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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 오대산 산행 및 사찰순례 ⑥ 江原 平昌 五臺山 山行 及 寺刹巡禮 六
-오대산 월정사 (五臺山 月精寺) ②-
적광전 뒤 아미타불을 모신 수광전(壽光殿) 즉 무량수전(無量壽殿)
한 건물에 정면은 수광전(壽光殿) 오른쪽은 지장전(地藏殿)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壽光殿), 극락전(極樂殿)이라고도 합니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 불(無量光佛)로도 불리는데, 이미타는 아미타유스(Amitayus:무량수(無量壽)와 아미타바 (Amitabha : 무량광(無量光)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월정사 무량수전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뒤쪽으로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모시고 있습니다. (사진촬영 못함) 지장전(地藏殿)
아미타불 오른쪽 북단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의 수광전(壽光殿)은 1989년 도명스님 때 시작해 1992년 현해스님이 완공했다고 합니다.
수광전 옆 삼성각(三聖閣) 1994년 현해 스님 때 중건.
개산조각(開山祖閣)
적광전(寂光殿) 뒤에 자리잡은 개산조각(開山祖閣)은 규모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진영眞影을 모신 곳 입니다. 자장율사의 진영은 1804년에 제작된 통도사에 모셔져 있는 자장율사의 진영이 가장 오래 되었으나 월정사의 자장율사 진영은 최근에 제작한 것이랍니다. 1958년 영해 당 경덕 스님이 중건했으니 현존하는 월정사 당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개산조각(開山祖閣)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글씨.
개산조각(開山祖閣) 모습
진영각(眞影閣)
진영각은 개창주(開創主)나 중창주(重創主)와 같은 고승의 진영 모시는 전각입니다. 월정사의 진영각은 개산조각을 따로 두어 개창주를 따로 모시고 있어 근 · 현대의 스님들 만을 모시고 있습니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형태인 월정사 진영각은 근 대 월정사에 주석한 조계종 초대 종정 이신 한암스님, 현대불교학의 아버지이신 탄허 스 님,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지암스님, 6.25 의 전란 후 월정사를 중건하신 만화스님의 진 영을 모시고 있습니다만 사진촬영은 못했습니다. 1975년 만화스님이 중건하고 1994년 에 현해스님이 2009년 퇴우 정념스님이 증축했다고 합니다.
월정사를 창건하신 자장율사(慈藏律師)
중국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시고 불사리(佛舍利)와 가사 등을 전해 받고 오대산(五臺山)에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시다.
고려 말 선풍(禪風)을 드날렸던 나옹선사(懶翁禪師)
『고려말, 오대산의 북대암(北臺庵)에서 수도하던 나옹(懶翁) 스님은 매일같이 월정사로 내려가 콩비지를 공양(供養)하였다.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마다 눈이 소복히 쌓여 소리만 크게 질러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어느 겨울 날, 나옹스님은 비지를 받쳐 들고 조심스레 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와라락' 소리가 들리면서 소나무 가지 위에 얹혀 있던 눈들이 스님과 부처님전에 올릴 비지를 덮쳐 버렸다. 순간, 스님은 소나무를 향해 크게 꾸짖었다.
"이놈, 소나무야, 너는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계신 이 산에 살면서 언제나 크나큰 은혜를 입고 있거늘, 어찌 감히 네 마음대로 움직여 불전에 올릴 공양물을 버리게 하느냐!"
마침 스님의 꾸짖는 소리를 듣게 된 오대산 산신령은 결단을 내렸다.
"소나무야, 너희는 큰스님도 몰라보고 부처님께도 죄를 지었으니 이 산에 함께 살 자격이 없다. 멀리 떠나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전나무 아홉 그루로 하여금 이 산의 주인이 되어 오대산을 번창케 하리라."
산신령의 명령에 따라 소나무들은 오대산에서 쫓겨나고 이후 전나무들이 주인노릇을 하 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을 입증이나 하듯 일주문 가까이에는 지금도 아홉 그루 전나무 중 두 그루가 유난히 큰 키를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전통사찰 총서 월정사편에서-
구국(救國)의 성사(聖師)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
『속성 임(任). 본관 풍천(豐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 ㆍ송운(松雲)ㆍ 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임응규(任應奎). 유정(惟政)은 법명. 경남 밀양 출생.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 獻)에게 《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 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 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 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 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 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 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 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 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 가 그 곳에서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 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네이버 사전에서-
스님은 월정사에서 한 때 수도하시고 낙후된 월정사를 중수하셨다고 합니다.
법력(法力)으로 상원사를 지키신 한암(漢巖) 스님.
『1950년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 전쟁으로 민족의 분단은 더욱 더 고착화되 었고, 남북 간의 이념 대결이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문화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실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을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 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다. 마침내 국군은 38선상에서도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고, 주민들도 다시 피란을 가야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세요!"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불을 놓는 것이니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돼. 너희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을 따라 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된 것 아니냐. 그러니 걱정 말고 불을 질러라." 절의 소각을 전해들은 한암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 서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에게 이제 되었으 니 불을 놓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승과 장교는 상원사 소각을 놓고 눈에 핏발이 선 대결을 하였다. 장교의 옆에 있는 사병이 “이제 끄집어낼까요?”라고 말을 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한암스님의 상좌와 보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장교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부 탁하였다. 잠시 후,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한 장교는 “이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다. 도인 스님이 분명해.”라고 말을 하면서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 법당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는 절을 태웠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절의 문짝을 태워 연기라도 내야 하겠 다는 양해를 노승에게 얻었다. 장교는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의 문짝 수 십여 개를 떼 어내서 마당에 놓고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문짝을 태운 검은 연기는 상원사 하늘로 높 이 올라갔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을 다 태운 장 교는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승이 옻칠한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스님의 생사불이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 절의 수호 정신으로 상원사는 기적적으로 소각을 면한 것이다. 당시 한암 스님의 말을 듣고 소각 중지 명령을 내린 그 중위의 신상 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월정사와 상원사를 불태우라고 명했던 국군 김백일 장군은 월정사 소각 후 비행기 를 타고 가다가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암(漢巖) 스님의 좌탈(坐脫)
『상원사 문화재를 수호한 한암스님은 조계종의 종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근대 고승, 큰 스님이다.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2세 때인 1897년 금 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하였다. 그는 치열한 수행을 하여 금강산 신계사와 해인사에서 두 차례의 깨달음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근세 선불교의 고승인 경허에게 인가를 받았 고, 통도사 내원 선원에서 30세의 나이로 조실을 역임하였다. 1923년에는 서울의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당하고, 불교마저도 친일불교로 전락되어, 파계승이 들끓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천고에 자취를 감출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 무새는 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그는 이렇듯이 산중에 칩거, 수행하면서도 불교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을 치열하게 하였 다. 이 같은 한암스님의 명성은 전국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 전국의 선방 수좌들은 상원 사 선방의 한암스님 회상에서 한철 수행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한암스님은 월정사 승려 와 그를 찾는 승려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승가 5칙 즉 참선, 간경, 염불, 의식, 가람수호 를 가르쳤다. 이 5칙을 다 지키면 좋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꼭 지키라고 강조하였다. 이 전통은 지금도 월정사 스님과 한암문도회 스님들에게는 전설로, 가풍으로 전해진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그는 그의 제자들을 안전한 남쪽으로 보내고 그의 상좌인 희찬 스님, 그를 시봉하던 평등성보살과 상원사를 지키고 있었다. 상원사 소각을 저지한 한암 스님은 3개월 후인 음력으로 2월 24일, 상원사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으로 열반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암스님의 열반 직후 그곳을 들른 국군 8사단 정훈장교인 김현기대위가 그 열반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그의 마지막 모습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김현기 대위의 육사동기이며 인접 사단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소설가, 선우휘는 한암스님의 상원사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69년 1월의 《월간 중앙》에 <상원사>라는 단편소설로 기 고했다. 그 후 한암스님의 문화재 수호 이야기는 세상에 전해졌다.』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지내신 지암(智庵) 스님
조선불교 수호와 독립운동자금 모연에 일심(一心)으로 외호(外護)하시며 도우시다.
탄허(呑虛) 스님께서 인재양성과 역경불사(譯經佛事)로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다.
탄허(呑虛) 대종사(大宗師)
『스님은 1913년 음력 1월 15일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인 율제(栗齊) 김홍규(金洪奎)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금택(金鐸), 자(字)는 간산(艮山), 법명은 택성(宅成)이 며, 법호가 탄허(呑虛)이다. 어려서부터 한문학 전과정을 마치고 15세 되던 해 충남 보 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후학인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 터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항상 훌륭한 스승,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았다. 그러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方漢巖) 스님의 명성 을 듣고 19세에 처음으로 한암(漢巖) 스님께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 근 3년 동안 오간 서 한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 대문장이었다. 21세가 되던 해 탄허 스님은 정든 속세, 부 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에 입산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 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華嚴經) 120 권을 번역, 출간하였으며,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조계종의 宗典), 사교(四敎), 사집(四集)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仁村)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1977년, 자신의 입적일 을 1983년 6월 5일 유시(酉時)라 예언한 바 있는데 꼭 그 시각에 입적하시어 세인을 놀라 게 했는데 향년 71세 법납 49년이었다. 입적할 때까지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후 종교인 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월정사 중창에 힘쓰신 만화(萬化) 스님
만화스님은 1938년 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상원사와 월정사, 신흥사 주지를 역임했 습니다. 특히 스님은 6. 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탄허 스님과 함께 오늘의 대가 람으로 중창시킨 주역이십니다.
적광전 뒤 진영각을 비롯한 전각들
대법륜전(大法輪殿) 2004년 낙성.
큰 법을 굴리는 집이란 뜻으로 사찰에서의 강당을 의미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정각 을 이룬 후 녹아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한 역사적 사실에서 당호의 이름을 지었 다고 합니다. 1층에는 강당이 지하에는 공양채가 있습니다. 검물이 매우 웅장합니다. 여기에 주련이 많은데 나중에 살펴 보겠습니다.
선불장(選佛場) 금정산인(金井山人) 석주(昔珠) 스님의 글씨.
선불장(選佛場)이란 부처를 뽑는 도량, 부처를 뽑는 과거장(科擧場)이란 뜻입니다.
동별당(東別堂)이라는 설선당(說禪堂)
적광전 왼쪽에 동당으로 불리는 설선당이 있습니다. ㅁ 자 형으로 지어진 이 큰 당우는 월정사의 일반 사무, 행정을 맡아 보는 종무소입니다. 1979년 만화스님이 중건하고 2002년 현해스님이 전면보수했다고 합니다.
서별당(西別堂)이란 대강당(大講堂)
서당은 주요 행사나 모임이 있을때 행사장이나 수련법회장으로 쓰이며 또한 스님들의 요 사채로 쓰입니다. 탄허스님 때에는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講院)으로 지어졌습니다. 지금 도 탄허스님이 쓴 대강당 현판과 큰방에는 탄허스님의 친필親筆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정면 11칸, 측면 3칸인 ㄱ자 팔작지붕이며 1976년 만화 스님이 중건했습니다.
종고루(鐘鼓樓)
적광전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태입니다. 범종, 목어 운판, 법고 등의 불전사물을 봉안하여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때 사용합니다. 이 사물은 모두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해탈성불을 이루게 한다는 교화의 의미를 가지 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밑에 석경원(碩經院)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불교서적과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종각 밑에서 불교용품을 파는 구조는 처음 봅니다.
보장각(寶藏閣) 성보박물관입니다. 1999년 조성.
보장각(寶藏閣) 탄허 스님 글씨.
『연건평 206평의 한식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전시실에서는 불 (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전시 주제로 삼아 불교 문화유산들을 전시하고 있다. 1999년 10월 개관한 이후 2000년 7월 문화관광부에 불교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함으로써 강원도의 유일한 불교전문박물관이다.
금강루(金剛樓)
『월정사의 금강루는 사천왕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으 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 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움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훔금강역 사상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적금강이 있으며 특히 밀적금강역사는 지혜의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이는 일체만물의 생성에서부터 소멸까지를 표현한 것으로 금강 역사의 강한 힘과 지혜로 불법을 호지護持하고 사찰을 수호하며 불교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으로 1997년 12월 현해스님이 착공하여 1999년 10월 에 낙성했다.』
천왕문(天王門) 1974년 만화 스님이 중건함.
원래 일주문부터 들어셨다면 금강교를 지나 제일 먼저 만나는 문이 천왕문이지만 우리는 역으로 출발했으니 천왕문을 나서서 금강교로 향합니다. 천왕문은 일명 사천왕문(四天王 門)이라고도 하며 대개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天王門)이 있습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 하는 수미산 중턱에 살고 있는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입니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ㆍ서ㆍ남ㆍ북에서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합니다.
사진은 못 찍었지만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왼손에 비파를 들었고, 남방 증장천왕 (增長天王)은 오른손에 보검을 들었고,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 여의주를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습니다.
금강교(金剛橋)
금강교 모습
금강교에서 바라 본 만월교
일주문(一柱門)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 1976년 조성.
오후 5시 일주문을 나셨습니다. 겨울의 초입이라 금방 날이 어두어지기 때문에 사진이 좀 어둡습니다. 그리고 날씨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 쾌청한 편이 아니어서 더 합니다. 이 사진을 끝으로 밧데리도 메모리칩도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 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1시간 동안 월정사를 둘러보기는 무리였습니다. 성보박물관도 들어가 보고 각 전각을 참배해야 하는데 박물관도 못 들어 가고 전각도 다 살피지 못했습 니다. 전각을 참배하며 의미를 더듬기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박 겉 핥기식이 되어 아쉽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법우님들은 저만치 가시고 없으니... ^^ 훗날 다시 오게 된다면 오래 머물고 쉽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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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나무 이야기가 재밌네요.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그리고 고루고루 잘 둘러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_()_ ^-^
이 외에도 전설이 더 있는데 다 적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전설이 많습니다. 전설을 알고 참배를 하면 더 값진 순례가 될 것입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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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는 단기 출가를 해서 잠시 머무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_()_
언젠가는 한 번 해 보고픈 일입니다. 내생엔 반드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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