尊敬하는 白相承市長님
李源萬正校님을 비롯한 獻官 大祝 執禮 및 諸執事 여러분!
鄕內外 祭官 여러분! 杜村할아버지 子孫 여러분!
今年은 杜村 할아버지가 殉節하신지 407年이 되는 해입니다.
正祖께서 杜村할아버지의 功德을 旌閭하사 우리 마을 어구에
忠臣之門을 세우고 表忠閣을 지어 神道碑를 모신지 211年이
되는 해입니다.
이 德山書社는 그로부터 140년이 지난 1923년에 建立되었
으니 只今으로부터는 81年前이 되겠습니다.
杜村할아버지의 不滅의 功德은 領議政 樊巖 蔡濟恭선생의 墓
碣銘, 副提學 淸臺 權相一선생의 墓誌銘, 左承旨 艮翁 李獻慶
선생의 招魂辭와 縣監 驪江 李憲洛선생의 招魂墓詩, 禮曹參判
洪良浩선생과 禮曹參判 金尙集선생의 旌閭記, 領議政 鄭存謙
선생의 旌閭碑文으로 昭詳히 記錄되어 現存하고 있습니다.
이 德山書社의 建立에는 숫한 事緣이있습니다.
1923年이면 日本曆으로는 大正12年입니다.
日帝의 强占期입니다.
己未獨立萬歲事件이 있은지 불과 4년後이며 日警의 눈이 가
장 따가웠던 時期입니다.
이러한 때 나라를 걱정하는 嶺南의 憂國之士 125名이 玉山書
院에 모여 西紀1783年 (正祖7年) 王命으로 旌閭되시고 忠臣之
門이라 命名되신 杜村할아버지를 모실 書社가 없음을 恨歎하
시어 가진 受難을 무릅쓰고 書社建立을 決議하심으로서 오늘
의 이 書社가 마련되었음은 모두 周知하시는 바입니다.
나는 우리 先賢들이 왜 何必이면 日帝强占期에 이 書社建立을
위한 悲壯한 決議를 하셨을까를 한번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
다.
壬辰倭亂이 우리가 겪은 倭로부터의 첫 번째 受難이라면 韓
日合倂은 分明 그보다 몇갑절 더한 제2의 受難입니다.
그 때를 當하여 鄕內 온고을의 선비들이 하나가 되어 救國의
決議를 다지는 具體的인 行動의 表出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
나 생각 해봅니다.
따라서 이 書社에는 杜村할아버지의 功德을 기리는 뜻에 더하
여 보다 큰 뜻을 우리 어른들은 담으셨다고 나는 確信합니다.
이 德山書社는 但只 壬亂에 이어지는 한 어른의 追慕의 場이
기보다는 日帝36年을 통한 民族 受難의 雪憤을 圖謀함이며 抗
日運動의 表象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하여 德山書社는 日
帝强占期에, 우리의 決意를 다짐한 崇高한 國家的 抗日 有形
精神文化財입니다.
尊敬하는 市長님 그리고 鄕內 先輩여러분!
나는 오늘 이 자리가 1923年의 玉山書院에서의 書社建立決議
에 이어지는 德山書社의 抗日文化財로서의 存在意義를 再照明
하는 場으로 昇華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今年에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西齋를 新築했습니
다. 東齋를 改築했습니다.
여기 저기 丹粧도 했습니다.
子孫으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마는 抗日의 얼이 깃든 이
書社가 아직 文化財 登錄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子孫들
이 不敏한 탓으로 事理를 分明하게 要路에 疏明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훌륭한 子孫들을 輩出한 다른 門中에서는 祖上의 履歷을 昭
詳히 後世에 밝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니 祖上을 대할 面目
이 없음이 率直한 저이들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行事를 빛내주신 市長님, 그리고 獻官 大祝 執禮
여러분!
이 書社가 꼭 文化財登錄이 되어 後孫들이 歷代 祖上님앞에 고
개를 들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懇請합니다.
여러 聖賢께서 杜村할아버지는 決코 淸安李門만의 할아버지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라의 할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호소도 아무때나 아무곳에서나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性質의 것은 아니기에 오늘 이러한 好機를 맞아 저의 門中의
哀切한 所願을 披瀝하오니 많은 보살핌이 있기를 懇請합니다.
無理한 時間을 割愛하셔서 枉臨하여주신 白相承市長님에게 다
시 한번 感謝드립니다.
感謝합니다.
2004년 5월
(참고 : 이 글은 04/05/07 덕산서사 향사시에 내방하신 경주시장과
당일 헌관, 대축, 집례 및 제집사에게 호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