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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을 로마서 제7강
롬8:12-39(8:18)
믿는 자의 희망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8:18)
로마서를 공부해 보면 우리의 구원은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단계<Justification>, 그 다음에는 믿음이 성장하여 거룩함에 이르러 가는 성화(聖化)의 단계<Sanctification>, 마지막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영화(榮化)의 단계<Glorification>입니다. 오늘 말씀은 영화의 단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실향민들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기억이 눈에 보는 듯 생생하고 그리움이 마음에 사무친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은 기억조차 없으며, 늘 현실에 쫓겨 살기 때문이어서인지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어떠한가를 마음에 새겨두고, 이를 우리의 희망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영광스런 하늘나라에 이르는 ‘천로역정(天路歷程)’에서 우리가 어떤 믿음과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영광스러운 희망 (12-25)
17절을 봅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속자는 그 아버지의 재산과 신분, 권세와 영광을 모두 상속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재산인 하나님 나라와, 왕이신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함께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사도 요한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5).
그런데 상속자는 아버지의 권세와 영광만 상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상속자는 영광과 더불어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영광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고난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해서, 힘든 제자들을 키우시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양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광은 받고자 하지만 고난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영광과 고난을 모두 감당합니다. 신자들은 그렇게 풍성하고 폭넓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18절을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그 많은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이 현재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무엇입니까?
첫째, 만유회복(萬有回復): 20절을 봅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습니다. 또 22절을 봅시다. 피조물들이 모두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며 탄식하고 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온 땅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창 3:17).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으며 약육강식(弱肉强食)하게 된 것도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 때문에 만물에까지 멸망의 악한 기운이 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피조물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굴복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창 1:26).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피조물이든, 풀벌레 하나나 돌멩이 하나라도, 무가치하게 쓰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에게 굴복하되 의미 있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목자가 그의 양을 수양회에 초청하기 위해 처갓집 양념통닭을 사주었습니다. 맛있는 치킨을 먹으며 목자의 권면을 들은 양은 마음이 움직여 수양회에 참석했고, 훗날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 양이 먹었던 그 닭은 얼마나 의미 있게 쓰였습니까? 그러나 연무동 맥주집에서 팔리는 닭들 중에는 대학생들 뱃속에서 맥주와 섞이다 길바닥으로 쏟아지곤 합니다. 게다가 어떤 닭들은 조류독감 때문에 큰 구덩이 속에 수천마리씩 집단폐사 하기도합니다. 이처럼 허랑방탕하는데 쓰이고, 허무한 데 굴복 당하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탄식합니다.
또한 마구 쓰고, 마구 버리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온 지구가 몸살을 앓습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 원유 때문에 고기와 새들이 괴로워하고,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버려서 갈 곳을 잃은 북극곰들이 길게 울며 방황합니다. 어떤 자들은 눈이 올 때 사냥합니다. 눈이 가득히 쌓이면 짐승들은 먹을 게 없어서 비실비실합니다. 이 기회를 잡아서 사냥을 하니 인간들이 얼마나 고약합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눈이 오면 새나 짐승들이 굶어죽을까 걱정되어 밖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옥수수 같은 먹이를 갖다 놓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짐승들이 그것을 먹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확실히 사람다운 사람들이 있어야 짐승들도 복을 받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허무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산천초목과 말 못하는 짐승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탄식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그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19).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만유회복의 그 날을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 젖 먹는 아기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6-9) 또 사도 요한을 통해서는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이 약속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 날, 그 아름답고 맑은 곳,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곳, 이리와 양이 친구 되고, 어린 아이와 독사가 함께 노는 곳,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날이 오는데, 이것이 온 우주가 고대하는 바요, 우리 믿는 자의 희망입니다.
둘째, 몸의 속량(贖良): 고통하며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들뿐이 아닙니다. 23절을 봅시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신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고 그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에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습니다. 원치 않지만 금방 자만심과 쾌락에 빠지고, 그래서 영혼에 임했던 평화와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영혼은 속량 되었지만 우리의 몸이 아직 속량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의 유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요, 또 세포 세포마다 정욕이 들어박힌 죄악 되고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수록 체력이 약해지고 피부가 탄력을 잃어가며 뱃살만 늘어가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슬퍼지기도 하고, 그렇게 투쟁을 하는데도 여전히 몸의 사욕을 좇아 게으름 부리고 죄에 빠지는 자신을 보노라면 몸이 원수 같고 세상이 밉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원합니다. 머리 쥐어뜯으며 갈등하지 않아도, 날 새고 소감 쓰며 회개하지 않아도, 그냥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노련한 농구 선수가 폼을 잡거나 조준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공을 던져도 골이 들어가듯이, 그렇게 익숙하고 자유롭게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21절에서 말하는 바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완전하고 영광된 자유는 원수 같은 몸을 입고, 죄의 유혹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는 한에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봅시다. 신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를 고전 15:20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나무를 심었는데 거기서 첫 열매로 사과가 열렸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도 계속해서 사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그를 믿는 자들도 역시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지저분하고 연약한 몸을 가지고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그 날에는 이 육적인 몸 대신에 신령한 몸으로, 이 약한 몸 대신에 강한 몸으로, 이 늙고 죽어 없어질 몸 대신에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고전 15:42-44). 즉 구원 얻은 영혼에 합당한 몸을 입게 됩니다. 그 날에는 영혼의 속량뿐 아니라 몸의 속량까지,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또 저주받은 세상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천사들과 예수님이 계십니다. 유혹도 없고 죄지을 육신도 없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희망입니다.
그러면 이 희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25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신자는 완전한 구원의 그 날을 위하여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막연하거나 불확실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나 우리가 지어낸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저주받은 우주 만물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회복하시고, 죄에 빠진 인간을 완전히 속량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기 전에 하나님의 희망이요 우리의 소원이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통과 신자들의 탄식을 아시면서도 왜 만유회복과 몸의 속량을 속히 이루지 않으십니까? 만유회복과 우리 몸의 속량은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에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 얻기는커녕 무서운 지옥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그 일을 이루시지 않는 것은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죄인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 이것이 영광을 받을 때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예수님과 함께 상속받은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구속 역사의 사명과 그에 따르는 고난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 크고 작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도 이를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의 고난도 잠깐입니다. 또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욕된 육신을 입고, 죄악 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살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의 영광을 위해서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며, 여기에 따르는 잠깐의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뜻과 사랑 (26-39)
우리는 위에서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신자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들을 인내하기에 우리는 고난에 약하고 유혹에 약합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어버리고 의심의 구름에 휩싸이며, 믿음을 포기해 버리고 그저 편하게만 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세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도우심: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고난이 계속되고 죄가 반복되면 우리는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에는 기도로써 힘을 얻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 힘들 때의 일이지 너무 힘들면 기도조차 할 수 없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라도 최소한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며, 무엇 때문에 고생하며, 현재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성령은 또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어려움을 이기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헤맬지라도 성령은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어느 경우에라도 성령을 굳게 의지하며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되고, 빌 바를 알지 못하여 “주여, 주여, … ”하면서 한숨쉬거나 탄식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무릎을 꿇고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 2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일이 어렵게 돌아가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완전무결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뜻이 무엇입니까? 29,30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자 하십니다.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본으로 삼으셔서 우리가 모두 그를 닮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미리 정하셨습니다. 다소 어려운 말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에는 앞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을 위해 그토록 오랜 동안 섬세하게 섭리해 오셨고, 또 앞으로의 계획까지 세워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어려운 일도 있고 복된 일도 있지만 그 모두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시고, 장차에는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고 영화롭게 되기 위해 실패도 필요하고, 억울한 일 당하는 것도 필요하고, 앓아 눕는 것도 필요하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어쩌면 나 하나 때문에 재앙이나 그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구원하시고 연단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셨다는 믿음을 갖기 전에는 하루도 편안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복이 있고, 우리의 의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으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요즘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가 티브이에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호주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와 닭뼈 같은 아주 작은 한 발과 발가락 두 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영 낚시 골프 등의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가 하면 음악과 디스코를 즐기고, 전동 휠체어를 몰고 다니면서 정상적인 사람 못지 않게 삶을 즐깁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에서는 재정학과 회계학을 복수 전공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미국에 사회복지 단체를 설립해 활동하는가 하면, 세계 각지로 다니며 복음 메시지를 전하면서 절망에 빠져 꿈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삶을 즐기고 선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철이 들기 시작한 여덟 살부터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들끓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 남에게 부담만 주는 삶, 차라리 생을 끝내버리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의심은 더욱 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로마서 8:28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야고보서 1:3,4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말씀들을 통해 ‘나쁜 일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은 선한 목적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깨달았을 때 그는 비로소 평안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이 팔다리가 없어서 넘어지면 꼼짝할 수 없는 그를 일어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왜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하시는가, 왜 하나님을 믿는데 실패가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네!” 하고 받아들이고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믿음을 주시기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크신 사랑: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문득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손해만 보는 게 아닌가 하여 소위 피해의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미 손해 본 거야 하나님을 위한 희생으로 친다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32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그의 외아들까지 주신 분이십니다. 가장 아까운 외아들을 주셨는데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직 주시지 않으셨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필요치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갖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잠시 죄악에 빠질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또 죄에 빠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보다, 왜 나는 악영향만 끼치게 되는가, 나는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더구나 사탄은 “네 죄를 하나님께서 송사하겠다.”고 위협하여 죄의식에 시달리게 하거나,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는 틀렸으니 이왕 버린 몸 자기하고 재미있게 놀기나 하자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만 우리의 죄를 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탄보다도 우리의 죄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모르지 않으시고 다 아시는데 의롭다 하셨다는 점에서 저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낍니다. 더구나 33절을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감히 송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용서하셨다면, 그의 자녀가 된 지금에야 얼마나 더하시겠습니까? 더구나 34절을 봅시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당하셨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변호사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데, 사탄이 송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어떤 허물과 실수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시며,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35-37절을 봅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No,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s us.)
결국 인생의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환난이 오고 핍박이 와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데, 굶고 헐벗고 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런 어려움을 주신 거라고 믿는데,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하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맺는 말
신자는 영혼이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도 연약한 육신을 입고,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빠지고 탄식하며, 또 사명을 감당하는 데 따르는 고난 때문에 고생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의 고난은 잠깐이요 이루어질 희망은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과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고난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