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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견진성사.
3.1. 견진 성사의 의의.
견진성사(Sacramentum Confirmatio)는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과 그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 하게 하는 성사로서 세례성사를 완성시키고 인호를 남기게 되는 성사입니다.
견진성사가 세례성사를 완성시킨다는 말은 세례성사가 불완전한 성사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성사를 거쳐서 견진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견진성사가 좀더 신앙을 성숙된 과정으로 만들어 주는 성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로 이룩한 구원을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구원의 결실을 내고
거룩하게 하는 관계와 같이 세례성사 때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고 깊게 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성사가 견진성사입니다.
이러한 견진성사를 받게되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삶을 이루도록 은총을 주는 특별한 성령칠은 지혜. 통달(通達).
의견(意見). 용기. 지식(智識). 효경(孝敬). 경의의 은사를 받게됩니다.
한 마디로 세례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견진 성사는 성령강림의 은혜를
더욱 견고케 해 주는 성사이며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된 신분을 공적으로 드러내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 하도록 특별한 은총이 주어지는 성사인 것입니다.
3.2. 견진성사의 역사와 성서적 근거.
견진 성사는 주교의 안수와 성유(올리브 시름)를 바르는 예절로 이루어지는 데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행하여 왔던 축복 예절 관습에서 유래되어 온 것으로 이 안수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천하거나
성사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게 베풀던 것으로 그 유래는 창세기 12장3절의 말씀처럼 야곱이 이사악의 안수로
하느님의 약속을 계승받게 되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안수로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성유를 바르는 도유 행위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도유함으로 사제로 축성한데서 그 시초를 찾고 있으며
사울이 사무엘에 의해 도유되어 왕으로 축성되거나 다윗이 도유되어 성령이 그를 덮게 되었다는 1사무엘 16장13절의
말씀처럼 구약에서 견진 성사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세례소 즉 십자가 성당이나 성당의 성세 대에서 알몸으로 나온 새 영세 자는
흰옷을 입은 다음에 성유로 도유 받음으로써 견진 성사를 받았고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8장14-17절의 말씀과 같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사도행전 19장1절의 말씀처럼 바오로가 에페소서에서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신자에게 안수를 하며 성령을 충만히 받도록 함으로써 견진 성사를 집전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3. 견진성사의 효과.
견진성사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히 고백하고 십자가를 부끄럽지 않도록 해 주는 은혜를 받게 하는 성사입니다.
견진성사를 받은 자는 교회의 성숙한 수호자로써 또 그리스도의 완전한 증거자로서 그 의무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리서 1265항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와 함께
그리스도의 입문성사의 하나이며 입문성사 단일성을 지켜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견진성사를 받은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적극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4. 견진성사를 통하여 받는 성령 칠은(聖靈七恩).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완성시켜주는 성사입니다. 또 이 성사를 통해서 많은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일곱 가지의 은총과 9홉 가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3.4.1. 지혜.
슬기라고도 이야기하는 지혜인데 이것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구원에 필요한 일에 끌리어
맛들이게 하는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3.4.2. 통달(通達).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믿음의 이치를 깨닫고 깨달음에 따라 그대로 따를 수 있게 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3.4.3. 의견(意見).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과 피해야할 악을 분별케 하는 일깨움을 가져다주는 은혜인데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을 선별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3.4.4. 용기.
굳셈이라고도 하는데신앙의 힘으로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싸울 수 있는 능력으로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3.4.5. 지식(智識).
앎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혜입니다.
3.4.6. 효경(孝敬).
받든다는 말로서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모시면서 사랑하고 신뢰하며 의탁케 하는 은혜입니다.
3.4.7. 경의.
두려워하는 이야기로써 하느님을 경의 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까봐 두려워하는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3.5. 성령의 9가지 열매.
갈라디어서 5장22-23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온유, 성실, 절제를 말합니다.
3.6. 견진성사란 무엇인가?
견진성사는 세례를 받은 신자가 주교의 안수와 축성 성유의 도유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는 성사를
견진성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령의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의미는 세례를 인준하고 세례의 은혜를 굳건하게 해주고
또 증대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의 효과 또는 세례의 은혜라고 말하는 풍요로운 은총으로 원죄와 모든 본죄가
사해지고 성부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으로 새롭게 탄생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279항).
견진성사는 이처럼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이 세례의 은총을 성장시키고 성화 시키는 것을 더욱 뿌리를 내리게 하고
그리스도와 더 굳게 결합하도록 함으로서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깊이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말과 실천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1303, 1316항) 교회는 견진성사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한 성숙이라고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3.7. 견진성사의 특별한 배경.
견진성사가 세례성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는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견진성사를 세례성사와 함께 한 번에 거행하여 오다가 3세기초에 와서 저술된 사도전승에 의하면
세례성사는 부활성야 때 여러 단계로 성대하게 거행되어 왔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의 견진성사의 배경은
세례자들이 세례 대에서 수세(水洗)를 받은 후 사제가 그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난 다음
세례자들이 성당으로 들어올 때에 주교가 세례자들에게 안수하면서 이마에 성유를 바르고
십자의 표시와 평화의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이어서 성찬의 전례가 이어져왔으며
여기에서 세례성사를 완성하는 두 번째의 도유와 안수가 견진성사를 의미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에 나타난 세례예식 참조)
그러나 점차적 시간이 흐르면서 신자 수가 늘어나고 교구가 커져가게 되자 주교가 모든 세례성사를 집전 할 수 없게 되어
도유와 안수는 주교에게 유보해 두면서 세례성사는 사제가 집행할 수 있도록 하고 견진성사는 주교가 거행하도록
시간적으로 분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두 성사는 아주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됩니다.
가톨릭 교리서에서는 견진성사는 세례성사 그리고 성체성사와 함께 그리스도교 입문성사의 하나이며
이 입문성사의 단일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285항)
그리고 이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미사 중에 견진성사의 예식을 거행하며 세례 때에 서약한 것을 다시 한번
갱신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3.8. 견진성사와 세례성사의 차이점.
(가톨릭 교리서 1303항).
한 마디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완성하고 확인하는 성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성사를 통해서도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선교활동에 참여하는 은혜를 받게 되지만 견진성사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되고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도록 해주며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하게
고백하고 십자가를 부끄럽지 여기지 않도록 증진시켜주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는 요한복음 16,12-13절의 말씀에 따라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는 성령의 힘을 받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선포하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이 체포되기 직전에 도망치기도 하고 제자 중에 으뜸이라는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3번씩이나 배반하며 예수님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다인들을 겁내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는 요한복음 20,19절의 말씀과 사도행전 2장이 전하는 말씀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감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는 이러한 맥락에서
견진성사를 받게 되는 사람에게는 성사를 통해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가 주어진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이 일곱 가지 은혜란
"구원에 필요한 일에 이끌리어 맛들이게 하는 은혜인 슬기"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학 악을 분별케 하는 의견"
"지력이 미치는 데까지 믿음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하는 은혜인 통달"
"유혹을 이기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은혜인 굳셈"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될 것을 분별케 하는 지식"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알고 사랑하게 하는 효경"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죄를 범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게 하는 은혜인 두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견진성사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세례성사 때 받은 성령의 선물이 견진성사를 통해서 내 안에서 강화됨으로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하게
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 주게 되는데 이것이 견진성사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3.9. 견진성사는 왜 받아야 하나?
사람이 살아가는데도 처음 애기로 태어나서 신체적이나 정신적인 성장이 있듯이 신앙 안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성숙의 과정을 거치게됩니다.
처음 그리스도 교회에 입문하여 세례성사로 신앙의 씨앗을 심었다면 견진성사는 그 뿌려진 신앙의 씨앗이
튼튼한 나무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세레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께 신앙의 충실을 약속했지만 그 동안 인간의 나약함과 소홀로 인하여
세례성사 때 하느님과 가졌던 약속이 많이 변질되어 나갔던 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견진성사를 통해서
세례성사 때의 결심을 새롭게 다짐하며 세례성사 때 주어진 하느님의 소중한 은혜를 다시 확인하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는 그리스도의 입문성사에 속하여 왔기 때문에
견진성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매우 중요한 것이란 답이 나옵니다. 때문에 이러한 바탕에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완성과 확인으로 세례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견진성사를 꼭 받아야 한다는
답이 나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견진성사를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 입교에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신앙성숙을 위해서 견진성사는 큰 의미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3.10. 견진성사의 준비와 어떤 사람이 받는가?
신약성서를 보면 성령을 받기 전에 항시 기도하는 자세를 갖추었음이 드러납니다.
루가복음 3장 21-22절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고 계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분에게 내려오시고 사도행전 1장 14절과 2장1절에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모으고 기도할 때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는 무한하고 풍부하며 강력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우리들의 자신에 의해서
그 은혜의 강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름달이 아무리 휘영청 밝다 하더라도 연못의 물이 잔잔하지 못하고
수면 위에 잡다한 잡풀들이 무수히 헝클어져 솟아나 있다면 아무리 밝은 달이라고 하지만 그 빛은 연못에 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처럼 성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사를 받기 위해 우선 내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 마음을 열어 보이는 기도의 자세에서만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닌가합니다.
만약 견진성사를 받을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무조건 견진성사를 받으려 한다면 위의 말과 같이 수면 위에 솟아난
잡풀들에 의해서 은총의 빛을 드러내지 못함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형식에 치우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견진성사는 신앙생활에서 하나의 통과하는 의례나 교회의 자격증을 받는 과정으로 잘못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견진성사를 받으시려는 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자세를 활짝 열고 성사를 통해서 진정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견진성사를 교회법 제866조에 의해서 만 12세 이상 분별력을 갖추고 신앙생활이 열심한 자로써
세례성사를 받은 지 6개월에서 1년이 지난 다음에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3.11.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견진성사를 통해서 받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는 복음이 참된 진리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두려움 없이
증거하고 전파하는 데에 있습니다.
견진성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란 것에 확신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짐이 아니라
기쁨으로 느껴져서 남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어서 5장 22절에서는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재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내리시는 분은 한 분이시지만 성령의 은혜는 지혜의 말씀과 지시의 말씀.
견고한 믿음과 병 고치는 능력(치유의 능력)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
어느 것이 성령인지를 가려내는 힘.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과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 등이라고
고린토 1서 12장8-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다양하게 우리에게 내려지기 때문에 성령을 받고 나서 어느 하나만 성령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돕는 것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는 은혜에 집착하기보다는교회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 신자다운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에 대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가령 자신이 예언의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환자나 혹은 집안에 우환이 있는
이들에게 조상 중에 안식을 누리지 못한 이가 있으니 연 미사를 몇 십대씩 드려라 고 한다면
이러한 이야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질병과 우환의 원인을 조상에게 두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기보다 무속이나 미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의 특색은공동체와 함께 하기보다는 혼자서 치유의 기도를 한답시고 점쟁이처럼
과거의 일을 어떻다고 짚어내려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기보다는 자기 자랑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3.12. 세례명과 대부모를 새로 정할 수 있는가?
세례명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법상 어떻게 하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명을 바꾸기 전에 먼저 자신이 선택하였던 성인의 정신을 올바르게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는지를 생각하고 새롭게 바꾸려는 성인의 이름을 왜 택하는지를 생각해야하겠습니다.
세례명을 바꾸려는 사람들 중에서 현대의 유해풍조에 암암리 편승하여 좀더 예쁘고 멋있게 불리어지고 싶은 마음으로
개명하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은 아닙니다.
세례명을 바꾸기까지는 교적은 물론이고 다른 부속서류까지 정정해야하는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기존 세례명에
다른 성인의 이름을 덧붙이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이라는 세례명에 바오로 사도를 덧 붙여 요한 바오로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견진성사 때 대부모를 새로 정할 수도 있지만 세례 때의 대부모를 그대로 정하는 것도 두 성사의 단일성을 나타내기
위해 바람직합니다.
대부모는 세례성사 때와 마찬가지로 내적 외적인 준비를 도와주고 주교님이 도유할 때, 대자 대녀 옆에서
증인이 되어주며 성령의 은혜 속에서 대자녀가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영신상 여러 가지 도움을 주게 됩니다.
만약 세례 때의 대부모가 돌아가셨거나 멀리 떨어져있다면 영신상 도움이 어려워지게 됨으로 새로운 대부모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3.13. 견진성사는 왜 주교님이 주실까요?
견진성사를 통해서 받는 은혜 중에는 견진성사로 인하여 교회와 유대를 더욱 튼튼하게 하는 것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또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 사목구 안에서의 대표자이고,
사제는 그 사목구 안에서 주교로부터 사목을 위임받은 대리자입니다.
주교가 견진성사를 집전한다는 것은 곧 견진성사가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됨으로
사도들의 후계자이신 주교님이 신자들의 공동체와 함께 성찬례(미사)를 거행할 때, 교회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견진성사는 주교님에게 유보되어 왔으며 매 견진성사 때마다 주교님이 직접 성사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신자가 견진성사를 원할 때에는 사제가 견진성사를 줄 수 있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선물로 완전하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바람하지 못하기 때문에
견진성사를 집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3.14. 비가톨릭 교회에서의 견진성사.
1054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동방교회에서는 견진성사를 도유성사 혹은 성유성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세례성사 후에 즉시 총주교나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가지고 주교와의 연대
즉 교회의 사도직 일치를 표현하면서 사제가 견진성사를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가톨릭교회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목구의 사도가 주교라고 할 때,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는 견진성사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주교가 한 손으로 안수하고
이마에 축성성유를 바르면서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시오" 라고 주교가 직접 집전한 것과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임하시기를 청원한 다음 사제가 견진자 몸의 중요한 부분 이마, 눈, 코, 귀, 입술, 가슴, 손과 발,
등에 축성성유를 바르며 그때마다 "성령이신 선물의 인장"이라고 말하면서 사제가 집전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와의 큰 차이점이라 하겠습니다.
성공회에서는 우리 가톨릭 교회와 비슷하게 세례성사 이후 몇 개월 혹은 일년이 지나고 나면 견진성사에 대한
일정 교육 후에 주교가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있습니다.
그 외 종교개혁자들은 견진성사를 성사에서 제외 시켰지만 17세기이래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자신들이 배척한 견진성사 대신에 자기네 고유의 견신 예절을 종교개혁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형식에 따라
도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15. 견진성사를 받으시는 분께.
견진성사를 받으시는 분께 앞으로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발전되고 주님 안에서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나
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견진성사자께서는 이번 견진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때로는 우리 인간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근본적으로 그 고통과 고난의 시련은 우리들이 회개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갖가지의 방법으로써 다가오고 계신다는 것도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극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은 신의 존재를 벗어난 인간의 형상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희생과 극진한 사랑이 크시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상태에서도 인간이 회계하는 순간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써 받아드리고 계십니다.
견진성사를 받으시려는 교형자매님!
아직까지 마음에 맺힌 것을 풀지 못하고 혹 견진성사를 받으시려 하신다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뉘우치며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회계를 하십시오.
그리고 인간과 원한을 가지고 있다거나 오해가 있다면 인간과도 회계도 하십시오.
또 자연을 무자비하게 훼손하려 하였다면 자연과의 회계도 하십시오. 이것은 회계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회개정신 안에서 세례성사의 완성이자 신앙을 성숙한 위치에 도달하게 하는 견진성사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견진성사를 통해서 내려지는성령의 일곱 가지(성령칠은)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아서 9가지의 열매를
자라게 하는 은혜로운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문화와 문명의 변화에 따라 우리들 삶 자체도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되는 삶 안에서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간의 사회적 생활과 정신을 정화하고
공동생활 발전을 이룩하는데 앞장 써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화이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