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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애굽기 2:16~25
제목: 그 많은 날 동안에 (During those many days)
출애굽기 1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두 보존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면, 2장에서는 그 백성에 대한 구원의 구체적인 실례로 히브리인의 남자아기 모세가 나일강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존하게 되는 세부적인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히브리 남자 모세의 생존과정과 성장과정에 대한 내용전개를 통해서 육체적 생물학적으로 성장한 이후에 모세는 바로 딸의 아들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정신적으로 장성하여 히브리 민족이 자신의 형제임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히브리인을 죽일 정도로 때리고 있는 애굽인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그 애굽인을 쳐서 죽이게 되었으며,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죽이려 하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내용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는, 아기 모세가 생물학적 정신적 성장과정 모두를 통하여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을 감당할 지도자로 준비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성경본문은 지도자로서 준비되어 가고 있는 모세에 대해서 그 어떤 내용도 알려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실제로, 모세가 친어머니 품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성경본문은 “그 아기가 자라매”라고 한 문장으로 요약하며, 또한 이후에 바로의 궁에서 성장하여 40세로 성숙한 모세에 대해서도 성공본문은 “모세가 장성하였다”라고 짧게 보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본문은 그 40년 동안에 모세가 친어머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히브리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성장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애굽의 궁에 들어와서 공주의 아들로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당대 최고의 학문과 지도자 과정을 섭렵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 모세의 40년 인생은 단 두 줄로 정리됩니다.
“그 아기가 자랐다”, “모세가 장성하였다”.
참으로 짧고도 단순한 보도입니다. 그러나 짧은 서술이라고해서 결코 중요도가 떨어지는 진술이냐? 무시할 수 있는 문장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모든 히브리 남자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져 죽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아기모세도 히브리인으로 태어났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소년으로 까지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진술울 통해 우리는 모세가 아기에서 소년으로 자랐다는 것은 결코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분명한 성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소년 모세는 히브리 남자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의 진원지인 바로의 궁에서 나이가 40세가 되기까지 “장성하였다”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출신성분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이 공개된 바로의 궁에서,
▪히브리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의 궁에서 모세는 40세까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단순히 아기시절에만 죽음을 면한 것이 아니라, 40세까지도 계속해서 마땅히 죽임당할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었음을 성경본문은 힘주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아기 때 안죽었으니까 평생동안 죽음의 위협에서 자유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로딸의 아들로 성장하여 나이 40세의 모세이지만 죽음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성경본문 출2:15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큰 죄를 지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죄에 대한 내용이 알려졌으면 바로는 당연히 그 사실을 조사하며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모세를 심문해야 하는 것이 적절한 단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로는 모세를 죽이고자 찾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바로가 모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본문은 오히려 바로가 모세를 죽일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뉘앙스를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2:15]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여기서 미디안 땅은 지금의 아라비아 사막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였다는 말은, 그 미디안 땅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찾는 바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미디안 땅에 와서 모세는 미디안 사람들과 만나게 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도망쳐 와서 머무르고 있는 이 미디안 땅에서 만나게 되는 미디안 사람들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오게 한 중심인물, 요셉이 그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다가 그 죽음을 면하고 팔려가게 될 때에 요셉을 노예로 사서 대가를 지불했던 사람들이 바로 미디안 사람들이었습니다.(창37:28, 그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요셉을 사서 애굽으로 내려갔던 그 미디안 사람들을, 오늘 모세는 애굽에서 도망쳐 올라와 다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으로 애굽에 내려갔다가 총리대신이라는 애굽의 제2인자가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반대로 모세는 바로공주의 아들의 신분에서 이제는 바로가 죽이려고 하는 히브리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한 인물이었다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내야하는 인물입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을 가뭄의 재앙에서 구원하였던 인물이라면, 반면에 모세는 애굽에 내린 재앙에 깊이 연루된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세는 요셉과 매우 유사한 삶의 이동경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동 방향은 정반대지만, 동일한 이동경로를 통해서 모세 역할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 보여줄 인물이라는 것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경본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항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세가 그 요셉과 동일한 삶의 이동경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와도 동일하게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결국 요셉이 주도했던 입애굽과 정반대의 출애굽 과정은, 모세의 행로를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행로중에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번 확인시켜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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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22 모세의 미디안 생활]
모세가 도망자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 동족이 죽음에 처할만큼 심하게 매를 맞고 있던 자기 동족을 도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세는 자기가 도움을 준 히브리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으며, 자기민족을 도운 일로 인해 애굽사람을 쳐죽인 일이 탄로나게 되어 도망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모세는 미디안광야에 도착해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을 모세가 도와주는 것을 보게 되는데, 미디안 사람들에게 모세는 환영받게 됩니다.
출애굽기2:16~17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그들의 아버지 양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다른 목자들이 와서 그 딸들을 쫓아내자. 모세는 그 딸들을 도와 목자들을 보내고, 다시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돕고 , 그 딸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특히,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은 19절에서 모세가 자신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었다(나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장 본문들에서 모세가 개입하고 있는 두 사건을 통해 모세의 역할이 항상 돕는 자 혹은 구원자(해결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자신은 .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나그네이며, 도망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을 전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상황가운데로 더 멀리 내몰려 버리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와같이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이지만, 여전히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만 그는 도망자입니다. 마치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이지만, 보디발 집에서 노예였으며,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출애굽기 1장부터 출애굽기를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은 분명히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2:1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는 모세의 상황을 보면서, 출애굽에 대한 기대를 가져보기도 하지만, 장성한 모세는 다시금 바로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미디안 광야에 갇혀버린 모세를 보면서 우리는 출애굽은 이제 더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라는 성경의 본문이 흘러갈수록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에 모든 여건이나 상황이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뀌어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40세 이후의 모세는 창세기의 요셉과 같이 바로의 2인자 자리까지 치고 올라가서 친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는 자기동족을 보살피게 되며,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로 인해 노예에서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출애굽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출애굽기 본문의 내용은 오히려 출애굽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쪽으로 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떠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모세의 가족은 이제 미디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라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게된 것입니다. 출2:22에서 모세가 무슨 고백을 합니까?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이 나그네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 나그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더 이상 무슨 권한이 있겠습니까? 나그네 모세는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그 어떤 연결고리도 가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모세는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돕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을 도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미디안에서는 여전히 나그네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장인의 양무리 치는 것을 보면, 모세는 미디안에서 계속해서 힘없는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4O년이라는 세월은 또다시 계속해서 흘러가게 됩니다. 그 4O년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온갖 고통속에 계속하여 신음하게 되며, 모세 역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그저 점점 힘을 잃어가며 노쇠하는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목동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그 정도의 상황에서,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면, 출애굽 계획이 취소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기 2:16~22절까지의 본문을 보면, 더 이상 출애굽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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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은 또 다시 “시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처음 언급되는 단어가 “태초에”라는 시간표현인데, 그와 비슷하게 “여러해 후에”라고 기록합니다.
모세에게는 더 이상 출애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때에, 성경은 여러 해 후에라고 말씀하며, 모세가 모르는 애굽상황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애굽왕은 죽었다” 그리고 모세가 4O년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농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다.(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들려오는 소리만 듣는 수동적이신 하나님이신가?
그리고 이어지는 24절에서 하나님은 그 여러 해가 반복되는 동안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에 대해서 하나 하나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능동적으로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계속해서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고(브 라아:감정과 의지가 함께 수반), 그 자손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고, 하나님께서 보셨고, 하나님께서 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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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이제 더 이상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 같지 않습니까? 앞 뒤 , 어제와 오늘 상황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이제 내 삶에, 내 일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실 것 같다는 확신이 설 정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고통속에서 우리가 신음할 때, 우리는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다 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 해 후”가 지나고 나면, 진정한 구원자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면,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면,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밝혀집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면,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 해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시면, 비록 지금 이 시간에 그런 칭찬이 없을지라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적고백)
저는 요즘 저희교회를 바라보며, 제 자신이 모세와 동일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교회가 창립되어 출발하면, 분명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자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4년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며, 교회공동체 역시 연약하며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해 후를 바라보며, 저는 그저 모세와 같이 여기 이곳에서 계속 성경본문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계속해서 함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여러 해 후를 기약하며 교회공동체를 세워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