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나 이 M-16이 누구에게 입수되었으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증언에 의해 확인된 시민군의 최초무장 총기는 M-16이 아니라 칼빈소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탄이 없는 칼빈소총이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1일 - 인용자) 오전 8시가 지나면서 2구의 시체를 앞세운 시위군중은 가톨릭센터 앞에서 50m 간격을 두고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처음 1만여명이었던 군중은 계속 늘어나 10시 쯤에는 5만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금남로를 꽉 메웠다. 이 시위 군중들 중 맨 앞줄에 있던 3,4 명이 카빈소총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쇠파이프나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다.
시위군중이 가지고 있던 이 카빈소총의 출처를 놓고 몇가지 논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카빈소총은 전날밤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갖고 온 17정 중 회수되지 않은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전남 경찰국 주상섭(朱相燮) 통신과장을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들어보았다.
"20일 밤 시위대원의 무기탈취 사건은 없었습니다. 특히 나주에서 있었다는 것은 그때 통신을 맡고 있었던 나로서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주경찰서장도 광주에 와 있었는데 서장이 모를리 있겠습니까? 만약 있었다면 나주경찰서뿐 아니라 경찰국 전체가 비상이 걸릴 만큼 큰 사건이었지요. 어찌됐건 내가 휴대하고 있던 무전기에는 전연 그런 사실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시위대원의 무기탈취는 다음날 오후 공수부대의 발포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이날밤 광주세무서 무기고에 있던 17정의 카빈이 시위대원들의 손으로 넘어갔으나 광주경찰서 간부의 설득으로 순순히 내놔 모두 광주경찰서에 반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2, 3정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죠. 이 카빈에는 실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뒤에 학생시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정상용(鄭祥容)도 1988년 1월 27일 국회청문회에서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의 일부일 가능성이 많다고 증언했다. …
- 김영택, 『5ㆍ18 광주민중항쟁』, 동아일보사, 1990, p118~120.
이상의 논의에서 시위대의 총기무장시점은 21일 이후로 잡아야할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겠다. 2만여명 이상의 시위대가 행방이 불분명한 M-16 한 정, 실탄이 없는 칼빈 3정을 소지한 것이 총기무장이라고 할 수 없다면 말이다. 시위대의 발포 역시 21일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위대를 폭도로 만들 필요가 있는 군의 자료에서 21일 이전 시위대의 총기무장이나 총격은 확인되지 않는다. 최소한 21일 이전 시위대의 총격에 의한 군의 사망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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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에게 탈취된 총기는 모두 칼빈으로써 총수량 10개이하 실탄은 없었습니다.
첫댓글 ㅁㅁ님, 폭도들이 5월 19일 나주경찰서에서 수천 정의 총기를 탈취하였습니다. 김영택씨가 무슨 잠꼬대를 하던 이것은 광주일보에도 실린 바 있는 사실입니다. 아래링크에서 광주일보를 읽어 보세요. http://altair.chonnam.ac.kr/%7Ecnu518/data/news/sagun/b/kwangju_961010.htm
"광주세무서에서 탈취한 무기는 17정이고 모두 반납을 했다." 고 명확하게 말을 해놓고, 모르지요 라는 글로 상대의 주장을 덮는것도 맞지 않는군요. 1700정이나 170정도 아니고, 칼빈 17정은 5정씩 들면 3 묶음에 2정이 더 있는 한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 비상시국에서 반납된 총기가 제대로 반납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은 글쓴이의 관점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거로군요. 통신과장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 의도가 나주에서 피탈된 무기가 아니란 점에는 확고하게, 광주세무서에서 탈취된 무기 반납엔 흐릿하게 가는군요, 그 통신과장이란 분이 무기를 반납받지 않은 당사자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