에 짊어지고 그먼길을 한발한발 오시고나서 띠밭머리에 오시고나서야 지게를 받치고 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정읍시장 본정통까지 쉬지안고 가셨드랍니다 그리고는 쌀한가마니값인 1가론짜리 둥근미제 분유를한통 사가지고 지게에 잘묶어가지고 집으로 오셨드랍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때에 외할머니께서는 쌀밥으로 누룽지를 만들어서 절구통에넣고 찧어서 미숫가루같은 누룽지가루에 분유를 넣고 끓여서 먹였드랍니다 가끔씩은 새끼손가락 두마디정도의 쌀한말값인 마른인삼도 넣어서 먹였드랍니다 외할머님과 아버님 어머님덕에 그무서운 홍진에도 안죽고 살아서 달리기도 잘하고 잘자라서 이렇게 잘살고 있답니다 그덕에 영하 20도가 넘으면서 강풍이 불어데도 반팔로 지리산이나 설악산도 잘다니고 있기에 그져 한없이 고맙답니다
월남에서 귀국해서 새로운 곳으로 보직을 받은곳이 26사단 75연대 3대대 부관겸 본부중대장 이었습니다 종합출신 박상문 연대장님과 육사14기 신우식 대대장님은 (문경출신) 두분다 보안사 출신으로 힘께나쓰는 아주 막강한분들 이었습니다 대대장님은 아침에 간단한 조회후 당면과제에대한 지시와 결재만 끝나면 대대장님 찦차를타고 나가셨습니다 어쩔때는 추리닝 차림으로 들어오시는 때도있었습니다 대대장님 찦차인 1호차 운전수에게 물어보면 1주일에 한두번씩은 20사단과 28사단에가서 그사단의 사단장님과 참모장님이나 사단참모들과 테니스를하고 우리사단 테니스장은 한달에 한번정도만 간다고 하였습니다 27사단과 7보단과 맹호 기갑연대에서 보았던 대대장님들과는 지휘통솔 방법이 하늘과 땅차이 였습니다 모든권한을 중대장들에게 거의다 위임해 주면서도 지휘권을 확실하게 잘도활용 하는게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아주 부러웠습니다 중대장들의 애로사항이나 건의사항도 99%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러기에 75연대 휴가증은 3대대에서 다같다 써먹는다고 연대에서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연대인사주임 이성우소령은 " 야오중위 제발3대대 중대장들한테 포상휴가 상신을 자제해주도록 교육좀 시켜주거라 애들입단속도 꼭 시키고 모든것이 공정해야하지 너희3대대가 다가져 가버리면 다른대대는 어쩌란 말이여 " 하였습니다 갑종출신으로 자기동기들 중에서는 선두를 잘달리고 있다는 그똑똑한 인사주임도 ㅁ막강한 신우식 대대장님의 비위를 안건드리려고 아주애를 쓰는것 같았습니다 얼마후에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신우식 대대장님은 관사에서 부대옆 쪽문으로 걸어서 출근하시면 대대장님실에서 하루종일 전화만 하시면서 꿈쩍도 안하셨습니다 중대장님들과 우리는 영내에서 만나면 서로궁금한 미상의 나이롱 정보를 항상주고 받았는데 결론은 우리대대장님이 그렇게 목에힘을 주었던게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의 빽이었다는 것으로 정답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날라다니시던 신우식 대대장님이 근보름간 대대장님실 에서만 꿈쩍을 안하시고 장교식당에서 당번이 갖다주는 점심만을 잡수셨습니다 전에는 대대장교 식당에는 한번도 쳐다도 안보시던 대대장님 이셨기에 조금은 안쓰러웠 습니다
대대장님께서 한달전쯤에 백의리에서 테니스를 하다가 접질린것을 물리치료도 하면서 쉬었어야 하는데 곧낫겠지 했으나 놔두었더니 부기가 안빠지고 자꾸 더아프다고 하셨습니다 군의관 오세환 중위와 (43년생) 위생병이 대대장님실에 들어가서 4 - 5 일간 주사도 놔드리고 부스타로 물을데워서 따뜻한 물수건으로 물리치료도 해드리니 한결 좋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서울대의대출신 군의관 오세환 중위는 대대장님과 대화중에 우리대대 장교식당은 연대장교식당과 너무나 차이가 난다고 하였드랍니다 그이튼날 아침조회후 의무대에 전화를 하여서 군의관을 내방으로 오라고 했더니 무슨낌새를 챘는지 긴장된 모습으로 내책상앞에 오더니 부동자세로 서더니 " 공격 " 하면서 경례를 하였습니다 군의관 오세환 중위와는 전입왔을 때부터 같은해주오씨 라고해서 족보도 따져보면서 BOQ방도 자기가 원하는데로 맨끝쪽 구석방을 골라서 갖게하는등 절친하게 잘지내는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갈일이 있다고 사정하기에 연대 인사주임께 부탁하여서 휴가증도 두번이나 끈어주었기에 서로좋아 하면서 잘지내고 있었지만 이번 문제는 꼭집고넘어 가야하겠기에 다음달 부터는 오중위의 부식비를 떼지안을 것이니 " 군의관 자네는 BOQ 에서 부스타를 사다가 라면을 끓먹던지 부대앞의 식당에가서 밥을사먹던지 하는것이 좋겠네 " 하였더니 절대로 그런뜻이 아니었다고 얼굴표정이 변하면서 죽는시늉을 하면서 깔깔 빌었습니다 일단은 한달이나 두달후에 장교식당을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더니 무척아쉬워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오후에 연대의무중대장이 전화가와서 오세환중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라고 사정을 하면서 자기도 조선대학교를 나왔고 조선대학교 2년후배이고 ROTC 7기인 연대본부중대장 오부근 대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래도 용서를 안해주신다면 자기가 대대장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하겠다고 하기에 내가지고 말았습니다 조만간에 동두천 으로가서 간단하게 부대찌게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하면서 오부근 연대본부 중대장까지 가니까 그날은 오씨종친회가 되겠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고 20일만에 신우식 대대장님께서 보직이해임 되었습니다 일과가 끝났는데 대대장님께서 필기준비를 해가지고 관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 그동안 수고많았다 지난번것을 참고로 각분야별로 인수인계서를 작성하여 잘검토해서 내일아침에 결제를 받을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 하셨습니다 대략적으로 감은잡고 있었지만 너무나 빠른것 같았습니다 밤에 대대참모전부를 비상소집해서 날을세워서 인수인계서를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인수인계서를 펴보지도 안하고 결재만 하시고는 웃으시면서 중대장들과 대대참모들과 아쉽게 악수만 하시고는 이임식도없이 쓸쓸하게 찦차를 타시고 연대로 가셨습니다 참으로 시원시원 하시고 좋은대대장님 이셨는데 줄을잘못 서신것 아닌가 생각되었 답니다
신우식 대대장님이 떠나고 나신후에 각중대장님 들에게 오후에 새로부임 하시는 대대장님이 오시니까 경비전화든 무전기든 통신축선에 대기하도록 당부를 하면서 전별금 이야기를 꺼냈더니 모두가 시큰둥하는 눈치였습니다 연대인사주임이 전화가 왔는데 17:00시에 대대장님 취임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참석인원은 연대장님과 1.2.대대장님이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장교식당 이중사한테 삼페인 서너병과 간단한 음료수와 과일과 과자를 준비시키고 본부중대 인사계한테 동두천 마크가게에 연락해서 대대장 이취임식 프랭카드 큰것2개를 얼른갖고 오라고 준비했습니다 군대는 무에서유를 창조하는 집단이기에 한시간안에 모든준비가 끝났습니다 새로오시는 임공락 (31년생) 대대장님은 정읍신태인 출신이고 갑종68기이며 감찰출신 이라고 했습니다 박상문 연대장님의 간단하신 축사와 신임 대대장님의 빈틈없는 부대지휘 방침으로 이취임식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장교식당에 마련한 연회장에서는 삼페인과 음료수를 반컵씩만 마시고는 연대장님께서 초대하는 갈비만찬에 빨리가야 한다고 하면서 높은사람들은 모두들 찦차를타고 소요산 입구의 갈비집 식당으로 가셨습니다 시원시원 하셔서 아침조회나 저녁석회때도 10분이내로 회의를 마쳤던 신우식 대대장님에 비해서 새로오신 대대장님 께서는 별것도아닌 지시사항등을 가지고 한시간 이상씩을 회의를하니 중대장들이나 대대참모들이 아주 혼이들나고 있습니다 중대장님들은 " 부관님이 대대장님께 건의하여서 회의시간을 반이나 1/3로좀 줄이자고해봐 씨잘때기없는 회의하다가 힘다빠진게 " " 지금당장 그러면 역효과가 날것인게 조금만더 있다가 건의해 보는게 좋을것 같네요 " " 우리는 오해봉 부관님만 믿을께요 빨리좀 서둘러 주세요이 " 하였습니다 어느날 대대장님께서 구파팔 근처인 76연대가 RCT 훈련을 나가면 수도권 중요지역 이기에 우리대대가 76연대 전지역을 경계해 주어야 한다면서 지형정찰을 가자보자고 하면서 교육관인 안병한중위와 (육사27기) 나를찦차에 타라고 하셨습니다 군수장교 김중위가 (ROTC 9기) 제대말기에 허리디스크로 후송을 가버렸기에 나는 보급관도 겸하였기에 였습니다 가면서 대대장님께 조심스럽게 중대장님들의 건의사항을 말씀드린다면서 신우식 대대장님의 조회시간과 대대장님의 조회시간을 비교해서 건의드렸으나 " 전대대장님은 전육군에서 누구도 못건드리는 강자였기에 그렇게 하였지만 신우식 대대장님이 떠나시고 안계시기에 앞으로는 각급검열 기관에서 수시로 검열이 예상되기에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하기 위함이니 이해하라고 설명해주어 " 하시느것 이었습니다
76연대가 RCT 에 (연대전투단훈련) 나가고 난후에 우리대대는 최소한의 경계병만 남겨두고 모두가 76연대 지역으로 이동 하였습니다 76연대지역은 지난 1.21.김신조 사태후 북한산 곳곳의 예상접근로를 철통같이 아주 잘차단하고 있었습니다 76연대 1대대 잔류병력인 장기복무자인 신동식하사는 광주상고를 나왔다는데 아주똑똑 하였습니다 이왕에 군대생활을 할것이면 3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하라고 하였더니 자기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대대장님께서 76연대 1대대를 둘러보러 오셨기에 서울산에서 가장높다는 북한산 백운대를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드리니 아주높고 험하니까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무전기도 꼭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칼빈M 2와 실탄57발을 탄띠에넣고 신하사는 무전기를메고 쓰리퀘터는 깊은산속의 암자앞까지 타고가서 주차를 했습니다 하얀 바탕에 빨간줄을 대각선으로 그려진 작전차량 이기에 누가타고자고 손을드는 사람도없고 아주 편했습니다 백운대를 두번이나 갔다왔다는 신하사는 앞에가면서 몇번이나 등산로를 못찾아서 헤멧습니다 내가 앞장을서서 안전하게 히미한 등산로를 잘찾아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북한산 백운대는 강원도 화악산이나 복주산과 도마치고개보다 훨씬더험하고 힘든산 이었습니다 절앞에 주차하고나서 산을올려보니 3시간정도면 다녀올것 같았으나 내가바라본 봉우리는 백운대가 아니고 한참이나 아래에있는 봉우리 였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백운대아래 성문에 (위문) 도착해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백운대 까지는 급경사 바윗길을 한시간은 더올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총을 비스듬이메고 네발로 기면서 백운대를 올라갔습니다 배도고프고 목도마려웠으나 돈이있어도 식당이나 가게가 없으니 아무것도 사먹을수가 없었습니다 뒤에따라오는 신하사를보니 신하사는 무거운 무전기 때문에 나보다도더 헬렐레 하였습니다 " 야 신동식 너여기서 쉬고있어라 내가얼른올라 갔다가올께 " 하였더니 " 여기까지 왔는데 저도올라 갈께요 " 하였습니다 우리는 젖먹던 힘까지 다쓰면서 네발로 기어가면서 백운대 정상에 바위에 올라갔습니다 신하사와나는 총을메고 무전기를 짊어진체 힘껏 포옹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조심조심 기면서 안전쇠줄을 붙잡고 내려왔습니다 끝도없는 바윗길 돌팍길은 아무리 내려와도 쓰리퀘터를 세워둔 절이안나 왔습니다 해는떨어 졌는지 어둑어둑 해지는데 후레쉬도없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절에서 목탁치면서 불경을 외우는 녹음된 앰프소리가 들렸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를 외치면서 절에와서 우리는물을 두바가지씩 마셨습니다 지쳐서 비실비실하던 신하사는 운전대를 잡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아주 씩씩해 보였습니다
2006.4월 군동기회 충무산악회 산악회가 수락산으로 산행을 하는날 이었습니다 부천 중동역에서 전철을타고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종점인 당고개역에 도착하니 집합시간보다 15분먼져 도착했는데 군동기생들이 많이들 와있었습니다 큰길로 한참을가다가 좌측으로 한참을 올라가는데 산초입 넓직한곳에서 어떤산악회가 시산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내뒤에 따라오던 우리중대의 나와절친한 임상순이 " 해봉아 혹시 라이타있냐 저사람들이 시산제를 지내는데 나이티가 없어서 촛불을 못킨단다 " 하였습니다 나는 비상용 간식과 우의와 라이타를 항상소지하고 다니고 있기에 비닐에싼체 주었더니 한참후에 라이타와 퍽큰찰떡을 한봉지를 갖고왔습니다 " 너술안먹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사람들이 떡을주드라 나는떡을 안좋아하니 네배낭에 넣어라 " " 상순아 내가 찰떡을 좋아하는걸 그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다냐 " 오늘참 수지맞었다이 하면서 떡을배낭에 넣었습니다 서너번을 쉬면서 수락산정상 표지석 아래서쉬는 우리일행들에게 전전에 충무회 산악회 회장을했던 김청룡이 지형설명을 하면서 우람하게 솟아있는 북한산의 인수봉을 자기가 지금까지 20여번을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 어이 김원장님 나는 83년부터 저곳을 올라가 보는게 소원이었다 그밑에가서 물어보니 등산학교를 가라고 하드라 " 인수봉하강 하는곳은 아주 위험하니 앞으로는 절대로 가지말라고 하면서 5월달이나 6월달에 인수봉에 나를데리고 가주겠다고 하면서 지리산이나 설악산과는 아주 다르다면서 팔굽혀펴기를 50개를 할수있냐고 물었습니다 배낭을벗고 모두가 보는곳에서 팔굽혀펴기를 100개를 하였더니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로프는 의정부산사랑 산악회에서 가지고 갈테니 나는 헬멧과 양허벅지에메는 하네스를 구매하라고 했습니다 자주 쓰지도안할 암벽장비를 15만원과 10만원을 들여서 살필요가 있겠냐하고 코오롱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암벽을하는 안산경찰서 김은성 아우에게 전화를 했더니 20만원짜리 헬멧을 소사역옆 소사2동 파출소에 맞겨놓는다고 했습니다 하네스는 인천 친구한테 빌려줬다고 했습니다 오프넷 모임에서 구리사는 광진이 엄마가 대학때부터 암벽을했고 지금도가끔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전화를 했더니 축하 드린다면서 틈나실때 전화를하고 구리전철 역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2006.6.7. 그렇게 그리던 인수봉에 올라가는날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평소에 다니던데로 서울역에서 4호선을타고 수유역에 내려서 20번 시내버스 를타고 종점에가서 내렸습니다 20번종점 도선사 입구는 북한산에 올라가는 입구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북한산에 올라가는 등산객들은 50%정도는 도선사까지 4km정도를 걸어서 올라가고 남어지는 택시를 타던가 도선사버스 기사님한테 눈총을 받으면서 1000원주고 도선사 버스를타고 경사길 언덕길을 올라간 답니다 도선사 버스주차장에서 집합시간인 09:00 시가되니 오늘함께 인수봉에 올라갈 6명이 다모였습니다 의정부에서는 故김청룡과 (의정부 대동한의원원장 한의학박사 2009, 6,26.지병으로 사망) 이종호님과 황규정님이(女) 50m짜리 좋은로프 두동을 갖고왔습니다 1m에 20000원씩 이기에 한동에 100만원 짜리였습니다 이로프는 독일것인데 영하30-40도 에서도 얼지안는다고 했습니다 학생팀인 우리가 한동을메고 가기로하고 5000씩원주고 도선사 입구까지 택시를 탔습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등산화끈을 조이고 헥헥거리면서 깔닥고개를 올라가는데 로프를 메었을때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예쁘게생긴 39살 올드미스인 황규정님이 자기가 내가멘 로프를 메어다 준다고 하기에 남자가 체면이있지 어떻게 여자에게 로프를 맞기겠냐고 하면서 고마운 마음만 받겠다고 하였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816m 큰바윗 덩어리인 인수봉에 올라가는 코스가 54개인데 우리는 가장쉬운 코스인 " 고독의길 " 코스로올라 간다고 하였습니다 50도 정도의 넒은 바윗길에서 바윗틈 잡는법 안전고리 끼우는 요령등을 배우고 실습하고난후 고독의길 입구로 갔습니다 우리 다음으로 오르는팀은 40대의남자 4명과 30대의 후반의여자 3명인데 모두다 암벽화를 신었고 로프도 반질반질 고수티가 났습니다 본격적인 인수봉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수인 김청룡과 이종호의정부 산사랑산악회 회장님이 선등을하면서 안전고리를 점검하면서 우리학생셋을 리딩했습니다 3번째로 내가올라 가는데 겁도나고 무지하게 힘이들었습니다 90도의 직각 오름길에서 정힘들면 땡겨달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제일난코스인 8-9m 짜리 직벽에서는 계속 " 땡겨땡겨 " 를하면서 올라갔습니다 몸이날렵한 기갑여단장출신 심상환은 그난코스를 자기힘으로 올라오는 걸보고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포병출신 임형수와 맨후미에서 로프를잡고 딜레이를보던 황규정님도 2번씩 땡겨를 부탁 하였습니다 인수봉 정상에 올라가서보니 큰돌로 일부러 고여놓은듯 탱크보다도 훨씬큰 바위를 큰돌4개가 고이고 있었습니다
인수봉정상 탱크보다 훨신큰바위가 있는데 바위아래로는 10명정도가 들어가서 앉을수가 있을것 같았습니다 30여분간 동서남북을 천천히 구경하고 내려왔습니다 제일 신비롭고 전망이 좋은곳은 인수봉보다 20m높은 백운대 였습니다 백운대 정상에 올라가서 이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서 이곳을 향하여 손을들 흔들었습니다 나도 백운대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사진도찍고 손도흔들면서 박수를 쳐주었던일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인수봉 하강코스 중간지점 에서는 문고리같은 고리하나에 우리팀 6명이 전부가 메달려서 김청룡의 강의를 들었는데 참으로 무섭고 겁이났습니다 만일 고리가 빠져버린다면 90도의 직벽에서 60-70m 가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납작한 개구락지가 되는것 입니다 " 청룡아 고리가 빠지면 큰일나니 얼른 내려가자 겁나서 못있것다 " " 괜찮아 너를 위험한 곳으로 데려왔것냐 이고리에 10명이나 20명이 걸고있어도 끄덕 없었단다 " 이고리들은 우리나라것은 한개도없고 거의가 독일이나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제품 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몇시간씩을 전동드릴로 구멍을뚫고 수입품정과 망치로 두들겨서 이세상에서 가장비싸고 강력한 특수뽄드같은 세멘트로 마감처리를을 해놨기에 절대로 안전하다고 하였습니다 컴퓨터로 이글을 두들기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손에서 땀이나고 그때의 두려움이 떠오른 답니다 몇년전 인수봉에서는 히말라야에서 사망한 고미영 (부안 59년생) 다음으로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그예쁘던 차선영도 명이그것 뿐이었는지 헬멧을 벗어놓고 인수봉 암벽등반 후배들에게 암벽등반 요령과 안전교육을 강의하던중 인수봉에서 밤알정도 크기의돌이 그녀의 이마로 떨어지니 강의도중에 푹쓰러져서 현장에서 많은피를 흘리면서 사망하였 드랍니다 헬멧만 썻드라면 톡소리가 나면서 웃음으로 끝낫을 일이었는데 헬멧을 벗었기에 사망사고가 나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올라갈때는 50m짜리 로프로 5핏치 (5번) 내려올때는 2핏치로 마쳤습니다 화순 동복유격장에서 유격훈련할때는 마닐라로프로 하네스도하고 근거리지만 직벽도오르고 30여m의 직벽도 레펠을 교관님의 설명을듣고 조교의 시범을보고 따라서 했었습니다 이곳 인수봉은 조선시대 때부터 수백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에 참으로 겁이났습니다 아침에 배낭위에 로프를 묶어가지고 난코스인 하룻재를 올라갈때는 아이고 하이고를 하면서 올라갔는데 김청룡과함께 내려올때는 발걸음도 가볍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김청룡은 중위로 전역하여서 경희대 한의대를 장학생으로 다녔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서 한의학 박사도취득 했드랍니다 의정부 산사랑 산악회를 창설했으며 각종암벽 장비와 빙벽장비도 사비를들여서 구비해놨고 자기돈 1000몇 백만원을 지원해주며 의정부 산사랑 산악회의 젊은산악인 두명을 히말라야에 보냈는데 두사람다 눈사태를 만나서 아직까지 시신도 못찾고 있어서 양주 불곡산에 추모비만 세워주고 매년봄에 산사랑 산악회 시산제때 추모제를 지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소변을보면 피가나오니 수술을해서 몸속의 암덩어리를 수술했어야 하는데 자기가만든 한약으로만 치료를 하다가 2009년 6월에 그렇게도 건강하고 늠늠했던 김청룡은 하늘나라로 떠나버렸 습니다 그때 동기생 심상환과나는 3일간 장례식장과 화장터와 뼛가룰 뿌려준 도봉산 망월사 넘어에있는 고려시대의 해거국사님 사리탑 아래의 바위까지 전송을 가주었습니다
성주산에서 자주만나서 절친하게 지내는 박훈 (전주 63년생 공수부대 중사출신) 이 지리산이랑 다른높은산은 거의다 가보았는데 여지껏 설악산을 못가봤다고 설악산을 꼭한번 데리고 가달라고 사정하면서 졸라댔습니다 성주산에서 박훈은 지용준님 (51년생) 김동섭님 (51년생) 과더불어 성주산의 번개3총사 였습니다 소래산에서 오다가 장수동 800년된 은행나무길 코스의 600m 정도의 험한 깔닥고개를 산을탄다는 사람들도 12-13분이 걸리는데 박훈이랑 3사람은 6분에 올라다녔 습니다 박훈은 전주 모악산도 45분만에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가는차비는 내가낼테니까 오는차비는 네가내라고 하면서 배낭을 될수있는데로 가볍게 갖고오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2006년 가울단풍 피크철에 박훈을 데리고 동서울에서 첫차를타고 인제와 원통을 지나서 용대리에 내렸습니다 박훈의 배낭을 들어보니 지리산가는 배낭처럼 무거웠습니다 배낭을 가볍게 꾸리라고 했더니 왜이렇게 무겁게 갖고왔냐고 했더니 자기랑 소래산에 함께다니는 동내 누나들이 찰밥과 김밥과떡을 자기집으로 해갖고 왔드랍니다 김밥두줄과 1.5리터 콜라병에 포카리스만 한병체운 내배낭을 들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면서 웃었습니다 박훈은 번개이기에 800m 만가면 백담사가는 셔틀버스를 타는곳 이니까 너먼져가서 쉬라고 했더니 금방 번개같이 어디로 가버리고 안보였 습니다 2000원 씩을주고 표를끈어서 백담사가는 셔틀버스를 타고가면서 창옆으로 흐르는 단풍계곡을본 박훈은 이래서 사람들이 설악산 설악산 하는가 보네요 하기에 임마 이것은 입구아니냐 했더니 더들어가면 더좋냐고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백담에서 절을간단히 구경하고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여사가 2년간 살았던 방과 횃대에 (옷걸이) 걸어둔 승복과 방에서 목욕했던 큰밤색 고무타라이를 구경을하고 영시암과 오세암을 향했습니다 가다가 옛날산장 앞에서 43년생 이라는 목포상고줄신 4명을 만났는데 폼세를보니 별로인 사람들이 김대중과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박지원등을 들먹이면서 입으로 목포정치를 다하면서 박훈에게 설악산을 몇번이나 왔냐고 했습니다 박훈이 처음이라 고하니 자기들만 따라오라고 하면서 설악산같이 높은산에 올때는 이런스틱을 꼭가지고 와야한다고 하기에 쳐다봤더니 노점에 서파는 15000-20000 원짜리를들고 폼을잡았습니다 그사람들은 수렴동 코스만알고 오세암 코스도 모르는 초보자들 이면서 아는티를 많이도 내었습니다 우리는 영시암과 오세암을 거쳐서 용아장성 뒷길로해서 봉정암에와서 저녁을먹고 이를닦고 나오니 목포상고 팀들은 그때서야 지친모습으로 올라오기에 박훈과내가 인사를 했더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왔냐고 반가워 했습니다 얼른 저기보이는 종무소에가서 10000원씩주고 표찰을받고 방을배당받아서 배낭을놔두고 저녁밥을 먹으라고 했더니 그러냐고 하면서 고맙다고 하면서 아주좋아 했습니다
봉정암에서는 한사람당 10000원씩을 받고는 저녁밥과 아침밥을먹고 점심용으로 김밥을 한개씩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10000 원내고 잠자고 밥을3끼를 먹는것 이었습니다 1983년 겨울에 내가처음으로 봉정암에 왔을때에는 커피까지 전부가 공짜였기에 고맙고 미안해서 10000 원씩내고 기와 한장값의 기와불사를 했기에 봉정암 기와에는 우리가족들의 이름과 김남일의 이름이 9개가 있답니다 그때 밖의기온은 영하20도가 넘었는데 불도안땠다는 방안은 사람들이 많아서 옷을벗고 잠을 잤었습니다 그후에 2006년 초부터인가 돈을10000원씩 받으면서 목에거는 각방의 표찰을 주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스텐 냉면사발에 100원짜리 동전을 가득담아두고 다른그릇에는 굵은사탕이 가득들어 있었고 누구든지 그돈으로 100원 씩을넣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서 먹었습니다 아침밥을먹고 점심용 김밥을 타러갈때는 그표찰과 김밥을 맞바꾸었습니다 10km 산아래 백담사 에서는 대웅전 근처에있는 절집기와 건물에서 커피와 상화차 녹차등을 시내의 커피숍같이 비싸게 팔고있는데 봉정암은 백담사와는 하늘과 땅차이 였습니다 가끔 주지스님이 저녁시간에 엠프방송으로 " 남의 신발을 가져가면 그사람의 업까지 짊어지고 가는것 이니까 얼른 제자리에 갔다놓으세요 " 라고 방송을 하시고 새벽에는 주지스님께서 " 산속에서 배고프면 밥을사먹을 곳도없고 큰일나니까 김밥을 꼭받아갖고 가세요 참기름도 많이발랐 으니까요 " 하셨습니다 마당에서 주지스님을 만났기에 인사를 드려더니 얼굴을 알기에 아주 반가워 하시면서 두손을잡고 흔드셨습니다 대식가인 박훈이는 아침밥도 두그릇을 먹었다고 하기에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소청산장을 거쳐서 중청산장을 지나서 대정봉에 올라가서 동서남북을 구경도 잘하고 사진도찍고 다시중청으로 내려와서 희운각 산장을 구경하면서 콜라도 한개씩 사먹었습니다 박훈이한테 공룡능선과 천불동능선을 설명해주면서 네가코스를 정하라고 했더니 1000개의 불상이 있다는 우리나라 3대계곡중 2번째 계곡인 천불동 계곡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험한 오름길 난코스도 잘도걷던 박훈이가 천불동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수시로 불러야 나를따라 왔습니다 비선대 입구에서는 다른사람보다 빨리갈려고 커부길에서 굵은로프를잡고 건너뛰던 40대후반의 헤비급 아주머니가 로프를 못잡아서 고사목에 이마를 헤이딩해서 기절하는걸 보았습니다 모두들 구경만하고 있기에 박훈과내가 그아주머니를 둘이들어서 길로옮겨놓고 내배낭에서 거즈와 반창고를 꺼내서 이마의 찢어진곳을 지혈을 시키고나니 아주머니가 깨어났습니다 119를 불러준다니 성남에서 왔는데 자기일행들이 뒤에서 온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하면서 명함을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아주머니 손목위에 피가더나면 여벌로 쓰라고 반창고를 서너번 감아드리고 그분일행 들에게 잘모시고 오라고 인계해 드렸습니다 명함을 꼭주셔야 한다고 하기에 명함을 드렸더니 그날밤에 그아주머니 남편이 고맙다고 하면서 나에게 꼭찾아와서 고마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전화가 왔었습니다
2011.1.7.지리산 제석봉에서 저의 지리산 100회산행 행사를 하였습니다 100회 등산은 2010.10.17.에 하였으나 행사참석 인원들의 참가일정 때문에 몇번을 미루다가 1.7일로 정했습니다 1.6.밤 23:59분 지리산아래 함양 백무동에가는 버스이기에 작은사위 김남일과 동서울 터미널에 갔더니 청우산악회 조문환회장님과 청우산악회 김교관 고문님께서 와계셨습니다 뒤를 이어서 송동선 아우부부와 오광덕조카 부부가 도착 하였습니다 조금후에 멀리 김포 양촌리에서 오점수아저씨가 오시고 조카딸 오영임이도 왔습니다 오늘밤에 버스를타고 지리산 백무동에 가시는 분들중에 나와처음 가는사람은 조카며느리와 영님이 조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2- 9 번씩 함께갔던 분들입니다 제일 연장자는 41년생 충남 서산이 고향인 김교관 고문님 이십니다 김교관님과는 청우산악회 산행때 자주만나고 있답니다 저보다 6살더 잡수신 형님이지만 산에가서는 김교관님을 나는 따라갈수가 없을정도로 잘걸으신 답니다 10수년전 가을에 고흥 팔영산에서 김교관님을 따라가 보다가 골병들뻔 보았답니다 쇠줄을잡고 1봉과 2봉까지는 겨우겨우 따라갔는데 내가3봉에 오르니까 김교관님은 4봉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다는 나보다 한살덜먹은 박형곤님은 " 오선배님 김교관 고문님을 따라다니 다가는 골병드니까 얼른포기 하시는게 건강에 좋을것 입니다 " 하기에 저도 그말씀이 맞는것 같네요 하였답니다 저의 지리산 100회 행사를위해 큰프랭카드와 고급 기념타올을 준비해준 청우산악회 조문환회장님이 참고마웠습니다 전남나주 동강면의 부잣집 아들인 조문환회장은 8사단 16연대에서 중대장할때 중대원 이었습니다 전역후 30년이 지났지만 수시로 만나고 그를따라서 함께산에도 다니고 있습니다 2006년 부터는 해군부사관 출신의 청우산악회 카페지기가 가정문제로 주문진으로 이사를 가버렸다고 나에게 1년간만 카페지기를 맞아달라고 하기에 승락했다가 2022년 현재까지도 제가 청우산악회 카페지기를 하고있답니다 동서울에서 지리산 23:59분에 백무동에가는 버스를타고 가다가 여산휴게소에서 한번쉬고 함양에서 몇사람이 내린후 백구동에 도착하니 03:30분 이었고 정류장의 온도계는 영하11도 였습니다 우리일행은 모두들 화장실에 들렸다가 이마에 렌턴불도켜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스틱을 조정하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지리산길은 왜그렇게 좋기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온사람 산악회의 관광버스를 타고온사람 자기들의 승용차를 타고온 사람들등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밝은불빛들은 참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걸음을 잘걷는 김교관 고문님과 조회징님은 번개같이 올라가 버리시고 남어지 사람들은 천천히 싸목싸목 올라갔습니다 참샘에서는 시원한 시원한물도 한모곰씩 마시고 밑에서 불을켜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구경하였습니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점점더 많아지는것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들에게 스틱과 아이젠을 다시한번씩 점검하도록하고 소지봉을 향해서 올라가는데 급경사의 돌팍길 너덜길이라 빙판으로 얼음이 얼어있어서 솔차니 힘이들었 습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산장에 이르는 등산로중 난코스인 이곳은 여름에는 땀이많이나고 겨울에는 미끄러운곳 입니다 너덜길을 오르다가 전주에사는 기전대 박찬선님을 만났습니다 박찬선님은 백무동에서 부산의 공용철님과 통화를 했는데 어젯밤에 부산 남은아님 연천 박사장님과 소지봉에서 제석당터 로가서 텐트를 칠려고 했는데 눈이허리닿게 쌓여서 산길중간에서 대충평탄 작업을하고 텐트를 쳤다고 하드랍니다 전주의 이영진님과 하동의 김진수님은 중봉에서 야영을 했는데 영하27도 가되고 강풍이 불어대서 혼났다고 하드랍니다 준족인 젊은 박찬선님에게 얼른올라가서 장터목 산장에서 쉬면서 공용철님과 이영진님과 통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쉬엄쉬엄 소지봉을 지나서 망바위에 올라오니 천왕봉 이있는 동쪽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지리산 주능선도 희미하게 보이고 장터목 산장이 보였습니다 장터목 산장에서 박찬선님을 만났더니 공용철님팀이 눈속에 파묻혀서 천왕봉까지는 도저히못갈것 같다고 하드랍니다 그러면서 행사를 천왕봉아래 제석봉에서 행사를 하자고해서 이영진님 에게도 제석봉으로 오시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일행도 김교관님과 조회장님 오광덕조카와 송동선아우 외에는 춥고힘든데 모두가 잘되었다고 환영 하였습니다 우리일행은 09:20분에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여서 라면4개를 끓여서 국물을 떠먹으면서 김밥으로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모두들 새벽에 5.8km의 눈길을 힘들게 올라왔기에 아침밥이 이렇게 맛있을수가 있냐고 했습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1700m인데 제석봉 전망대까지 너덜경사길을 아이고 하이고 하면서 올라갔습니다 그사이에 천왕봉을 다녀온 김교관님과 조회장님은 이영진님과 김진수님의 바로뒤에 따라왔습니다 박찬선님과 이영진 전무님께서 공용철님 팀에게 추워서 얼어죽겠다고 달려오라고 독촉전화를 하여서 그팀이 20여분만에 제석봉 전망대에도착 하였습니다 지리산에서 퍽으나 유명한 지리99의 부산의 남은아님의 연출로 모두들 푸랭카드를 펴들고 화이팅을 외치면서 저의 지리산 100회의 행사를 소박하고 뜻깊게 축하해 주셨답니다 행사후에 녹두팀은 모두가 백무동 으로가고 발이빠른 김교관님과 조회장님은 장터목에서 유암폭포길로 중산리로 갔습니다 송동선아우 부부는 오래간만에 지리산에 왔으니 산길을 더걷는다고 세석산장 으로해서 거림으로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일행 여섯명은 아이젠과 스틱을 점검한후 천천히 경치를 구경하면서 유암폭포로 내려왔습니다 나는 수십번 와보았지만 우리일행은 모두들 처음보는 아름다운 유암폭포를 모두들 신기해 하면서 좋아하였습니다 우리일행들은 사진도 찍으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나는 광덕이조카가 가지고온 김치와 돼지고기를 큰코펠에 가득넣고 찌게를 끓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40대의 퍽잘생긴 젊은이가 국립공원에서 불을피우면 되느냐 당장끄세요 하면서 갑질겸 시비를 하기에 거으다 끌었으니 이해해 주세요 하면서 허리를 몇번이나 굽히고 절을하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젊은이를 사정사정해서 보내고 우리는 식은밥에 따뜻한 김치찌게로 늦은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침으로 안타깝고 짠한이야기 입니다 6.25. 전쟁이난지 3년되던해봄 우리어머니의 태생지인 고창군 부안면 사창마을뒤의 양지바른곳에 잘모셔진 우리어머니의 외할아버지의 묘를 이웃동내인 상골조가들 7-8명이 몰려와서 자기들의 작은아버지 묘라고 파가버렸답니다 사창사람 몇사람이 구경하면서 들었는데 " 이상하네이 작은아버지는 이빨이 하나도 없었는데 먼이빨이 많이있대여 " " 죽어서도 머리카락허고 이빨은 나는것이여 " 하면서 묘를파가 버렸답니다 우리 어머니가 해마다 봄에 자손이없는 어머니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음력 제사날자는 잃어버렸음 어머니와 이모님이 돌아가셨기에 알수가없음) 떡과 생선 과일등음식을 장만하여서 사창에 가셔서 산소에가서 제사를 모셨답니다 6.25. 전쟁중이지만 우리어머니는 한번도 빼먹지안고 음식솜씨 좋으신 외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시는 제사음식을 머리에이고 새벽부터 30리가넘는 고창군 부안면 사창까지 외조부모님 제사를 모시러 가셨답니다 6.25. 전쟁이 3년차이던 그해에는 제사를 모시러 사창에 갔더니 어머니의 외가친척인 오상길님께서 ( 어머니보다 6살아래) " 누님네 외할아버지 묘를 상골 조가들이 자기작은아버지 묘라고 파가버렸어요 새로모신 묘소는 내가찾아 놨그만요 " 하더랍니다 그래서 오상길 외삼촌집에서 어머니의 외할머니님 산소에 올릴밥만 한그릇을 갖고가서 제사음식과함께 산소에가서 제사를 모시고나서 오상길 외삼촌을 따라서 퍽높은산을 한나절이나 걸어서 외할아버지 산소에 찾아가서 성묘를 드렸드랍니다 어머니는 자기 외할아버지의 산소에 다녀오느라 집에올수가 없어서 사창 오상길 외삼촌네집에서 하룻밤을자고 이튼날에야 집에오니 외할머니께서는 눈물바람을 하시면서 " 우리논밭을 선자나 붙여먹던 상골조가놈 새끼들을 내가쫓아가서 가만안둘란다 " 하시드랍니다 하지만 그때는 교통도 불편했고 지팡이를짚고 가까운 텃밭만 겨우다니시는 외할머니께서는 가신다 가신다 하시면서도 상골을 못쫓아 가보시고 이듬해 초여름에 (음력 5.25)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후에 우리어머니와 이모님은 외할아버지묘를 사창으로 이장한다고 제사지낼 음식을 잘장만 하여서 새벽밥을먹고 넷이서 제물과 삽과괭이를 지게에 짊어지고 알미장터에서 상골로해서 외증조 할아버지의 산소에서 묘를팔려고 준비하는데 상골 조가들이 5-6명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려오더니 자기작은 아버지묘인데 만일에 묘에삽만대면 전부다 죽여버린다고 하면서 좋은말로 할때에얼른 가버리라고 하드랍니다 그래서 우리아버지와 이모부님은 둘다체구도 왜소하고 뚜들겨 맛을까봐 겁나서 아무말도 못하고 짐을지게에 옮겼드랍니다 그래도 당찬우리 어머니는 상골 조가들에게 " 엇다대고 이것들이 저것들이라고 함부로하시요 먼놈의 죽은송장이 머리크락 (머리카락) 이나고 이빨이 난다요 나도아들이 셋이고 내동상은 (동생) 아들이 넷이나됭게 함부로 쌍소리는 마시요이 가면서 알미장터 지서에가서 이일을 따져보고 갈랑게 " 그렇게 대차게 나오니 상골조가들이 더이상은 쌍소리는 안하드랍니다 그리고는 무겁게 짊어지고 가지말고 술이랑 떡 전 생선을좀 주고가라고 사정적으로 좋게말을 하드랍니다 겁을잔뜩 먹었기에 우리아버지는 그사람들이 달라는데로 거의다 다뺏겨 버리다싶이 주어버리고 밥과반찬과 간것만 (생선) 겨우지게 바작에가 짊어지고 왔답니다 오다가 흥덕입구 뚝에서 늦은점심을 먹는데 새벽부터 많이걸었기에 배도고프고 밥이아주 맛나고 한없이 먹어지드랍니다 그후로는 나이드시는 우리 어머니도 새벽밥을 잡수시고 30리가 넘는길을 떡 전 생선등 퍽으나 무거운 제사음식을 머리에이고 다니시기가 벅차니 나보다 8살더먹은 작은형이 (오해팔 39년생) 큰집 해권이형님의 자전거를 빌려타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저도 중학교 2학년때와 3학년때에 그제사음식을 자전거뒤에 싣고서 사창에 두번을 갔었습니다 사창 故오상길 외삼촌 집에가면 유기그릇에 담아주는 따뜻한밥을 제사음식과함께 대바구니에 담아서 故오상길 외삼촌을 따라서 산소에가서 제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후 30여년이 지난후 故오상길 외삼촌과 이종형님인 故이상균님을 제차에모시고 톱과 황새목낫을 (나무자르는낫) 가지고 외증조 할아버지의 산소에가서 조고만 전신주만큼 큰상수리 나무와 맹감나무들을 잘라냈습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정신이 혼미하시던 83세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3주전에 제손을 꼭잡으시고는 " 늬성들 (네형들) 한티는 말히도 (말해도) 소양없응게 (소용없은게) 막둥이늬가 늬생전에는 우리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밥냄새와 술냄새를 꼭맞혀 드려라이 " 하시면서 간곡히당부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누나에게 부탁을해서 스텐그릇에 밥을담고 보온병에 국도담고 반찬도 몇가지 챙기고 술과빵 과자 과일등을 큰봉지에 담아서 작은누나랑함께 외증조할머님과 외증조할아버님의 산소에가서 성묘도 드렸습니다 어느해 추석 다음날에는 작은형님과 생질 송재종 조카 오정근 오광희까지 제차에 태우고 산속의 잡목이 우거진 외증조할머님 산소에 성묘를 드리고 왔었습니다 작은형님은 이렇게 험한곳을 용케도 잘찾아 다닌다고 칭찬을 하시기에 산속곳곳의 나무에다가 비닐봉지를 저렇게 묶었놨지 안냐고 하였더니 저렇게 안하면 못찾아 다니겠다 하시면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무남독녀인 우리 외할머니만 낳으셨는데 그외할머니마져 우리 어머니와 이모님만을 낳으시고는 외할아버지께서 금산에서 벼슬하면서 총각이라고 거짓말을하고 새장가를 가버리 셨기에 아들에대한 평생의 소원이고 한이었던 같았습니다 제가 96세의 이모님을 모시고 사창에 갔을때 자기 외할머니의 산소에서 성묘를 드리고나신 이모님은 " 어찌서 (어째서) 우리 외할머니는 넘들은 (남들) 다낳는 아들을 못낳았는가 모르것다이 " 하시면서 회한에 젖으셨습니다 그후로 어쩔때는 봄가을로 두번갈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김밥한줄씩과 과자와빵 술과오징어를 가지고 그두분의 산소에 성묘를 다녔었습니다 그러던중 2015년봄에 저보다 세살더먹은 이종형인 故이상선 형님이 내가 외증조부님께 성묘를 다닌다는 이야기를 알고었다면서 그두분의묘를 파묘하고 화장해서 이모님과 이모부님 산소가있는 새내선산에 모시는게 어쪄냐고 묻기에 저는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선형님이 정읍에서 묘를이장하는 분들에게 80만원을주고 두분의묘를 파묘하고 두분의 뼈를함께 산아래서 아주강한 께스불로 화장하여서 유골을 새내로 모시고 외증조부모님 남씨부부지묘 라고비석도 세워드려서 지금은 외증조부모님께 성묘다니기가 아주수월해 졌답니다 그때 상선형님은 우리큰형님이나 묘를이장할때 함께간 상호형이나 나에게는 일체돈을 못쓰게 하시고 혼자부담을 하셨답니다 그렇게 좋은일을하신 이상선 형님은 2017년도에 백혈병을 못이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상선형님은 6.25 참전용사인 저희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잠들어계신 이천호국원 24구역에함께 계시기에 상선형님께도 해마다 설과추석 장인장모님 제삿날 생일날등 5-6번씩은 성묘를 드리고 있답니다
내나이도 50살이 다되어가고 나보다 20살이 더많은 큰누나는 (1927.6.18) 70살이 곧되어 가기에 형님들이나 작은누나도 더나이가들면 자기발로 어디좋은곳에 구경도 못다닐것 같기에 형님들과 누나들에게 그런취지를 간단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좋다고 하시기에 부천 약대동 우리집으로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오래된 은행나무가있는 양평 용문사를 가기로 하였습니다 10수년전부터 형제처럼 지내는 유재춘 (43년생 함평 해보면) 형님께 봉고차만 빌려달라고 했더니 무슨말씀이냐고 하시면서 운전까지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유사장님은 10여년전에 우리식구들과 처제네 식구들까지 3박4일간 강릉해수욕장에 실어다주시고 데리러도 오셨습니다 유사장님은 서울인근 지리를 잘아시기에 일부러 양평 양수리로 돌아서 가주시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형님들과 누나들에게 북한강물과 남한강물이 합쳐지는 곳이라 두물머리라고 한다고 설명해드리고 여기서 부터는 한강상류라고 설명해 드렸더니 처음듣는 공부라면서 흥미로워 하셨습니다 언제 가을에 평창 메밀밭에 메밀꽃이 필무렵에 북한강 발원지인 오대산 상원사아래 우퉁수와 남한강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랑 하루에 세곳을다 구경을시켜 드리겠다고 하였더니 큰누나가 제일로 좋아하시면서 " 너따라 다니면서 구경할려면 아프지말고 오래살어야 허것다이 " 하셨습니다 형님들과 ( 큰형님 36년생 작은형님 39년생) 누나들과 큰형수님도 다른곳 으로는 구경을 많이다녀 봤어도 양평 용문사는 처음으로 가본다고 하셨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는데도 모두들 이곳저곳 처음보는 풍경을 구경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용문사에서 가장큰 보물은 1000년이 훨씬넘은 은행나무 입니다 이은행나무는 대학교수들에 따라서 수령이 1100년과 1300년 두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라가 56대 경순왕때 고려왕건에게 멸망하자 경순왕의 큰아들이 삼배옷을입고 (그래서 마의태자)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경주에서부터 스틱삼아 짚고온 은행나무 지팡이를 이곳에다 꽃아두고 갔는데 그지팡이에서 싹이난 은행나무가 이나무라면 1100년이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용문사에 들어가서 이곳저곳 구경을하고 법당에 들어가서 절을하자고 하니까 큰형님은 늬가 대표로 허거라 하셨습니다 큰누나 작은누나 은경이 엄마랑 넷이서 부처님께 7배를 드렸습니다 시주는 조금하고 소원은 많이 부탁해서 부처님께 솔차니 미안했습니다 점심은 주차장옆에서 산채비빔 밥으로 통일을 했는데 형님들은 내장사 산체비빔밥보다 낫다고들 하셨습니다 오면서는 양평읍내와 양수리도 구경하고 다산 정약용의 생가도 둘러봤습니다 오면서 찻속에서 내년에는 예산 수덕사와 온양온천에 가기로 행선지를 정하였습니다 이것저것 저녁생각이 없다고들 하셔서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터미널에서 대전으로 가시고 큰형님과 큰형수님은 송내역에서 부평에사는 큰딸 금선이네 집으로 가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산 수덕사에 갔던이야기 입니다 장성이 고향인 이세범 (55년생 장성 황룡면) 아우가 아침을 먹기전에 봉고차를 갖고와서 주차장에서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세범아우는 군대영장을 받아놓고 논에서 일을하다가 경운기 사고로 좌측발을 절단하였는데도 운전은 일류선수 였습니다 " 형님이 밥먹으러 올라오라고 하실것 같아서 아침밥을 먹고왔어요 저는 5층까지는 힘들어서 못올라 가니까요 " 하면서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세범아우는 다리가 하나가 없어도 성남에서는 정치활동도하고 조폭들과도 유대가 깊어서 형님소리도 듣고있었 습니다 큰누나와 작은누나 재종이는 어제오후에 우리집에 와서자고 큰형님 큰형수님은 부평큰딸네 집에서 일찍오셨습니다 작은형님과 우리부부등 오늘 수덕사에가는 인원은 운전수 이세범 아우까지 총9명 입니다 부천을 벚어나면서 고속도로로 가지안고 가면서 아산의 현충사와 윤보선 대통령 생가를 둘러보고 가는게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들 좋다고 하는데 큰형님 께서는 " 유명헌 수덕사를 먼져봐야제 그것들은 오면서 시간있으면 가보자이 " 하시니 작은형님이 " 현충사를 그까짓 수덕사에 비교해 " 하면서 큰형님과 엇갈리는 이야기를하니 큰형님은 " 야가 (이애가) 작년봄에 용문산 갔을때는 내말을 잘듣더니 오늘은 또신민당 이네이 " 하면서 웃으셨습니다 큰형님은 언제나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당이고 공무원이었든 작은형님은 무조건 김대중을 지지하는 야당이 었습니다 나를따라서 큰형님네 방앗간도 두번을 가봤던 세범아우가 운전을 하면서 " 여행은 즐거워야 좋으니까 정치가지고 싸우지 마세요이 세군대다 좋은곳 이니까 오면서제가 다구경시켜 드릴께요이 " 하니까 모두들 좋다고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토요일 이기에 수덕사는 차를댈곳이 없었습니다 관광 버스들은 거의가 경기서울 남바 였으며 전북남바도 한대가 보였습니다 두바퀴를 돌다가 세범아우가 큰식당앞에 차를세우고 9명이 점심밥을 먹는다는 조건으로 식당앞에 주차를 하였습니다 우리부부는 여러번 큰누나는한번 와봤으나 다른분들은 처음이기에 이곳저곳 구경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모두들 내장사나 선운사 백양사에 비해서 계단은 좀있어도 절이 가까우니 다리도 안아프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일체 단청을 하지안은 대웅전과 여승들만 산다는 무슨당과 부처님 사리를 전시한다는 법당까지 구경을 하고나니 점심시간이 훨씬지나 버렸습니다 식당에와서 부처님사리 이야기가 나왔는데 큰형님 께서는 " 부처님사리 그것은 거짓말인것 같어이 인도에선가 죽은부처님의 사리가 우리나라절에 있는것만해도 몇되는 될것이여이 " 작은형님도 " 스님들 저것들도 나이로중이 아주많혀 각시있는 놈도있고 전국의 절에있는 사리를 다모아 놓으면 형님말데로 겁날것 이여이 "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대를있는 절실한 불교신자인 큰누나는 " 너그덜 (너희들) 왜좋은 수덕사 구경하고 스님들 흉보고 트집잡냐 스님들이 얼마나 좋은일을 많이하는줄을 알기나하냐 " 세범이는 깜박하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가 천안으로 나와서 현충사에 갔더니 17:30분이 지났다고 문이닫혀 있었습니다
세번째 여주 신륵사에 갔던이야기 입니다 작은누나는 이번에는 가을일이 너무나 많이밀려서 빠져나올수가 없어서 참으로 서운하다면서 참석을 못했습니다 날이궂어서 참께도 초벌만털고 들께 녹두 팥도 비닐하우스속에 그데로 놔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이 많아서 열댓고랑심은 고구마도 손을못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와중에도 내가오리쌀을 좋아한다고 찻나락 (찹쌀) 두다발은 다익기전에 베어다 비닐하우스에 놔두었다고 하기에 참으로 고맙고 짠했습니다 이번에도 세범이 아우가 현대카쎈타 정형대님의 (정읍 이평면 47년생) 학원봉고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은 운전수까지 총원이 7명입니다 세범이 동생이 큰누님과 형님들께 여러곳의 좋은풍경을 구경시켜 드린다고 올림픽대로부터 계속하여서 남한강 남쪽길을 따라서 여주까지 갔습니다 팔당을 지나면서 100개도넘는 모텔들과 까페와 고급식당들을 구경하면서 갔습니다 큰누나는 " 서울이 크기는 겁나게 큰갑다이 저많은 것들이 돈을버니까 저렇게 번쩍번쩍 허것제이 " 하니까 세범이 아우가 " 목이좀 좋은곳은 권리금이 1억도 넘고요 못한곳도 권리금이 5000 만원정도 된답니다 " 하였습니다 여주에서 남한강의 큰다리를 건너서 신륵사에 왔습니다 용문사나 수덕사에 비하면 관광객이 1/5 정도로 한가하고 주차장도 아주널널 하였습니다 절입구의 큰가게에서 형님들까지 여러가지 아름다운 도자기와 돌그릇 돌솥을 신기해 하시면서 오랫동안 구경들을 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 평지이면서 수덕사 보다도 훨씬 가까웠기에 모두들 다음에도 이런곳에 가자고 하면서좋아 하셨습니다 수덕사에 비해서는 작은규모의 신륵사 이지만 오래된 소나무와 아주넓은 남한강가에 지어놓은 정자에 올라가서 주위풍경을 구경하면서 큰형님은 " 옛날에도 스님들은 풍수지리 에대한 공부를많이 했던가봐이 경치좋은곳은 절이다 차지헌것봐 " 작은형님도 따라서 " 태풍올때나 큰비가 왔을때에 물난리나 산사태가나서 절이떠내려 가든가 흙속에 파묻혔다는 소리는 못들어 봤어이 ' 하니까 큰누나도 " 절에 스님들이 밥만잡수고나면 앉아서 공부를 허지안냐 늙으신 스님은 자기가 몇인날 무슨시에 돌아가신다고 미리아시고 전국에 퍼져있는 자기의 상좌와 자손스님 들에게 연락하여서 다만나본후에 눈을감으 신단다 " 큰형님은 " 그러면 누님도 몇일날 몇시에 돌아가실것을 배워서 아는가? " " 야 내가 공부를 많이한 스님이냐 그것을알게 나는 그런것은 몰라 " 우리는 여주도자기 박물관과 세종대왕의릉을 구경하고 차가많이 밀려서 천천히 부천으로 왔습니다
네번째는 소요산 자재암에 가다가 비가와서 신창동 외숙모님집에 들렸다가 용산에있는 전쟁기념관을 구경갔습니다 이번에는 수년전부터 정형대님네 현대카쎈타를 함께이용하는 김철수아우가 (경기 강화읍 57년생) 현대카쎈타 학원봉고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일당도 못받으면서 아침일찍이 와주는것이 참으로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이번에는 작은누나와 재종이가 왔기에 운전수까지 9명이 되었습니다 일기예보에는 오후늦게 비가온다고해서 집에있는 우산을 큰보자기에 싸가지고 차에싣고 가는데 성산대교를 지나서 고가도로에 올라가니 빗방울이 한방울씩 떨어지드니 통일로위를 지나면서 부터는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형님들과 큰누나가 " 이비맞고 소요산에 가다가는 모두들 비맞고 구경도 못하고 감기만든게 다른곳으로 가보자 어디좋은디 없냐? " 하시기에 고가도로에서 내려서 20-30분 정도만가면 신창동 외숙모네 집이니까 외숙모님한테 인사도 드릴겸 가보자고 했더니 모두들 잘되었다고 하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앞쪽으로 이동하여서 운전하는 철수아우 뒤에앉아서 신창동으로 길을안내 했습니다 큰형님께서는 " 너는 남의동내길을 어떻게 그렇게 훤하냐 " 하시기에 나는 매년구정후 외숙모님께 새배드리러 다니고 외할머니. 제삿날은 (음력5.25) 우리집을 대표해서 제사에 꼭참석 하기에 훤하네요 했더니 큰누나는 큰형님에게 " 사실은 너하고 내가 외할머니 제사에 꼭가봐야 하는디 한번도 못가봤다이 외할머니가 너허고 나를 어떻게 키웠냐 춘수리 누구네 잔치에 갔다왔다고 떡이랑 전같은걸 어디다 싸갖고 왔는지 말이다 밴또싼다고 (도시락) 쌀밥만 추려서 싸주던 우리외할머니 아니었냐 우리어머니는 손이커서 휘휘젓어서 싸버린게 맨보리밥 이었제 눈물날라고 헌다야 " 외숙모님네 연립주택앞 슈퍼에서 큰형님은 소고기를 사시고 나는 사과를한박스 사갖고 외숙모님집에 갔습니다 " 이게 먼일이다냐 내새끼들이 왠일이대여 오초순아 (큰누나) 너본지가 맺년이냐 (몇년) 너도이제 늙는티가 난다이 " " 외숙모허고 나허고 여섯살차이 밖에안나 그런디 새각시인 외숙모가 나학교다닐때 치마며 저고리며 버선등 내옷들을 다해주신것이 지금도 신통하기만혀이 스무살도 안먹은 새댁이 그렇게 솜씨가 좋았어이 " 이사람 저사람과 손잡고 인사하고 물어보고 답을듣는게 1시간도 더걸렸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실때는 어쩌다가 우리집에 한번씩 오시면 한달에 두번씩은 외숙모님한테 가셔서 닷세나 일주일정도 계시다가 우리집에 오셨다가 또심심하다고 외숙모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셨답니다 10시가 조금넘었는데 오라고 사정해도안올 귀한손님이 왔으니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한식집에서 설렁탕 같은것을 불러다가 맥이는 것보다 너그가사온 쇠고기를 볶구고 미역국을 끓여서 점심밥을 맛있게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큰누나가 아침을 막둥이네 집에서 잘먹어서 아직은 밥생각도 없으니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옛날에 고생하시면서 살아오신 이야기나 해보시라고 했더니 이제는 다잊어버리고 없다이 하시면서 두영이와 며느리가 효도를 잘하기에좋고 손자승주와 손녀유정이가 잘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내가 어디가 조금아푼성 싶으면 어디가 아프냐 병원에가자 약국에서 먼약을 사올까 하는것이 참으로 고맙고 힘들게 살아온 보람을 느낀다이 라고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 셨습니다 큰누나가 우리들 보니까 좋다고 하시면서 왜눈물을 보이시냐고하니 " 너그덜을본게 (너희들) 참말로 반갑고 좋아서여 너그어머니 너그아버지가 너그외삼촌과 나한티 한것이 생각나고 그덕에 그서럽고 서러움을 참고또참고 안견디었냐 너그외삼촌과 나는 너그어머니 너그아버지를 친정부모같이 생각하고 살었다이 나는너그 막둥이한테 제사때마다 이야기 했다만 마음씨넓고 털털하신 너그어머니를 꿈에서라도 보았으면 참말로 좋것는디 내가 당신한테 서운하게 한것이 하나도 없는데 참으로 무정한 양반이어야 꿈에서 한번도 못보았다이 " " 와숙모가 우리어머니한테 참말로 잘하셨제 우리가 다알어 버선 양말 내복 코트도 몇게나 해주신것을 다알어 외숙모덕에 우리어머니는 원불교에 가서도 다른사람들이 코트를 만져보면 우리동상어댁이 (동생의처) 사주었다고 자랑했다데 " 밥은 먹은것이나 다름이없고 내년5월에 외할머니 제사때 올테니까 그때제사 모시고 밥을먹기로하고 가겠다고하니 못가게 하시면서 이웃동 지하에있는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조각난 천으로 아주멋있게 잘만든 남자들의 팬티를 남자들의 숫자데로 차에있는 운전수 철수아우것까지 3장씩을 비닐봉지에 싸주셨습니다 나는매년 외할머니 제사대마다 팬티를 선불로 얻어왔고 이불도 받아와서 30년이넘은 팬티가 지금도 있답니다 제종이 에게는 외할머님들 (남씨1번 강씨3번 외할머니) 산소에 벌초를 해준다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11:30분경에 나오는데 조금더 있다가거라 서운해서 쓰것냐 하시는 외숙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던중 큰누나와 외숙모님이 옥신각신 하시는것을 보았습니다 큰누나가 외숙모님께 용돈을 쥐어드리니 얼마인지 많다고 절반만 받으신다고 하셔서 였답니다 비는거의 갯는데 마땅히 갈곳이 없기에 극장에가서 영화를한개 볼것인지 용산으로가서 전쟁기념관 에가면 6.25.때 국군과 북괴군이 사용했던 권총부터 대포와 B-52 폭격기까지 있으니 그것을 구경할것 인가를 물었더니 100% 모두가 전쟁기념관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는 월남참전 용사증을 보여주고 무료로 들어가고 남어지 8명을모두 경로로표를 끈었습니다 형님들과 누나들은 이렇게 좋은곳을 놔두고 비맞고 다녔다면서 모두들 그때의 무기와 복장들 고사포와 비행기들을 구경하면서 신기해 하시면서 좋아들 하셔서 나도 흐뭇했습니다 1층부터 3층까지 구경을 하다보니 13:30분이 되었기에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하니 형님들은 밥은한끼 안먹어도 좋다고 하시면서 언제또 이좋은것을 구경하러 오겠냐고 하시면서 다보고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14:00시가 훨씬지나서 밖에나오신 형님들과 누나들께을 B-52폭격를 전시해놓은 곳으로 갔더니 " 야이렇게 큰비행기를 어떻게 여그까지 갖다놨다냐 " 하시면서 놀라워 했습니다 " 아마 분해해서 프로펠라가 두개달린 완전군장하고 1개소대가 타고다니는 히누크헬기로 실어날랐을것 같네요 저 B-52 폭격기가 폭탄을 50톤을 실을수있는데 6.25.때는 폭탄을 100톤씩도 싣고가서 이북곳곳을 초토화 시켰답니다 " 대충설명을 해드리고 옛날의 육군본부앞인 식당에가서 군인들이 잘먹었던 부대찌게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섯번째는 정읍역에서 기차를타고 목포로 갔습니다 작은누나네 큰아들 송재종이 자기가 초대했다고 자기딸둘까지 10명의 기차표를 끈었답니다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을때 광주에서 목포까지 버스를타고 가보기는 했지만 기차를타고 목포에 가는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작은형님과내가 호남중학교에 다닐때 우리는 언제나 상평리에서 철도를 건너서 당고개재를 넘어서 학교에 갔었습니다 작은형님은 6년간을 철도를 넘었고 나는1년반동안 철도를 넘어서 다녔습니다 반에서 8등을 하였다고 기분파였던 큰형님께서 쌀한가마니 반값을주고 일제중고 자전거를 사주셔서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자전거를 타고다녔습니다 작은형님과 장성을 지날때까지 그때 철길에서 퍽큰석탄을 줏어오던일 창밖밖으로 손을흔들던 낭만등 기찻길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면서 하면서 왔었습니다 그때는 기차의 화장실이 지금처럼 수세식이 아니고 화장실 바닥이 환하게 보였기에 화장실에서 똥을싸면 철로길 중앙으로 똥이떨어 졌기에 철길은 온통똥밭 이었습니다 소나기가 내리면 씼겨흘러서 그똥들의 흔적이 사라지곤 했었습니다 작은형님 말로는 그래서 철로가의 풀들은 그똥거름덕에 싱싱하게 잘자랐다고 하였습니다 송정리가 가까워지자 송정리가 친정인 우리은경 엄마는 작은누나와 자리를바꿔 앉으면서 이쪽저쪽을 쳐다봤습니다 작은형님이 제수씨 " 친정집도 보이든가요 다아는 곳이라 반갑것네요이 옛날허고 어쩐가요 많이발전 했지요 " " 새로생긴 높은건물들 때문에 대충만 알것같네요 " 기차는 황룡강과 영산강 그리고 이곳저곳 기찻길옆 그리운 마을들을 구경시켜주고 목포역에 들어서자 목포역 앰프에서는 이난영의 전설이서린 목포의 눈물이 메들리로 울려퍼졌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목포역 대합실에서 갈곳을 토의했습니다 나는 별로힘이 안두니까 유달산 중턱으로가서 목포항구랑 이난영의 노래에 나오는 삼학도랑 구경하자고 했더니 형님들이 구두신어서 못올라 간다고 반대를하니 큰누나등 여자들도 모두들 그러자고 했습니다 재종이가 택시를타고 농업박물관을 가보자고해서 택시를타고 바닷가 간척지 같은곳에 잘만들어진 농업박물관에 갔습니다 호미 괭이 삽 지게 멍석등등 수백가지 농사에관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대충훋어보고 나와서 흥미없어하는 재종이네 누리 (8세) 이랑이와 (6세) 바다에 떠있는 큰배들을구경 하였습니다 횟집에서 회와매운탕으로 점심을 잘먹었습니다 내년에는 많이안걷는 행주산성이나 남한산성을 갈것이니까 발이편하게 운동화를 신고오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정읍으로 오면서는 반대방향을 구경하면서 오는데 큰형님은 안주무시는데 큰누나랑 여자들은 모두들 잠을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