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曲線 / 김 홍 은
창문을 열고 깊어가는 가을 밤하늘을 바라본다. 스무닷새 달빛이 고요하다. 오늘따라 공허한 창공에 떠있어서 그런지 슬픈 듯 다가온다. 일그러진 하현달이지만 마음을 어디론지 살며시 잡아끌고 간다. 알 수없는 고독함이 밀려왔다.
첫사랑에 실연당한 심정이 이러하였던가. 고향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다가 상여소리와 함께 떠나가던 날도 이런 마음이 들었다. 삶이 그저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하던 날이면 강물굽이가 돌아가는 모래밭에서 잔잔하게 흐르던 물소리를 하염없이 들었다.
낙목한천에 스러져가던 달빛에 의지하며 그리움에 몸부림치던 긴긴밤을 보내던 철없던 젊은 날들도 이러한 마음이었다. 얼기설기 굴곡진 세월도 아련히 떠오른다. 막연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산다는 게 무엇인가 방황하며, 헤쳐나갈 가시밭길이 두렵기만 할 적에도 밤하늘의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타국에서 연구실의 문을 열고 쓸쓸히 교정을 나설 적에도 밤하늘은 편안했다. 어느 때는 광활한 어둠속에 포근하고 은은한 곡선으로 감싸주는 그믐달은 고향의 느낌이었다. 달의 모양은 변화만 있을 뿐 다정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달도 마음도 하나가 되어 살며시 허공을 맴돌아 눈물겹다. 바라보면 볼수록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고운 선이 어디 또 있을까?
자연미를 내세울 수 있는 아름다움의 상징은 아마도 고요한 새벽녘에 떠있는 그믐달이 아닌가 싶다. 어느 때는 마음을 아리게 하면서도 뭉클하게 만든다. 은은한 달빛이 가져다주는 고요함 속에서 느끼는 감성은 곡선이라서 더욱 편안한가 보다.
내 인생길을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고요한 새벽은 공연히 슬프다. 나약해져 가는 달빛에 젖는 인생길이라서 그런 것 일가.
낯선 직선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지루함으로 느껴져 온다. 직선길은 단조롭기만 하다. 고향의 골목길은 선과 선이 이어지는 곡선의 여유로움은 아름다움과 오묘한 감흥을 주었다. 구부러진 돌담길은 생각만하여도 향수에 젖는다. 곡선과 직선의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동양인의 사상과 서양인의 의식도 곡선과 직선의 사고에서 삶의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 곡선은 그냥 아름답다.
어둠속에서 이어지는 선과 선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흑백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 없이 이루며 여명을 기다리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으로 밀려온다. 가느다란 선, 굵은 선, 직선, 곡선, 짧은 선, 길은 선이 가져다주는 감정이나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선의 감성은 왜 다른가.
스러져가는 달빛이 차갑다.
하늘에 떠 있는 이 마음을 그믐달의 선으로 묶어본다. 가을밤에 보는 달은 밝으면서도 은은하다. 고우면서 겸손하지만 처량하다. 둥그런 모양에서 한쪽은 점점 이지러져 가지만 지나치게 밉지가 않다. 고고하면서도 부드러워 교만하지가 않아 여유롭다. 그믐달의 곡선으로 부터 가만히 내 인생을 배운다.
선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넘지 못하는 선, 넘어서는 안 될 위험의 선, 넘기를 소망하는 갈망의 선, 모두가 경계를 가진다.
누에는 알에서 깨어나 뽕잎을 먹고 많은 하나의 기다란 실선을 이어내어 집을 짓는다. 사람들은 누에고치의 실을 풀어내어 다시 비단을 짰다. 명주를 짜던 베틀 소리가 짤그락 짤그락 방문을 새어나와 달빛에 젖든 밤이 그립다. 그 밤은 섬돌 밑에서 귀뚜라미도 고운음률로 가냘픈 선의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언제 들어도 서글프게 들려온다. 그 소리는 마지막 입고 갈 비단 수의를 떠올려 놓기도 한다.
뽕나무는 실을 만드는 비밀을 살며시 들려준다. 뽕을 따던 한 여인의 밀의사(密蟻絲)의 재치 앞에서는 천하의 공자도 무릎을 꿇었다. 한 개의 구슬에 아홉 개의 가느다란 구멍에다 실선을 연결해서 꿰는 지혜를 재치로 가르쳐 준다. 굴곡진 아홉 개의 구멍에 꿀을 채우고 개미의 허리에 실을 묶어 두면 자연스럽게 실을 꿰어 놓게 하는 방법이다.
인생의 삶은 수 없는 어두운 사선(死線)의 그림자를 밟으며 희망의 밝은 빛으로 향하려고 몸부림 치고 있다. 삶이란 헝클린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서둘지 않고 갈고 닦아야 하는 지혜의 철학으로 스스로 터득하고 익히며 살아감이 아니던가.
그믐달빛이 점점 스러져 간다.
자연스러움은 변화가 많기도 하지만 신비롭다. 변화에는 그대로 아름다움이 깃들어져 있다. 그 속에는 알게 모르게 미적 조화를 담아내는 질서를 이룬다. 그믐달은 또 내일의 변화를 이룬다. 공간에서 하나의 점은 선으로 만들어지기까지 꾸밈은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직선은 단조롭지만 곡선은 불안한 듯 하나 여유와 행복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일그러져 가는 그믐달의 곡선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