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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2) 초기 복음 정착기의 찬양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때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이다. 미국 감리교에서 파견한 선교사 아펜젤러와 미국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의 인천항에 입항하면서 한국에 복음의 씨앗이 발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미 한국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있었다. 만주 우장에서 전도하던 스코트랜드 장로회선교사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의 영향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역사를 연 주인공은 의주사람으로 1876년 만주에서 로스목사의 한국어 교사가 된 이응찬이다. 그는 맥킨 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만주를 왕래하던 인사 중에 의주사람으로 이성하, 김진기, 서상윤, 서경조 등이 모두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에 백홍준은 1883년에 의주로 돌아와 전도를 시작하기까지 하였다.
1887년 9월 30일, 선교사에 의해 처음 설립된 새문안교회는 14명의 신자가 모여 감격스런 예배를 드렸는데, 이들 중에는 벌써 13명이나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서상윤을 통해 신자가 된 사람들이었고, 백홍준과 서상윤이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로 선택되었다. 당시 신자들의 찬양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새문안교회 역사 85년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데 백홍주의 딸, 백관성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돌아와 새문안교회에 교적을 두었을 때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시면서 "주 예수 에워, 주예수 에워"를 부르셨다 한다. 이 곡은 '예수 사랑하심은' (Jesus Loves me, This I know: 현 찬송가 411장)의 중국어 번역 '주 예수 아워'로 한국말 번역 찬송이 나오기 전에 초창기 교인들이 중국찬송을 우리말 발음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해 본다.
아펜젤러도 "죠션교회에서 처음에는 지나 찬미에서 얼마를 써 보았으나 한문에 흘러 부르나 그 뜻을 알 수 없었으며..."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선교초기 얼마동안은 중국어 번역찬송을 사용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초창기 한국교회의 찬송생활은 선교사들이 만든 찬송가가 나오기까지는 중국어 찬송가를 우리나라 말로 불렀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영국, 미국에서 들여 온 찬송이 보급되었다. 1885년 5월 아펜젤러에 의하여 설립된 배제학당에서는 1886년부터 창가 과목을 두고 찬송을 가르켰다. 처음에는 영어찬송을 그대로 가르키다가 점차 한 두줄씩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화학당의 초기 졸업생인 김룻세(1888~1897)에 의하면 "처음 학교에 들어오니까 소꼽질을 하게 하고 주기도문, 또는 찬송가를 영어로 가르켜주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통역도 하지않고 대뜸 영어로 가르켜 주었다." 라고 회상했다.
1891년에는 이화학당에서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경신 (1886년), 정신 (1887년), 영화 (1890년) 등 기독교 학교에서도 설립 초창기부터 음악과목(창가라 했음)이 있어서 주로 찬송가를 번역하여 가르쳤다.
번역찬송의 출연은 1888경으로 보는데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과 같은 몇 개 찬송가가 번역되어 사용되어 왔는데 외부의 시선때문에 예배 때에 찬송가를 많이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3) 한국 최초의 찬양집 "찬미가", "찬양가"
3-1) 찬양의 개척자적 사명을 완수한 "찬미가"
3-2) 곡조통일의 처음 시도 "찬셩시"
1896년에는 교회마다 "찬양가", "찬미가", "찬셩시" 3개의 찬양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선교사 게일의 선교보고서에 드러난 찬송생활의 평가는 당시의 한국인 성도들의 찬양생활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번역찬송은 시문학적 표현도 아쉬운 동시에 시적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특히 서양찬송 곡조를 좋아해서 잘 부르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노래를 음미하여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서양식의 음악은 한국 사람들에게 별 의미없어 보이나 곡조나 표현을 보면 'Rock of Ages' (만세반석 열리니)의 엄숙한 곡조보다 경쾌한 곡조가 더 좋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놀랄만큼 음악에 대해서 민감하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적인 토착찬송가가 나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 번역 찬송은 내용의 명료성, 운율, 경어에 있어서 결함이 많다. 대부분의 번역이 내용은 좋으나 표현이 분명하지 못하며 어색해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의아해할 수가 있다."
당시 한국교회의 현저한 특징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의 열정이 불타올랐다는 것인데 이러한 표시가 교인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교회에서 배운 노래의 곡조에 '고종황제를 위한 축가' '최병헌 독립가'를 만들어 가사를 붙여 불렀다. 초창기 한국교회 교인들은 이처럼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애국애족하는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불태워 기독교의 신앙에 융화시켜 찬송가를 통해 간절한 심금을 담아내었던 것이다. 이것은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극치를 이루었다. 하나님의 축복과 돌보심이 아니면 절대로 고난의 나라를 살릴 수 없다는 절박한 믿음이 한국 민족의 심령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졌던 것이다.
4) 1903년부터 일어난 영적부흥기의 찬양
한국 교회의 영적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감리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하디선교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성령운동'을 일으켜서 1910년까지 평양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부흥운동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이에 같은 열기를 타고 찬송소리도 전국으로 퍼져나아갔다. 강력한 회개운동을 일으키는 대집회를 인도함으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시도하며 영성의 샘을 터뜨리게 되었다. 1907년은 대 부흥의 발흥기로 한국교회 영성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와 그의 부흥회에 참여하여 은혜를 받은 김익두, 그리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주기철이 은혜를 받아 목사가 되었으며 주기철목사가 경남 선경학교에서 가르칠 때 손양원이 경남 성경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주기철 목사에게 배워 목사가 되어 그 신비한 영성의 물줄기가 연속적으로 한 시대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비로소 한국교회는 놀라운 영적성장의 발판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1907년은 매우 혼란기였음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정미7조약이 맺어져 한국의 주권은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갔고, 헤이그 만국 평화회담에 우리측 대표 이준열사 등이 파송한 혐의로 고종이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왕위에서 물러나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순종이 즉위하였던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국가적 운명 속에 하나님의 불을 붙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틀림없다.
그 해 정월에 길선주장로가 중심이 되어 부흥의 발흥이 이루어졌는데 그는 1903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고, 그 해에 결성된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20년간 목회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산정현교회, 창동교회, 남문밖교회, 서문밖교회 등 50여개의 교회로 분립 또는 개척되는 엄청난 성장을 보였다. 더욱 섬세하게 부흥의 발원을 찾아보면 길선주목사의 새벽기도가 한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국운이 기울어져갈 때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염려하며 새벽에 하나님의 전에 달려나가 기도하기 시작한 일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효시가 되는 동시에 부흥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이듬해 정월, 부흥의 불길은 타오르게 된 것이다.
5) 최초의 합본찬양집 "찬숑가"
7) 1960년대의 한국교회 찬양 그리고 현대
인간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다. (고후 5:17)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바치도록 창조되었으며 (사43:21), 본래 인간의 삶은 한시라도 하나님을 잃지않는 '임마누엘'의 상태인 것이다. 복음의 정착기에서 70년대 말까지의 우리 한국교회의 찬양생활은 고식적이고 원형적인 틀 속에 갇혀 졸아들대로 졸아든 그런 찬송생활을 영위해왔다. 찬송 속에 담겨있는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끌어올리지 못한 채 말이다. 찬송가에 수록된 찬송가 외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찬송을 대하지 못했던 1960년대, 거기에다가 찬송가도 서로 틀려서 찬송생활은 더욱 의기 소침증에 빠져 있었다. 우리나라 민족성은 흥이 있는 민족이요,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점잖만 떨려했다.
1973년은 교단마다 제각기 선호하는 찬송가의 한계를 성도들 자신이 처절하게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빌리그래함목사를 초청한 "빌리그래함 전도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찬송가를 선택하는데 엄청난 혼선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로 그럴만한 것은 찬송가의 장수도 틀릴 뿐아니라 가사도 다른 것이 있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워했겠는가? 이 일로 여론이 통일된 찬송가가 필요하다고 모아졌으며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된 찬송가를 가지고 싶어했다.
한국 기독교약사에 있어서 그 전환점 그리고 폭발적인 부흥의 기폭제가 된 대형집회의 역사는 1990년대까지 그 영향력이 과시되고있다. 대형집회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 1974년 엑스폴로 -> 1974년~1977년 민족대복음화성회 ->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 1984년 한국기독교 백주년 기념대회
찬송가의 통일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수많은 교파가 있으나 교회일치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고, 둘째, 초교파적인 집회 등에서 여러 개의 찬송가를 불러야하는 불편사항을 없앤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때를 맞추어 출연한 복음성가는 이 때문에 어느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찬양의 새바람이 한국강산에 불어왔다. 가스펠이라는 음악의 한 장르가 그것이다. 기독교중창단 그리고 YMCA, YWCA 등 사회성을 띤 기독교기관들이 빠른 속도로 '가스펠송'을 보급했다. 이 시기는 1970년대, '개편찬송가', '새찬송가', '합동찬송가' 를 예배에 사용하고 있었다. '가스펠송'은 수련회, 여름성경학교, 문학의 밤 등 교회행사에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발빠른 교회 청년부에서는 '복음성가집', '복음송모음집'을 제작, 가스펠송의 활성화에 기름을 붓는 듯했다. 그때 불리운 곡들은 "내게 강같은 평화, 사랑의 주님 닮기원하네, 내 등에 기름을 채우소서, 작은 불꽃 하나가" 등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하나님께 회심한 대중가수들의 복음성가 취입이 뒤따랐다. 또 교회마다 제각기 복음성가집을 제작하면서 70~80년대 초의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기존의 복음성가와 운동권 경향의 창작곡, 건전가요, 팝속 등을 뒤에 부록으로 싣기도 하였다. 잔잔하기만 한국교회는 온통 '가스펠송'의 바람에 술렁거림과 동시에 활력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스펠송은 찬양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않았다. 또 찬양이라는단어조차 흔하게 불리워지지도 않았다. 급기야 가스펠송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간증, 헌신다짐위주의 가스펠송이 교회성장에는 도움을 주었으나, 너무 주관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찬양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현실로 떠올랐고, 교회는 서서히 자성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어갔다.
1970년대 중반에 예수전도단은 매주 화요일마다 기도모임을 주최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시간을 갖기시작했다. 그러면서 참여자들은 찬양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과의 통로인지 알게되었다. 찬양의 삶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야할 특권'임을 알게 된 것이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의 찬양의 봇물터지듯 넘쳐나게되는 찬양모임이 펼쳐지게되는데 바로 두란노서원 주최로 목요일 저녁에 모여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두란노 목요찬양'이 그것이었다. 석달에 한번씩 큰 찬양잔치를 전개하면서 한국교회의 찬양의 문화를 넓히고 확산시키는 목요찬양은 현재 매주 2천~3천여명이 모이는 대규모 찬양모임으로 발전했다.
찬양은 이 땅과 천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행위이다.
세상을 향해 너무 무기력한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을 언제나 인식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교인들!
한국교회에 진정한 경배와 찬양의 회복을 지금도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임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권세뿐이다. 찬양을 드릴 때의 힘있는 그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입술을 열어 노래하는 행위가 찬양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 인식'이 찬양이라는 사실을 찬양자는 알아야 한다.
찬양은 동기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의 실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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