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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제동성당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강목동
* 내가 아니면 누가, 오늘 아니면 언제 * -- 이해인수녀 --
주.** 이글을 올리는것은 한일도 없이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고 한맺힌채로 사라져 가는 희생양들을 좀더 널리알리고 함께 한을 풀어주자는 뜻에서 입니다.**
일제시절 종군위안부는 10만여명으로 추산 되지만 한국에서2004년에 종군 위안부로 자진 등록한분은 220분 이었으나 불과 4년이 지난 현재는 60%가 사망하시고 불과 90여분이 맺힌한을 못 푼채로 연명하고 계신다. * 과연 누구의 책임이며 누가 이분들의 한을 풀어 드릴수 있을까?
방문 동기 : 8월 16일자 본당 홈페지 게시판에 올라있는 서수미아녜스의 "연극 *나비*를 보고" 라는 글에 종군위안부의 처절한 하소연을 읽고 화도나고 흥분되어 그분중 누구라도 당장 찾아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알지도못하는 (홍제동에 이사온지 1년) 자매님께 댓글로써 대화하여 위안부역사박물관과 그곳에 기거하시는 7분의 생존자를 알게 되었고 홍제성당 대건회명의로 8월24일(주일)방문허가를 받게 되었다.
방문멤버 구성 : 내차는 7인승 카렌스이라 7명을 선정하는데 고심끝에 대건회 네사람(모두 레지오 원) 우종각/이재필/최승환/강신영 과 앞으로의 지속적인 활동을 고려하여 마당발 여성 두명 (김병숙/최혜숙)과 나비의 장본인 서수미아녜스 도합 7명으로 했다. 당초 계획일정보다 일주일 앞당겨지는 바람에 인원 선정에 다소 혼선도 빚어졌다.
종군 위안부 역사박물관 방문기 : 멤버 7인은 각자 특전/9시미사를 드리고 약속대로 오전 10시 정각에 본당집합했다, 서수미씨가 예약한 떡이 도착되었고. 그분들이 포도를 좋아한대서 포도를 두상자 사서 차에 실으니 차가 비좁았다. 퇴촌면 원당리에 가본사람이 없어서 그곳 소장에게 핸드폰으로 묻기를 수차례, 차를 세우고 길가는 사람들에게 수차례 물어물어 시골 산골자기에 위치한 박물관에 도착하자 소장이 나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두시간이나 걸렸기에 점신시간이 임박하였으나 인근에 음식점이 없다기에 점심은 그냥 거르고 우리가 준비한 떡과 과일을 조금 꺼내어 먹으려 하였는데 주일이라 외출한분도 있어 밥이 좀 여유있다고 하여 그곳의 위안부할머니 7분과 우리 7명이 같은 방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들은 과거의 악몽과 수치심때문에 좀처럼 입을 열지도 않고 눈길도 주지 않았으나 식사후 후식으로 우리가 준비해간 떡과 포도를 정성들여 내놓고 나누면서 자연 스럽게 대화가 시작 되었고 말솜씨좋은 사비나/맥틸다/아녜스가 그분들의 말에 애교스런 맞장구를 쳐주자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일제 종군위안부 실상 : 일본은 세계대전시 동남아 정복을 목적으로 한국/중국/필리핀/싱가폴등과 전쟁을 통하여 잔악한 통치를 시작했으며 일본군이 장기간 외국진영에 머무르는동안 군인들의 성적 충족을 위해 한국/중국/대만/필리핀/홀랜드의 어린 여성(13세~16세) 들을일본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해준다는 속임수를 써서 해외 주둔 일본군 벙커내 두평정도의작은 방에 가두고 목침대와 물 대야 하나만 있는방에 위안부의 일본이름 문패를 달아주고 줄을서서 기다리는 군인들에게 차례대로 성폭행을 당했다. 더러는 군표(군인이 쓰는 돈)를 팁으로 받았으나 외출도 못하는위안부로서는 전혀 쓸모없는 휴지쪽에 불과했다. 1945년 세계 2차대전에서 패망한후 일본군은 퇴진하고 해외(오끼나와/일본/중국/필리핀/싱가폴)에 버려졌던 위안부들은 해방의 기쁨은 커녕 일본인 취급을 받아 잡혀가서 현지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일부는 일본에 일부는 중국에 남아서 연명을 하면서도 그들은 본인들의 수치스런 과거를 숨겨야만했다. 그당시 위안부 총수는 줄잡아 10만명 정도 였다고 한다. 정부도 이 사실을 발표하거나 관여하기를 꺼려해 왔다. 많고많은 한국인 종군위안부 출신중에 자진 신고한분은 2004년에 220명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4년이 지난 오늘 60%가 사망했고 생존자는 90여명에 불과하며 이곳 퇴촌에 있는 박물관에서 사시는분은 연고가 없거나 가난한자분들로서 98년도에 10분이 입소 하셨는데 전에한분/올해두분이 돌아가셔서 이제 7분이 남아계시고 그분들도 모두 80세 이상이라 몸이 성한분이 없었다. 앞으로 4-5년내로 거의다 돌아가실것 같아 박물관 전시관에는 그분들의 사진/발도장 족적/ 손도앙의 손적을 보관하고 있었다.
위안부 역사관 : 불교 조계종에서 사단법인으로 건설및 운영 최초의 증언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영상 영화실 (역사적 설명과 증인들의 증언)상영 당시의 위안부 방의 모형 (실물크기) 문패/군표/삿구등 일본정부의 판결문/사망하신 위안부들의 사진과 유품/추모의방 등
관람가능시간:오전 10시~오후5시 (월.수요일은 휴관) 관람료: 성인 5000원초,중.청소년 3000원
천주교 신자인 위안부 : **이옥선안나 (82세) :경상도 부산태생. 13세에 중국 훈춘으로 끌려갔다가 해방후 연변에 살다가 한중국교 체결후 2000년에 한국에와서 보니 사망신고 되어있어 국적을 줄수 없다는 정부와 3년간 싸워 (여기 이렇게 살아왔으니 잘못된 사망 신고를 취소하고 국적을 달라고 싸움) 2003년에 국적 취득하여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음 . 북한출신 천주교 신자와 결혼하였으나 본인은 양심적 가책으로 영세를 받지 않다가 한국 수녀님의 설득 "강제로 당한것은 죄가 아니다" 을 듣고 영세를 받아 매일 묵주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함. 책상위에 성모님상과 십자가 고상이 있어 일행 모두가 함께 기도를 드리다보니 사찰에서 주모송 바치는 체험도 했다. 그곳에서 불교가 아닌 천주교를 믿는 용기가 돋보였다. 그날도 성당에 주일미사 드리고 늦게 오셨다.
**김군자 요안나 (83세)경상도 상주출신 창피한듯 별로 말이 없었다. 며칠저 걷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쳐서 성당 (천진암)도 못가고 누워 계셨다. 종군 위안부들은 모두 부산에서 배를 태워 끌고 갔기때문에 주로 경상도 처녀들을 데려갔댄다. 기도를 하고 싶어도 낮에 방문객들 때문에 매일 새벽 3시에 묵주의 기도를 바친댄다. 동행했던 세 자매님들이 달라붙어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자 아프다면서 잠시후 사양하는데 친절도 받아들이기가 쑥스러운 표정 이었다. 두시간여 대화를 나누다가 그방을 나올시간이 되자 우리 맥틸다가 먼저 흐느끼더니 아녜스/ 사비나도 흐느꼈다. 나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고 튀어나와서 화장실로 달려가서 손수건을 적시며 맥힌 가슴을 두들겼다. 그분 다리라도 우선 나았으면 좋겠다.
나눔의집 연락처및 가는길: 그분들이 사는곳을 "나눔의집"이라고 한다. 주소: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65 ( 천진암에서 20분거리) 출장소장 (책임자) 면회신청 연락전화 :031-768-0814 안신권 소장 가는길 :중부고속도로 광주(경안)인터체인지에서 천진암 방향으로 가다가 전화하여 물어보면서 갈것 ( 매우 어려운 길로감) 참고사항 ** www.nanum.org ***
작별인사.: 김군자 요안나할머니는 아픈다리를 뒤척이더니 의자를 밀고 방문앞까지 나와서 젖은 눈시울로 묵묵히 손을 흔들었고 이옥선 안나님은 검물 출구까지 나와서서 빽밀러로 차가사라질때까지 손을 흔들더니 손수건을 눈으로 향했다.
내친김에 향한 천진암 성지 : 우리 방문단은 차안에서도 가슴이 막혀 잠시 아무말도 못하고 차안의 고르지못한 숨소리에 분위기는 더욱 우울했다. 운전하던 내가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천진암 성지에도 잠깐 들립시다" 아침에 출발할때는 갔다가 빨리 돌아와야 한다던 자매님들이 세상물정은 잊어버린듯 이구동성으로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오늘 새벽에 인왕산 등정후 서소문 성지에 들려왔기에 천진암을 걸어올라가는데는 숨이 헉헉 거렸고 다리도 끌려갔다.
수원교구가 가난해서인지 성지는 10년전이나 5년전이나 소폭의 변화만 있었고 대성전은 건축시작도 못했다. 수천평되는 공사터의 가장자리에는 클로바만 자라고 있었다. 땅을 물끄럼히 바라보고있던 사비나가 순식간에 네잎 크로바를 두개나 찾아 소중히 간직했으나 다른일행은 하나도 못찾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지에서 네잎 크로바를 두개나 찾았으니 사비나는 큰 사랑을 만나겠구나" 하고**
성지를 나오면서도 가슴은 뚤리지 않자 아녜스가 "우리 천진암 계곡에 쉬어가요" 라고 하자 만장일치로 찬성하였고 우리는 물가에 앉아서 물소리 들으면서 떡과 포도를 나누면서 시장기를 메웠다. 맥틸다가 찬물에 발을 담그자 우요셉은 맨발로 계곡물에 들어갔고 일행모두 발을 적시자 더위도가고 갑갑했던 가슴도 뚫렸다. 돌아오는 왕복 2차선 도로는 주차장 모습이었고 홍제동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좀 넘었다. 일행은 그사이에 정이들었고 섭섭하게 헤어졌다,
당부의 말씀 :
우리는 TV 를 통하여 임신한 위안부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분이 1921년생 박영심 할머니라는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분도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앞으로는 1-2년내사망하실분이 급속도로 많아질 것입니다. 그날에도 일본인들이 두대의 버스로 찾아와 방명록어 서명하고 있었으나 정작 한국인은 우리포한 15명에 불과하여 야릇한 심정을 느꼈습니다. 나라를 넘겨주었기에(혹은 빼앗겼기에) 그분들이 속아서 당했고 한이 맺혀졌으며 한평생을 어둠속에서 사시다가 사라져 가는 그분들을 국가도 국민들도 방관하고 있습니다. 의사한분도 없는 그곳에서 동물원의 힘빠진 원숭이처럼 먹거리와 취침으로 생을 마감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방관한채로 희희낙락 인생을 즐긴 우리들은 스스로 천국행을 믿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요안나님이 필요한것좀 말씀해 주세요" 라는 나의 하소연에 머리를 저으면서 "아무것도**" 또 "저희들이 자주 와서 재롱을 부리면 받아 주시겟어요? " 라는 질문에 맥없이 고개를 끄덕인 대화의 의미를 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글 솜씨가 없는 저의글을 끝까지 읽어주고 관심을 표시한 여러붕 가정에 위안부님의 고통의 보답으로 주님의 참평화와 건강이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혹시나 지속적으로 그곳을 방문하여 그분들과 사랑을 나누며 대화해주실분은 위에 적힌 방문자일행 또는 현지 소장에게 방문허가를 사전에 받고 대화시 주의사항을 인지하신후 가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구경가는식으로 가서 헤튼소리만 하고 오려면 차라리 그곳 위안부 박물관만 구경하고 오십시오. 그분들을 다시 속여서는 안됩니다.
글쓴이: 홍제동성당 대건회총무 강신영 그레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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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 총무님의 신심은 익히 체득 하였읍니다만 이곳에서 활동하고 계셨군요. 그리고 이렇게 세밀하고도 꼼꼼하게 글을 올려 주셨군요. 정말 대단 하세요. 전심으로 그분들을 염려하는 형제님의 사랑이 동기부여 줄수 있을 것 같아서 퍼서 본당 계시판에 올리고 싶은데 괜찮으실지요?
저의 졸필을 본당게시판에 올린다니 영광이지만 좀 쑥스럽네요.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이글도 hongje1004 카페의 *쉼터게시판*에 원문이 있으니 안옮겨지면 그곳에서 퍼가시면 됩니다. 이곳까지 방문해주신 *아녜스*님께 대건회일동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