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한기의 기학속으로 들어온 근대
혜강은 퇴계나 율곡보다 높다
<원제> 최한기의 기학속으로 들어온 근대
1. 조선에 있어서 19세기는 봉건사회체제가 해체되고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였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로의 과정은 국내의 상황과 함께 국외의 상황으로도 많은 혼란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19세기의 초의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여러 부분에서 과도기적 혼란이 나타났고, 그 중 사상계에서는 18세기까지의 사상적 관용이 사라지고 교조주의적 주자학이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정조 정치기에 배태되었던 서학사상 중 서구과학 수용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고,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因子가 되는 서구문화의 개방은 鎖國主義와 斥邪衛正사상이란는 두 장벽을 통해서 서구학 제반에 대한 철저한 배척을 낳았고 그것은 곧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쇄국주의 밑에서도 자주적 개국과 서구과학사상의 수용으로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움직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움직임들 속에, 단연 돋보이는 전대미문의 독보적인 독특한 巨匠의 한 사람이 우리의 시대 위에 놓여져 있는 듯 합니다. 단지 정책적으로 실현되어 나타나지는 못했지만 19세기 당대의 근대화 수용에 그 누구보다도 밝았고, 치열한 문제의식과 끝없는 학문적 열정으로 '기학'이라는 웅대한 학문체계를 세웠던 최한기를 통해서 우리는 전통시대의 끄트머리에 놓여진 근대화의 물결, 그 물결이 일으키는 무수한 결과 의미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아버지는 치현(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입니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습니다. 큰아들 병대(柄大)는 18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의 시종을 지냈으나 후손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의 일생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가 현전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저술(1000여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의 다른 학자들조차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긴 일은 극히 드뭅니다.
(얼마 전 발견된) 조선후기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건창의 문집에 그의 평전이 전합니다.
"최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했고, 책을 읽을 때 그 심오한 뜻을 만나면 곧 스스로 이해하는 능력이 돋보였다.(...)중년에 그는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였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했다. 그리고 경전연구에만 온갖 힘을 쏟았으며, 때때로 동남(관동, 영남, 호남 등지)의 산수에 遊하면서 그 견문과 뜻을 넓혔다."
그는 일생을 서울에서만 살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책을 사기 위해 가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독서광이었으며, 전통적인 고전 학문뿐만 아니라 당대로서는 최고의 신간서적이랄 수 있는 한역 서학책에 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혹호(酷好)의 관심과 깊은 공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상인들이 새 책이 들어오면 무엇보다 최한기의 집을 찾았다고 합니다.
"책을 살 때는 비싼 값을 아끼지 않고 그 책을 구입하고, 읽은 만큼 읽은 뒤에는 헐값으로 팔아버리니 이 때문에 국내 서승(書僧)들이 다투어 와서 팔았다. 연도방국(燕都坊局)의 신간의 책이 들어오면 일차적으로 혜강에게 먼저 입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가 책을 구하는데 너무 많은 돈을 쓰다고 나무라면,
"가령 이 책 속에 사람이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으면 수천리 길이라도 찾아가야만 할텐데, 지금 나는 앉아서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들긴 하나 식량을 싸 가지고 멀리 찾아가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라고 하며, 그의 학독(學讀)의 대한 입장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극히 궁핍해졌던 죽음을 앞둔 말년에도 저술과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실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책 속의 사람'은 무덤 속에 있는 옛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중국의 선진 사상가들과 서양각국의 과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책을 통해서 이들과의 '자기 안의 학문적 만남'을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최한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삶과 사상이 개방된 삶 그 자체를 얼마나 지향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최한기는 이런 서구에서 들어오는 신학문에만 밝았던 것만 아니라, 전대의 동양고전에도 해박하여 거의 모든 분야를 통과하는 천재적 박식(博識)가였습니다.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폭넓은 공부를 통해, 그가 '기학'이라는 자신만의 원대한 학문의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학문적 재능의 영민함과 공부에 미쳤던 그의 치열한 노력, 이 두 가지 날개를 겸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일생을 바친 '고금과 동서의 공부'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했던 것일까요.
3. 이른바 '기학(氣學)'이라고 일컬어지는 최학기의 학문은 '운화(運化:모든 것은 천리와 기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 생성한다.)라는 기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학, 지리, 천문, 수학, 의학, 농업, 정치, 교육, 사회사상, 문학 등 당대 최한기가 접할 수 있는 모든 학문 영역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관심은 이런 내용들을 다 수용할 수 있은 엄청난 지식량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기학'이라 명명되는 그의 학문이 인간사의 총제적 해답이 될 수 있는 열렬한 이상으로 가득 찬 최고의 진리가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같은 진리를 밝힌 이가 없었다는 그의 자부의 언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쉽게 이런 점을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최한기의 '기학'의 특징은 무엇보다 '천리와의 합일을 통한 자연과의 조화'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천리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까닭이자 방법론이 되는 것은 기(氣)의 운화(運化)때문인데, (최한기가 표현했듯) 별과 달이 한 순간도 쉼이 없고 우리의 혈액도 한 순간도 쉼이 없듯 우주의 운행 법칙은 기의 흐름을 통한 끊임없는 생명의 변화 작용으로 파악됩니다. 모두 다 우주 속에 하나의 유기체라는 의식, 그리고 그런 화(和)의 자리 위에 만물이 끊임없이 생생지리(生生之理)를 통해 변화해 간다는 점은 또한 역(易) 철학의 핵심 사상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으로 최학기의 '기학'은 사실 역사상의 기학적 전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최한기의 사상과 학문에 있어 이런 역학적 사고의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나, 기존의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이 점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있지 못한 듯 하여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역리(易理)의 지대 위에 세워진 기학이라는 상아탑(象牙塔)은 어떤 것일까요. 최한기의 특징을 또렷이 읽을 수 읽는 글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자연이란 천지의 유행지리(流行之理)이고 당연(當然)이란 인심의 추측지리(推測之理)이다. 학자는 자연으로 표준을 삼고, 당연으로 공부를 삼아야 한다. 자연이란 천(天)에 속하나니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당연이란 인에 속하나니 이것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한편 당연이라 한 것 속에는 또한 우열과 순박(純駁: 순수함과 잡됨)이 있으므로 갈고 다듬어야 하나니, 요컨대 자연으로 표준을 삼아야 한다. (...) 간혹 혼미한 자가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과 관련해 공부를 잘못한 탓이다. 이를 가리켜 '하늘을 대신해 바쁘다'고 이르나니, 도로 무익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당연에 전혀 생각을 두지 않는다면 이를 가리켜 '인도를 버렸다'고 이르나니, 끝내 무슨 성취가 있겠는가.
이 글을 통해 살필 수 있는 점은 '유행지리로 표상되는 형이상학적 천(天)'과 '추측지리로 표상되는 형이하학적 인(人)'에 대한 동시적 추구, 즉 자연(自然)의 리와 인도(人道)의 리에 대한 합일적 조화를 통해서, 이상과 현실을 겸한 완전한 통일에 대한 지향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런 조화의 이상을 모든 학문 분야와 모든 나라에게까지 미쳐서 천인운화(天人運化), 조민운화(兆民運化)로 나아가 전인류 화일(和一)의 대동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천하인민을 하나로 보는 것이 가장 광대한 사랑'이었기에 이러한 이상 속에는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개별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내장하고 있어 전통적인 성리학적 화이(華夷)론은 발 부칠 곳이 없을 뿐 아니라, 현실성과 실용성이 강조되는 기학의 정신은 유교의 상고(尙古)주의에 얼어버린 맹목적 교조주의의 틀에 과감 없는 철퇴로 내려앉았습니다.
하늘 아래 만민(萬民)이 하나이이기에 유교가 가지는 성인에 대한 절대적 존숭은 천리와 자연의 존숭으로 부정과 동시에 유래 없는 방향 전향을 하게되었고, 자연의 인위화, 인위의 자연화를 통한 자연과 인위의 도덕적 통일을 꾀한 주자학적 패러다임은 완전히 부정되며 주석 잇기의 '경전주의'가 거부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유가의 선비임을 자처했지만, 그의 학문은 유학의 오랜 원리를 해체시켰습니다.
그는 인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점을 깊이 인식하고 그 인욕이 천리 운화에 승순(承順)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방법론을 여러 분야 걸쳐 다각도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극렬한 이상주의자였지만 또한 치열하고 열렬한 연구자이기 했습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포부와 이상을 위해 그는 동서와 고금의 좋은 점들은 어떤 것이든 과감히 끄러와 자신이 구상하는 '기학'이라는 웅대한 학문적 상아탑을 세우는 자료로 녹여 썼습니다. 흔히 최한기에게 따라 붙는 말인 '동서융화론'이라는 말은 이런 속성들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한기의 학문은 그 이상에 있어서도 동과 서를 넘은 전인류 공영의 대동세계의 화합을 추구했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도 동과 서의 장점을 취합하여 동서의 학문적 성과를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이상의 지적들은 최한기 학문의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또한 저의 부족한 식견과 짧은 말로 '기학'의 맥을 제대로 짚고서 소개했다고도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한기의 학문은 워낙 방대하기에 전문가조차 쉬 정통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되며 더더구나 이 짧은 글에서 그의 전모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부족한 이해를 전제로 그의 기학 속으로 들어온 근대의 편린(片鱗)을 소개함을 통해서 그가 치열한 역사적 문제 의식 위에 각고의 열정으로 평생을 바쳐 이룩한 '기학'이라는 근대기획(근대구상)이 어떤 경로와 고민을 거쳐 나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4. 상술했듯이 그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학문 전반에 걸쳐 다방면의 연구를 하였고 또한 그 결과는 그의 수많은 저서로 엮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는 각 분야에 걸쳐 있지만 우리가 아울러 살펴야 할 것은 그 각각의 저서들은 최한기의 '기학'이라는 총제적 학문관과 타 분야의 지식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최한기 저서의 주된 특성이자 독특한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그의 인성론이나 교육론, 과학 이론 하나에도 천인운화(天人運化)라는 '기학'의 자장이 늘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를 읽는 독법에는 필히 '기학'이라는 최학기 학문의 총체적 맥락 속에서 읽지 않으면 그 숲 속에 심어놓은 나무 하나 하나의 색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도 지금의 저의 능력과 본고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불과한 것이라 '시각에 대한 문제의식'만 지적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5.
최한기의 천문학에 관한 인식은 [추측록], [지구요전], [의상리수] 등에 잘 타나나 있습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리면 월식(月食)이 된다. 그런데 그림자가 형체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 형체가 둥글면 그림자도 둥글다. 지금 월식에서 가려진 지구의 그림자를 보면 항상 둥그니, 이로써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해의 타원궤도설'을 쾨글러의 <력상고성푸편(歷象考成後編)>에서 소개하고 있는 갈서니와 법란덕의 관측자료를 원용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최한기는 이런 서양 서적을 통한 이해에 앞서 홍대용과 같은 전대 실학자들과 동양에서의 전통적인 천문 지식까지 이미 알고 있었고 또한 이들을 조합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지구요전(地球典要)>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구자전과 공전설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상리상(儀象理數)>에서는 일식, 얼식, 황도(黃道)와 적도(赤道)의 떨어진 거리 등 보다 구체적인 천문현상을 수학적으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역법에 있어서도 중국력과 서양력의 동이점(同異點)을 조목조목 들고 그 차이가 나는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서양은 망원경을 가지고 보다 정밀하게 역법을 작성했다 하여 서양력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 수용하고자 하는 합리적 태도를 가졌습니다.
6. 농학(農學)에 대한 관심은 <농정회요(農政會要)>에 잘 나타나 있는데, 종(種)에 따라 경비법, 파종, 어음법, 운자법, 누획법, 과목, 방적, 양잠, 목축 등에 관한 기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농업기술 발전에 각별한 관심이 가지고 있어서, 더 깊어진 연구로 <육해법(陸海法)>과 <심기도설(心器圖說)>을 저술했습니다. 특히 이 책들에는 기기(器機)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농업뿐만 아니라 일용(日用)의 잡기에 대해서도 그림을 첨가하여 다양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일용(日用) 상행(常行) 가운데 스스로 그 공을 배로 하고 인력은 줄이는 것이 있고 또 힘을 쓰지 않고도 그 공을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라고 하여 서양의 기계가 인력감소 등의 실용적 공효가 있음을 지적하는 등 기계 제작에 있어서 인간의 과학적 사고를 매우 존중하였습니다.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는 이런 실학적 태도와 아울러 기기(器機)에 대한 그의 기학적 면모를 살펴볼까 합니다.
"기(器)의 쓰임은 사물을 이루는데 있고, 기의 근원은 마음의 기(機)에 있다. 기(器)가 있고 닦아서 쓰는 것은 이 마음이며, 그 기(器)가 없어서 만들어 쓰는 것도 이 마음이다. (...)무릇 마음이 기(器)가 됨은 크게는 천지를 받아들이고 작게는 털끝 속에 들어가며, 천고(千古)를 풀무질하여 만상(萬象)을 만들어 낸다."
"무릇 기용(器用)의 학문은 일용(日用)과 국가의 흥작(興作)에 보탬이 있는 것으로, 한갖 법식이나 규구(規矩)만을 알아 수치(修治)하고 제작하여 생활에 의뢰가 되는 것은 공장(工匠)의 말단적인 기예일 뿐이지만, 형상이 있는 기구를 따라 형상이 없는 이치를 징험하고 형상이 없는 이치를 미루어 형상이 있는 기구를 제조하여, 천하의 이익을 성취하고 정미한 이치를 징험하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의 의무이다."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고 끌어당기며, 물을 끌어오고 불을 일으키며, 규구(規矩)와 준승(準繩)으로 측량하는 일들은 모두 기수(氣數)에 밝은 자라야 할 수 있다. (...)사람의 지교(智敎)가 능히 활동운화하는 기(氣)에서 단서를 잡아 수학을 베풀고 기계를 제작하니 무한한 묘용(妙用)이 공예(工藝)에 실려 있다."
이상의 3편의 글은 모두 각각의 다른 저서에서 뽑은 것입니다. {심기도설](기기), {추측록}(인성론), {인정}(정치)은 모두 다른 주제를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4장에서 지적했듯이 그의 저서 곳곳에는 이처럼 '기학'이라는 맥락이 유기적으로 도저하게 흐르고 있어 하나의 맥락으로 일관(一貫)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일용(日用)의 기기(器機)에 대해서도 최한기의 학문은 이처럼 '기학'이라는 심오한 철학 체계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계들의 제반원리와 제조방법 등은 서양의 기술력에 힘입었지만, 그것을 최한기 자신의 주체적인 독특한 인식작용을 거쳐 새로운 학문체계로 펼쳐 보인다는 점, 이것이 최한기가 이룩한 '기학'이라는 학문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서구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기술과 동양의 심학(心學)과 기학(氣學)의 유기적 통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천기(天機) 실천(실현)의 학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7. 최한기는 화학과 물리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던 듯 합니다. "물의 질(質)은 두 개의 기가 융회하여 만들어졌다. 양기(養氣, 산소)는 3분의 1이 되고, 경기(輕氣, 수소)는 3분의 2를 얻을 수 있는데 전기기(電氣機)로 곧 나눌 수 있다"고 하였으니, 화화 지식의 습득을 알 수 있을 뿐아니라, 그가 수소나 산소와 같은 원소들을 기의 여러 형태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輕氣, 수소) 성분은 쉽게 연소되고, 탄기(炭氣, 탄소) 성분은 불꽃이 밝다. 두 가스를 혼합해서 불을 붙이면 불빛이 밝고 희며, 밝기도 기름이나 밀납을 태우는 것보다 우수해서 실용가치가 크고 값이 싸다. 이것으로 해서 서양인 중에는 가스를 팔아서 생활을 하는 자도 있다. 영국, 불란서, 화란 등 나라에는 모두 가스를 파는 업소가 있다. (...) 통을 끌어와 가스에 점화해서 등불을 대신하는데 대낮같이 밝아서 거의 불야성인가 의심할 정도이다. 그곳에 있는 귀족집안이나 영업장소에서도 가스를 사서 방안을 밝히지 않는 일이 없다."
이처럼 그는 서양과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기학(氣學)의 개념을 거쳐서, 그 기학을 통해 새로운 근대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추구하였고, 그런 기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8. "기(氣)에는 반드시 리(理)가 있고 리에는 반드시 상(象)이 있고 상에는 반드시 수가 있는 것이다. 수(數)에 의하여 상에 통하고 수에 의하여 리를 통하며 리에 의하여 기를 통한다."
"기는 수의 체(體)요, 수는 기의 용(用)이다."
그는 기학과 수학을 자연과학의 근본적 대상과 기초적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가 천문현상을 수학적으로 해명하는 {의상리수(儀象理數)}를 짓고, 그 기초로서 수학의 계산법인 {습산진전}을 지은 것은 수학을 자연과학의 기초로서 인식하고 강조하는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습산진전}은 많은 내용을 청의 강희제의 명에 의해 편집된 서양수학의 집성서의 {수리정온(數理精蘊)}에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듯 그가 저술한 수학책 또한 기학의 사상체계 위에 축조된 것이며, 특히나 수리(數理)에 대한 이해는 역학(易學)과의 영향 관계를 빼고서는 논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9. 그의 의학서인 {신기천험(身機踐驗)}은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선교사 합신이 쓴 {전체신론(全體身論)}(인체해부도), {서의략론(西醫略論)}(의학총론), {내과신설(內科新說)}(내과학), {부영신설(婦瓔新說)}(산부인과와 소아과) 등을 요약하여 소개한 것입니다.
"서의(西醫)는 해부학적 방법으로 미세(微細)를 다하고 전체를 밝게 살피어 부위를 경락짓고 있으며, (...)서양의술은 천지만물을 조물주가 주재한다는 기본관점에 입각한 것이고, (...)병치료의 근거에 있어 세인(世人)의 신복(信服)을 받고 있다. (...) 동의(東醫)는 기화(氣化) 맥락에 어둡고 천문과 지리의 방술(方術)을 의학에 원용하고 있으며 (...) 병치료도 방술(方術) 오행(五行)으로 다루고 있으며 (...) 그 까닭에 의술이 천기(賤技)가 되었다."
이처럼 그는 서학을 중의(中醫)보다 우수하다고 보았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를 의사에 대한 전문교육·선발과 존중 그리고 해부학적 지식의 발달 등을 들고 있습니다. 이같은 실험을 통한 실증적인 교육방법과 효용론은 그의 기학을 이끈 중심 바퀴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10. 그는 세계를 알기 위해서 지리 및 지지에 관한 연구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인간 세상의 이른바 경륜과 사업은, 토지를 떠나서는 손쓸 곳이 없고 지도와 지지를 버리고서는 지리를 알 수 없다. 지지를 읽어 익숙하게 궁구하면 이해의 근원을 증험할 수 있고, 지도를 상고하여 지시하면 심신(心身)이 멀리서도 밝게 통찰할 수 있으며, 착수할 때의 완급이나 때에 맞는 취사도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고 하여 지리학의 유용성을 천명하였습니다. 최한기가 당대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와 친분이 두터웠고 이들은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겼기도 했습니다. 1834년 김정호가 {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최한기는 여기에 제를 써주기도 했으며, {해국도지}, {영환지략}을 참고하여 세계인문지리서인 {지구전요(地球全要)}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지리서를 통해 서양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지역별 분류뿐 아니라 각 국의 강역, 풍기, 물산, 례(禮), 교(敎), 형(刑)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그의 서양에 대한 지식의 정도와 인식을 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을 토대로 문화 전반에 대한 주관적 이해를 피려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세계가 통하게 됨에 따라 "문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천생(天生)의 농아(聾兒)가 서로 대면하여 각기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다투고 반쟁하는 단서를 유발하기 쉽다"고 하여 번역의 중요성을 자각하며 서양의 문자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서양의 문자는 한자어와 크게 다른데 자모가 26자이며 두세자가 합해서 1음이 되므로 한자로 번역할 때 끊는 것이 어렵다. 반면에 배우기는 쉬워서 수일이면 배우고 문예, 국사, 천문, 지리, 역산 등의 문예를 익히는데 모자람이 없다."
고 하여 영어 알파벳을 그려서 소개하였습니다. 최한기의 '기학'을 읽는 중요한 핵심 키워드의 하나는 '통함(通)'일 것입니다. 통해야만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그래야 서로 화합하여 '하나'를 이룰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리와 언어에 대한 관심은 분명 이런 기학적 대동세계의 맥락에서 함께 읽혀져야 할 듯 합니다.
11. 최한기는 서양의 각종 법제(法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소개하고 있으며,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서양 각 국의 출판물은 천주교 경전을 대종으로 삼고 있으며, 후세의 학자들의 저서는 반드시 천주교정신에 합치되어야만 국내에 유포되는 것이 허락된다. 또한 검서관제를 두어 출판될 책을 사전에 상정(詳定)한다. 도회지에는 모두 서원을 설치하여 책을 모아두어서 누구나 들어가 이용할 수 있다. 서양 제국은 모두 학교를 세워 한 나라와 군에는 대학과 중학이 있고, 한 읍이나 향에는 소학이 있다."
라고 하여 서양의 정신은 천주교에서 비롯된 것이며, 서양도 문을 중요시하는 사회라고 파악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서양 각국의 여러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런 그의 관심 속에는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이 깊게 내장되어 있습니다.
"풍토가 다르면 습속도 역시 다르므로 천하의 각 나라 법이 대체는 같으나 조금씩은 달라 다 알 수 가 없다."
"천하의 토의(土宜)와 산물과 한서(寒暑)의 이르고 늦음은 각기 다르고, 언어와 복식과 풍속도 따라서 같지 않으니, 이런 것들은 끝내 하나로 돌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절대적 기준의 독선을 버리고, 개별 주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역(易)의 시위(時位:때와 장소에 따라 움직임)의 사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듯 합니다. 기실 기(氣)라고 하는 것은 그 만상의 변화의 흐름을 타는 것으로 그의 이런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은 기(氣)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 서학에 대한 그토록 열렬한 관심과 학습으로 일관했던 그였지만 유독 서교(西敎)에 있어서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신령하고 괴이한 설로 대중을 미혹하고 혹은 비유를 통해서 천당과 지옥으로 권선징악하며 허무한 것을 만들어 신기하고 괴이한 것으로 권선징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견해는 서양에서 말하는 인격신이란 가상적 허구에 불과하며, 따라서 실제 그 자리에 놓여야 할 것은 '자연=대기운화'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자연은 곧 천(天)이며, 기(氣)이며, 신(神)입니다. 최한기의 기학속에서는 신의 자리를 점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의 우주는 오직 기 밖도 없고 기 안도 없는, 기로써만 충만한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무한한 우주 속에 한 움큼 기로 만들어진 사람'도 또한 우주의 운화지기(運化之氣)로서 천(天)과 인(人)은 일체를 이룹니다. 이것이 천인운화(天人運化)의 본질적 의미일 것이며 이것은 동학에서 말하는 인내천(人乃天)과도 통하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이것은 우주만유를 유기체로 인식하는 합일적 사상에 기인한 것입니다. 혜강의 경우는 역리(易理)를 통해서, 동학의 경우는 수도를 통한 깨달음을 통해서 획득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신(神)에 대한 이런 부정적 태도는 불교나 도교의 공(空)이나 무(無)의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며 실용주의의 대극에 놓이는 성리학의 명분론, 심성론, 경전주의 등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할 뿐 아니라 그러한 특성이 붕당, 문벌의 폐해를 낳았으며 조선사회가 침체되는 궁극적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존재'와 '쓰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부패한 사회와 힘없는 나라, 약육강식의 세계화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과 해결책으로서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 그 주된 한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운화(運化)의 기학자(氣學者)답게 이런 '문제적 무리'에 대해서도 매우 유연한 입장과 관용성을 가집니다.
"외도와 이단은 마땅히 성실한 도리로 감화시키는 것을 위조로 해야지, 이를 배척하여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고 승리의 기치를 세울 것을 기약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단이나 사교의 사람들도 다 기화(氣化) 속의 사람으로 모두 선한 도리를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실한 도리를 수명(修明)하는 자는 운화(運化)의 귀정(歸整)을 기다릴 뿐이니 어찌 그들을 서둘러 박멸하기에 힘을 쓸 것이 있겠는가"
그의 이러한 사상의 유용성과 관용성은 그의 사상가로서의 그릇이 매우 크게 한다고 할 것이며, 또한 이단이나 사교 등의 모든 사람이 기화(氣化) 속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일체의식의 향한 발걸음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궁극적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이상이며, 또한 그의 학문 어디에도 이처럼 운화지기(運化之氣)의 기학적 이상의 관점이 내장되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13. 서구학문에 대한 최한기의 이런 관심과 입장은 당연히 정치적 입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동방사람의 저술은 거의 진부한 것을 주워모은 것이 많고 기화(氣化)의 언론이 없으며, 간혹 기화에 언급하여도 대체가 홀략(忽略)하고 소절(小節)이 모호하여, 실용을 힘쓰는 사람에게 취택되지 않는다."
"비록 평생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다 하더라도 얻는 것은 대동소이한 풍기(風氣), 물산(物産)과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얻는 도청도설(塗聽道說)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원근의 서적을 모아 전 세계의 전례(典禮)와 연혁(沿革)을 열력(閱歷)하고, 전 세계의 현인, 달사와 수작하는 것에 비기겠는가? 크게는 력상(歷象)에서 작게는 기용(器用)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연구하여 정신은 육합(六合)에 소요하여도 막힘이 없고 기운은 일체(一體)에 유통하여 추측한다면, 비록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더라도 저 평생 동안 쉬지 않고 돌아다닌 자와 비교하여 그 소득은 절로 우열(優劣)이 있을 것이다."
라 하였으니 저서의 유통을 통한 전세계와의 유기적 소통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이것은 단순한 일방 통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서적이 우리에게 오고 우리의 풍기와 물산이 서양에 전해는 등의 쌍방(雙方) 통행을 희구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기학의 핵심 이념인 운화(運化)의 본질은 <흐름과 통함>이 아닐까 합니다. 소통을 통한 흐름, 그 흐름을 통한 만남, 이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다시 그것은 역방향이 되어 소통이 가능하고 그 소통은 더 많은 흐름을 낳고 그 흐름은 더 많은 만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한 초극의 만남의 화호(和好)가 최한기 기학의 궁극적 이상일 것입니다. 그런 입장이기에 그는 쇄국주의를 버리고 문호개방을 통한 서학의 적극적 수용을 희구하였습니다.
"좋은 법제나 우수한 기용(器用)이나 양호한 토산물품 등이 진실로 우리보다 나은 점이 잇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 보아 당연히 취하여 써야한다."
그의 이런 선진적이고 획기적인 개국론는 당시 조선사회의 문제점과 전세계의 역사적 흐름을 정확히 읽은 선각자적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법(禮法), 치모(治謨), 교문(敎文), 산업(産業)에서부터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비교하고 저것을 들어 이를 징험하면, 자연 취사가 있을 것이요, 또 그 취사(取捨)하는 가운데 또 우열(優劣)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비교를 한 뒤에야 우열이 자연 생기니, 비교할 것이 없으면 우열을 알 수 없다. 견문이 한 집이나 한 나라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우열을 알 수 있는 견문이 없다."
이런 그의 지적 속에는 '교류를 통한 소통'과 '취사를 통한 발전'의 비젼이 들어있다 하겠습니다. 여기도 또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교류를 통한 소통 속에 취하고 버려서 견문을 넓려 우(優: 성장, 발전)가 되고자 하는 '주체적 입장과 실전의 관심'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동방사람으로 하여금 서방의 기명(器皿)을 쓰게 한다면 동방의 기용(器用)이 더욱 밝아지고, 서방사람의 하여금 동방의 기명(器皿)을 쓰게 한다면 서방의 기용(器用)이 더욱 밝아지며, 북방에서 쓸모없는 기명이 남방에서는 절실하게 쓰이기도 하고, 남방에서 쓸모 없는 기명이 북방에서는 절실하게 쓰기도 한다."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 속에는 상호 존중이라는 화일(和一)의 정신이 깊이 내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너도 잘 되고 나도 잘 되는 공존공영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런 입장은 전인류가 우주의 운화지기(運化之氣)의 흐름에 놓인 하나의 생명이라는 천기(天機)의 정신에서 배태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14. 저의 거칠고 조잡한 글이 오히려 최한기를 왜곡시키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글은 어디까지나 일부 주체의 한정해서 멋대로 취사(取捨)한 것이기에, 그의 학문의 진정한 면모를 살펴본다는 불가한 것이며, 또한 아무 소양도 없는 저로서는 분에 넘치고 부끄러운 일이라 본고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빙산(氷山)의 곁에 떨어진 일각일 뿐이라는 말씀을 거듭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며칠 밖에 안 되는 짧은 공부였지만, 최한기를 바라보는 저의 느낌은 한국사상사에 있어 '전대미문의 어마어마한 거인'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최한기라는 산은 퇴계나 율곡이라는 산보다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토록 높은 산이 지금껏 (상대적) 무관심과 무지 속에 잠자고 있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시대를 너무 앞지른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외적 속성들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권세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고,. 평생 관직생활은 않고 책에만 묻혀 살았기에 중앙의 관심이나 권력의 끈은 그의 손 곁에 나가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사상이 당시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의 해체를 가능케 하는 폭탄 같은 혁명적 사상이었기에 학파 형성은 고사하고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산은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국 지성사(知性史)의 다시없는 거인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수많은 이가 이 산을 매력에 빠져 그 웅대한 위용(偉容)에 감탄할 것입니다.
그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 인간사의 수많은 질곡과 아픔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점이고, 그 고민이 나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넘어선 전인류 억조(億兆) 만민(萬民)을 위한 것이고, 또한 그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까지 수렴한 것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아울러 고난에 빠져 있는 조국의 현실의 문제점들을 직시(直視)하고, 선구적인 역사인식의 바탕 속에서 이에 대한 주체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한기의 시대는 그의 주장대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화전반에 창신(創新)의 물결을 불어넣어야만 하는 시대였습니다. 교조주의적 주자학으로 조선을 문화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고 그 경직성만큼이나 시대의 흐름에 잘 움직이지 못하고 삐걱이며 피폐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대엔 최한기가 크도록 갈구했던 서구의 문물이 가득히 들어와 있습니다. 또한 우리뿐 아니라 전세계 여러 나라들도 다른 나라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구촌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랬던 전인류의 대동세계는 여전히 소원하기만 하고, 우리 내에서도 근대화의 물결이 남긴 문제점들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무거운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주체를 몰각한 보편은 얼빠진 맹목이며, 보편에 견인되지 않거나 보편에 열려 있지 않은 주체란 결국 자기 자신을 물론이려니와 타자에 대한 억압으로 화할 공산이 크다. 이 양자의 역동적 균형과 긴장을 잃지 않는 지혜로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라고 한 박희병 선생의 지적은 사실 최한기의 사상들과 분명 같은 선상의 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토록 서구를 배우려 했던 최한기의 근대는 주체를 몰각한 보편이나 근대가 아니었습니다. 서구근대라는 패러다임 안에는 폭력성이라든지 자기중심이라든지 차별과 억압이라든가 하는 측면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최한기의 사상과는 전면 대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왜곡하면서 이루어지는 베끼기는 불구적이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마련입니다.(박희병)"
제가 느끼는 현대의 우리나라는 서구의 물결에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식민지를 넘어서 문화전반이 서구 식민지가 되어 그들 문화의 노예가 되어 있는 듯 합니다. 근대 베끼기든 옛적의 모화주의의 중국 베끼기든 베끼기는 늘 베끼는 측의 자기소외를 낳고 그것이 심한 경우는 필연적으로 주체를 상실한 예속화(노예화)를 낳게 됩니다. 근대적 세계상, 혹은 현대적 세계상의 모범답안은 없으며 더더구나 우리의 밖에서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서구를 좇는 것만이 길이라는 '통념적 근대'라는 집단최면을부터 이제는 깨어나야 할 시기를 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의 물결이란 끊임없이 타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수용과 변용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용과 변용은 '나'의 주체적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최한기가 희구했던 것처럼, 그것은 보다 큰 관점, 즉 우주와 진리와 천리에 부합하는 전인류 화호(和好)의 조민운화(兆民運化)의 지형(地形) 위에서 펼쳐진 조화 속의 나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최한기와 똑같은 시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최한기의 학문은 어느 면에서 분명 천년을 넘게 고착화된 '중국의 황제 패권주의의 노예화·식민지화'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대혁명이었으며, 자기 생명에 대한 열렬한 예찬과 부활의 움직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부활의 정신과 생명성을 잘 이어왔지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쩜 우리는 최한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맹목적인 노예적 근대화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생명의 정신을 찾아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비판적으로 숙고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진실로 인재 수용에 있어 방법을 다한다면 우리가 가진 바로서 서양에 빌어야 할 것이 없으며, 실용적인 기예를 취함이 철저하고 성실하다면 서양이 익힌 바는 모두 우리의 쓰임이 될 것이다. 비록 어쩌다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다 할지라도 주객지세(主客之勢)로 그 부족함이 채워질 것이니, 진퇴와 조종이 오직 우리에게 달려 있다." {추측록}권6, [기용학(器用學)]
자아 망각의 혼란의 시대에 주체적 입장과 실천을 강조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의 귀와 눈과 가슴속에서 메아리쳐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권오영, {혜강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 연구}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4 김용옥, {혜강 최하기와 유교} 통나무, 2004 박희병, {운화와 근대} 돌베개. 2003 신원봉, {혜강의 기화적 세계관과 그 윤리적 함의},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3 윤창혜, {최한기의 서구과학사상수용에 대한 일고찰} 이화여대 석사논문, 1992 정화영, {최한기의 실학적 교육사상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논문, 1986 황경숙, {혜강 최한기의 사회사상연구} 성신여대 박사논문, 1993
김주수, 시대소리 한국사상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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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깨달음의 철학(상) | 2006년 02월 04일 22시 49분 35초 김주수
<<東學과 깨달음의 철학>> 스스로 괴로울지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은 없게 하라.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지 말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 대해서도 거친 말을 하지 말라.-마누법번
차례------------------------------------- 1. 들어가며 2. 동학의 씨를 뿌린 최제우 3.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4. 동학을 열매맺게 한 최시형 5. 해월신사법설 6. 다른 깨달음의 철학들과의 비교 7. 맺으며 ------------------------------------
1. 들어가며 동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동학이란 단어를 익숙하게 들어왔고, 또한 우리의 근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진정 동학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날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학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학자의 자리에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고작 밖에서 바라본 이의 피상적 이해에서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것은 동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학문 대상이 어떤 것이든 모든 영역에 두루 해당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 대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대상이 되어본 후에 다시 학자의 자리로 돌아와 학자의 말을 하는 것이 더 깊은 이해와 균형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고는 이런 뜻에서 학인의 자리를 떠나, 동학 속으로 들어가 동학의 뇌로 생각하고, 동학의 심장으로 느끼며, 동학의 입술로 말을 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동학>과 <人乃天>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학에 대해 백치에 가까우며, 전문 학자들도 동학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있어 빗겨서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듯 동학 속으로 들어가 동학이 되어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文字之學'이 아닌 것을 문자지학으로만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깨달음의 배움>입니다. 깨달음은 문자지학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人乃天"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 인내천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동학을 다 알았다 할 것이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동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서는 최제우, 최시형이 어떤 인물이며 또한 동학이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어떠한지 전혀 알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의 길을 밝힌 깨달음의 도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큰 유리컵이 하나 있다고 할 때, 유리컵 속에 허공과 유리컵 밖에 허공이 둘로 나뉘어 있지만, 이 유리컵이 깨어지면 <안의 허공/밖의 허공>이 하나의 허공이 됩니다. 이처럼 에고라는 경계로 '내 안의 마음'과 '나 아닌 나 밖에 있는 物의 마음'이 나뉘어 있지만, 에고에 묶인 我相이 깨어지면 <내 마음/物(천지)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유리컵의 안과 밖의 허공이 하나의 허공이 되었듯, 내 마음과 物(천지)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내 마음이 바로 천지의 마음이 되고, 천지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된 마음'을 불교에서는 一心이라고 하는데, 천지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기에 一切唯心造라 이르는 것이요, 소강절이 "마음이 바로 태극(우주만상)이다"라고 한 것도 모두 똑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동학에서는 與天地合其德이라 하거니와 또한 도가에서 이르는 物我一體의 진의 또한 이것이니 내가 천지와 합일을 이루었으니 아와 물의 비분리의 합일 상태이기에 無爲自然(함이 없이 절로 그러함)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합일을 이룬 이는 자아의 我心를 초월하여 천지의 마음(우주심)으로 살아가기에 늘 천리에 합일하는 성인이 됩니다. 바로 이것, <우주 만물과 내가 완전한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골자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무한 자비심과 조화의 마음이며, 진정한 중용의 참뜻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 아래 모든 깨달은 이의 공통된 메시지이며, 모든 깨달음의 경전의 똑같은 목소리입니다. 人乃天이라는 말도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나온 말로,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천지만물, 우주, 하느님의 제유로 쓰인 말로, 모든 것이 하늘이라는 뜻은 모든 것이 분리가 되지 않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物/神>의 경계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하나이기에 나 아님이 없고 하늘(님)이 아닌 것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최시형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을 일러 "하늘이 하늘을 지고서 하늘을 먹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궁한 울 속에 무궁한 나>! 이것이 신인합일의 깨침이며 이를 깨달은 이를 불가에서는 부처라 했고, 한국의 선가에서는 신선이라 하였습니다. 이렇듯 동학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대각을 통한 위대한 성과(열반) 위에 나온 깨달음의 聖火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석가와 같은 레벨의 대철인이 우리의 근대사에 나와서 깨달음의 찬란한 빛을 밝혔지만, 우리는 고작 이들을 구한말 민족종교를 창시한 시시한 종교지도자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동학은 불가나 도가, 예수, 흰두교 등 세계 그 어느 깨달음의 말보다도 더 뛰어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오직 하나이지만, 이 깨달음을 말로 펴는 경우 더 쉽고 절실하고 명료하게 말하는데 있어서는 차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른바 道可道(말로 표현한 도)로써 도가나 불교는 형이상학전이 면에 많이 치우쳐서 많은 오해와 왜곡을 낳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최치원이 [낭랑비서]에서 말했듯 우리 나라의 고유의 도 풍류는 깨달음의 형이상학적인 면과 그것이 실생활에 적용된 형이하학적인 면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 우리는 그 고유의 선도의 진정한 면모를 동학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참으로 놀라운 것은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의 이치를 너무나도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힘차게 삶의 일상 속으로 가져온 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을 하늘처럼 공경하라." 전세계 그 어느 경전에서도 이처럼 명료하고 단순하게 실천의 논리로 깨달음과 삶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시킨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동학은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도가도에 있어서 궁극을 꿰어 더 없이 독특하며 또한 깊고 다채로워 오히려 깨달음의 宣揚에 있어 절정을 달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聖學, 우리는 여기서 동학이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물음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와 함께 우리는 역사의 저울에 동학과 최제우, 최시형의 무게를 다시 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동학의 씨를 뿌린 최제우 崔濟愚는 (1824 순조 24∼1864 고종 1) 崔 의 외동아들로 10에 어머니를 여이고 16세에 아버지마저 잃었습니다. 아버지 최옥은 당시 경주에서 덕망 있는 선비였으나, 과거에 출사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초야에서 묻혀 살았다고 합니다. 멀리는 최치원의 후속이고 가까이는 7대조 최진립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의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 이후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였다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출세하지는 못하였으나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있었고 또 제자들이 문집([近庵集])을 만들어 줄 정도였으므로, 최제우의 성장기의 학문적 소양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 양 부모를 여이고 화재까지 겹쳐 그의 살림은 더욱 궁핍했으며, 당시 부패한 정치 상황에 출사할 뜻을 품지 못하고 젊어서부터 시대와 자신의 신세에 대해 심한 갈등을 가진 듯 합니다. 20대 초부터 전국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혔는데, 당시 서구와 일제의 침입등 갖은 혼란상을 목격하고 최제우의 문제의식은 더욱 깊어 졌으며, 1856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일화가 있지만, 정확히 그가 어떤 수도방법을 통해 수도를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가무도교의 김일부와 동문수학하였다 하였으니, 그런 이 수도에도 다소 영향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결정적으로 1860년에 자신의 교향인 용담정에서 49일의 수도 끝(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에 대각을 이루니 이것이 동학이 발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를 펴는 1861년부터 수교까지 고작 3년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의 저작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되어, 더 많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에 대한 끝없는 고민과 세상에 대한 원대한 구원의 뜻을 품은 그는 체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3.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동경대전} 최시형이 최제우 사후에 그의 글을 수습하여 엮은 책입니다. 분량이 매우 적어서 그의 사상의 면모를 폭넓게 살펴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동학의 기본 씨앗의 단편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論學文]에는 득도를 통해 천주의 접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동학의 첫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일일이 들어 말지 않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뿐이었다. 바로 그 무렵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신기한 말씀에 의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보려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은 더욱 이상스럽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라고 물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를 어찌 알리오. 천지는 안다해도 귀신은 알지 못하였으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를 미치게 하노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擧此一一不已故 吾亦悚然 只有恨生晩之際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講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 曰 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而無知鬼神 鬼神者 吾也 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
오랜 수도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득하는 순간 天語를 듣게 되고 자신의 천명을 자각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동에서 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라고 하지만 학인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는데 서가 어찌 동이 되며, 동을 어찌 서라고 말하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서 나서 추나라에 교화를 이루었으므로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하여졌다.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서학이라고 이름하겠는가.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 受於斯 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동학의 이름을 정한 연유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단수히 서학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난 우리의 도라는 자부심과 자주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묻기를 "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므로 주문이라 이르는 것이니, 지금 글에도 있고 옛 글에도 있는 것이니라." 묻기를 "강령의 글뜻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至라는 것은 지극한 것이오, 氣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모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이니라. 今至라는 것은 도에 들어 처음으로 至氣에 접하게 됨을 안다는 것이요, 願爲라는 것은 청하여 비는 뜻이오, 大降이라는 것은 氣化를 원하는 것이다. 侍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아는 것이오, 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것이오, 造化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定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오, 永世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오, 不忘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오, 萬事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오, 知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밝고 밝은 그 덕을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면 지기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지극한 성인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曰呪文之意 何也 曰至爲天主之字 故以呪言之 今文有 古文有 曰降靈之文 何爲其然也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 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今至者 於斯入道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和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 故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동학의 수법인 주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글입니다. [시천주] "하느님을 내 안에 있어 조화를 이루니 영원토록 잊지 않아 만사가 절로 깨달아지도다.(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상세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도법의 전부이고 이것이 깨달음을 얻어 천지와 합일하는 유일한 길임을 여러 글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을 이 같은 맥락에서도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歎道儒心急> 신과의 강령과 주문 외에 동학과 사상과 최제우의 당시 정회를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매우 깊고 그 이치가 심히 깊은 뜻을 지녔노라. 내 마음 속에 바른 기운이 있고 줏대가 떳떳해야, 우리 도의 참 진미를 알고, 오로지 하느님을 위하는 한가지 생각이 있어야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느니라. 나쁘고 옳지 못한 기운을 모두 떨쳐버리고 맑고 바른 기운을 , 하느님의 마음을 받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깨끗한 마음처럼 닦도록 하라. 우리 도를 행함의 바른 방법은, 오직 하느님을 위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되어야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있느니라. 풍부하고 지혜로운 총명은, 자연속에서 사는 신선의 마음에서 나오고, 밝은 지혜로 크게 이루는 모든 일은 오직 하느님의 바른 이치로 돌아가느니라.남의 조그만 허물을, 나의 바른 마음에 두지 말 것이며, 나의 바른 마음의 작은 지혜일지라도, 남이 본받도록 베풀어주어라. 이와 같은 큰 도를, 사사로운 자신의 욕심을 위하는 작은 일로는 정성을 삼지 말 것이니라. 하느님을 도와 하느님의 덕을 펴는 일에 자신의 정성을 다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도움이 있느니라.하느님의 무한한 창조의 힘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모두 다르니, 하느님과의 약속을 굳게 지키고, 마음을 조급히 하지 말 것이로다. 그러면 공을 이루는 다른 날에 하느님과의 연분을 짓게 되느니라. 하느님의 마음은 본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응하여도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하느님의 바른 마음을 받아서, 그 마음을 닦아야 하느님의 무한한 베푸심인 덕을 알고, 그 덕이 오직 밝아야 하느니라. 오직 이것이 하느님의 올바른 가르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도는, 한결같이 하느님의 무한한 베푸심에 있으며 사람에게 있지 아니 하느니라.우리의 도는,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 믿음에 있으며, 사람이 갖고 있는 재주에 있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의 도는 가까운데 있으며, 먼데 있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의 도는, 하느님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 있으며,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구하는데 있지 아니 하느니라.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런 것이고, 먼데 있는 것처럼 느껴 질 수도 있으나 절대 멀리 있지 아니 하도다. 간신히 한 가닥 길을 얻어서, 걷고 또 걸어 험하고 어려운 난관을 극복했도다. 산 넘어 산이 다시 나타나고, 물 건너 또 물을 만났도다. 다행히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너머 산을 넘어 왔도다. 넓은 들판에 거의 이르러 비로소 큰 길 있음을 알았노라. 봄소식을 몹시 기다려도 봄빛은 끝내 오지 않도다. 봄빛을 좋아하지 않음은 결코 아니나, 오지 아니하면 때가 아니로다. 이르러 올 계절이 되면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오리라. 봄바람이 간밤에 불어와, 모든 나무들이 봄소식을 모두 알도다. 하루에 한 송이 꽃이 피고 이틀에 두 송이 꽃이 피고 삼백예순 날에 꽃송이 만발하도다. 한 몸이 다 꽃이요 온 집 안이 다 봄이로다. 병 속에 신선의 술이 있으니 백만 사람을 살릴만하도다. 빚어 넣기는 천년 전인데, 쓸 곳을 대비하여 이를 간직하도다. 부질없이 봉한 뚜껑을 열면 향기는 흩어지고, 맛도 또한 희박해 지리라. 지금 우리 도를 위하는 사람들은 말조심하기를 이 술병같이 지켜야하느니라 山河大運盡歸此道其源極深其理甚遠固我心柱乃知道味一念在玆萬事如意消除濁氣兒養淑氣非徒心至惟在正心隱隱聰明仙出自然來頭百事同歸一理他人細過勿論我心我心小慧以施於人如斯大道勿誠小事臨勳盡料自然有助風雲大手隨其器局玄機不露勿爲心急功成他日好作仙緣心兮本虛應物無迹心修來而知德德惟明而是道在德不在於人在信不在於工在近不在於遠在誠不在於求不然而其然似遠而非遠 裳得一條路步步涉險難山外更見山水外又峯水幸渡水外水僅越山外山且到野廣處始覺有大道苦待春消息春光終不來非無春光好不來卽非時玆到當來節不待自然來春風吹去夜萬木一時知一日一花開二日二花開三百六十日三百六十開一身皆是花一家都是春甁中有仙酒可活百萬人釀出千年前藏之備用處無然一開封臭散味亦薄今我爲道者守口如此甁
최제우는 한문보다도 오히려 한글 가사를 널리 도를 알리고자 했는데 이는 서민과 부녀자와 아이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경주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울님만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捨近取遠한단말가 나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 믿고 해몽못한 너희들은 서책은 아주 폐코 수도하기 힘쓰기는 그도 또한 도덕이라 문장이고 도덕이고 歸於虛事 될가보다 열석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心學이라 하였으니 不忘其意 하여서라 현군자 될 것이니 도성덕립 못 미치까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 한다말가(...) 이 글보고 개과하여 날 본 듯이 수도하라 부대부대 이 글보고 남과 같이 하여서라. -[敎訓歌] 4절 일부 사상적인 면에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분량 면에서 {용담유사}가 더 많은 양을 차지할 뿐 아니라 민중적이고 정서적인 생생한 목소리는 가사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4. 동학을 열매맺게 한 최시형 동학의 씨를 최제우가 뿌렸다면, 崔時亨(1827 순조27∼1898)은 동학의 열매를 찬란하게 거둔 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최제우보다도 더 몰락한 집안있었고,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매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최제우가 동학을 편 1861년에 동학에 입교하였고, 수도정진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63년에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아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98년 72세의 나이로 순교하기까지 평생을 혹독한 고난 속에도 교세의 확장과 구국안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최보따리'라 불리우리 만치 그는 일생을 쫒겨다니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지만 진리 빛을 밝히기 위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찬란한 혼불을 밝힌 다시없는 성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5. 동학의 성전 {해월신사법설} 동학의 사상은 실로 {해월신사법설}에서 이루어졌다고 할만큼 {해월신사법설}(총38장)은 동학 사상의 골자를 담고 있는 동학의 찬란한 꽃이요 열매라 할 수 있는 경전입니다. 그 내용 중 일부 내용을 통해 동학의 사상적 특질을 살펼 볼까 합니다.
밝게 분별하여 말하면 처음에 기운을 편 것은 이치요, 형상을 이룬 뒤에 움직이는 것은 기운이니, 기운은 곧 이치라 어찌 반드시 나누어져 둘이라 하겠는가. 기란 것은 조화의 원체 근본이요, 이치란 것은 조화의 현묘이니, 기운이 이치를 낳고 이치가 기운을 낳아 천지의 수를 이루고 만물의 이치가 되어 천지 대정수를 세운 것이니라. 明辨初宣氣理也 成形後運動氣也 氣則理也何必分而二之 氣者造化之元體根本也 理者造化之玄妙也 氣生理 理生氣 成天地之數 化萬物之理以 立天地大定數也 <1장 天地理氣-11>
이 글은 동학의 이기론이라 할 수 있는 글로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니, 지금 사람들은 다만 부모 포태의 이치만 알고 천지포태의 이치와 기운을 알지 못하느니라. 한울과 땅이 덮고 실었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이며, 해와 달이 비치었으니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며, 만물이 화해 낳으니 천지이기의 조화가 아니 무엇인가. 천지는 만물의 아버지요 어머니이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主란 것은 존칭하여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기는 것이라'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예와 이제를 살펴보면 인사의 할 바니라' 하셨으니, '존칭하여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 는 것은 옛 성인이 밝히지 못한 일이요 수운대선생님께서 비로소 창명하신 큰 도이니라. 지극한 덕이 아니면 누가 능히 알겠는가. 천지가 그 부모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 오만년이 지나도록 오래 되었으니, 다 천지가 부모임을 알지 못하면 억조창생이 누가 능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로써 공경스럽게 천지를 받들 것인가. 천지부모를 길이 모셔 잊지 않는 것을 깊은 물가에 이르듯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고 극진히 공경을 다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된 도리이니라. 그 아들과 딸된 자가 부모를 공경치 아니하면, 부모가 크게 노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벌을 내리나니, 경계하고 삼가라. 내가 부모 섬기는 이치를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려 억지로 할 것인가. 도무지 이것은 큰 운이 밝아지지 못한 까닭이요 부지런히 힘써서 착한데 이르지 못한 탓이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로다.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요 곡식은 오행의 으뜸가는 기운이니, 젖이란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곡식이요, 곡식이란 것은 천지의 젖이니라.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내니, 사람이 어렸을 때에 그 어머니 젖을 빠는 것은 곧 천지의 젖이요, 자라서 오곡을 먹는 것은 또한 천지의 젖이니라. 어려서 먹는 것이 어머님의 젖이 아니고 무엇이며, 자라서 먹는 것이 천지의 곡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젓과 곡식은 다 이것이 천지의 녹이니라.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을 알면 반드시 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님의 젖으로 자란 줄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보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니라. 식고는 반포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어찌 홀로 사람만이 입고 사람만이 먹겠는가. 해도 역시 입고 입고 달도 역시 먹고 먹느니라. 사람은 한울을 떠날 수 없고 한울은 사람을 떠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의 한 호흡, 한 동정, 한 의식도 이는 서로 화하는 기틀이니라.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사람의 호흡과 동정과 굴신과 의식은 다 한울님 조화의 힘이니, 한울님과 사람이 서로 더부는 기틀은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못할 것이니라. 1. 天地卽父母父母卽天地天地父母一體也父母之胞胎卽天地之胞胎今人但知父母胞胎之理不知天地之胞胎之理氣也 2. 天地盖載非德而何也日月照臨非恩而何也萬物化生非天地理氣造化而何也 3. 天地萬物之父母也故經曰主者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又曰察其古今則人事之所爲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前聖未發之事水雲大先生主始創之大道也非至德孰能知之不知天地其父母之理者五萬年久矣皆不知天地之父母則億兆蒼生孰能以孝養父母之道敬奉天地乎 4. 天地父母永侍不忘如臨深淵如履薄氷然至誠至孝極盡極敬人子之道理也爲其子女者不敬父母則父母大怒降罰於其最愛之子女戒之愼之 5. 吾事父母之理何待人言而强爲哉都是大運未明之故也勤勉不善之致也實是慨嘆之處也 6. 人是五行之秀氣也穀是五行之元氣也乳也者人身之穀也穀也者天地之乳也 7. 父母之胞胎卽天地之胞胎人之幼孩時唆其母乳卽天地之乳也長而食五穀亦是天地之乳也幼而哺者非母之乳而何也長而食者非天地之穀而何也乳與穀者是天地之祿也 8. 人知天地之祿則必知食告之理也知母之乳而長之則必生孝養之心也食告反哺之理也報恩之道也對食必告于天地不忘其恩爲本也 9. 何獨人衣人食乎日亦衣衣月亦食食 10. 人不離天天不離人故人之一呼吸一動靜一衣食是相與之機也 11. 天依人人依食萬事知食一碗 12. 人依食而資其生成天依人而現其造化人之呼吸動靜屈伸衣食皆天主造化之力天人相與之機須臾不可離也
2장 천지부모의 전문으로 동학 특유의 범신론적인 만물일체 사상과 조화와 공경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사람의 일동일정이 어찌 한울님의 시키는 바가 아니겠는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여 힘써 행하면 한울임이 감동하고 땅이 응하여 감히 통하게 되는 것은 한울님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人之一動一靜 豈非天地之所使乎 孜孜力行則天感地應 敢以遂通者 非天而何(3장 도결-12)
천지인은 도시 한 이치기운뿐이니라. 사람은 바로 한울 덩어리요, 한울은 바로 만물의 정기이니라. 푸르고 푸르게 위에 있어 일월성신이 걸려 있는 곳을 사람이 다 한울이라 하지마는, 나는 홀로 한울이라 하지 않노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의 이 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니라. 天地人都是一理氣而已人是天塊天是萬物之精也蒼蒼在上日月星辰所係者人皆謂之天吾獨不謂天也不知者不能覺斯言矣(4장 천지인-2)
사람의 일거 일동이 하늘이며 오직, 하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천인합일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것이 동학의 메시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느니라. 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4장 천지인-7)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한울에 있고, 한울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곧 한울이요 한울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마음이 없느니라. 한울과 마음은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니 마음과 한울이 서로 화합해야 바로 侍定知(하늘이 내 안에 있음을 앎)라 이를 수 있으니, 마음과 한울이 서로 어기면 사람이 다 侍天主라고 말할지라도 나는 시천주라고 이르지 않으리라. 心在何方 在於天 天在何方 在於心 故心卽天 天卽心 心外無天 天外無心 天與心本無二物 心天相合方可謂侍定知 心天相違則 人皆曰侍天主 吾不謂侍天主也(4장 천지인-8)
경에 이르기를 "마음은 본래 비어서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다"라 하였으니, 빈 가운데 靈이 있어 깨달음이 스스로 나는 것이니라. 그릇이 비었으므로 능히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집이 비었으므로 사람이 능히 거처할 수 있으며, 천지가 비었으므로 능히 만물을 용납할 수 있고, 마음이 비었으므로 능히 모든 이치를 통할 수 있는 것이니라. 經曰心兮本虛 應物無跡 虛中有靈知覺自生 器虛故能受萬物 室虛故能居人活 天地虛故能容萬物 心虛故通萬理也(5장 虛實-1)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그릇은 비움있음을 통해 우주와 하느님까지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천지를 에워싸고 우주를 담을 때 진정한 시천주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청주에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하늘)가 베짜는 것인가"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 강림하셨다 말하라. 余過淸州 徐淳家聞其子婦織布之聲 問徐君曰 彼誰之織布之聲耶 徐君對曰 生之子婦織布也 又問曰君之子婦織布 眞是君之子婦織布耶 徐君不卞吾言矣 何獨徐君耶 道家人來勿人來言 天主降臨言(7장 待人接物-4) 도가의 부인은 경솔히 아이를 때리지 말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 도인집 부인이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경솔히 아이를 때리면, 그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니 이제 아이를 때리지 말라. 道家婦人輕勿打兒 打兒卽打天矣 天厭氣傷 道家婦人不畏天厭氣傷而輕打幼兒則 其兒必死矣 切勿打兒(7장 待人接物-5)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 待人之時 如少兒樣 常如花開之形 可以入於人和成德也(7장-12부분)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요,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孰非我長 孰非我師 吾雖婦人小兒之言 可學而可師也(7장-13)
동학의 행동지침을 읽을 수 있는 글로 모든 이에 대한 <하늘같은 공경>은 동학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태어난 것은 한울님의 영기를 모시고 태어난 것이요, 우리 사람이 사는 것도 또한 한울님의 영기를 모시고 사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사람만이 홀로 한울님을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 吾人之化生 侍天靈氣而化生 吾人之生活 亦侍天靈氣而生活 何必斯人也 獨謂侍天主 天地萬物皆莫非侍天主也 彼鳥聲亦是侍天主之聲也(8장 靈符呪文-11)
우리의 도의 뜻은 한울로써 한울을 먹고, 한울로써 한울을 화할 뿐이니라. 만물이 낳고 나는 것은 이 마음과 이 기운을 받은 뒤에라야 그 생성을 얻나니, 우주만물이 모두 한 기운과 한 마음으로 꿰뚫어졌느니라. 吾道義 以天食天 以天化天 萬物生生 稟此心此氣以後得其生成 宇宙萬物總貫一氣一心也(8장-12)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존중 사상을 독특하게 들어내주고 있습니다. 흙 한줌도, 물 한방울도 모두 우리의 형제이며, 나이며 하늘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은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요, 내 마음이 편안치 않는 것은 천지가 편안치 않은 것이니라. 내 마음을 공경치 아니하고 내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천지부모에게 오래도록 순종치 않는 것이니, 이는 불효한 일과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부모의 뜻을 거슬리는 것은 불효가 이에서 더 큰 것이 없으니 경계하고 삼가라. 我心不敬天地不敬 我心不安天地不安 我心不敬不安 天地父母長時不順也 此無異於不孝之事 逆其天地父母之志 不孝莫大於此 也戒之愼之(9장 守心正氣-7)
모든 것과의 일체감을 느끼고 하늘 같은 공경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내 마음이 먼저 하늘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도 모두 하느님이 마음이니 어찌 경솔히 그 마음을 대하겠습니까.
남편이 화애롭고 아내가 정순함은 우리 도의 제일 종지니라. 夫和婦順 吾道之第一宗旨也(17장 夫和婦順-1) 도를 통하고 통하지 못하는 것은 도무지 내외가 화순하고 화순치 못하는 데 있느니라. 내외가 화순하면 천지가 안락하고 부모도 기뻐하며, 내외가 불화하면 한울이 크게 싫어하고 부모가 노하나니, 부모의 진노는 곧 천지의 진노이니라. 道之通不通 都是在內外和不和 內外和順則天地安樂 父母喜悅 內外不和則天大惡之 父母震怒矣 父母震怒卽天地之震怒也(17장-2)
묻기를 "우리 도 안에서 부인 수도를 장려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부인이 감당하니, 주부가 만일 정성 없이 음식을 갖추면 한울이 반드시 감응치 아니하는 것이요, 정성 없이 아이를 기르면 아이가 반드시 충실치 못하나니, 부인 수도는 우리 도의 큰 근본이니라. 이제로부터 부인 도통이 많이 나리라. 이것은 일남구녀를 비한 운이니, 지난 때에는 부인을 압박하였으나 지금 이 운을 당하여서는 부인 도통으로 사람 살리는 이가 많으리니, 이것은 사람이 다 어머니의 모태 속에서 나서 자라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吾道之內婦人修道奬勵是何故也 神師曰婦人家之主也 爲飮食製衣服育孀兒待賓奉祀之役 婦人堪當矣 主婦若無誠而俱食 則天必不感應 無誠而育兒 則兒必不充 實婦人修道吾道之大本也 自此以後婦人道通者多出矣 此一男九女而比之運也 過去之時 婦人壓迫 當今此運婦人道通活人者亦多矣 此人皆是母之胞胎中生長者如也(18장 婦人修道)
동학은 증산도와 함께 지극한 여성 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이 제대도 존종받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는 미개의 사회입니다. 中正의 조화가 이미 깨어졌으니 결코 진실이 바르게 깨어나지 못할 것은 살펴볼 필요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아니하리라. 이로운 것은 밤과 낮, 활을 당기는 사이에 있느리라. 山不利 水不利 利在晝夜 挽弓之間(36장 降詩-9)"이라 했으니 중정의 조화는 역의 진리이자 깨달음의 진리입니다.
<21장 三敬> 1. 사람은 첫째로 敬天을 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이것이 先師의 創明하신 道法이라. 敬天의原理를 모르는 사람은 眞理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하면 한울 은 眞理의 衷을 잡은 것이므로써이다. 그러나 敬天은 결단코 虛空을 向하여 上帝를 恭敬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恭敬함이 곧 敬天의 道를 바르게 하는 길이니, 「吾心不敬이 卽 天地不敬이라」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敬天함으로써 自己의 永生을 알게 될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人吾同胞 物吾同胞의 全的理諦를 깨달을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남을 爲하여 犧牲하는 마음, 世上을 爲하여 義務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敬天은 모든 眞理의 中樞를 把持함이니라. 2. 둘째는 敬人이니 敬天은 敬人의 行爲에 의지하여 事實로 그 效果가 나타나는 것 이다. 敬天만 있고 敬人이 없으면 이는 農事의 理致는 알되 實地로 種子를 땅에 뿌리 지 않는 行爲와 같으니, 道닦는 자 사람을 섬기되 한울과 같이 한 후에야 처음으로 바르게 道를 實行하는 者니라. 道家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 님이 降臨하였다 이르라 하였으니, 사람을 恭敬치 하니하고 鬼神을 恭敬하여 무슨 實效가 있겠느냐. 愚俗에 鬼神을 恭敬할 줄은 알되 사람은 賤待하나니, 이것은 죽은 父母의 魂은 恭敬하되 산 父母는 賤待함과 같으니라. 한울이 사람을 떠나 別로 있지 않 는지라, 사람을 버리고 한울을 恭敬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解渴을 求하는 자와 같 으니라. 3. 셋째는 敬物이니 사람은 사람을 恭敬함으로써 道德의 極致가 되지 못하고,나아 가 物을 恭敬함에까지 이르러야 天地氣化의 德에 合一될 수 있나니라. 셋째는 물건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 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
天·人·物에 대한 동학의 삼경사상입니다. 결국 어느 글을 보아도 다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이므로 모든 것을 나처럼 사랑하라!
<22. 天語> 1. 내 恒常 말할 때에 天語를 이야기 하였으나 天語가 어찌 따로 있으리오. 人語가 곧 天語이며 鳥聲도 亦是 侍天主의 聲이니라. 그러면 天語와 人語의 區別은 어디서 分別되는 것이냐하면, 天語는 大槪 降話로 나오는 말을 이름인데 降話는 사람의 私慾 과 感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公理와 天心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킴이니, 말이 理 에 合하고 道에 通한다 하면 어느 것이 天語 아님이 있겠느냐.
<24.以天食天> 1. 내 恒常 말할 때에 物物天이요 事事天이라 하였나니, 萬若 이 理致를 是認한다 면 物物이 다 以天食天아님이 없을지니, 以天食天은 어찌 생각하면 理에 相合치 않음 과 같으나, 그러나 이것은 人心의 偏見으로 보는 말이요, 萬一 한울 全體로 본다하면 한울이 한울 全體을 키우기 爲하여 同質이 된 자는 相互扶助로써 서로 氣化를 이루게 하고, 異質이 된 者는 以天食天으로써 서로 氣化를 通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 울은 一面에서 同質的氣化로 種屬을 養케하고 一面에서 異質的氣化로써 種屬과 種屬 의 連帶的 成長發展을 圖謀하는 것이니, 總히 말하면 以天食天은 곧 한울의 氣化作用 으로 볼 수 있는데, 大神師께서 侍字를 解義할 때에 內有神靈이라 함은 한울을 이름이요, 外有氣化라 함은 以天食天을 말한 것이니 至妙한 天地의 妙法이 도무지 氣化에 있느니라
<37장에서> 宇宙는 一氣의 所使며 一神의 所爲라, 眼前에 百千萬像이 비록 其形이 各殊하나 其理는 一이니라. 一은 卽 天이니 天이 物의 組織에 依하여 表顯이 各殊하도다. 同一 의 雨露에 桃에는 桃實이 結하고 李에는 李實이 熟하나니 是 天이 異함이 아니요, 物 의 種類 異함이로다. 人이 氣를 吸하고 物을 食함은 是 天으로써 天을 養하는 所以니 라. 무엇이든지 道아님이 없으며 天아님이 없는지라, 各各 順應이 有하고 調和가 有하 여 宇宙의 理 此에 順行하나니, 人이 此를 從하는 者는 是正이요 此를 逆하는 者 是惡이니라. 我의 一氣 天地宇宙의 元氣와 一脈相通이며, 我의 一心이 造化鬼神의 所使와 一家活用이니, 故로 天卽我이며 我卽天이라. 故로 氣를 暴함은 天을 暴함이요, 心을 亂함은 天을 亂케 함이니라. 吾師 天地宇宙의 絶對元氣와 絶對性靈을 體應하여 萬事萬理의 根本을 明하시니, 是乃天道며 天道는 儒佛仙의 本原이니라.
個人各個가 能히 神人合一이 自我됨을 覺하면 이는 곧 侍字의 本이며, 侍의 根本을 知하면 能히 定의 根本을 知할 것이요, 終에 知의 根本을 知할 것이니, 知는 卽通이므로 萬事無爲의 中에서 化하나니, 無爲는 卽 順理順道를 이름이니라.
이 글들은 최시형의 구술을 담은 내용인데, 동학의 실천 강령은 결국 '모든 것이 하나의 하느님임을 알아서 하느님으로 살아라'는 것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달리해서 각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7. 맺으며 저는 학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세상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아파 할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아파하지 못한다면, 그 학문은 영혼과 사랑이 없는 빈 껍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아무리 지식이 많은들 그것이 세상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이며, 그런 그를 어찌 학자라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아파한 이 그들이 인류의 구원을 꿈꾸었던 깨달은 이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몸은 곳의 나의 몸이요, 세상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에서 성인이 무엇이고 학문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디는 시종일관 {바가바드 기타}의 주석에서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천하지 못하면 그것은 글을 읽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고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실로 폭력과 매춘과 사이비의 암흑 그 자체의 역사였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라 할 것이며, 오직 깨달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깨달음의 알맹이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알맹이는 그토록 같은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말의 껍질에 매여 그 말 속에 담긴 알맹이는 제대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 알맹이란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이기에 너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고, 너의 슬픔은 곧 나의 슬픔이 됩니다. 오직 이 우주일체 의식(하나된 마음, 一心)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며, 참된 행복을 얻은 영원한 진리의 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마음으로 돌아가 서로의 행복을 떠받쳐주는 아름다운 하늘 섬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이들 속에게 있으며, 우주 만물의 영원 속에 함께 있는 까닭에... |
기학을 설명하면서 혜강 최한기를 소개하였다. 혜강 최한기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종족은 편견없이 평등하게 교류해야 한다는 조민유화(兆民有和)를 주장한 사람이다. 무무(無無), 즉 없는 것(無)는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모든 것은 실체적인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체가 없는 것을 숭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 사람이다. 그는 19세기 혼돈의 시대에도 위대한 사상가로 나타났다.
노자와 혜강 최한기는 경제사상적으로 보면 자유주의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정치는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이 없는 시장의 힘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도덕경 제57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 금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중략)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무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되고, (중략) 내가 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질박해진다.” 정부가 규제를 덜하고 국민들의 생활에 덜 간섭하면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다는 것이다. 17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최고의 군주는 백성들이 '우리 임금이 계신가보다' 정도만 인식하는 지도자다. 두 번째 지도자는 백성들이 '우리 임금 최고야' 하는 칭찬 받는 지도자다. 세 번째 지도자는 백성들이 '우리 임금 무서워' 하며 피하는 지도자다. 네 번째 지도자는 '우리 임금 못됐어' 하며 욕하는 지도자다.” 군주는 이 세대에 정부에 해당한다. 정부를 책임 맡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다. 정부와 대통령이 조용하면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말이다.
김용옥씨가 강의한 최한기의 조민유화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유무역이다.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1873년 혜강이 쓴 <재교(財敎)>라는 책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이 저술은 남아 있지 않고 그의 제자 김수실이 붙힌 후서에 나와 있다. “공자의 말씀 중에 재리(財利)라는 두 글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백성이 재물을 좋아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가르치지 않아도 능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람들이 재리만을 좇는 것을 우려했다. (중략)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재리란 삶을 영위하고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까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왕이나 귀족은 물론, 어염의 서민들도 다 그 사이에서 움직이니 예의와 재용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재용을 힘쓰면서 인의를 돌보지 않는 것도 천박한 일이지만, 인의를 말하면서 재용을 의식하지 않는 것도 부끄러운 일 이 아닌가. 또한 어떤 이는 학문보다 돈을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을 하는데, 나는 늘 이를 병폐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조선의 상황에서 이러한 사상을 피력했다는 것을 보면 도올 김용옥씨 말대로 혜강은 정말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임에 틀림이 없다.
최한기
惠岡 최한기의 과격한 실용주의 1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의 과격한 실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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