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상 어의는 무수히 많았고, 수의(首醫) 또한 언제나 존재했다. 의술의 공으로 당상관 지위에 오른 사람도 적지 않으며, 현종 때의 의관인 유후성이란 인물은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생전에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허준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가 학문적으로 대단한 위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조선의학의 물꼬를 바꿔버리고, 오늘날까지도 한의학도에게 널리 읽혀지는 {동의보감}이라는 불후의 대작이 포함되어 있다.
허준이 쓴 책으로는 7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찬도방론맥결집성},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동의보감},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허준의 언급과 최근에 발견된 한 자료에 따라 2종을 더 추가할 수 있을 듯하다. 먼저 허준의 {언해두창집요}의 발문을 보면 그가 왕명을 받들어 "{태산집}.{창진집}.{구급방}을 지어 올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허준이 쓴 {언해태산집요}와 {언해구급방}이 이전에 있었던 동일제목의 책과 완전히 다름을 볼 때, 아직 발견된 바가 없지만 허준이 새로 지어 올렸다는 {창진집}은 그것의 내용과 크게 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그것은 다른 책이 그렇듯 {동의보감}의 내용과 비슷한 것으로 언해가 딸려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의보감}의 내용 중 [제창문(諸瘡門)]이 창진(瘡疹)의 내용을 폭넓게 다루고 있으므로, 허준의 {(언해)창진집}(?)은 그 부분과 흡사한 내용의 것이었을 것이다.
역사학자 이우성이 중국에서 새로 발굴하여 국내에 영인, 소개한 {태의원선생안}(고종 초기 저술된 것으로 추정됨)에는 또 1종의 허준 저작이 표기되어 있다. '허준' 조에 적힌 {언해납약증치방}이 그것이다. 이 책에는 편찬자에 대한 정보가 적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곧바로 허준의 저작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또 {태의원선생안} 이외에 다른 문헌에서 이 책이 허준의 저작이라고 말한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납약증치방언해}의 거의 모든 내용이 {동의보감}에 나오는 것으로 90퍼센트 이상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 또 언해 형식이 다른 언해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허준의 작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다만 표기법이 17세기 것이 아닌데, 그것은 현존하는 {언해납약증치방}가 초간본이 아니라 영조 무렵에 찍은 판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허준의 저술은 크게 세 부류로 대별된다.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의 편찬, {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언해두창집요}.({언해납약증치방}.{언해창진집}) 등 3종(또는 5종)의 언해본 의서의 편찬, {동의보감}의 편찬, 전염병 전문서인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의 편찬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찬도방론맥결집성}과 {벽역신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의보감}과 깊은 관계가 있다.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가운데, 일부 내용을 추려 별도의 책으로 엮었든지 아니면 {동의보감}의 내용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1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시기별로 보면 {동의보감}과 비교적 관계가 먼 {찬도방론맥결집성}은 젊은 허준의 첫 작품이며, {벽역신방}은 '성홍열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는' 허준의 최후 저작이다.
허준은 그의 나이 43세 때 첫 저작 {찬도방론맥결집성}(1581년)을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제목의 책의 잘못을 교정한 책이다. 원저는 6조 때 고양생이 쓴 진맥에 대해 노래 책인 {맥결}이며, 그 노래의 출간 이후 여러 사람이 그 책에 주석을 달았으며, 원대의 어떤 인물이 그 주석을 모두 모아 책으로 묶은 것이 바로 {찬도방론맥결집성}(4권)이다. 이 책은 초보자의 진맥학 학습서로 뛰어난 것이었으나 자체 모순을 보이는 등 문제점이 계속 지적되어 왔었다. 허준은 왕명을 받아 자신의 의학적 지식으로 중국에서 편찬된 이 책의 오류를 바로 잡는 일을 했다. 이 책의 편찬으로 허준은 학의(學醫)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허준의 두 번 째 책은 15년 후인 그의 나이 58세(1596년) 때 시작되었다. 그것이 14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동의보감}(1610년)이다. 선조는 당대에 마구 쏟아져 나온 명나라의 의학에 불만이 많았다. 그것이 몸의 수양이라는 양생의 대의에 기초해 있지 않았고, 지엽말류 같은 내용이 마구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이정구(李庭龜)가 쓴 {동의보감} 서문을 보면 "우리 선조대왕께서...병신년간(1596년)에 태의(太醫) 신(臣) 허준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요즘 중국(中朝)의 방서(方書)를 보니 모두 자잘한 것을 가려 모은 것으로 참고하기에[觀] 부족함이 있다. 너는 마땅히 온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는 대목에서 선조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학에 밝았던 선조는 새로 편찬할 책의 성격까지 규정해주었다. 그것은 첫째 "사람의 질병이 조섭(調攝)을 잘 못해 생기므로 수양(修養)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둘째 "처방들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그 요점을 추리는 데 힘쓸 것", 셋째 "벽촌과 누항의 사람들이 의원과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도,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생산되는 향약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몰라 약으로 쓰지 못하니 책에 우리 나라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할 것" 등 세 가지였다. 물론 이런 명령이 허준의 교감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선조를 의주까지 따라갔던 어의 허준과 선조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의 관계를 뛰어 넘어 인간적, 학문적으로 교감하는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허준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학문적 믿음이 없었다면 이런 '무모한' 명령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준은 왕명에 따라 유의 정작, 다른 어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편찬국을 만들어 책을 편찬해나갔으나 이듬해인 정유년(1597년)에 재란하였기 때문에 책의 뼈대만 잡은 채로 작업이 중단되었다. 다시 난이 수습된 후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선조는 {동의보감}의 편찬을 허준 단독으로 편찬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혼자 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진척이 더뎠다. 그가 귀양을 가기 직전까지(1608년 3월)까지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바쁜 어의 일에 신경을 쓰느라 책에 전념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 책 쓰는 일에 전념한 듯 보인다. 그는 이후 2년 5개월 동안 절반이 넘는 내용을 채워 1610년 8월에 그것을 조정에 바쳤다. 귀양살이 1년 8개월은 인생살이에서는 쓰라림이었겠지만, 그의 학문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대 후원자인 선조를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선조와 그 사이의 약속, 곧 중국의학을 능가하는 의서의 편찬이라는 유훈을 묵묵히 실천해냈다.
한의학사에서 볼 때, {동의보감}(25권)의 구성은 이전의 그 어느 것과 다르다. 단순히 다를 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형태를 띤다. 한의학사에서 처음으로 {동의보감}은 대분류 방법을 통하여 전체 의학 체계를 분류하였다.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 다섯 가지 기준이 그것이다. 이렇게 편을 나누게 된 까닭을 허준은 [집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이 책은 먼저 내경(內景)의 정, 기, 신, 장부로 내편(內篇)을 삼고, 다음으로 외경(外境)의 두(頭), 면(面), 수(手), 족(足), 근(筋), 맥(脈), 골(骨), 육(肉)으로 외편(外篇)을 삼고, 또한 오운육기(五運六氣), 사상(四象): 望, 聞, 問, 切), 삼법(三法: 吐, 汗, 下), 내상(內傷), 외감(外感), 제병(諸病)의 증상을 나열하여 잡편(雜篇)으로 삼고, 끄트머리에 탕액(湯液), 침구(鍼灸)를 덧붙여 그 변통의 이치를 다 밝혔다.
이 글에서처럼 허준은 도교적 양생사상에 입각하여 {동의보감}의 큰 줄기를 세웠다. 먼저, 그는 "도가(道家)는 맑고 고요히 수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의학에서는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로 치료를 하니, 이것은 도가는 그 정미로움을 얻었고 의학은 그 거친 것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몸의 생명력을 기르는 양생술이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의학보다 우선함을 천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병의 치료와 관련된 탕액(湯液)과 침구에 관한 내용을 끄트머리에 놓았으며, 몸을 기르는 행위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각종 병에 관한 내용을 중간에 놓았다. 다음으로, 양생과 관련이 있는 신체에 관한 내용을 안팎으로 나누어 책에 앞에 차례대로 배열하였다. 그 중 정, 기, 신, 오장육부 등 몸 안의 존재하는 것들이 몸의 근본을 이루는 동시에 양생의 도와 밀접하므로 맨 앞에 놓았으며 근골, 기육, 혈맥 등은 몸의 형체를 이루는 것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허준은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에는 강한 의학 전통과 정 . 기. 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체관을 정립한 양생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명, 신체, 자연환경과 인간의 질병, 질병의 치료를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양생과 의학 전통을 결합하여 신체관을 정립하고 그 신체관에 따라 각종 몸의 부위와 질병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동의보감}이 17세기 조선의 생명관 또는 신체관을 가장 잘 확립한 사상서로 높이 평가한다.
{동의보감}의 완성에는 14년이 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허준은 언해 의서 4종(여기에 {언해납약증치방}까지 보탠다면 5종이 된다)을 펴냈다. 이 모든 것은 1601년(63세 때) 봄부터 시작하여 8월까지 불과 몇 달 안에 이루어졌다. 짧은 기간 동안에 이 네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계속해서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들의 편찬 동기는 {동의보감}의 그것과 다른 데 있었다. {동의보감}이 중국 의서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데 주목적이 있었다면, {(언해)태산집요}.{(언해?)창진집}.{(언해)구급방}이 책들은 왜란으로 망실된 의서를 대체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언해납약증치방}을 내게 된 까닭도 이 세 책과 같이 망실된 의서의 회복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의서 회복 차원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을 같은 제목의 것과 비교해서 볼 때 그 내용이 훨씬 체계적이고 잘 다듬어져 있다. 또 새로 수입된 명의 의서가 충분히 활용되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전 의서의 대체, 보완이라는 말보다는 그 분야에 대한 새로운 책을 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해태산집요}(1권, 81쪽)은 아이를 얻는 방법, 잉태에 관한 제반 사항, 임신부의 헛구역질하는 증상인 오조, 태를 편안하게 앉히는 방법, 제반 출산 방법, 출산 전 임산부의 각종 질병과 치료, 산후 각종 질병과 치료, 아이를 별탈 없이 낳게 하는 태살방위법, 소아구급법 등의 내용을 실었다. 세종 때 나온 {태산요록}과 비교해보면, 산모의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각종 방법보다는 의학적 처치, 즉 여러 증상에 대한 명확한 서술과 적절한 처방의 제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언해구급방}(상하 2권, 185쪽)에서는 위급한 상황의 발생과 해결, 죽게 되는 경우의 처치법, 여러 가지 부스럼과 외상에 대한 처치법, 중독과 해독 등의 내용을 다루었다. 세조 때의 {구급방(언해)}와 비교해서 본다면, 구급의 범위가 훨씬 넓고, 또 구급 방법으로 명 대 이후의 저서에서 많은 내용을 채웠다. 대부분의 내용은 {동의보감}의 여러 군데에 나뉘어 설명되어 있다.
{언해납약증치방}(1권, 74쪽)에서는 납약, 곧 매년 12월(납월)에 내의원에서 만드는 각종 상비약을 말한다. 이 책에서는 우황청심환 등 27가지 상비약을 실었다. '증치(症治)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약들로 고칠 수 있는 각종 증상을 언급하였으며, 약 먹을 때 조심해야 할 금기도 실었다. 납약들이 듣는 각종 증상과 금기를 일목요연하게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언해두창집요}를 쓰게 된 동기는 위의 책들과 다르다. 망실된 의서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편찬된 것이 아니라 두창에도 약을 써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편찬한 것이다. 즉, 허준이 왕자의 두창을 고친 것을 계기로 해서 두창에도 약을 써서 고칠 수 있다는 점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또 그것을 언해하여 부녀도 쉽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두창}에 관한 전문 서적은 결코 이전에 없었다. 이 책이 처음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당시 두창은 약을 써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금기의 대상으로서 의학계에서도 감히 이를 깰 엄두를 내지 못하던 질병이었다. 사람들은 두창이 두신(痘神)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를 노하게 하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의학적 접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조 때 임원준이 편찬한 {창진집}에는 두창을 치료하기 위한 내용을 일부 실려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허문(虛文)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효과를 신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허준이 광해군과 왕자, 공주 등을 고친 것을 계기로 강한 금기를 깨려고 했다. 허준의 "믿을만한 처방"을 계기로 {언해두창집요}를 지어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던 것이다. {언해두창집요}(상하 2권, 285쪽)에는 두창이 생기는 이유, 두창과 유사 질환의 구별, 두창이 안 생기도록 하는 방법, 두창에 전염되지 않는 방법, 두창의 경과와 각 단계에 대한 적절한 처치법, 두창 때 죽는 증상과 안 죽는 증상, 두창 때 좋은 예후와 나쁜 예후, 두창 때 생기는 각종 합병증과 그것을 치료하는 법 등을 망라하였다. 명대에 나온 여러 문헌을 많이 참고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언해두창집요}의 대부분 내용을 {동의보감} [소아]문에서 볼 수 있다.
1610년 {동의보감}이 완성된 이후에도 허준은 두 책을 더 썼다. 두 책 모두 1613년(75세 때)에 북쪽 지방에서 유행하던 열성 질환인 온역(瘟疫)에 대한 대책으로 씌어진 것이다. 온역은 요즘의 급성 티푸스 질환으로 추정되는 질환이다. {신찬벽온방}(1권, 40쪽)을 온역을 다룬 이전의 모든 의서와 비교해 볼 때, 허준의 {신찬벽온방}은 가장 체계적이다. 허준은 {의학정전}이나 {의학입문} 같이 당시 최신 서적들에 담긴 내용을 참고하면서, 이전의 온역 이론과 처방을 재정리했다. 이는 반드시 의학적 대응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예방과 기양(祈 )이라는 측면에서 주술적인 방법도 다수 포함했다. 그리하여 온병이 생겨나게 된 주원인과 부수적인 요인, 온역이 생겼을 때의 맥의 상태, 계절에 따른 온역의 제반 증상과 각각의 치료법, 온역의 침투에 따른 여러 증상과 각각에 대한 치료법, 유사질환, 온역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법과 약물 처방, 온역을 예방하는 법, 침 치료법, 고칠 수 없는 증상, 온역에 걸렸을 때의 금기 등 모든 측면이 온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벽역신방}(1권, 16쪽)은 1613년 겨울 북쪽 지방에서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는 그 병의 원인과 증상,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여러 처방이 실려 있다. 매우 간단한 책이지만, 허준의 다른 의서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다른 문헌이 이전의 문헌을 존중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에 충실했다고 한다면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관찰과 해석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유례가 없었던 새로운 질병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의학자가 특정 질병을 연구하여 이름을 붙이고, 병의 증상과 원인을 탐구하여 책자로 정리한 것은 이 책이 최초이다. 또 전염병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귀신소행설'을 완전히 떨쳐버린 것도 이 책이 최초이다. 대신에 그는 의학의 합리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허준의 성홍열에 대한 세밀한 관찰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을 통틀어 성홍열과 유사질환을 구별해낸 최초의 것이었으며 세계홍역사상(世界紅疫史上)으로도 가장 이른, 또 정확한 기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허준이 {동의보감}으로는 동아시아 한의학을 한 차원 높게 정리해냈다면, 그의 최후의 저작으로는 세계질병사에 한 획을 긋는 '성홍열' 감별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이는 허준의 만년이 지지부진한 것이 아니라 최후까지 학문적인 불을 태웠고, 그 불은 마지막에 가장 빛나는 광채를 띠었다.
허준이 역사에 이름을 남게 된 것은 그가 쓴 책에 담간 그의 의학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의학적 성취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첫째는 조선 의학사의 관점에서이다. 한마디로 허준은 조선 의학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그 이전의 조선 의학을 모두 갈아치우면서 그 이후 조선 의학의 전범을 제시했다. {동의보감}이 그것이다. 후대의 많은 조선 의학자들은 허준의 의학에서 자신의 공부를 시작했다. 또 그가 정리한 {찬도방론맥결집성}은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의과 시험의 교재로 활용되어 의학 초보자 학습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고, {언해구급방}, {언해태산집요}, ({언해창진집}, {언해납약증치방}) 등은 민간에서 가장 시급하고 요긴한 기본 의학 지식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동의보감}이 고급 의학으로서 높은 수준의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다면, 이런 의서는 낮은 수준에서 의학을 손쉽게 배우고 의료를 널리 확산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둘째는 동아시아 의학사에 대한 기여이다. {동의보감}은 출간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려서 중국 의서 가운데에서도 {동의보감}과 성격이 비슷한 종합의서로서 {동의보감}보다 많이 찍은 책은 불과 몇 종에 불과하다. 이렇게 널리 읽힌 것은 {동의보감}에서 이룩한 의학적 성취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두 갈래로 흩어져 흘러온 양생과 전통과 의학의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종합하였다. 병의 치료와 예방, 건강도모를 같은 수준에서 헤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동의보감}은 병의 증상, 진단, 예후, 예방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냈다. 중국 의학 책 중에서 {동의보감} 만큼 이런 내용이 잘 갖춰진 책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동의보감}의 성취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한의학 전통의 핵심을 매우 잘 잡아냈다는 점이다. 허준은 엄청나게 거대한 한의학 전통에서 2천 여 가지의 증상, 1천 여 가지의 약물, 4천 여 가지의 처방, 수 백 가지의 양생법과 침구법을 뽑아냈는데, 그것은 한의학을 종합하기에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분량이다. 허준은 의학 경전의 정신에 따라 그것을 취사선택하여 신뢰성을 높였다. 허준은 또 자신의 뛰어난 편집 방식과 임상 경험으로 그것을 엮어내어 자신의 {동의보감}을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주목받는 책 가운데 하나로 올려놓았다.
셋째는 세계질병사에 대한 기여이다. 허준은 성홍열 연구를 통해서 매우 면밀한 관찰 결과를 보고했는데, 그것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었다. 허준은 두창, 수두, 홍역, 성홍열 등의 유사질병을 구별하여 하나의 '전염병학'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 적이 없다. 다만 민간에 만연하는 무시무시한 역병에 대해 그 시대를 사는 의학자로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60여 년 동안 허준 개인이 이룬 의학적 식견과 경험이 깔려 있었다. {동의보감}에 비한다면, 허준의 성홍열 연구는 이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오늘날 의학의 관점에서 내리는 것일 뿐이다. 이런 한계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허준의 성홍열 연구를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유사 질병을 가려내는 일이 여간한 의학적 관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