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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종실록(肅宗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숙종실록(肅宗實錄)》은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재위 기간(1674.8~1720.6) 46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이며, 모두 65권 73책으로 간행되었다.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권1•2를 1책으로 묶었고, 권13•14•15•32•34•38•50은 상•하 2책으로 각각 나누었으며, 권35는 상•중•하 3책으로 만들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은 숙종이 승하한 지 반년 후인 경종(景宗) 즉위년(1720) 11월부터 편찬에 착수하여 영조(英祖) 4년(1728) 3월에 완성하였다. 실록 편찬에 9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숙종의 재위 연수가 47년이나 되어 기사의 분량이 많았고, 편찬 도중에 노론•소론의 정쟁으로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생기는 등 정국이 자주 바뀌고 편찬 책임자가 여러 번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경종(景宗) 즉위년(1720) 11월에 《숙종실록(肅宗實錄)》의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할 때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 실록 찬수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도청(都廳) 및 1, 2, 3의 각방 당상(各房堂上)과 낭청을 선임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경종 원년(1721) 12월에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일어나자 김창집을 포함한 노론 사대신이 모두 처형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에 소론의 조태구(趙泰耈)가 총재관이 되고, 도청 및 각방 당상, 낭청도 대부분 소론으로 경질하였다. 경종 3년(1723) 5월에 조태구가 총재관을 사면하고, 최석항(崔錫恒)이 대신 총재관이 되고, 그 후에 또 이광좌(李光佐)가 총재관이 되었으나, 모두 소론인 까닭으로 편찬 방침이 변경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종 4년(1724) 8월에 경종이 승하하고 노론이 지지하던 영조(英祖)가 즉위하게 되자, 이광좌(李光佐) 등 소론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노론의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 등이 정권을 잡게 되어, 실록청 책임자는 모두 노론으로 경질(更迭)되었다. 즉 영조 원년(1725) 2월에는 노론의 정호가 총재관이 되었고, 뒤이어 이관명(李觀命)•민진원(閔鎭遠)이 서로 이어가며 총재관이 되었으며, 이의현(李宜顯)•이재(李縡)•이병상(李秉相)•김재로(金在魯)•유척기(兪拓基) 등이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되어 실록 편찬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영조 3년(1727) 9월에 편찬이 끝나고 인쇄(印刷)를 마치게 되었다.
바로 그때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발생하여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소론은 정권을 잡은 후 실록을 개수(改修)하려고 했으나,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각 권말(卷末)에 빠진 기사를 보입(補入)하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이른바 보궐 정오(補闕正誤)를 붙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보궐정오편은 영조 4년(1728) 3월에 완성되었다. 현재 《숙종실록(肅宗實錄)》 각 권말(卷末)에 보궐 정오가 붙어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숙종년간에도 실록의 고출에 관한 다양한 사례가 있다. 숙종 2년 7월 왕은 허적(許積)을 인견하고 최명길(崔鳴吉)과 김육(金堉)이 종묘의 묘정에 배향되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 이에 최명길은 병자호란에 사생을 걸고 국가가 위급할 때 몸을 바쳤고 김육은 옛 것을 널리 알고 직간하기를 좋아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여 그 이익이 백성에게 미쳤으나, 종묘에 배향되지 못한 이유는 유자들에게 영합하지 않은 까닭이며 그 때문에 식자들이 한탄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추배여부를 물으니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이 추배된 적이 있다고 하자 실록을 상고하라 명하였다. 이에 실록을 상고하여 공신 이제가 처음에는 배향되지 못했으나 태종의 명으로 태조묘에 배향된 전례가 있다고 보고했고 이어 최명길과 김육은 종묘에 배향되었다.
숙종 5년 3월초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의 간행을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 정족산사고에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冑)와 대교(待敎) 홍만조(洪萬朝)를 파견하였다. 4월 백성의 소원을 들어 허적 등이 남소문을 다시 열어 주었다. 6월에 병조판서 김석주가 남소문을 열게 된 것은 잘못이라고 아뢰었다. 일부에서는 동남쪽에 있는 남소문을 열어 소양의 기를 통하게 해야 공주보다는 왕자와 왕손이 많을 것이며, 남소문은 김안로가 임의로 폐쇄한 것이므로 남소문을 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김석주는 소양의 방위는 정동 즉 진방(震方)이며 동남방은 손방(巽方)이라 하였고, 또한 김안로가 권세를 마음대로 하기 이전에 편찬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경성 성곽조에도 문은 8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만약 남소문을 개통시킨다면 9가 되어야 하니 처음의 제도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마침내 숙종은 실록에서 증거가 될 내용을 상고하라 명하였댜ㅏ. 바로 이어 기록은 없으나 숙종 16년 7월에 또 남소문을 열 것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보아 닫은 것으로 보인다.
5월에는 검열(檢閱) 목림일(睦林一)을 정족산사고에 파견하였다. 이는 낭선군(郎善君)의 발의로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을 발행하게 그 자료가 될 열성의 승하전명, 왕후의 탄강년월일, 승하전명, 연월일, 공정대왕 등제년월, 소헌왕후 책봉년월일, 인성대군의 명자를 고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숙종 6년 7월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현종실록에는 사실대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는 현종 14년 영릉(寧陵)을 지금의 동구릉 자리에서 여주로 옮길 대 선왕이 몸이 불편하여 친히 거동하지 못했는데, 윤휴(尹鑴)가 행장을 지으면서 아래에서 그치게 햇다고 한 점을 들었다. 또한 병조판서 김석주도 총재관이 내용을 마음대로 고쳤으며 전살(錢殺), 갑병(甲兵), 형옥(刑獄) 등의 일은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개정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은 춘추관 당상과 대신에게 명해 날을 받아 실록을 고열한 뒤 처리하라고 명했다. 뒤에 고열하니 소략하고 누락된 것이 많아 실록을 개수할 것을 청했다. 숙종 6년 윤8월 15일에 예문관 행대교(行待敎) 이현기(李玄紀)가 실록을 고출한 바 이때의 정족산사고의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이 앞서 숙종 5년 낭선군의 발의로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숙종 6년 1월 20일 특별히 사관을 파견하여 기한에 구애받지 않고 종친에 관한 자료를 정확히 조사할 수 있게 하자고 건의를 한 바 있었다. 이어 1월 28일에는 낭원군(郎原君)이 실록의 고출과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수정 방법에 대하여 품의하였다. 그러나 8월 20일의 기록에는 실록고출은 미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9월에는 지난여름에 선원보략을 간행하기 위해 고출해온 실록의 자료가 부실하다고 종부시(宗簿寺)에서 사관을 치죄하기를 요청하였다. 아울러 실록을 고출하기 위해 당상과 사관을 다시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2월에 대제학(大提學) 이민서(李敏叙)와 봉교(奉敎) 남치훈(南致薰)이 강화 정족산사고에 파견되어 실록을 고출하였다. 숙종 7년 1월 예조에 설치되어 있는 《국휼등록(國恤謄錄)》에는 많은 잘못이 있어서 《오례의(五禮儀)》만 준용하고 있는데 이도 소흘하고 간략한 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례를 참고하고 증보하여 국조에서 행한 예를 고증할 수 있는 예서를 만들 것을 조사석(趙師錫)이 청하였다. 이에 숙종 6년 10월말에 승하한 숙종원비 인경왕후의 졸곡 후에 실록에서 상고해내도록 명하였다. 결국 6월초에 조사석이 정족산사고에 파견된다. 5월 《선원보략교정청(璿源譜略校正廳)》에서 공정대왕(共靖大王)의 묘호가 빠져있다고 아뢰었다. 아울러 사사로운 기록은 있으나 전거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므로 실록을 상고하여 처리할 것을 건의하였고 왕을 이를 윤허하였다. 이에 따라 6월 14일 예종년간에 논의된 공정왕의 묘호 추상여부를 강화실록에서 상고하여 보고하였다. 그 고출내용은 세종, 세조, 성종년간에도 거행하지 아니하였고 예종은 세조를 부묘할 때 병행하려 했으나 갑자기 사망하여 결국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논의한 바 12월에는 정종(定宗)의 묘호(廟號)를 추상(追上)하였다. 6월초 예조에서 전후왕후의 국휼 대 이미 거상했던 전례를 춘추관 당상이 실록을 상고하기 위해 강화에 내려갈 때, 아울러 상고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는 아마도 《선원보략(璿源譜略)》의 간행을 위해 공정왕의 묘호를 찾으면서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6월에 작성된 정족산사고의 고출형지안에는 행복호군(行福護軍) 조사석(趙師錫)과 행검열(行檢閱)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앞 기사에 언급된 공정왕의 묘호를 고출하는 일과 인경왕후 졸곡 후의 의절을 고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졸곡 후의 의절은 1월의 왕명에 따른 것으로 중전 인경왕후 김씨가 사망하자 왕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한 경우의 장례에 대한 의절을 고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고한 내용은 수릉관(守陵官)의 변복절차(變服節次)에 대한 기록인데 《오례의(五禮儀)》에는 내상이 먼저 있으면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관(執事官)은 11개월의 연제(練祭) 후에는 그대로 상복을 입고 13개월의 선제 후에는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15개월의 담제 후 길복을 입는 것이었다. 이후 9월에 인조비 인열왕후(仁烈王后) 상제시의 전례에 의거하여 절목을 마련하였다. 숙종 9년 11월 대왕대비인 인조계비 장열왕후(莊烈王后) 조씨의 회갑에 풍정(豊呈)을 설행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실록을 고출하였다. 이때 정족산사고에 예조판서 윤지완(尹趾完)과 奉敎 최석항(崔錫恒)을 파견하였으나 형지안은 전래되지 않는다. 그러나 숙종 10년 8월 대왕대비의 승하로 풍정을 설행하지 못하였다.
숙종 12년 2월 왕의 연령 장차 30인데 저사(儲嗣)가 없었다. 이때 대왕대비의 상기도 마쳤고 중전의 여러 차례의 권유도 있어 빈어(嬪御)를 간택하게 되었다. 이에 인조년간 장귀인(張貴人)을 간택하던 일을 실록에서 상고하게 하였으나 기록이 없었다. 내간에 있는 고사에느 조종조에 숙의를 간택할 때의 처자단자는 다만 음관, 생원, 진사, 유학에게만 받들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도한 삼간택된 처녀는 간택된 날부터 별궁에 있게 하였다가 한달 뒤에 입궐시켰다는 인조 대의 궁인의 말을 따랐다. 이때 간택된 후궁이 현감 김창국의 딸로 숙의 김씨 이다. 숙종 15년 윤3월 전임자가 아니면 감히 추천하지 못하므로 그 법규를 보존할 것을 삼정승이 상소하였다. 왕은 실록을 상고하라 명하였다. 이에 정족산사고에 파견된 행홍문부교리가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전래된다. 이때 열성실록을 상고한 바 대신이 천가한 전례가 있었으므로 영의정 등에게 제신의 권점을 모아 대제학으로 삼았다. 4월 국왕은 이미 폐한 사람을 하루라도 대내에 머물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좌의정 목래선(睦來善)이 실록을 상고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춘추관에 명해 내일 아침 급히 상고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춘추관에 명해 내일 아침 급히 상고하라 명했다. 이는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초에 이조판서 유하익과 행검열 민진형을 강화 정족산사고에 보내 성종이 윤시를 폐한 때와 중종이 신비(愼妃)를 폐한 때의 고사를 고출하게 하였다. 이틀 후 내린 비망기에서 임금은 춘추관에서 상고한 실록을 보니 민씨를 폐해야 할 죄가 윤시보다 컷다면서 5월초에 폐해 서인으로 삼았다. 이후 숙종 20년 4월 민시는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었다.
10월에 안동 유생 노이익이 상소하여 고찬성의 아들 유의제가 검열이었을 때 실록을 포쇄하고 와서 그 아비에게 말한 것이 차차 누설되어 모두 알게 되었다고 아뢰었다. 비밀로 말한 것이란 효종이 도통을 계승함에 당시 겸필자가 뇌물로서 신위를 도모했다고 썼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윤의제의 장원별감(掌阮別監) 윤하제를 불러 확인하고 실록도 상고하라 명했다. 이에 대신들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전고에 없던 일을 행하면 후일에 무궁한 폐단을 남길 것이고 상고한 뒤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국체에 더욱 손상될 것이라고 실록상고를 중지할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으므로 마침내 이듬애 16년 1월 왕은 거짓을 쾌히 밝혀야 하며 거짓이 없으면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4월에 영의정 권대운 등과 춘추관 관원이 춘추관에 모여 인조와 효종의 실록을 고출하였다. 실록을 고출한 바 성조께 거짓이 미친 바가 없었으므로 의심이 풀렸다. 이로서 와전한 윤의제와 상소한 노이익을 죄주기를 대신들이 청하였다. 따라서 10년전에 죽은 윤의제의 관직을 추탈하고 노이익은 정배하라고 명했다. 3일 후 전적 박권이 노이익과 윤하제의 처벌에 관해 상소를 올렸다가 극변으로 귀양보내졌다. 이 과정에서 춘추관의 실록 중에 《봉림대군환(鳳林大君還)》 아래의 두 줄을 칼로 오려내고 고쳐쓴 흔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춘추관에서 실록을 상고하여 고쳐쓴 흔적을 확인한 후 대신, 2품 이상, 삼사의 신하들을 빈청에 모아 비사를 두루 살피는 것이 마땅한 가를 의논하였다. 막중한 비사에 긴요한 곳을 베어내고 채운 것이 거의 두 줄이나 되는데다 의심스러운 것이 많으므로 외방의 사각에도 사관을 보내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5월에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 행예문관대제학(行藝文館大提學) 민암(閔黯), 봉교(奉敎) 민진형(閔震炯)을 정족산사고에 파견하여 강화수비에 관한 것도 고출하면서 《인조실록》에서 무필(誣筆)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무필은 없었고 칼로 40자를 베어낸 곳은 춘추관 사고의 실록과 같았다. 5월에는 태백산사고에 좌삼찬과 행봉교를 파견하였고 적상산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유하익과 봉교 이인엽(李寅燁)을 파견하였다. 8월에는 오대산 실록도 행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행시교 이윤명이 상고하였으나, 오대산 사고형지안에는 고출형지안이라고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외방의 실록 가운데 한 두자라도 베어내고 채우지 못하게 할 것을 영구히 정식으로 만들었다. 아울러 대제학 민암과 홍문제학 유명천에게 이 일의 시말을 찬차하여 중외에 반포하게 하였다.
숙종 20년 2월 종실 화춘군과 화선군이 상소한 바 태묘의 제 3실에서 제 8실까지의 옥책이 간수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병화로 손실을 입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옥당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게 하였으나 역대 옥책의 기사와 월, 일을 빠뜨린 것이 많아서 증거를 찾을 수 없어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3월에 강화의 실록을 상고하였는데 이때 좌삼찬과 행검열이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11월 청백리(淸白吏)와 겸근리(兼謹吏)를 뽑는데 이조의 기록이 자세하지 않았다. 전례를 따르기 위해 이원익의 일기 내용과 같이 2품 이상이 모여서 의논하고 묘당에서 결정하되 조종조의 청백리도 실록을 고출한 후 성안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은 내년 봄 실록을 포쇄할 때 고출하라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효종년간에도 이후원(李厚源) 역시 청백리(淸白吏)를 상고한 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24년 9월 말 전현감 신규의 상소로 인해 장릉(莊陵) 즉 노산군의 복위와 중종비인 신비의 추복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사실들을 실록에서 고출하도록 하고 동방문집(東方文集)과 만필(漫筆) 등에서도 고출하여 홍문관에 삽입(揷入)하도록 하였다. 사육신사건으로 노산군의 생모인 문종비 소릉 권씨는 세조 3년 6월 서인으로 개장되었다. 이때 소릉 권씨의 아버지 權專도 관작이 추탈되어 서인이 되었고 그 아들 권자신도 극형을 받았다. 이후 중종 8년 5월초 소릉을 현덕왕후로 추복하였으므로 억울하게 화를 당한 선비들도 신원되었다. 이때 권전 부자도 복관되었을 터인데 공사문적에 기록이 없었고 실록을 상공했으나 역시 없었다. 이에 숙종은 특명을 내려 권전 부자도 아울러 복관시켰다.
숙종 25년 10월 28일자의 태백산실록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는데 행검열이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고출한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숙종 28년 5월에도 정족산사고에 형조판서 민진후와 행봉교 김상원이 파견되어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있다. 역시 고출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없다. 숙종 29년 11월 왕은 연잉군(延礽君)이 관례를 치를 때가 되었으므로 예조에 명해 전례를 상고하게 하였다. 이때 상고하여 《대명집례(大明集禮)》나 《오례의(五禮儀)》에는 친와과 왕세자의 관례만 있고 대군과 왕자의 관례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춘추관에 수장된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상고하게 하였으나 역시 관련 기록이 없었다. 감춘추(監春秋)가 강화실록을 상고해야겠지만 반드시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실록의 상고는 매우 중대하무로 《오례의(五禮儀)》나 《중조회전(中朝會典)》을 참고해 청할 것을 청해 윤허를 받았다. 이에 사신은 왕자도 신하인데 신하를 삼가기 위한 절목 때문에 비장한 사승을 상고한다는 것은 사체에 어긋나고 훗날 페단이 된다고 하면서 예관이 건의한 것은 애석한 일이며 애초부터 상고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고 논평하고 있다. 숙종 30년 8월 봉교가 강화실록을 고출하고 돌아와서, 장릉이 단종으로 복위되었는데도 《단종실록》 표지에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기록되어 있다고 보고하면서 이를 고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복위교문(復位敎文)》, 《고묘문(告廟文)》, 《익책문(謚冊文)》 등을 부록으로 만들어 싣기로 하고 권내의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란 제자는 그만 두더라도 표지의 서명은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고치기로 하였다. 이에 찬집청을 설치하고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을 찬집하였다. 4개월만에 활자로 인출하고 춘추관의 당상을 네 곳 사고에 보내어 봉안하고 제첨을 고쳐 붙였다. 앞서 종친이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올렸는데 여기에 비로소 덕종(德宗)의 초휘(初諱)인 종을 실었으므로 대신과 예관이 청해 실록을 상고한 바 초휘는 옳으나 피휘하는 글은 없었다. 이에 9월에 예관이 피휘여부에 대해 다시 《성종실록》을 상고하기를 청해 강화실록을 고출하기로 하였다. 이로서 성종년간에도 피휘하지 않은 것을 알고 피휘하지 않기로 하였다. 아마 이때 작성된 정족산의 형지안이 예문관대제학 김진규와 봉교가 파견되어 작성한 고출형지안으로 보인다. 숙종 31년 2월 동지춘추관사 병조참의와 봉교가 정족산실록에서 칭경(稱慶)한 고사를 상고해온 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그때 고출한 내용은 중종 30년에 즉위 30주년 기념으로 과거를 베풀고 왕세자가 경회루에서 진연한 일과 선조 40년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교서의 반포, 사면, 진하와 진연을 행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예조에서 진하와 진연할 날짜를 일관에게 추택하게 하여 3월 초 3일로 정해 종묘제사 교서반포, 진하, 중궁전 진하를 거행할 것을 정하였다. 4월 예조에서 종묘의 보책에 대해 아뢰었다. 종묘에 없어진 옥책을 추보해야 하는데 지난해 중신이 보수하도록 상소하여 서적과 실록을 상고하였으나 책문이 완비되지 않아 추보를 중지했었음을 아뢴 것이다. 이어 6월에 종묘제조가 故 상신(相臣) 상진(尙震)의 기록은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이므로 믿을 만한데 상진이 기록한 《보책등록(寶冊謄錄)》에서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실에는 책문은 있느나 보장(寶章)이 없고 영령전(永寧殿) 11실의 보장은 유실된 듯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시호를 추시하면서 보장이 없는 일이 에전에 없고 사체가 중대하므로 먼저 실록을 상고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자 윤허하면서 사조 각실의 추시보장 유무도 상고하라 명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한 바 모두 추보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나 왕이 인정으로 참착하건데 결코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여 사조실(四祖室)의 금보를 추보하라고 명하였다.
숙종 32년 2월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신명(李頣命)이 《단종실록부록》을 태백산에 봉안할 때 차사원과 군졸의 수효를 감할 것과 종묘의궤를 찬수할 때 고거할 문적을 실록에서 참고해낼 것을 청해 윤허를 받았다. 이를 위해 5월에 정족산사고에 파견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행시교 강우서가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있다. 숙종 36년 3월 판부사(判付事) 이신명(李頣命)이 아뢰어 관왕묘(關王廟)에 거등했을 때 상이 사자에게 읍례(揖禮)를 행함이 마땅하고 배례(拜禮)는 없어도 될 것이라고 하였다. 관왕묘를 창건한 초기 예절은 알지 못하지만 명나라 장수가 함께 가서 제사할 때 후한 예로 섬김이 있었다. 해도 이는 한때의 권의(權宜)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를 법식으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자 왕은 훗날 실록을 포쇄할 때 선조가 몸소 제사 지낸 의절을 상고하라 명하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편찬한 전후의 실록청 관원은 아래와 같다. 《숙종실록청의궤(肅宗實錄廳儀軌)》에는 1•2•3방(房)의 당상 및 낭청은 구별하지 않고서 일괄하여 각방 당상, 낭청으로 기록하였다.
총재관(摠裁官): 김창집(金昌集), 조태구(趙泰耈), 최규서(崔奎瑞), 최석항(崔錫恒), 이광좌(李光佐), 정호(鄭澔), 이관명(李觀命), 민진원(閔鎭遠), 이의현(李宜顯)
도청 당상(都廳堂上): 송상기(宋相琦), 이관명(李觀命), 이광좌(李光佐), 이재(李縡), 최석항(崔錫恒), 이의현(李宜顯), 민진원(閔鎭遠), 조태억(趙泰億), 이조(李肇), 강현, 유봉휘(柳鳳輝), 서명균(徐命均), 윤순(尹淳), 이진망(李眞望), 이덕수(李德壽), 김재로(金在魯), 이병상(李秉常), 유척기(兪拓基), 조관빈(趙觀彬), 윤봉조(尹鳳朝), 이기진(李箕鎭), 신방(申昉), 홍석보(洪錫輔), 김유경(金有慶), 김취로(金取魯), 조상경(趙尙絅), 이병태(李秉泰), 조문명(趙文命), 송인명(宋寅明)
도청 낭청(都廳郞廳): 김제겸(金濟謙), 서명균(徐命均), 박사익(朴師益), 신절, 이진유(李眞儒), 심공(沈珙), 이중협(李重協), 권익관(權益寬), 이명의(李明誼), 이정제(李廷濟), 윤성시(尹聖時), 정석오(鄭錫五), 윤유(尹游), 여선장(呂善長), 조원명(趙遠命), 유필원(柳弼垣), 정수기(鄭壽期), 송진명(宋眞明), 이현장(李顯章), 오명신(吳命新), 오수원(吳遂元), 조익명(趙翼命), 조지빈(趙趾彬), 이진수(李眞洙), 이거원(李巨源), 윤용(尹容), 신치운(申致雲), 이광덕(李匡德), 이광보(李匡輔), 성덕윤(成德潤), 홍현보(洪鉉輔), 김진상(金鎭商), 서섭(徐宗燮), 권적, 윤심형(尹心衡), 이유(李瑜), 이현록(李顯祿), 서종급(徐宗伋), 박사정(朴師正), 박사성(朴師聖), 황재(黃梓), 김상석(金相奭), 윤섭(尹涉), 민응수(閔應洙), 신노(申魯), 이도원(李度遠), 김용경(金龍慶), 홍성보(洪聖輔), 유겸명(柳謙明), 홍봉조(洪鳳祚), 한현모(韓顯謨), 심태현(沈泰賢), 이흡, 이양신(李亮臣), 조명익(趙明翼), 조명택(趙明澤), 조현명(趙顯命), 서명빈(徐命彬), 황정(黃晸), 오광운(吳光運), 조명교(曹命敎), 정우량(鄭羽良), 이종성(李宗城), 김시형(金始炯), 이수익(李壽益)각방 당상(各房堂上):이의현(李宜顯), 조태억(趙泰億), 이조(李肇), 강현, 이진망(李眞望), 이병상(李秉常), 조관빈(趙觀彬), 신방(申昉), 조도빈(趙道彬), 민진원(閔鎭遠), 신사철(申思喆), 김시환(金始煥), 최석항(崔錫恒), 한배하(韓配夏), 심단(沈檀), 오명준(吳命峻), 임순원(任舜元), 이집, 홍치중(洪致中), 김재로(金在魯), 유중무(柳重茂), 이세최(李世最), 이만성(李晩成), 이태좌(李台佐), 권상유(權尙遊), 황귀하(黃龜河), 홍계적(洪啓迪), 김연(金演), 이정제(李廷濟), 박태항(朴泰恒), 오명항(吳命恒), 심공(沈珙), 이정신(李廷臣), 남취명(南就明), 윤행교(尹行敎)
각방 낭청(各房郞廳): 김취로(金取魯), 신절, 이중협(李重協), 권익관(權益寬), 정석오(鄭錫五), 윤유(尹遊), 여선장(呂善長), 조원명(趙遠命), 유필원(柳弼垣), 이현장(李顯章), 조익명(趙翼命), 조지빈(趙趾彬), 이거원(李巨源), 홍현보(洪鉉輔), 서종섭(徐宗燮), 권적, 윤심형(尹心衡), 이유(李瑜), 서종급(徐宗伋), 황재(黃梓), 이정제(李廷濟), 조문명(趙文命), 홍용조(洪龍祚), 권익순(權益淳), 정석삼(鄭錫三), 성덕윤(成德潤), 홍만우(洪萬遇), 이광도(李廣道), 심전(沈•CODE〉J), 김상규(金尙奎), 조상경(趙尙慶), 이중술(李重述), 신무일(愼無逸), 김유, 이성룡(李聖龍), 김고, 임주국(林柱國), 윤혜교(尹惠敎), 유정(柳綎), 이진순(李眞淳), 이제(李濟), 정필녕(鄭必寧), 강필신(姜必愼), 유언통(兪彦通), 이정소, 김여(金礪), 조진희(趙鎭禧), 김시혁, 유수(柳綏), 이태원(李太元), 유시모(柳時模), 어유룡(魚有龍), 정택하(鄭宅河), 양정호(梁廷虎), 채응복(蔡膺福), 유복명(柳復明), 서명구(徐命九), 서명우(徐命遇), 유만중(柳萬重), 김동필(金東弼), 김계환(金啓煥), 김중희(金重熙), 김보욱(金普昱), 구택규(具宅奎), 김시엽(金始燁), 이승원(李承源), 심준(沈埈)
등록 낭청(謄錄郞廳): 홍성보(洪聖輔), 유겸명(柳謙明), 홍봉조(洪鳳祚), 이양신(李亮臣), 조명익(趙明翼), 정희규(鄭熙揆), 권지(權贄), 윤휘정(尹彙貞), 강필귀(姜必龜), 박문수(朴文秀), 정광은(鄭光殷), 이철보(李喆輔), 채응만(蔡膺萬), 신치근(申致謹), 이대원(李大源), 김변광, 한덕후(韓德厚), 박규문(朴奎文), 정광제(鄭匡濟), 최도문(崔道文), 민치룡(閔致龍), 최명상(崔命相), 김응복(金應福), 김수문(金守文), 한계진(韓啓震), 이제항(李齊恒), 강일규(姜一珪), 윤광천(尹光天), 박종윤(朴宗潤), 정언섭(鄭彦燮), 이단장(李端章), 박필정(朴弼正), 이정응(李挺膺), 이용(李榕)분판 등록 낭청(粉板謄錄郞廳):김우철(金遇喆), 이정박(爾挺樸), 김수석(金壽錫), 송수형(宋秀衡), 임진하(任震夏), 심성희(沈聖希), 유최기(兪最基), 윤급(尹汲), 윤득화(尹得和), 권혁(權爀), 신만(申晩), 김상신(金尙紳), 이태징(李台徵), 이수해(李壽海), 박치융(朴致隆), 윤득징(尹得徵), 김몽후, 이광운(李光運), 서명형(徐命珩), 임경관(任鏡觀), 정홍제(鄭弘濟), 남유상(南有常), 김약로(金若魯), 이석신(李碩臣), 김수집(金壽鏶), 성대열(成大烈), 안상휘(安相徽), 민원(閔瑗), 송시함(宋時涵), 이성해(李聖海), 송국위(宋國緯), 민형수(閔亨洙), 정익하(鄭益河), 이위(李瑋), 이항수(李恒壽)
2. 《숙종실록(肅宗實錄)》의 내용
숙종은 현종(顯宗)의 장자(長子)로서 휘(諱)가 순(焞), 자(字)가 명보(明普)이다. 현종 15년(1674) 8월 23일에 즉위하여 46년(1720) 6월 8일에 승하하였으므로 47년간 통치하였다. 이 숙종이 재위한 시대는 조선 정치 사상, 정치 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했던 기간으로 흔히 환국시기로 칭해지고 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의 주요 내용도 이 정쟁 문제에 치중(置重)되어 있다.
숙종은 1674년 8월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6년에 경신 환국(庚申換局), 15년에 기사 환국(己巳換局), 20년에 갑술 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서인 사이에 정국이 바뀌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숙종 즉위년(1674) 9월에 진주 유학(幼學) 곽세건(郭世楗)이 상소하여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극론하여 공격하였다. 이것은 제2차예송[甲寅禮訟]으로 위축된 서인의 당세(黨勢)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숙종은 선왕(先王:현종)의 묘지문(墓誌文)을 송시열에게 짓게 하였으나, 곽세건은 송시열이 복제(服制)를 잘못 판정하여 예제(禮制)를 무너뜨리고 왕통(王統)을 문란시켰으니, 선왕의 묘지문을 짓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곽세건의 상소가 도화선(導火線)이 되어 서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축출되고 남인의 허목(許穆)과 윤휴가 요직(要職)에 임명되어 정국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시열 등 서인을 처벌할 때 남인들은 준혹(峻酷)을 주장하는 《청남(淸南)》과 완화(緩和)를 주장하는 《탁남(濁南)》으로 나뉘어 분쟁을 일으켰다. 서인은 숙종 6년 경신년 3월에 이른바 허견(許堅)의 모역 사건(謀逆事件)을 고발하여, 여기에 관련된 남인들은 대부분 주살(誅殺)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이른바 《경신 환국(庚申換局)》이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다시 송시열에 대한 시비로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열되었다. 경신환국에 주동적 활동을 한 인물은 서인의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두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비밀 정탐으로 남인을 역모로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에 서인의 소장파인 지평(持平) 박태유(朴泰維)•유득일(兪得一), 대사성(大司成) 조지겸(趙持謙), 교리(校理) 한태동(韓泰東) 등이 그들을 탄핵하였으나, 송시열은 김익훈이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고 하여 두둔하였다. 또 송시열과 제자 윤증(尹拯)에 갈등이 일어나 마침내 분열되었다.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및 김만기(金萬基)•김만중(金萬重)•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등을 지지하는 쪽은 노론(老論)이고, 박세채•윤증•조지겸•한태동•오도일 등을 지지하는 쪽은 소론(少論)이 되었다.
집권파인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서로 논박이 계속 부절하고 있는 차에 숙종 15년(1689)에 원자 정호(元子定號)의 문제가 일어났다. 숙종 6년에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가 별세하고, 이듬해 7년에 계비(繼妃) 민씨(閔氏)가 책립되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는데, 후궁인 숙원(淑媛) 장씨(張氏)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14년 10월에 왕자(후일의 경종(景宗)를 낳았다. 숙종은 15년 정월에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봉하였다. 이때 봉조하(奉朝賀) 송시열이 시기상조(時期尙早)를 주장하자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서인 일파를 축출하였다. 대신 남인인 권대운(權大運)을 영의정으로,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요직을 모두 남인으로 임명하여 정국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어 희빈을 왕비로 승격시키고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남인들은 송시열을 제주(濟州)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켰다가 6월에 정읍(井邑)으로 이배(移配)하는 도중에 사사(賜死)하였다. 전월(前月)에는 김익훈을 장살하고, 이미 죽은 김석주는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며 서인 대신이었던 김수항(金壽恒)도 유배지에서 사사(賜死)하였다. 그리고 경신옥사(庚申獄事)에 죽은 남인의 허적(許積)•윤휴•이원정(李元禎) 등은 모두 복관(復官)하였다. 이를 기사 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숙종 20년 갑술년 4월에 서인 중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민비 복위(復位)의 음모를 진행시키다가 음모가 고발되었다. 남인 우의정 민암(閔黤)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실정을 밝힌 후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2경에 숙종은 갑자기 정국을 변동시켜 국문에 참여한 남인의 대신 이하 고관(高官)들을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고 죄인들을 석방한 후 노론(老論)•소론(少論)을 불러들여 정국을 바꾸었다. 폐비(廢妃) 민씨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고,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봉(降封)하였다. 이를 갑술 환국(甲戌換局)이라 한다.
후에 장희빈의 저주 사건 등이 일어나 처단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소론 대신들은 세자 보호를 위하여 완화론(緩和論)을 주장했으나, 노론들의 준론(峻論)에 몰려 장 희빈은 사사(賜死)되었다. 이에 소론의 최석정(崔錫鼎)•남구만•유상운(柳尙運) 등 대신들도 모두 찬축(竄逐)되었다. 이와 같이 숙종 시대에는 서인•남인의 정쟁(政爭)이 격심하여 몇 차례의 정국 전환을 초래하였다. 이는 국가나 민생(民生)을 위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주로 왕실에 관한 문제들, 즉 왕족의 복상(服喪), 왕자 책봉, 왕비 폐립(廢立)에 관한 문제였다. 이러한 왕실의 전례 논쟁에는 위험한 항상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여기에는 숙종 자신의 애증적(愛憎的) 편향이나 변덕스러운 기질도 작용하였다.
숙종은 왕실의 존엄성(尊嚴性) 유지와 왕권의 강화에 주력(注力)하고자 하였다. 특히 역대 조종(祖宗) 중에 공적이 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에게는 존호를 올렸고, 인조(仁祖)와 효종(孝宗)은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묘호(廟號)가 없었던 공정왕(恭靖王)에게는 정종(定宗)이란 묘호를 올렸다. 또 세조(世祖)에게 폐위된 노산군(魯山君)을 추복하여 단종(端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렸으며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고치고 그 전말(顚末)을 기록한 부록을 찬집했다. 중종(中宗)의 폐비 신씨(愼氏)에게는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게 하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복위시켰으며, 또 조선 초기 절의의 표본인 사육신(死六臣)을 복관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이런 일들은 당시 병자호란 뒤에 존명대의(尊明大義)를 주창한 일부 유신들의 건의에 따른 조치였다.
숙종은 호서•호남 지방에 시행하던 대동법(大同法)을 영남에도 시행했으며,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시행하였다. 서원의 중첩 설치를 금하고, 서북인(西北人)의 임용을 장려하였다. 군비면(軍備面)에서는 종래 사영(四營)이던 군제에 금위영(禁衛營)을 더 만들어 오영(五營) 제도를 완성시켰으며, 대흥산성(大興山城)과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여 청군(淸軍)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대마도(對馬島)의 왜사(倭使)에게 왜인의 울릉도(鬱陵島) 침입 금지를 요구하여 23년(1697)에는 일본 막부(幕府)로부터 금지시킨다는 회보(回報)를 받았다. 또 청국(淸國)의 국경선(國境線) 확정 요구에 따라 38년(1712)에는 백두산(白頭山) 분수령(分水嶺:압록강과 두만강이 갈리는 곳)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숙종은 46년(1720)에 승하(昇遐)하였는데, 묘호(廟號)는 숙종(肅宗)이고, 존호는 장문헌무경명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이고, 능(陵)은 명릉(明陵)이다.
3.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는 영조 4년(1728)에 이광좌(李光佐)•윤순(尹淳) 등 소론(少論)이 편찬한 것으로, 영조 초에 노론(老論)이 편찬한 《숙종실록(肅宗實錄)》을 수정 보완하기 위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보궐정오(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補闕正誤》이다. 이 《보궐정오》는 별책으로 편철하지 않고 《숙종실록(肅宗實錄)》의 매권 말미에 합철하였다.
영조 3년(1727) 9월에 편찬이 끝나고 인쇄(印刷)를 마치자 바로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발생하여 노론의 정호•민진원 등 백여 명이 파면되고, 소론의 이광좌•조태억(趙泰億) 등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소론이 정권을 잡은 후, 실록에 고의(故意)로 왜곡시킨 기록도 많다고 하여 실록을 개수(改修)하려고 했으나, 개수 작업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각 권말(卷末)에 빠진 기사를 보입(補入)하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이른바 보궐정오(補闕正誤)를 붙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실록보궐청(實錄補闕廳)을 설치하고 이광좌(李光佐)를 총재관, 윤순(尹淳)•송인명(宋寅明)을 당상(堂上)에 임명하였다. 이 보궐정오편은 영조 4년(1728) 3월에 완성되어 인쇄 작업을 마치고 앞서 노론이 편찬한 실록 원편(實錄原編)과 합본(合本)하여 각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 현재 《숙종실록(肅宗實錄)》 각 권말(卷末)에 보궐 정오가 붙어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보궐정오(補闕正誤)》의 편찬에 참여한 관원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보궐 총재관(補闕摠裁官): 이광좌(李光佐)
도청 당상(都廳堂上): 윤순(尹淳), 송인명(宋寅明)
도청 낭청(都廳郞廳): 이광보(李匡輔), 조현명(趙顯命), 서명빈(徐命彬), 황정(黃晸), 오광운(吳光運), 조명교(曹命敎), 정우량(鄭羽良), 이종성(李宗城), 김시형(金始炯), 이수익(李壽益)
분판 등록 낭청(粉板謄錄郞廳): 이주진(李周鎭), 유건기(兪健基), 유엄(柳儼), 권영(權穎), 이종백(李宗白), 홍경보(洪景輔), 조상행(趙尙行), 김상성(金尙星), 이춘제, 심성진(沈星鎭), 윤종하(尹宗夏), 권굉(權宏), 임정(任珽), 권집, 윤광운(尹光運), 이성효(李性孝), 민정(閔珽), 이중경(李重庚), 박필재(朴弼載), 허채(許采), 남태량(南泰良), 이유신(李裕身), 홍성(洪晟), 조진세(趙鎭世), 이정석(李廷錫), 한종근(韓宗瑾), 권기언(權基彦), 이종연(李宗延), 남태제(南泰齊)1987년 10월 이재호(李載浩)
4.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의 내용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는 숙종대의 역사에서 소론 측의 입장을 천명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다. 그들은 노론이 주도하여 편찬한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오류와 왜곡이 많다고 판단하여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를 수정 보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보궐정오편은 소론 측의 당론을 반영하는 편파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肅宗實錄)》 자체가 노론의 당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반인들에게는 일종의 균형 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에서 수정되거나 보완된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소론과 노론의 이해 득실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1680년(숙종 5)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노소 분당 과정에서 빚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서 소론들은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주축이었던 김석주(金錫冑) 김익훈(金益勳) 등의 처사를 극히 비판적으로 수정하였다. 또한 1694년의 갑술옥사 이후 세자(世子: 景宗)의 보호와 희빈(禧嬪)의 처리 문제에 대한 노•소 두 정파의 대립 갈등에 대하여 소론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을 많이 수록하였다. 이후 양파는 병신처분(丙申處分) 등 사사건건에서 입장과 시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들 사건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갈등에 관한 소론 측의 자료들이 본서에 수록되어 있다.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는 비록 소론의 입장에서 편찬된 것이기는 하지만, 원본의 오류나 미흡한 내용들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숙종 대의 역사를 노론 측의 시각과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균형 있는 역사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과 함께 이 보궐정오편이 편찬•보존되어 전해지게 된 것은 매우 흥미있고 다행한 일이다.
(신승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