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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 산 전승에 관해서
모리야 산 전승에 관해서
정용섭 목사
(1)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3)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가지고 하느님께서 일어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을 어디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8b)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마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하고 말한다.
(15)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내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물을 부수로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종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들을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브엘세바로 돌아갔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눌러 살았다.(공동번역, 창 22:1-19)
본문이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는 이 모리아 산 전승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아무리 교회를 설렁설렁 다녔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린이 주일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장년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의 설교에서도 이 이야기는 단골메뉴에 속한다. 이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신자들에게 주입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이 여기서 관건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던 외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의 신앙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브라함은 자기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여러분은 무얼 바쳤습니까?”
더구나 이 이야기의 후반은 청중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하나님이 숫양을 한 마리 준비해두셨다. 본문은 하나님이 준비해두셨다는 사실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받아들일만한 단서가 없는 것도 아니다. 모리아 땅의 어느 산으로 추정되는 그곳 이름이 “야훼 이레”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이 바로 그 단서이다. 물론 그곳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야훼 이레라는 용어의 의미도 조금씩 다르다. 칠십인 역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이며, 히브리 원본은 “야훼의 산에 장만되어 있다.” 혹은 “야훼의 산에서 그가 나타나신다.”로 되어 있다. 마틴 루터는 “주님이 보십니다.”로 번역했다. 본문은 15절 이하에서 이 아브라함의 행위가 크게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만약 설교자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큰 복을 내려주신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확신시킬 수만 있다면 청중들은 실제로 외아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것들을 앞 다투어 바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리아 산 전승*은 우리 교회 현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이다.
*참고적으로, 모리아 산 전승을 기독론적인 시각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쳤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외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의미와 일치하고, 이삭이 죽음의 길에 온전히 순종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와 일치한다. 루터역의 각주는 롬 8:32절에서 이의 근거를 찾는다.
모리아 산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본문이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간혹 오용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우리의 노력도 한계가 있다. 그 어디에도 완전한 해석은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해석이 없다는 이 엄정한 사실은 성서 본문을 대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자세를 요구하거나 허락한다. 하나는 해석의 오류를 줄여나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석의 창조적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전자는 해석의 소극적인 면이며, 후자는 적극적인 면이다. 이 양자는 구별되기는 하지만 서로 동일한 차원이다. 오류가 보이면 창조적인 지평이 열릴 것이며, 해석의 창조적 지평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기존의 오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필자는 오늘 얼마나 창조적일지 모르겠으나 이 본문을 필자 나름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말씀의 영이여, 도우소서!
첫째 마당, 아브라함아!(1절)
오늘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른 경우가 세 번 나온다. 두 번은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고, 한번은 아들 이삭이 부른 것이다.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고 한다. 하나님도 바쁘실 텐데 아브라함을 굳이 시험해 보려한 이유가 궁금하다. 도대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시험은 신구약성서의 중심 주제이기도하다. 욥은 당대의 최고 의인이었지만 적신으로 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간다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참혹한 시련을 당했다. 그 시련은 사탄의 요구에 의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신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된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모든 시험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이 선악과는 기독교 신앙에서 뜨거운 감자다. 그것 자체로 모순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선악과가 모순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완전성에 배치된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했다고 한다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선악과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모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충돌을 풀어가는 게 기독교 신학이다. 이런 모순과 충돌이 기독교 교리 안에 적지 않다. 선악과와 연관된 교리를 말한다면 원죄론이다. 원죄가 피를 통해서 유전된다면,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행할 수밖에 없다면 그 죄의 책임은 아담에게로 돌려야한다. 부활과 영혼불멸설도 충돌한다. 부활이 인간 실존 자체가 완전히 죽었을 때 일어나는 생명 사건이라고 한다면, 결국 영혼불멸설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도 서로 충돌되는 것들이 있다. 사랑과 정의, 창조와 심판은 서로 충돌한다.
이런 모순과 충돌은 기독교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다. 그것이 말하려는 신앙과 신학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면 이런 충돌이 오히려 기독교의 미래를 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완벽한 논리로 해명해낼 수 없다.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우리는 신비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신비개념을 냉소적으로 대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는 현재의 세계를 종말론적으로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도달하는 세계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지금 우리는 호랑이 털 몇 가닥이나 배설물만을 보고 호랑이를 설명해야 할, 또는 호랑이를 추적해야 할 호랑이 연구가들이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한 번도 모든 자태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경우에 따라서 사랑이 무한한 분으로 나타나기도 하시고, 때로는 눈곱만큼의 인정머리 없는 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런 점에서 주인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성서의 질그릇 메타포는 정당하다.
*브래넌 매닝의 설명에 따르면(윤종석 역, 신뢰, 복있는사람 출판사) 히브리어로 영광을 뜻하는 카봇(Kabod)은 구약성서에서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빛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야훼 하나님은 “내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출 33:18-23, 고후 3:18 참조)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다. 이런 침묵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언표로 나타내지 말라는, 즉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는 불가지론의 주장과는 다르다. 우리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우리가 경험한 호랑이 털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신구약성서에서 그런 털을 많이 발견한다. 바람처럼 달려가는 호랑이의 등을 본 증인들을 만날 수도 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고, 여리고 성벽이 허물어지는 걸 본 사람들도 있다. 아주 부분적이긴 하지만 성서는 온갖 형태의 하나님 경험을 보도한다. 바로 그 성서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최선의 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설명도 아마 그런 하나님의 뒷모습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삶의 온갖 어려움에 시달리며 살았던 성서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막연한 운명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였다.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이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은 포도가 높은 곳에 달려 따먹지 못하게 되자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다면서 돌아선 이솝 우화의 여우 이야기와는 다르다. 성서의 이런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함으로써 고난의 결과에 상관없이 삶의 영적 깊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영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분이라고 한다면 영적 깊이로 들어가는 삶의 자세야말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바로 그 자리에 야훼 하나님이 함께 죽어간다고 생각할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며, 동시에 우리의 응답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시험은 끔직한 내용이다. 이건 시험이라고 부르기에도 별로 적합하지 않다. 성서는 이 내용을 짤막하게 전한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어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자식을 칼로 찔러 죽이고 불에 태워 자신에게 바치라고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지 모른다. 이 명령을 오늘 내가 받았다고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자식이 아니라 집을 팔아서 바치라는 명령도 우리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필자는 이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환청이 아니었을까 하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당시의 가나안 지역을 포함한 근동에서 어린이 번제 행위가 간혹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들의 종교행위를 보고 자신도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전쟁에 승리하면 자신의 집에서 가장 먼저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께 받치겠다고 약속했다가 예상했던 종이 아니라 딸이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딸을 받쳤다는 입다 전승에서 볼 수 있듯이 인신제사는 흔한 건 아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분명히 행해졌다.
본문이 그런 어린이 희생제사 행위에서 이야기 형식을 빌려왔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중심 주제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다. 여기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미래였다. 이삭이 없으면 아브라함의 미래도 없다. 하나님은 이미 앞에서 후손 번성과 땅을 통한 아브라함의 미래를 몇 번에 걸쳐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의 미래를 약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그 미래를 포기하라고 명령을 내리신다는 것은 모순이다. 어쨌든지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시험이다.
아브라함의 이 모리아 산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감나게 나누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이 확실한 미래라는 말일까? 사람들에게 가장 분명한 미래는 당연히 후손들이다. 건강한 자녀들이야말로 고대인들에게 미래를 가장 확실하게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곰곰이 그 사태를 들여다보면 자녀들이 모든 미래를 완전히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대에 이르면 자녀가 없을 수도 있고,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씨족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다.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미래이지만 절대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상황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미래가 자식들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아들에게서 그런 걸 확인하려는 경향도 많다. 긴말 할 것 없이 인류가 지구에 그대로 존속하리라는 보장이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를 자녀나 후손에게 둘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45억년이라는 지구의 나이에 비해 겨우 1,2백만 년밖에 되지 않은 호모사피엔스의 나이를 비교해도 좋고, 지구 자체가 유한하며 우연한 방식으로 생태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도 좋다. 또는 수백만 년 후의 우리 후손들이 오늘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특히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무슨 차원이 있는지를 생각해봐도 좋다. 우리의 미래가 자녀들에 의해서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후손이 아니라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의 미래인가?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현재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가? 이렇게 흘러가는 현재가 궁극이며 모든 것의 확실한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데, 물론 그 미래도 우리에게 오면 현재가 되고, 동시에 과거가 된다면 점에서 무엇이 현재이며, 무엇이 미래인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 규정도 쉽지는 않다. 아직 그 실체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성서에서 그 미래는 바로 하나님의 시간이며,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성서는 그 미래를 후손이 아니라 그 후손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오늘 아브라함 전승을 따른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미래라고 보았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단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의 결단은 잘 한 것일까? 그걸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다르게 묻자.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듣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걸 또한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우리는 본문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아브라함의 결단과 순종이 하나의 흔적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의 인식에서 진리라는 사실을 배울 뿐이다. 지금 우리도 이런 명령에 부단히 직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둘째 마당, 내 아버지!(7절)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길을 떠난다. 나귀, 두 종, 장작을 챙겨서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만약 이삭을 바치는 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다고 한다면 이렇게 먼 길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사흘길이라면 최소한 1백리 이상이다. 아브라함이 그 먼 길을 여행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장소를 일러주셨다는 데에 있다. 그 여행마저 하나님의 시험이리라. 어쨌든지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마다않고 모리야 땅에 있는 산에 닿았다. 그곳부터는 이제 종들을 밑에 놓아두고 이삭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야했다. 종들이 머무는 곳은 베이스캠프이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번제를 드릴 곳은 정상인 셈이다.
불씨와 칼
정상정복에 나선 산악인처럼 아브라함은 번제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이삭과 나눠 들었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은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들었다. 이삭이 장작을 짊어졌다는 걸 보면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이 좋았든지 아니면 나이가 그렇게 어리지 않았던 것 같다. 또는 아브라함이 장작을 들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백세에 이삭을 낳았다면 최소 백 십사오세는 되지 않았겠는가. 이 문제는 체력의 문제가 아니다. 불씨와 칼은 위험한 물품이다. 이런 것들을 이삭에게 맡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고대인들에게 불씨와 칼은 생존과 직결된다. 그것은 석기시대부터 인간의 문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도대체 불과 칼 없이 가능한 문명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 불은 사물의 화학적 변형을 가능하게 하고, 칼은 물리적 변형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통해서 음식문제는 물론이고 거주와 예술에 이르기 까지 모은 인류문명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불과 칼은 동시에 인간의 삶과 문명을 파괴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칼*은 의사의 손에 들렸을 때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살인자의 손에 들렸을 때 죽이기도 한다. 폭탄은 모두 불의 아들이다. 귀한 것들은 모두 이렇게 위험하기도 하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귀하면 귀한 것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귀하지만 동시에 배합이 조금만 잘못되면 생명을 파괴한다.
*요즘 필자는 박 아무개 목사로부터 선물로 받은 일본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를 뒤늦게 읽고 있다. 이 소설은 일본 메이지유신을 배경으로 하는데, 현재 필자가 읽고 있는 제 3권은 료마가 큰 뜻을 품고 자신이 속했던 한을 떠나는 순간이다. 자신을 지켜주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할 고난의 길을 떠나면서 료마가 준비한 가장 중요한 물건이 바로 칼이다. 명검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을 찾아갔으나 얻지 못하고 체념하고 있던 료마는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돌아와 살던 셋째 누나로부터 명검을 선물로 받는다. 그 칼에 의지해서 료마는 이제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번제에서 필수적인 물품도 역시 불과 칼이다. 칼은 하나님께 드릴 번제물의 생명을 빼앗고 각을 뜨는데 쓰이며, 불은 번제물을 태우는데 쓰인다. 이삭을 짊어지고 가는 장작은 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그것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장작이 없다 하더라도 하늘의 불이 번제물을 태우는 일들이 구약성서에는 가끔 일어나기도 했다. 가장 위험한 물품이 가장 거룩한 일에 사용되고 있다.
오늘 본문은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끔찍한 사건에 대한 진술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우리는 이 텍스트만 보고서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알 도리가 없다. 성서기자들은 원래 사람의 감정과 심리 묘사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의 골고다 사건에서도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행위 앞에서 인간의 감정이 억제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흡사 고전음악 연주회에서 연주자와 관객들이 음악에만 심취함으로써 자신들의 감정적인 반응을 절제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열린예배>를 바람직한 예배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예배는 “믿습니까?” 하는 멘트로 아멘과 할렐루야를 유도해내는 부흥사들의 막가파식 설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있다.”
이제 종들과 나귀를 남겨둔 채 이삭만 데리고 하나님이 일러준 바로 그 장소로 길을 떠나려는 바로 그 순간에 그동안 아무 말하지 않던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움찔 하고 놀랬는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아무 말이 없다. 아브라함은 그냥 대답했을 뿐이다. 응, 또는 왜, 이런 식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공동번역에는 “얘야! 내가 듣고 있다.”로, 이전의 한글 번역과 개역개정, 또는 루터번역에서는 한결같이 “내가 여기 있다.”로 되어 있다. 철저하게 의역에 기울어진 공동번역은 세 번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각각 다르게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한결같이 “내가 여기 있다.”이다. 여기서 필자는 구약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를 깊게 다룰 자신이 없다. 그냥 표면적인 차원에서 보이는 대목만 한번 짚어보자.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에 “있다.”고 이삭에게 대답했다. 이어서 이삭은 다시 묻는다. 불씨와 장작은 여기 “있는데” 어린양은 어디 “있는가?” 유럽 사람들의 언어에서 가장 특이한 단어는 be(독일어 sein)이다. 그들의 말은 기본적으로 be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즉 그들은 모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사과의 색깔이 “붉다.”라고 표현하지만 그들은 “붉게 있다.”(is red)라고 표현한다. 그뿐만 아니라 저것은 나무다, 할 때도 그들은 be를 쓴다. 하이덱거는 유럽언어의 이런 속성에 기대서 모든 존재자를 규정하는 더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모든 사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인리히의 오트의 설명을 인용하겠다.
그런데 이 신비스런 것 덕분에 존재자가 존재자로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 자체는 아무런 존재자도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서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존재자 가운데서는 아무데서도 존재를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가? 아마도 이렇게 확정해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존재자에 대하여 말할 때 ‘있다’라는 조동사를 쓰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데서 접근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유와 언사의 불가피한 도구이다. 우리는 그 동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강제성 밑에 서 있다. 그것은 우리 사유의 기본적 소여성이다.(H. Ott, 김광식 역, 사유와 존재, 146 쪽).
오늘 성서본문의 상황을 “있다.”는 동사를 중심으로 들여다보라. 아브라함은 그곳에 있지만, 그리고 불씨도 거기에 있고, 장작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번제물은 “없다.” 이 장면의 이삭처럼 우리도 역시 어떤 것들은 이 세상에 “있고” 어떤 것들은 “없는”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나에게는 딸이 둘 있다. 다른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가능성 중에서 왜 두 딸만 있게 됐는지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아낸단 말인가? 아버지 아브라함도 있고, 불씨와 장작도 있지만, 번제물이 없는 이유를 이삭은 모른다.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렇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8절)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대답을 면피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이 어딘가 해결책을 갖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서기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는다. 이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런 판단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성서의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전체 주제의 틀을 유지할 때만 유효한 작업이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이 대답이 이삭을 속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숫양을 따로 준비해두셨다는 사실을 확신했다는 말도 아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능력만이 모든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해명이 안 되는 사태 앞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분만이 그에게 존재의 근거이며, 미래의 희망이었다. 이런 신뢰심에서 그는 아들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상황이 급속하고 험악하다. 번제물이 어디 있는가 하고 물었던 이삭은 그 상황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설득했어야만 했는데, 성서기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다. 왜 아브라함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아들을 죽이려는가? 이삭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는가? 아브라함 부자는 피도 눈물도 없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정신이 팔린 광신도들이라는 말인가? 아브라함은 실제로 장작더미 위에 누워있는 이삭의 목을 칼로 찌르려고 했다. 이 장면은 필자가 설명할 수 있는 그 범주를 넘어섰으니 그냥 남겨두고 진도를 나가는 게 좋겠다. 대신 예술가의 영혼을 통해서 그 편린이나마 맛보자.
렘브란트는 1636년부터 1655년에 이르는 시기에 모리아 산 전승에 관해서 네 편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민영진 목사는 이 본문과 그림을 이렇게 묶어서 설명했다.
같은 해에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감격스럽습니다. 사랑과 순종과 말림과, 죽임을 극복하는 살림으로 가득 찬 그림입니다. 아까 유화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 치던 이삭이 여기에서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순종하는 자세로 아버지 품에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아들 이삭을 강제로 우락부락하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그 무서운 칼을 보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감싸고 아들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천사 역시 유화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아브라함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를 꼭 껴안습니다. 왼손으로는 아브라함이 칼을 쥔 왼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아브라함의 오른 손목을 잡고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말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도 살고 아버지도 살아납니다. 이런 방해, 이런 말림 속에 감격이 있고, 죽임이 아닌 살림이 있습니다.(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 157 쪽)
셋째 마당,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11절)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칼이 이삭의 숨통을 끊게 될 바로 그 긴박한 순간에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실 때는 한번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더니 그 일이 성취되려는 순간에는 두 번에 걸쳐서 다급하게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아브라함은 이런 대답을 들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12절)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은 하나님인 반면에 위기의 순간에 부르신 분은 야훼의 천사로 묘사되었다. 동일한 전승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가 나뉘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필자는 잘 모른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이 곧 고대 유대인들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폰 라트(Gerhard von Rad)에 의하면 천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현현 양식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가 하나님으로 기술되든지 하나님의 천사로 기술되는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례요한의 잉태와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도 곧 하나님의 현현 양식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질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공경’하는지 알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의 하나님이 굳이 아브라함을 시험해야만 했던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앞서의 질문을 다시 꺼내들어야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또 하나의 충돌을 만나기 때문이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공경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참혹한 시험을 내리셨다. 거기까지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시험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깊은 마음을 알았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우리를 지으신 분이다. 그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그의 눈길로부터 벗어날 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 분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후에 “알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모리아 산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의 전지는 별로 확실한 하나님 속성이 아니다.
전지만이 아니라 사실은 전능에 대한 불안은 성서 전체에 깔려 있다. 그것은 불의한 자의 고난에 관한 질문인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으로 집약된다. 하인리히 오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답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로 말하였습니다. ... 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듣기만 했으나 이제는 내가 당신을 눈으로 봅니다.” 이는 곧 궁극적인 고난에 관한 질문은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십자가 신학이 설명하는 대로 악과 고난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셋째, 부활신학이 또 하나의 대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무의미성이라는 무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간다. 넷째, 종말론적 대답으로서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윤리적 대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대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들이 나름대로의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과 고난과 무의미성의 모든 근원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신학적 문제는 우리가 그대로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성서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궁극의 문제 앞에서는 할 말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핵심은 아니다. 시험치고, 통과한다는 방식의 생각은 자칫하면 우스갯소리로 떨어질지 모른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 값을 배상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배상만족설처럼 희화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말이다. 오해는 말자. 이런 교리가 터무니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교리의 토대를 정확하게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에 하나님을 신인동성동형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서가 고대인들의 다양한 설화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훨씬 근원적인 삶의 깊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외경, 거룩한 두려움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관건이다. 개역은 “경외한다.”고 했으며, 루터는 “두려워한다.”고 번역했다. 성서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경외, 또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은 고대인들의 언어인 ‘루아흐’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장엄한 자연 앞에서 외경을 경험하기도 하고, 역사의 오묘함 앞에서도 그런 걸 느끼고, 때로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에서도 그걸 경험할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이 지시하는 경외가 종교 일반에서 말하는, 예컨대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같은 경험인지 아닌지는 학자들에 따라서 약간 씩 다르게 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성서는 종교일반이 말하는 그런 종교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즉 자연종교에 머물지 않고 아주 독특한 인격적인 하나님 경험에 닿아있다. 아브라함의 외경을 단순한 종교적 차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폰 라트의 입장을 따르는 게 좋을 듯하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이 두려움은 곧 놀라움이기도 하다. 생명의 현재와 미래를 한 손에 쥐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놀라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전혀 민감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칼 바르트는 신학적 실존을 바로 이런 두려움, 즉 놀라움에서 찾았다.
누구나 신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신학에서 손을 떼고 편견 없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놀라움의 경험이 솟아올라서 더 이상 상실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계속 강건해져야 한다. 얼마동안 놀라움을 경험했고 지금은 아무 놀라움도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놀라움의 경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욱 곤란하다. 이러한 놀라움의 경험이 신학자에게 전적으로 낯선 것(그렇게 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우나)으로 남아 있으면 그는 신학 이외의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K. Barth, 이형기 역, 복음주의신학 입문, 76)
외경, 두려움, 놀라움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공포 영화를 보았을 때의 경험이나 군사독재자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는 다르다.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차원을 슬쩍 들여다보았을 때 엄습하는 놀라움이다. 이런 두려움은 오히려 존재의 용기로 작동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신뢰가 가능하다. 이런 경험이 복음서에서는 예수 사건에서 발생했다.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업적과 윤리와 가치들을 폐기시키는 그 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이며, 그의 나라이며, 통치이다. 이런 힘 앞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과 신뢰뿐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성서가 침묵하고 있지만 이런 신뢰가 이삭에게도 전달되지 않았겠는지. 이런 신뢰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지 않았겠는지. 아래와 같은 폰 라트의 진술은 전적으로 옳다.
이 설화를 읽고 이야기했던 후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의 제단 위에 놓여져, 야훼께서 다시 주어지고 야훼로부터만 다시 삶을 돌려받는 이삭에게서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민족들처럼 역사 속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의 권리 주장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자유로운 역사의지에 의해 이삭을 살게 하셨던 분의 의지에서만 찾았다. 이런 식으로 설화를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그의 청중들의 깊은 성찰을 상당히 요구한다는 것이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게르하그트 폰 라트, 창세기, 269 쪽)
하나님은 누가인가?
이 모리안 산 전승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결국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그 중심에 둔다. 그는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분이다. 그의 행위 앞에서는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 없듯이 아무도 변명하거나 항거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만 있을 뿐이다. 이 순종은 자신의 전체 존재를 거는 결단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미래로 믿었던 이삭을 포기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설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는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만난다.
첫째, 순종은 결국 숙명론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순종은 의지가 개입된다는 점에서 숙명론과 구별된다. 예수의 순종은 분명히 예수의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밀려오는 십자가 처형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예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둘째, 무엇이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가? 이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당 건축, 단기선교, 사회봉사 같은 것들만을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이 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찾아야 한다.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바르게 배우고, 그 성서의 내용을 체계화한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이 누구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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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아 서울오프 인문학적 성서읽기 2007년 월별 강의 일정
1회(4월26일)-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창 12:1-9)
2회(5월31일)- 모리야 산 전승에 관해서(창 22:1-19)
3회(6월28일)- 아브라함의 여자들(창 25:1-18)
4회(7월26일)- 야곱의 아내들(창 29:21-30)
5회(8월30일)- 요셉의 출세 이야기(창 41:37-57, 47:13-26)
6회(9월27일)- 이드로의 사위 모세 이야기(출 3:1-12)
7회(10월25일)- 만나 사건의 실체(출 16:1-36)
8회(11월29일)- 금송아지가 필요한 사람들(출 32:1-14)
9회(12월27일)- 여호수아의 전쟁 이야기(수 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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