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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안 령 (興 安 嶺)의 미스-테리?
▣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 국내(國內)에서 발행(發行)되는 대부분의 역사서 해설(解說)을 보거나, 또는 현 중국(中國)학자들의 논문, 연구서를 번역(飜譯)하여 옮긴 여러 책을 보면, 흥 안 령(興安嶺)이 등장(登場)하는데, 『대 흥 안 령(大 興 安 嶺)이 현 흑룡강(黑龍江)성에 있으며, 이곳에 선비산(鮮卑山)이 있다.』하면서 선비(鮮卑)족의 시원(始原)지를 이곳에서 찾고 있다. 또한 위(魏=북위(北魏)를 건국한 탁발(拓拔)씨들이 이곳으로부터 남진(南進), 서진(西進)하여 음산(陰山)주위에 정착하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현 중국(中國)학자들의 주장(主張)을 여과 없이 번역(飜譯), 옮기면서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서 손뼉을 친다(박수).
☞ 이러한 현 중국(中國)학자들의 주장은 “동북(東北)공정(工程)”이란 미명의 프로젝트 이름으로 시작한 땅뺏기 작업의 일환일 뿐이란 것을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들에게 안타까움만 더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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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카페의 “이 민우의 조선사 칼럼”에서 “흥 안 령(興安嶺)”에 대해 여러 번에 걸친 해설(解說)과 설명(說明)과 주장(主張)을 하였습니다. 왜 오늘 주제로 “흥 안 령(興安嶺)”으로 했는가는, 《몽골인 그들은 어디에서 왔나? : 張 久 和 씀. 북 방 사 연구팀 옮김》을 보고, 너무 화가 난 때문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선비산(鮮卑山)이 흑룡강 성의 흥 안 령(興安嶺)에 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始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국(中國)의 학자(學者)가 쓴 책을 번역(飜譯)하여 소개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문제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影響)이며, 그러한 주장(책속의 주 내용)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을 먼저 파악한 뒤 소개해도 된다.
『선비산(鮮卑山)이 흑룡강(黑龍江)성의 흥 안 령(興安嶺)에 있다고 누가 그랬는가? 이 사람들은 옛 역사서를 보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써먹는 것이 아닌가?』
▣ <고 전 번 역 원>에서 설명하는 흥 안 령(興安嶺)부터 알아보자.
(1) 무오연행록 제4권 / 기미년(1799, 정조 23) 1월[9일-25일] / 22일
[주D-001] 달자(㺚 子) : 몽고족의 한 갈래. 원 나라가 망한 뒤 몽고족의 일부가 북쪽으로 옮아 가 흥 안 령(興 安 嶺) 서남 지방에서 북원 국(北 元 國)을 세워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불려 진 데에서 나온 말이다. 후에 몽고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 위의 설명을 보면, 『흥 안 령(興安嶺) 서남(西南)지방에 “북원(北元)”을 세우고, 이들을 “달단(韃靼=타타르)”라 했다.』는 설명이다.
● 대륙 사【大陸史 : 정사(正史)라고 칭하는 사서(史書)】와 조선사【朝鮮 史 : 고려사. 고려사절요. 왕조실록. 기타 문집】등에서 말하기를, 『막북(漠北)으로 도주하여 “북원(北元)”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현 흥 안 령(興安嶺) 서남(西南)지방이 “막북(漠北)”지대라는 것이 되는데, “막북(漠北)”이란 말은 말 그대로 “사막(沙漠)의 북쪽”이란 의미다. 흥 안 령(興安嶺) 서남(西南)지방 그 어디에도 “사막(沙漠)”지대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곳은 현 『하 북 성 북경(北京)과 외몽골 수도(首都) 올란바토르』 사이의 땅인데, 이곳은 『“내몽골자치구의 내몽골 고원지대”이며, 외몽골과 내몽골의 최 동쪽이다.』
☞『북쪽으로 도주하여 막북(漠北)에 “북원(北元)”을 세웠다.』는 조선사(朝鮮史)와 대륙 사(大陸史) 속의 기록은 또 무엇인가? 달단(韃靼)은 조선사(朝鮮史)에 “사막(沙漠)의 북쪽에 있었다.”하였으며, 대륙 사(大陸史) 역시 같다. <타타르는 달단(韃靼)>이라고 한다. 현재 <타타르공화국>은 우랄산맥의 서(西)쪽에 존재하고 있다.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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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호사설 제3권/ 천지 문(天地 門) / 생 숙여진(生熟女眞)
[주D-020] 선비(鮮卑) : 종족(種族) 이름. 흥 안 령(興安嶺) 동쪽에서 일어나 뒤에 흉노의 옛 땅으로 옮겼음. 진(晉) 나라 때에 이르러 모용 씨(慕容 氏)는 중국 북부에 걸쳐서 전연(後燕)ㆍ후연(後燕)을 세웠으며, 척 발 씨(拓 跋 氏)는 강북(江北)을 통일하여 후위(魏)를 세웠음. 《후한서》 선비 전에, “鮮 卑 東 胡 之 支 也, 別 依 鮮 卑 山, 故 因 號 焉”이라는 기록이 모임.
○ 위 설명은 『선비(鮮卑)족은 흥 안 령(興安嶺) 동쪽에서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흥 안 령(興安嶺)동쪽?????????은 흑룡강(黑龍江)성 지방으로 흑룡강(黑龍江)이 관통하며, 흐르는 곳이다. 이곳에서 “선비(鮮卑)”가 일어났다면, 흑룡강(黑龍江)을 흑수(黑水)라고 하며, 숙신(肅愼) 및 말갈(靺鞨)지방이란 얘기는 또 무엇인가?
○ 선비(鮮卑)가 흑룡강(黑龍江)성의 흥 안 령(興安嶺) 동쪽지방에서 일어났다면, 이들은 서진(西進)하여, 기존 정착민들을 무찌르고 자신들의 왕국(王國)을 건설했다는 말인데, 이들이 서진(西進)했다는 종족(種族)이동사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흉노(匈奴)와의 전쟁(戰爭)으로 패하여 선비산(鮮卑山)에 숨아 들어가 종족을 보존(保存)했기 때문에, 종족의 이름도 “선비(鮮卑)”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그 “선비산(鮮卑山)”은 또 어디에 있는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역사(歷史) 해설이다.
☞ 선비(鮮卑)는 오환(烏丸)과 같다. 그러므로 옛 학자들은 역사서를 편찬 할 때 “오환(烏丸). 선비(鮮卑). 동이(東夷)전”이라 이름 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동호(東胡)라 하였다. 이러한 동호(東胡)였던 “오환(烏丸)”의 지리적 위치는, 三 國 志 / 魏 書 / 烏 丸 鮮 卑 東 夷 傳에서 설명하기를 ;〔一〕 魏 書 曰 【➡地無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蛇,在丁令之西南,烏孫之東北,以窮困之. : 땅(地)에 산(山)이 없고, 사막(沙漠)과 유수(流水)와 초목(草木)이 있고, 살모사 뱀이 많다. (오환(烏丸)은 정령(丁令)의 서남(西南)에 있고,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인데, 궁벽(딱하고 곤란한)한 곳이다.】 라고 설명한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기록에 따른다면, 동호(東胡)였던, 오환(烏丸). 선비(鮮卑). 동이(東夷)는 현 신강(新疆)성 서쪽지방에 있었으며, 이들을 소위(所謂) 『동호(東胡 : 동쪽오랑캐)』라 했다는 결론에 달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라는 역사서속의 내용을 확실하게 반박할 수 있는 증거(證據)나 고증(考證)이 있을까? 또한 수경(水經)주에서의 『“선비산(鮮卑山)”은 돈 황(燉煌)서남 400 리에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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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왕조실록 / 성종 22년 신해(1491,홍치 4) / 4월28일 (계유) / 북방 정벌에 반대하는 대사헌 신종호 등의 상소문
[주D-008] 대막(大 幕) : 대막(大漠)과 같음. 대막(大漠)은 흥 안 령(興安嶺)의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흑룡강성(黑龍江省)· 찰 합 이 성(察 哈 爾 省)· 외몽고(外蒙古)· 신강 성(新疆省)의 변경에 걸친 사막(沙漠)을 말함.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대장군 위청(衛 靑)· 곽 거병(霍去病)을 보내어 기련 산(祀 連 山)을 공격하고 대막(大 幕)을 끊어 선우(單于)를 끝까지 추격한 일이 있었음.
○ 대막(大漠)은 대막(大幕)과 같다. 곧 큰 사막(沙漠)을 일컫는 말이며, 이 큰 사막(沙漠)을 기준하여, 그 남쪽을 『막남(漠南)』이라 하고, 북쪽은 『막북(漠北)』이라 하였다. 위 설명으로 보면,
➊ 흑룡강성(黑龍江省) 역시 『막북(漠北)과 막남(漠南)지방』이 존재해야 하며,
➋ 하 북 성 지방 역시도 『막북(漠北)과 막남(漠南)』지방이 있어야 한다.
➌ 하 북 성(河 北 省)이나 요 녕 성(遼 寧 省), 길림성(吉 林 省), 흑룡강 성(黑龍江 省)지방에 큰 사막(沙漠)지대가 있다????????????
➍ 사막(沙漠)의 지형지세는 현대의 발전된 과학으로 보면, 서(西)쪽 지방에 존재해 있던 것들이 점차 동쪽지방으로 확대(擴大)되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실제 당시의 사막분포지역은
현재의 것 보다 더 서(西)쪽 지방에 존재해 있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➎ 위의 [주 D008] 설명처럼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대장군 위청(衛 靑)· 곽거병(霍 去 病)을 보내어 기련 산(祀 連 山)을 공격하고 대막(大 幕)을 끊어 선우(單于)를 끝까지 추격한 일이 있었음.】이라고 했을 때 『“기련 산(祁連山)”을 공격(攻擊)하여, 대막(大幕=大漠)을 끊어 “선우”를 끝까지 추격(追擊)했다.』면, 『기련 산(祁連山)과 대막(大幕)』은 남북(南北)관계의 지리적 관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련 산(祁連山)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바로 남쪽지방에 있고,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바로 북쪽지방이 대 사막(沙漠)지대이기 때문이다.
● 아래의 사막(沙漠)지대에 관한 것은, 네이버, 다음 등의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다.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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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國(중국)의 沙漠(사막)지대
➀ 阿 拉 善 砂 漠(아 납 선 사막) ; 중국 (서)북부에 있는 사막 : 면적 100만㎢, 길이 550km, 최대너비 270km이다. 고비사막의 남단부를 이루며, 내몽고(內 蒙古)자치구 서부, 하란 산(賀 蘭 山) 서쪽, 감 숙성 하서주랑(甘 肅 省 河 西 走 廊) 이북, 중국·몽골 변경이남 및 약수(弱水) 동쪽에 있는 사막과 파단길림(巴 丹 吉 林 : 4만 4300㎢)사막, 등 격리(騰 格 里 : 4만 2700㎢)사막 및 오 란 포 화(烏 蘭 布 和 : 9,900㎢) 사막의 총칭(總稱)이다. 거대한 산간분지의 밑바닥을 이루는 평원으로, 구릉지와 저지로 나뉜다. 해발고도는 북서쪽이 820m, 남동쪽이 1,660m이다. 저지에는 함수호(鹹水湖)· 늪· 소택지 등이 산재하고, 남부는 모래언덕이 펼쳐진다.
➁ 고비사막 [Gobi Des] : 몽골고원 내부에 펼쳐진 사막.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인 몽골고원 내부의 고비사막의 범위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알타이산맥 동단에서 “흥 안 령(興 安 嶺)”산맥 서쪽 기슭에 걸친 동서(東西) 1,600km, 남북(南北) 500∼1,000km의 범위로 알려져 있다. 고비란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란 뜻으로, 모래땅이란 뜻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고비라는 말의 뜻처럼 고비사막 대부분의 지역은 암석사막을 이루어 모래사막으로 된 지역은 매우 적고, 또 일반적으로 고비사막이라 부르는 지역범위 안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포함되어 있다. 강수량은 중앙부에서 연 25∼50 mm, 북부에서 남동부에 걸쳐 150∼200mm에 불과하나, 강수량의 대부분이 목초와 농작물 생육기인 여름에 집중된다. 하천은 대개 사막 속으로 스며들거나 염호(鹽湖)로 흘러드나, 북부에 케 룰 렌 강(江), 남부에 황하(黃河) 등이 흐른다. 지하수면은 대개 지표에서 6m 미만의 깊이에 있으나, 물은 대부분 鹽 水 化되어 있다. 중심부의 노암지대(露岩地帶)에서 주연 부(周 緣 部)로 나가면서 스텝지대로 이행하는데, 수목은 거의 없고 유 극관 목 림(有 棘 灌 木 林)이 간간이 있을 정도이다. 영양 류(羚 羊 類) ·설치류(齧齒類) 등의 야생동물이 살고, 가축으로는 염소 ·양을 비롯하여 소 ·낙타 ·말 등이 사육된다.
● 근대 대륙(大陸)의 지형도를 보면 ; 『고비 사막(沙漠)』을 “한해(瀚 海)”라고 표기(表記)하여 놓았다.
➂ 騰 格 里 沙 漠 (등 격 리 사 막) : 중국 영하자치구와 감 숙성 사이에 있는 사막. 면적은 4만 2700㎢이다. 중국 북부의 영하회족자치구(寧 夏 回 族 自治區)와 감 숙성(甘 肅 省)의 접경지역에 있으며, 하난 산맥(賀 蘭 山脈)의 주봉(3,230m)이 사막을 가로막고 있다. 중국의 8대 사막 가운데 하나로, 크게는 고비사막의 남단부를 이루는 아랍선 사막(阿 拉 善 沙漠)에 포함된다. 내몽고자치구(內 蒙古 自治區)에서는 서쪽에 해당하며, 매년 봄 중국을 비롯해 동북아시아 지역을 모래 먼지로 뒤덮는 황사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막과 <파단길림(巴 丹 吉 林)> 사막에서 발원한 황사는 두 사막의 중간부에 있는 금 창(金 昌)에 막대한 피해를 준 뒤, 북경(北京)의 북서쪽 루트를 타고 화북지역과 북경(北京)· 천진(天 津)을 거쳐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이동한다.
➃ 渾 善 達 克 沙 漠 (혼 선 달 극 사 막) : 중국 북부 네이멍구자치구의 시린 궈 러 초원에 있는 사막. 면적은 2만 3800㎢이다. 중국 북부 내몽고자치구(內 蒙古 自治區)의 석 림 곽 늑(錫 林 郭 勒)초원에 위치한다. 중국의 4대 모래 땅[沙 地] 가운데 하나로, 정식 명칭은 “훈산 다 커 사지”이다. 내몽고자치구 동부에 있으며, 몽골고원[蒙古高原]의 평균 해발고도보다 1,000m 정도 낮다. “훈 산 다 커 사 막”을 비롯한 내몽고 지역은 원래 모래가 많지 않은 초원지대였으나, 빠르게 사막화가 진행되어 현재 중국의 4대 모래 땅이 모두 내몽고자치구에 속할 정도로 모래땅의 범위가 커졌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모래먼지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 황사가 발생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황사의 규모도 커지면서 황사를 일으키는 주요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해발고도가 낮고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발생한 모래먼지는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이동해 네이멍구자치구에 먼저 피해를 준다. 이어 계속 남동쪽으로 이동해 黑 龍 江 省·吉 林 省·遼 寧 省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히고,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준다. 황사의 대부분은 사막의 중서부에서 발생한다.
● 원래(原來), 사막(沙漠)지대가 아니었으나, 근대(近代)에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사막(沙漠)지대로 변해버렸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➄ 科 爾 沁 沙 漠 (과 이 심 사 막) : 중국 길림성 남부의 서요하강 중하류에 있는 사막. 면적은 5만 600㎢이다. 중국의 4대 모래 땅 가운데 하나로, 정식명칭은 사지(沙 地)이다. 길림성(吉 林 省)과 요하 성(遼 河 省) 사이, 서 요하(西 遼 河)의 중하류에 위치한다. 한반도에서도 가까워 신의주시(新 義 州 市)에서 북서쪽으로 500㎞도 떨어져 있지 않다. 유동사막(流動沙漠)으로, 1950년대 이전에는 초원지대였으나 중국 정부가 1980년대까지 대규모 개간을 하면서 초원이 파괴되고, 빠르게 사막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30여 년 동안 한반도 쪽으로 남동진해 30㎞ 주변이 이미 황무지로 변했고, 4㎞가 사막화되었다. 더욱이 지구온난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새로운 황사의 발원지로 떠오르면서 국제연합에서도 유동사막 재해지역으로 선포한 곳이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계속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어 갈수록 규모도 커지고 있다. 경로는 <커 얼 친>사막에서 발원해 북서풍을 타고 신의주와 서울을 거쳐 제주도 지역으로 이동한다. 한국에서는 2001년 4월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➅ 타클라마칸 사막 : 타림분지내의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塔 克 拉 玛 干 沙漠)은 중앙아시아의 사막으로 신강위구르 자치주에 있다. 그것은 남쪽으로는 쿤룬 산맥과 파미르 고원, 서쪽과 북쪽으로는 티 엔 산(이 메 온 산)에 의해 경계가 정해진다. 타클라마칸은 세계 최대의 사막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극이 아닌 사막 중에서 15번째의 크기이다. 면적은 270,000km²에 달하며 길이는 1,000km, 폭은 400km이다. 북부와 남부 가장자리에 비단길이 있으며 근래에는 중공이 타림 사막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는데 남쪽의 호탄과 북쪽의 룬 타이를 연결하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곤륜과 알 툰 산맥사이의 거대한 충적선상지, 왼쪽에 많은 작은 시내에 흐르는 물에서 푸른색이 보인다.
➆ 英 尔 力 克 沙 漠 (영 이 력 극 사막) :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 疆 維 吾 爾 自 治 區] 화전[和 田]에 위치한 사막. 타클라마칸사막 최남단에 위치한다. 사막의 배경인 위 성 류 숲은 5~6월에 붉은 색의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룬다. 원시 백양나무숲은 모래기둥과 목초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생장하는 뤄 퉈 츠[骆 驼 刺, 사막에서 생장하는 가시 있는 관목], 수염 풀, 백양나무, 위성 류 등은 가뭄에 강한 식물로 사구 위에서 자란다. 사막 남부의 사구(沙 丘) 아래에는 잉 아이 리 커[英 艾 里 克] 저수지가 있으며 어민들이 종종 이곳에서 낚시를 즐기곤 한다.
➇ 중가리아분지 [Dzungaria] : 신강(新疆)성 북쪽에 있는 분지. 면적 70만㎢. 중국어로는 준가얼분지[準 爾 盆 地]이다. 동쪽의 해발고도 1,500m에서 서쪽 200m로 기울어져 평균 해발고도는 500m. 1월과 7월의 기온 차는 40~50°나 되는 대륙성 기후이며, 강수량은 연 150~250mm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부터 천산북로[天山北路]로서 유명하며 동서 교류의 큰 몫을 해왔는데 오늘날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➈ 白 龍 堆 (백룡 퇴) : 신강(新疆)성과 감 숙성(甘 肅 省) 사이에 있는 사막(沙漠)지대. 중국 신강(新疆)성의 나포 박(羅 布 泊)과 감 숙성(甘 肅 省) 옥문관(玉門 關) 사이에 펼쳐진 사막(沙漠)지대이다. 해발고도는 약 1,000m이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는 사막의 형태가 용(龍) 같다고 하여 백용 퇴(白 龍 堆)라고 부른다. 줄여서 용퇴(龍 堆)라고도 한다. 고대(古代) 호적 층(湖 積 層) 및 적색사력층(赤色 砂 礫 層)이 올라와 바람에 잠식된 지역으로, 높이 25~40m의 방 산(方山)· 암 탑(岩 塔)· 토주(土柱) 등의 사적에 위치한다. 고대 서역(西域)의 교통 요지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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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막(沙漠)지대 설명(說明) 중에서 특히 『(4)번과 (5)번』의 사막(沙漠)지대 설명을 잘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곳 사막(沙漠)지대(地帶)는 근대(近代)에 자연환경의 변화와 인간들의 생태계 파괴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본시엔 초원(草原)지대였으나, 근대(近代)에 들어서서 모래사막(沙漠)지대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 일천 년 전, 이천 년 전』시기엔 이곳은 초원지대로 “모래사막”지대와는 거리가 먼 초원(草原)지대였다는 것이다.
● 옛 역사서에 기록된 사막(沙漠)지대는 대륙(大陸)의 황하(黃河)서쪽지방에 존재했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서 상에 기록된 대막(大漠=大幕)지대는 영하(寧夏)성을 관통(貫通)하는 하(河)의 서쪽지방에 존재할 뿐이며, 『막북(漠北)과 막남(漠南)』 지방 역시 하(河)의 서쪽지방에 존재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은 현재의 사막지대로 보니 그렇다는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이나 일천여년전의 상황은 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 이는 현 일본인 학자들이 쓴 『돈 황(燉煌)에 관한 문화와 역사』라는 책속에 “돈 황(燉煌)주위를 고비사막지대”로 표현(表現)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위 사막 설명 중에서 『(1)의 阿 拉 善 砂 漠(아 납 선 사막)과 (2)의 고비사막 [Gobi Des] 및 (3)의 騰 格 里 沙 漠 (등 격 리 사 막)』은 현재의 사막지대로부터 휠 씬 서(西)쪽 지방에 있었다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당시의 『고비사막지대가 돈 황(燉煌)도 포함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1)의 阿 拉 善 砂 漠(아 납 선 사막)과 (3)의 騰 格 里 沙 漠 (등 격 리 사 막)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흥 안 령(興安嶺)”의 서쪽 기슭으로부터 대막(大漠=大幕)지대가 펼쳐진다.』라고 했을 때 “흥 안 령(興安嶺)”은 어디에 있는 어떤 “령(嶺)”을 말하는 것일까?
위에서 설명한 것으로 보면, “흥 안 령(興安嶺)”은 『알타이산맥(山脈)과 하난 산맥(山脈)의 잇달아 이어지는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다.』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리적 배치를 하고나면, 하난 산맥【賀 蘭 山脈 : 주봉3,230m】의 서쪽지방과 알타이산맥의 서남지방에 대막(大漠)지대가 펼쳐진다.
반도(半島)사에서 말하는 흑룡강(黑龍江)성에 있다는 “대 흥 안 령(興安嶺)”은 옛 역사서속에 기록된 “흥 안 령(興安嶺)”이 될 수 없다. 『짝 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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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보면, 하(河)의 서쪽지방에 역사서에 기록된 “대막(大漠)”지대가 될 수 있는 조건(條件)이 갖춰진 지형, 지세다. 이럴 때 과연 조선(朝鮮)의 영토 안에 하(河)가 있었는가하는 문제에 봉착된다. 본인은 이미 요수(遼水) 또는 요하(遼河)란 바로 이 하(河)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朝鮮) 영토의 북쪽 끝 변방의 큰 진(鎭)이 있었던 『의주【 義州=용만(龍灣) 또는 화의(和義) 라고도 한다.】를 노래한 시(詩) 한 편을 감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생각해 보자. 』
아래 시(詩)를 지은 석주(石 洲)는 권 필(權 韠,1569~1612)을 말하는 것이며, 이 분은 광해군(光海君) 때 외척(外戚)의 전횡에 강한 불만(不滿)을 터뜨리며 궁 류 시(宮 柳 詩〉를 지어 풍자했는데, 이때 필화(筆禍)를 입어 『곤장(棍杖)을 맞고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 여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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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石 洲)집【 권 필(權 韠,1569~1612)】별집 1권/칠언율시(七言律詩)/사상(使相)의 통군정(統 軍 亭)시에 차운하다. 2수 {고전번역원의 고전번역서 참고인용}
1) 황하의 근원 아스라이 음산에서 나와서 / 河 源 迢 遞 出 陰 山
2) 물줄기 정자 앞에 이르러 굽이를 이룬다. / 流 到 亭 前 曲 作 灣
3) 땅은 누른 사막에 이어져 바람이 변새 흔들고 / 地 接 黃 沙 風 振 塞
4) 하늘은 푸른 바다와 잇닿아 달이 관외에 이른다. / 天 連 滄 海 月 臨 關
사루는 그저 아손의 반열에 들 수 있을 뿐 / 謝 樓 秪 是 兒 孫 列
등각만이 오직 백중의 사이에 낄 수 있으리 / 滕 閣 唯 應 伯 仲 間
이 밤에 우연히 좋은 모임에 참석했으니 / 此 夕 偶 然 陪 勝 集
술자리 벌여 머물러 놀며 돌아갈 줄 모른다. / 一 樽 延 賞 不 知 還
성 아래에는 긴 강이요 강가에는 산이라 / 城 下 長 江 (江) 上 山
정자가 외로이 서서 푸른 물굽이 굽어보누나. / 有 樓 孤 絶 俯 澄 灣
봉우리들은 휩쓸리듯 비스듬히 바다로 들고 / 群 峯 獵獵 斜 侵 海
5) 평평한 들판은 아득히 멀리서 관문과 이어졌다 / 平 野 茫 (茫) 逈 接 關
6) 오랑캐 땅에 구름과 모래는 술자리 저편이요 / 胡 地 雲 沙 尊 俎 外
계문의 내 낀 나무는 아스라이 보일락 말락 / 薊 門 煙 樹 有 無 間
사화의 방초청천 시 구절이 / 使 華 芳 草 晴 川 句
풍광을 가져다 소매 가득 넣어 돌아오누나. / 携 得 風 光 滿 袖 還
※ 『통군정(統 軍 亭)은 100척이나 높게 솟아 변경(邊境)지방을 압도(壓倒)했다』고 한다.
▣ 위의 시(詩) 구절(句節)을 보고 있으면,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반도(半島)가 아닐 수 있다?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1)을 보면 ; <황하의 근원 아스라이 음산에서 나와서 / 河 源 迢 遞 出 陰 山> 라는 것을 보면, 이 글을 지은 “석주”는 황하(黃河)의 근원(根源)을 잘못 알았던가? 아니면 “음산(陰山)”이란 산의 이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원(中原) 황하(黃河) 서북연안에 있는 “음산(陰山)”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 되며,
2)를 보면 ; <물줄기 정자 앞에 이르러 굽이를 이룬다. / 流 到 亭 前 曲 作 灣> 라 했으므로 황하(黃河)의 물줄기가 용만(龍灣=의주=화의)의 백 척(百尺) 높이 솟아있는 “통군정(統軍亭)”앞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3)을 보면 ; <땅은 누른 사막에 이어져 바람이 변새 흔들고 / 地 接 黃 沙 風 振 塞> 라 했으니, 『용만(龍灣=의주=화의)의 하천을 건너면, 누런 모래사막지대와 연이어져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으며,
4)를 보면 ; <하늘은 푸른 바다와 잇닿아 달이 관외에 이른다. / 天 連 滄 海 月 臨 關> 라 한 것은 『하늘은 창해(滄海)와 잇닿아』에서 창해(滄海)가 현재 의미인 “바다”를 말하는 것인지 의심(疑心)의 여지가 있다.
5)에서는 ; <평평한 들판은 아득히 멀리서 관문과 이어졌다 / 平 野 茫 (茫) 逈 接 關> 용만(龍灣)의 하천을 건너면, 『아득히 먼 평평한 들판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6)은 ; <오랑캐 땅에 구름과 모래는 술자리 저편이요 / 胡 地 雲 沙 尊 俎 外> 라는 것은 용만(龍灣)은 국경(國境)의 도회지(都會地)로 이곳을 지나면, <오랑캐 땅(胡地)이며, 이곳의 구름과 모래(沙)는 존조(尊俎) 밖이라> 는 이야기다.
▣ 결론적으로 말하면 ; 위의 시(詩) 내용으로 볼 때, 『용만(龍灣)은 황하(黃河)의 물줄기가 흐르는 사막(沙漠)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며, 용만(龍灣)을 건너면, 바로 오랑캐 땅이며, 이곳엔 누런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沙漠)지대였으며, 그 사막(沙漠)지대는 바다처럼 평평한 사장(沙場)이 아득히 멀리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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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 시 한 구절을 보았으니, 이 분(석주. 권 필)의 시(詩) 한 편을 더 감상해보자. <고전번역원의 고전번역서>에서 소개한 해제 내용 중에서 인용하면 『한편 “권 필”은 국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외적의 침략을 염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영변에는 본성ㆍ북 성ㆍ신성ㆍ약산성이 있는데, 철옹성이라 할 만큼 관서 지방 제일의 요새이자 우리나라 제일의 요새였다. 권 필은 철옹성이 만주 지역 이민족들의 침략을 막아 낼 국가의 보루라고 보았다. 그런데 당시 그 방비가 허술하였다. 그의 예견은 불행히도 들어맞아 얼마 뒤 만주족의 침략으로 온 국토가 유린당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하면서 아래 시(詩)를 소개하고 있다.
〈절도사 장만을 전송하여 쓴 철옹성 노래〔鐵 甕 行 送 張 晩 節 度〕〉에서,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 君 不 見
철옹 같은 성 만 길로 솟았으니 / 鐵 甕 之 城 餘 萬 丈
높고 큰 성벽이 천하에 웅장해라 / 崇 墉 巨 壁 天 下 壯
한 사내가 칼을 잡고서 요충을 지키면 / 一 夫 按 劍 當 要 衝
천 사람이 개미 떼처럼 붙어도 못 오르지 / 千 人 蟻 附 不 得 上
1) 살수를 굽어보고 백두산을 등지고 / 橫 臨 薩 水 負 太 白 : 백두산이 아니고, 태백임.
2) 서북쪽에 웅장히 솟아 보장이 되었어라 / 雄 峙 西 方 作 保 障 : 서북쪽이 아니라 서쪽임.
예로부터 진영을 두고 영변이라 불렀으니 / 古 來 設 鎭 號 寧 邊
이 뜻이 참으로 있어라 어찌 우연이리오. / 此 意 有 在 寧 偶 然
조정의 계책은 쉽게 헤아릴 수 없지만 / 廟 堂 成 算 未 易 測
이곳을 버리는 것은 만전책이 못 되지 / 棄 此 不 守 非 萬 全
듣건대 노로가 자못 기세가 굴강해 / 似 聞 老 虜 頗 倔 强
힘 쌓고 틈 노린 지 여러 해라네 / 畜 銳 伺 釁 今 有 年
▣ 위 시(詩)를 읽어보면, 원문(原文)과 번역(飜譯)이 따로따로임을 알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지리, 지형, 방향 등에서 특히 그렇다.
위 글 ; 【 1) 살수를 굽어보고 백두산을 등지고 / 橫 臨 薩 水 負 太 白 : 백두산(白頭山)이 아니고, 태백(太白)임. 2) 서북쪽에 웅장히 솟아 보장이 되었어라 / 雄 峙 西 方 作 保 障 : 서북(西北)쪽이 아니라 서(西)쪽임.】 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선 <살수(薩水)를 굽어보고, 백두산(白頭山)을 등져있다>고 하면, “영변”은 백두산(白頭山) 남쪽지방에 있어야, 백두산(白頭山)을 등에 지고 있는(負), 형상이 될 수 있으며, <영변은 평안북도 남부에 있는 도회지 이름이다.>라고 볼 때, 묘향산(妙 香 山)는 동쪽 1백 30리에 있는데, 태백산(太 伯 山)이라고도 한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면, 백두산(白頭山)이 될 수 없다. 또한 태백(太白)과 태백(太伯)은 또 다르다.
또한 2) 서북쪽에 웅장히 솟아 보장이 되었어라 / 雄 峙 西 方 作 保 障 : 서북(西北)쪽이 아니라 서(西)쪽임.】를 보면, 원문에는 서(西)쪽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곳의 서쪽은 서해바다 방향이기 때문에 흉노(匈奴)와의 변방(邊防)은 서북(西北)쪽임에 번역을 그렇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문(原文)을 무시한 번역(飜譯)은 안 한만 못하다. 】 따라서 이러한 옛 분들의 시(詩) 한 편을 보면서도 “조선(朝鮮)”의 영토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2011년 03월 13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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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언제나 문무님의 글이 책으로 볼 수 잇을지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