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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올렸던 중국논문을 대충이나마 번역해 보았다. 여기서 '마갑중장기병'(원문에는 갑기구장)은 흔히 말하는 '철기병'에 가까울 것이다. 원문은 좀더 세분화된 용어선택을 하고 있는데, 이에 맞는 적절한 우리말을 몰라서 슬그머니 '마갑중장기병'이란 용어를 쓴 곳이 좀 있을 것이다(다른 용어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좀 이상하면 원문을 참조하는게 좋겠다.
넘치는 말: 본문에 남북조시대 남송의 장수 설안도가 나옵니다만, 자치통감(仁貴, 安都之六世孫) 등을 근거로 설안도는 설인귀의 6대조 할아버지란 설이 있습니다. 어떤 중국학자는 하동 설씨 일족이라네요.
당나라 초기 마갑중장기병 쇠락 및 경기병 흥기의 원인
(唐初甲騎具裝衰落與輕騎兵興起原因)
왕원조(王援朝)
(1951年生, 中央廣播電視大學歷史教硏室副教授)
중국 위진남북조∼수나라 시대까지 줄곧 갑기구장[甲騎具裝, 이하 마갑중장기병] — 즉, 사람과 말이 다 갑옷을 걸친 중기병이 군대의 주력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초기에 이르러 일변하여 사람은 갑옷을 입되 말은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輕騎兵)이 주력이 되었다. 그 한가지 이유를 중원에서 찾아 일반적으로 수나라 말 농민봉기와 이에 따른 문벌세족(門閥世族)의 몰락을 원인으로 보는데[1], 필자는 여기에 대해 굳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필자는 그 주원인을, 전쟁행위가 더욱 빈번해지면서 점차 마갑 무장의 중대한 결함(기동성 부족)이 발견된 점, 살상병기의 발전, 그리고 북방 소수민족(특히 돌궐기병)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외국문헌, 석굴사(石窟寺) 암벽화, 그리고 돌궐비문을 근거로 여기에 대해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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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를 전후해서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로부터 동아시아까지 중기병(heavy cavalry)은 다 경기병의 강함에 맞서 도전했으나 보편적으로 경기병이 중기병을 압도하는 추세가 형성되었고, 전장의 으뜸패는 경기병으로 대체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신흥 돌궐왕국이 유연의 중기병을 격퇴했고[2], 돌궐은 유연을 대신해 초원의 패주(霸主)가 되었다[3]. 중원에서는 신흥 당나라가 경기병으로써 수나라 마갑중장기병을 격퇴했고, 경기병은 마갑중장기병을 대신해 군대의 주력으로 대체되었다.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도 중기병의 쇠락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농민봉기와 문벌세족의 쇠락과는 무관했고 주로 그 기동성의 부족함에 관계가 있었다.
중원에서 마갑중장기병이 쇠락한 것도 앞의 예와 같이 기동성의 부족함에 말미암은 것이다. 마갑중장은 비록 방호력를 증가시켰지만 기동성의 감소를 피할 순 없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완전한 철제 말갖춤 한 점은 무게가 대략 40∼50kg이었고 특별히 제조된 중무장 갑옷[重鎧]은 100kg는 너끈히 나갈 만 한다. 또《宋史》권197<兵志十一>에 따르면 남송(南宋) 첫해의 철갑(鐵甲) 한 벌[領]의 무게는 45∼50근(약 26.86~29.84kg)이었다. 전투마에 실리는 사람용 갑옷과 말갖춤의 무게는 적어도 60∼80kg이었으며 가장 무겁게는 130kg 가 족히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무거운 갑옷은 전투마의 부담을 증가시켜 전투를 오래 지속하기 어렵게 했다. 다만 크고 튼튼하며 끈기까지 갖춘 말[馬]로써 중장기병의 주저앉음을 커버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이처럼 머리를 높이 쳐든 큰 말을 써야지만 속도를 자유자재로 하며 돌격해 갈 수 있었다.
기병은 전진 공격형의 병종(兵種)이고, 기병작전의 기본적인 특이점은 기동성이다. 빠른 기동성을 상실한다면 한 병종의 성질이 바뀌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 우세함을 살리기가 어렵다. 일찍이 선진(先秦)시기에 손자(孫子)는 ‘무릇 전쟁을 하는 자는 정석을 써서 맞서되 변칙을 써서 이긴다[凡戰者, 以正合, 以奇勝]’고 했다[4]. 싸움을 벌일 때 응당 정면의 군대는 적과 교전하되 측면 공격, 선회, 포위 등을 써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인데, 기동작전의 씀씀이를 몹시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군대는 전차병과 보병으로 뒤섞여 편성되어 있었다. 전차병은 도로에 따른 제한이 대단히 컸고, 보병은 두 다리에 의지해 걸어갔으므로 행동속도는 비교적 느렸다. 이 두 병종의 기동성 또한 뒤떨어졌기 때문에 정작 그 손자의 주장을 실행하기에는 적잖은 제한이 있었다. 그런데 서한(西漢) 시기에 이르러 경기병으로 조직된 기병 대집단이 출현한 뒤부터 손자의 주장은 비교적 너끈하게 실행될 수 있었다. 기병 대집단의 출현에 의해 군대는 치중하여 대처할 곳을 개편해야만 했는데, 그 실상은 행군속도와 기동성을 보강하여 군대 전투력으로 구현시킨 것이었다. 위진남북조 이후에 기병은 사람과 말 다 갑옷을 입힌 갑기(甲騎) 차림으로 발전되었는데, 방호력은 몹시 높아졌으되 기동성은 떨어지고 말았다. 미국의 군사사학자 두푸이(Trevor N. Dupuy)는 기동성, 돌연성, 양측면돌격 그리고 돌파의 맹렬성 이야말로 고대기병전술의 기초가 되는 4가지 요소라고 주장했는데, 이 4가지 잠재력(potential)을 진정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말[馬]의 고도한 기동성이 필요하다고 했다[5]. 영국의 군사사학자인 풀러(John Frederick Charles Fuller)는 기병의 으뜸패는 속도와 시간이지 타격력이 아니라고 보았다[6]. 전쟁실천이 심화됨에 따라 중장기명의 약점이 노출되었다. 기동력이 부족한 중장기병은 비록 정면돌격에는 적합했지만 기동전술의 실시에는 부적합했으며 집어넣기 및 선회에도 마땅치 못했다. 승기를 잡기 위한 기습공격에 나서도 무거운 차림으로는 그 전술이 간단했고 행동도 느렸다.
마갑중장기병은 가까이에 보병을 두고 함께 있을 때는 두드러지게 우세했지만, 기동력이 기민한 경기병 및 정예 보병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마음껏 힘쓰지 못했고 불리한 처지에 놓이기까지 했다. 수나라군이 돌궐과 싸울 때 “오랑캐 기병이 (측면으로 돌아서) 분산 돌격해 올 때마다 전차 및 보·기병은 다 서로 함께 사슴뿔을 쳐들고 방진(方陣)을 이루었는데 기병은 이 안에 있었다”[7]. 수나라군 마갑중장기병[8]은 돌궐 경기병의 기민한 진공을 단독으로 막기는 어려웠고 보병과 함께 싸워야지만 비로소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십자군의 중기병이 셀주크-투르크의 경기병과 싸울 때의 상황과 꽤 비슷하다. 행동이 신속한 셀주크 경기병은 흔히 십자군 중기병의 정면을 활짝 피해 선회하여 그 측면 및 배후로 쳐들어갔다. 십자군은 일종의 보·기병 협동전술이 발전했는데 즉 보병 쇠뇌수로 이루어진 견고한 엄폐 장벽을 짜고 기병은 이 뒤쪽에 있었다. 기병은 돌파가 필요할 때 나섰으며 보병(쇠뇌수)이 그 통로를 열어 확보했다[9]. 이렇게 두 병종의 협동으로 셀주크 경기병에 대항했었다. 수나라 의녕(義寧) 원년(617), 이연(李淵)은 "태원(太原)에서 봉기하여 서쪽의 관중(關中)을 취했다. 9월에 수나라 장수 상현화(桑顯和)가 효과(驍果)의 정예기병 수 천명을 이끌고 밤에 당나라군을 기습했다. 당나라군은 처음엔 싸움이 불리하여 여러 군은 다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부중(部衆)을 이끌고 당나라군을 따라 출정한 서돌궐의 티긴[特勤, Tigin] 사대나(史大柰)가 수 백 기병을 이끌고 (상)현화의 뒤쪽으로 나가 그 방비하지 않음을 덮쳐 크게 깨부수니 여러 (당나라)군은 다시금 진동했다"[10]. 수나라군의 기병은 마갑중장기병이었고 반면에 사대나가 거느린 부(部)는 경기병이었다[11]. 기민한 기동력의 경기병이 속도에서 빛나는 우세함을 발휘하여 수나라군 진영의 배후를 쳐서 방호력만 강하고 기동성은 처지는 마갑중장기병을 무찌른 것이다.
전쟁실천이 심화됨에 따라서(특히 돌궐 등의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사람들은 점차 기병의 경우 기동성이 방어력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수당 시대, 군사사상 측면상 한가지 새로운 변화가 출현했는데, 방어를 중시하는 사상에서 기동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당나라 초기의 명장인 이정(李靖)이 ‘군대운용은 사람이 예측못함이 으뜸이고, 싸움은 그 빠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用兵上神, 戰貴其速]’고 힘주어 지적한 바와 같다[12].
새로운 군사사상은 또한 새로운 병종의 실시를 필요로 했다. 16국-남북조 시기에는 군대 안쪽에 있는 마갑중장기병 외에도 바깥쪽에 또한 갑옷을 입은 사람이 일정한 수로 있었는데 말에는 갑옷을 입히지 않은 경기병이었다. 이들은 전자와 달리 정찰이나 추격과 같은 임무를 맡고 있었다. 고고학적 자료로 이 점을 뒷받침 할 수 있다.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의 127굴에 서위 혹은 북위가 만든 벽화《十善十惡》중에 창[矛]을 쥐고 무장한 기사(騎士)가 있고, 또 투구를 쓴 사람이 갑옷을 입지 않은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있는 경기병이 있다. 맥적산 135굴 서위의 벽화인《涅變》중에는 전투마가 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음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13]. 전쟁실천이 거듭됨으로 말미암아 경기병이 전쟁터의 주력이 될 필요가 생겼고, 사람들은 마갑중장기병 대신에 경기병을 군대의 주력으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군대 안에 경기병이 증가했고, 비례해서 마갑중장기병은 감소했으며, 후대로 갈수록 점차 경기병이 마갑중장기병을 대신해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기동작전과 진격의 돌연성을 강조하는 군사사상의 지도아래, 당나라 초기의 전쟁 중에는 흔히 행동이 신속한 경기병을 내보내서 불시에 먼거리에 있는 적을 기습하곤 했다. 명장 이정(李靖)은 남달리 경기병의 갑작스런 기습 공격을 잘 써서 언제나 느닷없이 적에게 나가 싸워 이겼다. 정관(貞觀) 4년(630)에 그는 ‘군을 이끌고 동돌궐을 치러나가서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갑작스레 3천 기병으로 “밤에 정양(定襄)을 덮쳐[夜襲定壤]” 돌궐을 크게 이겼다. 얼마 뒤에 또 당검(唐儉) 등은 앞서 간 돌궐이 본거지 천막집[牙帳]를 어루만지는 틈을 노려 “정예 기병 1만을 골라내 20일치의 군량을 가지고 그들을 쳐[選精騎一萬, 齎二十日糧往襲之]” 일거에 돌궐의 주력을 섬멸했다[14].
당나라 초기에는 적지 않은 뛰어난 장수가 다 경기병을 잘 사용했던 바, 전쟁터에서 고도의 기동전술을 구사해 상황을 살펴 적을 격파했다. 마치 당태종
마갑중장기병의 주요 장점은 방어력과 충격력에 있지 속도에 있지 않았다. 그 주요효능은 정면으로 병사에게 돌격할 때 발휘되었지 승기를 잡기 위한 기습출격에는 마땅치 못했다. 한편, 경기병은 속도로 표현되는 전투력에 뛰어났다. 그래서 전쟁의 실천이 발전함에 따라 기동성이 중시되는 군사사상이 주도적 지위를 점유한 뒤부터 마갑중장기병은 경기병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였고, 필연적으로 경기병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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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살상병기의 발전에 말미암았다. 군사사(軍事史)를 종합해서 보면 무기장비는, 모두 “방패”의 발전이 있으면 이에 대항한 “창”의 진일보한 발전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16국시기로부터 방어력이 몹시 강한 마갑중장기병이 중원의 전쟁터에서 대량으로 출현한 후, 살상병기 또한 몹시 크게 발전했다. 궁노(弓弩)•대부(大斧)•장창(長槍) 등이 비교적 크게 개선되었고 수당 때는 참마검(馬劍發)의 발전에서 유래한 맥도(陌刀)도 출현했는데, 이것들은 다 마갑중장기병에게 상당한 위협을 낳았다.
동•서진-남북조 시기에 활의 발사력은 전대에 비해 크게 증강되었는데, 남북조때 보궁(步弓)은 10 여 석(石)까지 날릴 수 있었고 마궁(馬弓)은 6 여 석까지 달할 수 있었다[18]. 서진시기에 강대한 위력의 신노(神弩)가 출현했고 동진남조때는 또한 더욱 발전된 ‘만균신노(萬鈞神弩)’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는데 “격파하여 허물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所至莫不摧陷]”고 한다[19]. 아울러 남조에는 또한 몇 마리의 소가 시위를 잡아당겨야 쏠 수 있는 상노(床弩)가 있었는데 수성(守城) 및 유목민기병의 돌격에 대한 방어용으로 쓰였다[20]. 당나라 시대에도 일반적인 노(弩) 외에 진대(晉代)의 만균신노를 기초로 발전된 차노(車弩)가 있었는데 한 번에 일곱개의 철가지[支鐵] 살[羽箭]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고 사정거리는 700 보(步)였다[21]. 차노는 전차(兵車) 및 전선(戰船)에 장착해 사용하여 일정한 기동성을 가지고 공격과 수성에 쓸 수 있었으며, 게다가 기병에 대항하여 쓸 수 있기까지 해서 당나라 시대 강노(强弩)의 대단한 위력은 상당한 위압감이 있었다. 당나라 덕종(唐德)때 번진(藩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미 판주(汴州)을 함락시킨 반란한 장수 “
당나라 시대에는 끊임없이 궁노의 살상력이 증강되었으며 아울러 장비 수량도 증가되었다. 당나라군이 궁(弓)을 장비한 비율은 10/10로서 각각의 전투병으로 평균해서 다 모두 궁을 장비했고, 노(弩)의 장비율은 2/10 즉 20%였으며, 전문 궁노수(弓弩手)의 비율도 전대(前代)에 비해 증가하여 전투병의 30%까지 달했다[25]. 대량의 강노(强弓) 및 경노(勁弩)는 마갑중장기병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었다.
수당 때는 또한 한대(漢代)의 참마검(斬馬劍)의 발전에 말미암은 맥도(陌刀)가 출현했다[26]. 맥도는 양면에 날이 서있으며 전체 길이는 1장이고 무게는 15근으로 쪼개 베어 죽이는 효능이 상당히 높았다[27]. 맥도는 당시에 상비했던 무기의 하나로 군중(軍中)에는 맥도부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전(李筌)의《太白陰經》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 한 군(軍)중의 전투병은 12,500명인데 맥도를 장비한 배속병은 2.500명으로 전투병 수의 20%을 점유했다.
수당시대에 도끼[斧]는 비교적 크게 개조되어 날 부분은 더 넓어졌으되 손잡이 부분은 감소하여 짧아졌다. 그 양식에 따라 장가부(長柯斧)와 봉두부(鳳頭斧)로 나뉘는데 쪼개 죽이는 효능은 다 상당히 높았다[28]. 마갑중장기병의 방호면적은 비록 컸지만 말 다리까지 방호하기 어려웠다. 궁노(弓弩)로는 말 다리를 쏴 맞추기 어려웠겠지만 맥도나 대부(大斧)를 쓰면 실제로 쪼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漢)∼당(唐)까지 장모(長矛) 또한 비교적 크게 개조되었다. 진대(晉代)에는 모(矛)의 머리부분을 짧게 줄이되 뾰족하게 한 유형의 장모로 개조되었다. 그 머리부분이 전통적인 모(矛)의 머리부분보다 짧은 것이 요긴한 전체적으로 가볍고 예리한 병기다. 즉, 민첩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다 찔러 죽이는 효과는 더욱 좋아졌다. 게다가 보다 금속이 절감되니 제작이 간편하여 대량제조도 용이해서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일반적으로 모(矛)를 창(槍)이라고 호칭했고 주요병기가 되어 각각의 전투병은 다 한 점씩 장비하고 있었다[29]. 당대(唐代)의 창(槍)은 전대에 비해 갑옷을 관통하기 쉬웠는데, 돌궐인이 사용하는 장모(長矛)에는 그 창자루 끝에 갑옷을 전문적으로 꿰뚫기 위한 지느러미 같은 날[窄翼, narrow-flange]이 하나 달려있었다[30]. 이것들은 다 중장갑옷 차림의 방호력을 상대적으로 깎아내렸고, 그 필요성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상술한 바를 종합하면 수당 때의 현저하게 높아진 살상병기의 위력은 행동이 느린 마갑중장기병에게 대단한 위협이 되었다. 군사사(軍事史)에 있어 살상병기의 위력이 방호장비를 능가할 때면 두 종류의 반응이 가능한데, 한 종류는 방호장비를 보강하는 것이고 다른 종류는 방호장비를 제거하여 부담하는 중량을 줄여 기동성을 높이는 것이다.
14세기 프랑스인은 방호장비를 보강하는 쪽을 채택하여 쇠사슬 갑옷(chain mail)을 더 무거운 철판 갑옷(plate mail)으로 대체했으나 정작 효과는 썩 좋지 않았다[31]. 중장기병은 영국의 장궁병(long-bow man), 스위스의 장창병(lancer)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보강은 방호력을 높이지만 기동성이 희생되었고, 단지 기동성으로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살상병기의 위력을 더욱 유효하게만 했다.
수당 때는 부분적으로 방호장비를 제거하여 중장기병의 말갖춤을 없앴는데, 즉 사람만이 갑옷을 입고 말에겐 입히지 않은 경기병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고속 기동성으로 압도적인 상대방의 살상병기를 피하려 했고, 비교적 좋은 효과가 있었다. 사실, 일찍이 남북조시기에 이미 사람들은 장비를 덜어내고 돌격하여 적진을 무너트리기도 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원가(元嘉) 27년(450) 유송(劉宋)과 북위(北魏) 간 합(陜)에서의 전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때 송나라 장수 설안도(薛安都)는 "눈을 부라리며 창[矛]을 휘두르려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격하여 좌충우돌 분투하니, 좌우의 적은 모두 피하기 급급하며 당해내지 못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살상했다. 이에 군사들은 북을 울리면서 전진했고 사병들은 다 죽기로 싸웠었다. 애초에 북위군이 기병을 풀어 돌격해 오자 군사들은 이를 두려워했었다. 이에 무척 노한 설안도는 투구를 벗고 갑옷끈을 풀어 속에 입은 빨간색 윗도리[衫]를 드러내고, 말 또한 마갑[具裝]을 없앤 채, 용맹하게 적진으로 치달렸다. 적병이 맞서도 베어 쓰러트리지 못하는 법이 없으니 그가 가는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약이 오른 적은 그를 가둬 쏴 맞추려 했으나 맞추지 못했다. 이와 같이 4번이나 1사람이 들어갔지만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었다".[32] 수차례 적진에 돌격했음에도 그를 가둬 쏴 맞출 수 없었음은 마갑을 덜어낸 것에 기인함이 충분히 표명된 것으로, 높아진 전투마의 속도는 상대방의 화살에 의한 살상을 피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수당 때, 전투마는 보편적으로 마갑이 제거되어 있었고, 고속 기동의 경기병으로 적진에 돌격하는 전술이 보편적으로 응용되었다. 전술했듯이, 당태종
일반적으로, 무기장비는 전술의 양식을 결정하고, 전술 또한 역으로 무기장비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다. 위진남북조 이래 살상병기의 발전은 충격·방호 위주의 전술이 기동성 위주의 전술로 대체되는데 결정적이었고, 이러한 전술의 사용은 또한 마갑중장기병이 경기병으로 대체되는 역사적 추세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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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북방소수민족, 특히 돌궐 경기병의 영향을 보자.
수당 때 한족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소수민족은 돌궐이다. 돌궐의 군대는 기동성을 강조하여 경기병을 대량으로 사용했다.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기재에 따르면 돌궐기병의 주력은 경기병이었는데, 시베리아 미누신스크(Minusinsk) 부근에서 대략 5~7세기 사이의 돌궐인이 그린 암벽화에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그림이 하나 있다! 손에 장창[長矛]을 쥐고 찌르기 공격을 하는 모양의 기사(騎士)인데 전투마에는 마갑이 없다[33]. 8세기 전기의 돌궐 귀족인 퀼 테킨[闕特勤]의 전공을 돌궐문자로 쓴《퀼테킨비문》에는 명사산(鳴沙)의 전투에서 돌격하여 적진을 무너트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 그는 타디크 촐(Tadïq Čor)의 회색말을 (타고 공격했는데), 이 말은 거기서 죽었다. 다음으로 이쉬바라 야므타르(Išbara Yamtar)의 회색말을 타고 진격했는데, 이 말도 거기서 죽고 말았다. 세번째로 예갠 실리그-벡(Yegän Silig Beg)의 말옷이 입혀진 밤색 말을 타고 진격했는데, 이 말도 거기서 죽었다. 그의 갑옷과 카프탄(caftan)은 1백 개가 넘는 화살을 맞았으나 단 하나도 그의 얼굴이나 머리에 맞지 않았었다. …… 여러 투르크 군장[lord]들이여, 너희들은 그의 진격을 알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저들의 군대를 소멸시켰음을.” 이 전투에서 퀼 테킨은 앞뒤로 4마리의 전투말을 탔는데, 이 중 한마리만이 말옷을 입고 있었다. 이 비문에 따르면 퀼 테킨은 전투 중에 다해서 차례차례 10마리의 말을 탔지만 이 중에서 말옷이 입혀진 것은 단 한마리였다.[34] 돌궐문자로 적힌《퀼리 촐 비문[闕利啜碑]》에는 다섯 군데에서 전투마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 세 군데에선 털색만 묘사하고 있을 뿐 말옷을 입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고, 나머지 두 군데에선 비문이 결여되어 있어 자세하지 않다.[35]
이렇게 돌궐군대 중에는 말옷을 입은 전투마가 있었음을 볼 수 있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고, 게다가 외국학자의 추측에 따르면 돌궐의 말옷은 비금속차림으로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36]. 돌궐인도 러시아인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갑옷을 씌워 전투마의 기동력을 저해하지 않았다.
서기 7~8세기에 창작된 신강 파리곤(巴里坤)현 팔장자(八墻子)촌의 암벽화인《戰騎圖)》에는 두 기사(騎士)와 세 마리의 준마가 있는데, 준마는 형체가 건장하되 모두 마갑이 없었다[37]. 서기 9세기에 창작된 암벽화가 신강 하미[哈密]시 필성(泌城)향 두공(頭工)촌에 있는데, 8명으로 이루어진 기사 집단이 기다란 병기를 손에 쥐고 창을 뻗어 맞서 싸우는 중앙의 기사(騎士)를 포위공격하고 있는 것이 돌 위에 새겨져 있다. 기사의 형태는 각기 달라서 봉(棒)을 들고 있거나 창을 뻗치고 있지만 타고 있는 전투마는 모두 마갑이 없다[38]. 파리곤-하미 일대는 서기 서기 7~8세기엔 사타돌궐(沙陀突厥)의 주거지였으며 근대에는 카자흐 등의 민족에 속한 땅이다. 신강 길목라리 북정고성(北庭故城)에서 출토한 고창(高昌) 회골(回鶻, 위구르) 왕실사원인 서대사(西大寺)에는 세기적인 한 폭의《王者出行圖》가 있는데, 이 그림 안에는 기병이 많지만 모두 사람은 갑옷을 걸쳤지만 말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39]. 이 민족은 돌궐과 이웃이었고 게다가 일찍이 돌궐에 복속된 바 있다. 사타돌궐과 회홀(回紇, = 回鶻)은 종족상 또한 근친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 군대의 편성 및 장비 등은 다 돌궐과 퍽 닮았을 것이고, 이것은 또한 돌궐군대는 경기병이 주력이었음을 명확하게 뒷받침한다.
당나라 초기 경기병의 편성, 장비, 훈련, 전략, 전술 등은 다 돌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일찍이 태원(太原)에서 봉기하기 전, 돌궐기병의 방식을 완전히 본 떠서 그 군대를 훈련했고, 그래서 좋은 효과를 얻었다. 이연은, “눈 앞의 이익을 보고도 물러나는 편이 어렵거늘 바람처럼 달려가다 번개처럼 빠지며, 그 진열도 고정되지 않은” 신속한 행동이야말로 돌궐기병이 상습적으로 승리를 취하는 주요원인이고, “중국군대가 행하는 것은 모두 이와 반대로 근접전을 통해야 하므로 공을 세우기가 드문데 만약 이와 같다면, 그 좋은 점을 배워서”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기사(騎射)가 가능한 자 2천 여 명을 골라[簡使能騎射者二千餘人]” 돌궐의 방식을 더해 훈련시켰는데, “먹고 자고 하는 것이 돌궐과 똑같이[飮食居止, 一同突厥]”하게 했었다. “그래서 돌궐은 황제의 군대를 볼 때마다 다들 말하길 그들의 부락이 아닌가 의심했었고,” 뒤에 돌궐과의 교전에서 “병사를 풀어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니”, “돌궐은 쓸개(용기)를 잃어버리고 황제의 정예병[能兵]에 깊이 굴복하여 그 부(部)를 거두고 섣불리 남쪽으로 쳐들어 오지 못하게”까지 만들었다[40]. 이후, 당왕조는 정예 경기병으로 천하를 평정하여 그 우월성을 한층 더 실천으로 실증하였다. 때문에 당나라 시대에 경기병이 점차 마갑중장기병을 완전히 대체하여 마갑중장기병이 쇠락한 사건과, 이연이 돌궐기병을 모방하여 군대를 훈련한 사건은, 얼추 시기가 일치하는 데, 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 두 사건 사이에는 현저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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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당나라 초기에는 상술했던 회흘 등 민족의 군대처럼 귀의[歸附]한 각 유목민족의 군대가 대량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들 민족의 군대는 대다수가 돌궐과 마찬가지로 주로 경기병이었고, 귀의한 각 민족의 군대가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이들로부터 장비·편성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연(李淵)이 돌궐기병의 영향을 받아 그 방식을 모방한 경기병을 조직한 사건은 사료에 환하게 적혀있지만, 이것이 수나라 말 농민봉기군에게 끼친 막대한 영향에 관한 측면은 사료에 명확한 기재가 빠져있다. 이연이 돌궐의 영향을 받은 경기병을 조직한 때는, 농민봉기군과 서로 군사접촉이 발생하기 전인 대업 11년[41]이고, 대업 13년에 비로소 농민봉기군과 서로 마주쳤다. 즉, 역산비(歷山飛) 부대와 맞닥트리게 되었는데 이미 더 강대한 경기병을 보유했던 이연은 이 경기병에 의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42]. 농민봉기군은 장비가 부족했었다 해도 마갑을 입히지 않은 경기병으로 기병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경기병이 주력이었을 것이다. 당나라군은 농민봉기군 경기병과의 접전 과정 중에 그 자신의 경기병도 일정 정도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연은 이전에 돌궐의 영향을 받았었고, 따라서 당나라 시대 경기병은 수나라 말 농민봉기군의 영향을 받아 출현했다고 볼 순 없다.
문벌세족의 몰락과 마갑중장기병의 몰락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위진남북조 마갑중장기병의 구성원은 유럽 중세시기의 중기병과 같지않은데 귀족(nobles)이나 기사(騎士, knight)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들 중에는 부락의 구성원 혹은 국가 병적[兵戶]이나 이른바 영호(營戶), 군호(軍戶), 사가(士家)의 예속민, 혹은 균전(均田) 농민이 많았다. 16국시기 각 나라 군대의 기본병력은 소수민족의 부족병이 많았고, 기본병력은 또 통치자의 본래 민족의 부족병이 골간이며 주체였다. 마갑중장기병의 주요 출신은 이와 같은 부족병이었다. 예를 들어 전조(前趙)의 황제인 흉노인 유요(劉曜)는 “조서를 내려 공경 이하의 자제 중에 날래고 튼튼한 이를 친어랑(親御郞)으로 삼아 갑옷을 입고 개마(鎧馬)를 타고 자신[유요]을 따라 움직이거니 멈추거니 하면서 (적의 창끝을) 막아 꺽는 일을 맡도록 충당했다”.[43] 북위(北魏) 전기의 군대는 부락병 위주였는데 군대 구성원의 주요 뿌리는 선비족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다. 한족(漢族)은 일반적으로 병역에 복속되지 않았고 단지 “농잠(農桑)에 복속되어 일하면서 군국(軍國)에 이바지했다[服勤農桑, 以供軍國]”[44]. 뒤에 점차 한인(漢人)을 지방군 성질의 주병(州兵)으로 충당하여 효문제(孝文帝)는 제도를 고쳐 한인(漢人)에게 징병제를 실행했고 중원 각 주(州)의 주병(州兵)은 기본적으로 다 징집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만 한인(漢人)은 주로 보병을 담당했고 기병을 담당하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동위·북제의 주요 병원(兵源)은 선비인(鮮卑人)이었고, 그 밖에 한인(漢人)도 많은 수로 징병되었는데 북제(北齊)때는 더 많은 수로 병사를 모았다. 서위와 북주는 부병제(府兵制)를 실행했는데 그 군대의 구성원은 처음엔 선비인(鮮卑人)이 많았고, 뒤에 와서 권력을 업은 유력 호족의 부곡사병(部曲私兵)과 일부 향병(鄕兵)이 증가되었으며, 더 뒤로 와서는 많은 수의 균전 농민이 또한 증가되었다. 동진(東晉)의 주요 병원은 세병(世兵)과 모병(募兵)이었고, 이 밖에도 징병(徵兵)도 조금 있었다. 남조(南朝) 각 왕조의 주요 병원은 모병이었고 그 다음으론 군호 출신의 세병이었며, 이 밖에도 많은 수의 징병이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대다수 군대는 정부의 관병(官兵)에 속해있었다. 서위(西魏)때 유력 호족 지주의 부곡(部曲)과 일부 향병(鄉兵)이 대량으로 거두어져 편성되기도 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문벌세족의 부곡사병(部曲私兵)은 소수에 그쳤다. 게다가 문벌세족의 사병(私兵)중에는 보병은 많았으되 기병은 비교적 적었다.
총괄하면 위진남북조 시기의 마갑중장기병의 구성원은 중세 유럽의 중장기병처럼 귀족이나 기사가 아니고, 일부 학자의 주장처럼 문벌세족의 부곡사병(部曲私兵) 위주도 아니며, 평민신분의 부락 구성원 혹은 국가 병적[兵戶]의 예속민 혹은 균전(均田) 농민 위주였다. 따라서 문벌사족의 몰락은 마갑중장기병의 몰락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마갑중장기병의 몰락을 문벌세족의 몰락과 연결 지으려 한다면 유럽의 귀족 몰락과 중장기병 몰락 사이의 관계를 불가피하게 적용해야 하는데, 유럽의 역사가 간단하게 중국의 역사로 적용될 지는 의심스럽다.
마갑중장기병의 몰락은 다른 원인에 있음이 명확하다. 앞머리에서 서술했듯이 전쟁실천이 발전함에 따라서 점차 마갑중장기병의 한가지 중대한 결함(주로 부족한 기동성)이 발견된 점, 살상병기의 발전, 그리고 북방소수민족(특히 돌궐경기병)의 영향 때문이다.
1. 見《中國軍事史》第4卷《兵法》, 解放軍出版社1988年版, 第113頁,《中國古代軍事三百題》, 上海古籍出版社1989年版, 第576頁等。
2. 見《外國著名戰爭戰役》(上), 知識出版社1981年版, 第14頁,《外國著名戰爭戰役》(中), 知識出版社1982年版, 第415頁, 楊泓《中國古兵器論叢》, 增訂本, 文物出版社1985年版, 第71頁圖62《波斯杜拉.尤羅波斯鎧馬騎士雕像》, 沈福偉:《中西文化交流史》, 上海人民出版社1985年版, 圖版《波斯古畫中的騎士•具裝與龍》, (美) Dupuy, Trevor N.:《The Evolution of Weapons and Warfare》, 軍事科學出版社1985年版, 第69, 72頁。
3. 본문에서 후술하겠지만 돌궐의 기병은 절대 다수가 경기병이었다. 그러나 유연의 기병은 중기병 위주였다.《魏書》卷二《太祖紀》: 天興五年正月辛卯, 蠕蠕社侖遣騎救素古延等, 和突逆擊, 破之於山南河曲, 獲鎧馬二千餘匹.
4. 《孫子兵法·勢篇》。
5. 前引《The Evolution of Weapons and Warfare》第51頁。
6. (英)Fuller, John Frederick Charle,《A Military History of the Western World》第一冊, 戰士出版社1981年版, 第303頁。
7. 《隋書》卷四八《楊素傳》。 每慮胡騎奔突, 皆以戎車步騎相參, 輿鹿角爲方陣, 騎在其內
8. 《隋書》卷八《禮儀志三》에 따르면, 大業7年(611年), 수양제의 고구려 출정시, 隋軍의 기병은 다 甲騎具裝이었다. 해군은 기병을 4團 보유했는데, 그 제1단은 모두 靑絲連明光甲, 鐵具裝, 제2단은 絳絲連朱犀甲, 獸文具裝, 제3단은 白絲連明光甲, 鐵具裝, 제4단은 烏絲連玄犀甲, 獸文具裝이었다. 또한《考古》1977年第5期《安徽六安東三十鋪隋畫像磚墓》: 安徽 六安 東 三十鋪 隋畫像磚墓에서 甲騎具裝과 보병의 전투가 묘사된 화상전이 1점 출토했다.
9. 前引《The Evolution of Weapons and Warfare》, 第87頁。
10. 《大唐創業起居注》卷二,《舊唐書》卷一九四下《突厥傳》下。
11. 돌궐기병은 절대 다수가 경기병이다. 상세한 것은 본문 제3절을 볼 것.
12. 《通典》卷一五四引《李靖兵法》。
13. 見《中國石窟:麥積山石窟》, 文物出版社•(日)平凡社1987年版, 圖163, 176。
14. 《資治通鑒》卷一九二, 貞觀四年正月•二月。
15. 《資治通鑒》卷一九二, 武德九年九月。 “每觀敵陣, 則知其强弱, 常以吾弱當其强, 强當其弱, 彼乘吾弱, 逐奔不過數十百步, 吾乘其弱, 必出其陣後反擊之, 無不潰敗.”
16. 《資治通鑒》卷一八九, 武德四年五月己未。 “世民命宇文士及將三百騎經建德陣西馳而南上, 戒之曰, 賊若不動, 爾宜引歸, 動則引兵東出. 士及至陣前, 陣果動, 世民曰, 可擊矣,”
17. 《資治通鑒》卷一八九, 武德四年五月。 “挺身陷陣, 直出其後, 復突陣而歸, 再入再出, 飛矢集其身如蝟毛,” : “給以副馬, 使從己,” : “張唐旗幟, 建德將士顧見之, 大潰.”
18. 《梁書》卷三九《羊侃傳》, “所用弓至十餘石.”《南史》卷六三《羊侃傳》, “所用弓至二十石, 馬上用六石弓.” 여기서 馬弓은 6石이고, 步弓은 10 여 石에 가깝다.
19. 《宋書》卷一《武帝紀》上。
20. 《北史》卷二八《源賀傳》: 北魏때, 源賀曾은 漠南에 성을 수축하여 북방유목민족을 방어하자고 건의했는데, “城置萬人, 給强弩十二床”, “弩一床給牛六頭”하자고 했다.
21. 《通典》卷一六0。
22. 《舊唐書》卷一五二《王棲曜傳》。 “李希烈既陷汴州, 乘勝東侵連陷陳留•雍邱, 頓軍寧陵, 期襲宋州。 浙西節度使韓蟦命棲曜將强弩數千, 夜入寧陵, 希烈不之知。 晨朝, 弩矢及希烈坐幄, 希烈驚曰, 此江淮弩士入矣, 遂不敢東去.”
23. 見《太白陰經》卷四《戰具》。
24. (蘇)吉謝列夫,《南西伯利亞古代史》漢譯本下冊, 新疆社會科學院內部刊行, 第95頁。 轉引自薛宗正《突厥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1992年版, 第748頁。
25. 見《太白陰經》卷四《戰具》。
26. 見《通典》卷一四八引《李靖兵法》。
27. 見《唐六典》卷一六《衛尉宗正寺武庫令》。
28. 見《中國軍事史》第一卷《兵器》, 解放軍出版社1983年版, 第26•27頁。
29. 見《太白陰經》卷四《戰具》。
30. 前引《突厥史》, 第749頁。
31. 見前引《The Evolution of Weapons and Warfare》, 第103~107頁。
32. 《宋書》卷七七《柳元景傳》. 安都瞋目橫矛, 單騎突陣, 四向奮擊, 左右皆闢易不能當, 殺傷不可勝數, 于是衆軍竝鼓噪俱前, 士皆殊死戰. 虜初縱突騎, 衆軍患之. 安都怒甚, 乃脫兜鍪, 解所帶鎧, 唯著絳衲兩當衫, 馬亦去具裝, 馳奔以入賊陣, 猛氣咆勃﹐所向無前, 當其鋒者, 無不應刃而倒. 賊忿之, 夾射不能中, 如是者數四, 每一入, 衆無不披靡.
33. 孫機,《中國古輿服論叢》, 文物出版社1993年版, 圖8—17—1。
34. 林幹,《突厥史》附耿世民譯《突厥文碑銘譯文》, 內蒙古人民出版社1988年版, 第260~263頁。
35. 《中國新疆古代藝術》, 第276, 277頁。
36. (蘇)伯恩斯坦,《六至八世紀鄂爾渾葉尼塞突厥社會經濟制度》。 轉引自薛宗正《突厥史》第747頁。
37. 穆舜英主編《中國新疆古代藝術》, 新疆美術攝影出版社1984年版, 圖168。
38. 同上書, 圖。
39. 《中國新疆古代藝術》, 圖。
40. 《大唐創業起居注》卷一。, “見利卽前, 知難便走, 風馳電卷, 不恒其陣” : “中國兵行, 皆反於是, 與之角戰, 罕能立功. 今若同其所爲, 習其所好” : “突厥每見帝兵, 咸謂以其所爲, 疑其部落” : “縱兵擊而大破之” : “突厥喪膽, 深服帝之能兵, 收其所部, 不敢南入”
41. 見《舊唐書》卷一《高祖本紀》。
42. 《大唐創業起居注》卷一。
43. 《晉書》卷一0三《劉曜載記》。 “召公卿以下子弟有勇幹者爲親禦郎, 被甲乘鎧馬, 動止自隨, 以充折衝之任.”.
44. 《魏書》卷二八《劉潔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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