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참 덥습니다. 길 가의 옥수수들이 다시 내 키만큼 자랐고 더운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시험이 끝이 난 학생들은 여름 방학에 들어 갔
습니다. 철수는 뭔가 실험할 게 있어 아직 자취방에 머물지만 곧 서울로 올라
가 버릴 것 같습니다. 철수는 날 위해 애써 자취방을 지켰던 적이 있지요.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네요. 이 번 여름 방학 때 전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학기 중일
때보다는 한가하겠지만 연구실을 지켜야 하는 신세입니다. 철수더러 학교에 내
려 와 있으라는 부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도 자기만의 시간이 있는데 날 위
해 희생시킬 수는 없겠지요.
"낮에 더운데 수원가서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 그릇 먹고 오자."
연구실을 찾은 배선배는 내 핀잔에는 아랑곳 없이 계속 내게 친한 척입니다.
"학교 근처도 냉면하는 집 많아요."
"이왕이면 맛있는 곳을 찾아가자."
"저 애인 있거든요."
"하하, 진짜 연하 사귀는거야?"
"연하 사귀면 안되나요?"
"걔는 너하고 안 어울려."
"왜요?"
"걔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데 은정인 나이보다 성숙해 보여. 걔는 은정이 상대
가 안돼."
살 기분이 나쁘네요.
"그럼 제 상대는 어때야 되는데요?"
"나 정도는 되야지. 그 철수라는 애 공대생이지?"
애? 나보다 나이가 적지만 그래도 이제 대학 4학년인데 애라고 그러냐.
"네."
"걔 졸업하면 취직할테지?"
"아니요. 대학원 갈거에요."
"그래 봤자지 뭐. 어디 취직해서 평범한 회사원 되겠지?"
"그래서요?"
"아깝지 않냐? 너 정도면 잘난 남자들과 어울려야지.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게
사는거, 그거 재미없는 거다."
"철수도 잘났어요."
"너 나이 이제 곧 26살이다. 너 학위 받고 나면 곧 바로 결혼 문제 생각해야 될
거다. 거추장스럽게 그런 애 옆에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귀찮아 진다?"
"말이 너무 심하네요. 철수가 어때서요. 나 걔랑 이렇게 지내다 결혼 할 거에
요."
"야, 결혼은 현실이야. 좋다고 하는 게 아니야. 감정은 일순간이고 현실은 평생
이야. 걔 졸업하고 기반 잡으려면 적어도 5년 후의 일일텐데, 넌 그때 서른 살이
야."
"같이 살면서 기반 잡아도 돼. 배선배 그렇게 까진 안 봤는데 물이 잘못 들었네
요?"
"나이 드니까 다 그런 생각 가지게 되더라. 너도 그렇게 될거다. 사람만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난 그렇게 되지 않을거야. 그렇게 되기 싫어요."
"그래, 학생일 때가 그래서 좋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나도 배선배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현실을 따지며 사람
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철수를 잘나지 못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철수에게 삐삐를 쳤습니다. 배 선배는 홀로 점심을 해결하러 떠났습니다.
"왜 삐삐 쳤어요?"
"뭐해?"
"밥 같이 먹자고 삐삐 친거에요?"
"아니. 뭐 하냐니까?"
"당구쳐요."
"뭐야?"
"왜요? 오늘 실험 끝내고 선배들과 당구 한 게임 치는 중이에요."
"너 졸업하고 뭐 할거야."
"나? 대학원 갈거라니까."
"대학원 마치고 나면?"
"거기까지 생각 안해 봤는데. 뭐 정해진 거 아닌가? 군면제 해주는 회사에 취직
해야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취직하면 나가라, 나가라 할 때까지 월급 받으며 사는
거지."
"뭐야?"
"왜요?"
"넌 꿈 같은 거 없어?"
"다 그렇게 사는데 뭘. 그렇게 살면서 재밌고, 가치있는 꿈 하나 만들고 하는거
지."
"훗, 그럼 결혼은 언제 할래?"
"결혼? 우리 아버지가 집은 하나 사준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내 밥그릇은 해
결해야 될테니까 28살에서 30살 정도 되야 하겠죠."
"나는 그때 노처녀 소리 듣고 있겠다."
"왜 그래요. 누나는 누나에게 맞는 사람 찾아서 일찍 결혼하면 되잖아."
"야! 너 지금 나하고 그래도 연인 사이다? 애인에게 그런 말 하는거 모진말이
야."
"흠, 그건 알지만 나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할 나이도 아니고 평범한 회사원이
잘난 약대출신 여자하고 결혼하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아요. 나 아직 누나를 내
반려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너 나뻐 씨."
그렇나요. 철수는 그냥 학생의 신분으로서 다른 생각없이 나를 사람이라는 한 가
지만 보고 좋아하고 있나 봅니다. 나도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요. 결혼은 현실이다. 현실을 생각해야 될 시점이 오면 난 철수를 져 버릴까요.
과연 져 버릴수 있을까요. 난 내 자신을 능력있는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내 능력
만으로도 남들 만큼은 살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실? 그게 뭐. 지금은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너 내일 서울 갈거야?"
"응."
"방학 내내 서울에 있을거야?"
"종종 내려 올게. 누나는 학교 와 있어야 되지?"
"그래."
"누나 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내려 올게요."
"이 번 주말에 영화나 보러가자."
"그래요."
"짐도 가져 갈거야?"
"가을 되면 겨울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짐이 많아 질거에요. 필요없는
것들은 집에 갖다 놓아야지."
"인형은 내 방에 갖다 놓고 가."
"왜요?"
"깨끗하게 빨아서 안고 자려고 그런다."
"흠. 그럼 갈 때 주고 갈게요. 이제 누나 방 가세요."
"그래. 잘 자."
"누나!"
"왜?"
"뽀뽀라도 한 번 해주고 가면 안될까요?"
"아직까지도 그러니?"
"뭘?"
"계속 물어보고 하잖아."
"처음엔 안 그랬어."
"네 마음속에 나와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나도 그런 생각이 들고
있다고 생각을 해. 나도 네 마음과 비슷하다고 그렇게 생각해."
"진짜루?"
"그래."
하루 밤이 지나면 철수는 한 동안 내 옆에 있지 않겠네요.
너무 친근하면 종종 그 존재를 기억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기억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려 종종 다른 사람의 모습에 치워져 버리
는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사람이 곁에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지요.
철수가 서울로 떠난 다음 날, 승주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직 그에 대한 여
운이 많이 남아 있나 봐요. 철수를 완전히 내 사람으로 받아 들였지만 내 곁에
그가 없는 지금 멀리 있어 그리운 승주는 날 가슴 떨리게 합니다. 그의 편지 내
용에 이런 물음이 있었습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니?
내 지금 마음으로는 승주에게 떳떳하게 철수를 얘기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불
과 반 년 전에는 반대였지요. 그때 보다는 덜 하지만 난 잠시 철수를 치워 놓고
혼자라 생각하며 승주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주말에 서울로 올 때는 철수 생각만 했어요. 많이 설레었어요. 고작 3
일 철수를 내 옆에 두지 못했는데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혹시 낯설지 않을까 하
는 생각도 했어요.
"은정이? 그 나이 많은 처자 맞지?"
"네. 근데 저 이제 25살인데요."
"허허, 우리 철수는 23살인데?"
"네?"
"처자가 철수보다 나이 많은 거 맞지?"
"네."
"그러니까 내가 나이 많은 처자라고 해서 기분 나쁘고 그러지 않지?"
"네."
"철수는 오늘 집에 안들어 올텐데."
"네?"
"군대 간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면회 갔어. 오늘 면회가 안되었던 모양이
야. 벽제라고 했나? 그 근처 여관에서 하룻 밤 묵고 내일 친구 면회하고 온다고
전화 왔었어."
"저에겐 그런 말 없었는데..."
"우리 철수가 처자 꼬봉인가?"
"네?"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처자에게 보고해야 되냔 말이지."
"아니에요."
"어디 김씬가?"
"저 홍씨인데요. 남양 홍씨에요."
"음, 그런가? 철수 오면 전화 왔었다고 전해 줄게."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저녁이었지만 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볼 생각으로 철수집에 전화를 해 보았어
요.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이제 저도 목소리만이지만 상당히 친근한 존재가 되
었나 보네요. 아버님이 예전보다 전화 받으시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다른 질문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시네요.
친구 누구 면회 간 거야? 오늘은 그냥 집으로 바로 가야 겠네요.
저녁에 엄마가 병원 일로 집에 오시지 않아 아빠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
습니다.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베스트 극장 드라마를 봤어요.
"아빠."
"왜."
"저 결혼 안하고 있으면 뭐라 하실거에요?"
"뭐라고 하다니?"
"시집 가라고 강요하실거냐구요."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그럴려구. 그래도 28살 안에는 시집 가라."
"에? 강요하겠단 말이네요 그럼."
"흠, 자식이 너 하나라고 니가 결혼을 늦게 하면 행여 여러 잡념들이 많이 생
길 것 같아. 남들 시집갈 나이에 너도 시집 가."
"저 그럼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 니가 대학 졸업할 때부터 그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흠."
"자식이 저 하나라고 사위 고르실 때 까다로우실 것 같아요."
"아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다. 난 너를 믿지. 내가
널 못 믿었으면 학교 근처서 그렇게 자취생활 하게 하지 못했다?"
"엄마도 그럴까요?"
"그럴거야."
"아빠."
"왜?"
"저 그냥 회사원에게 시집 가도 되죠?"
"회사원이 어때서?"
"그럼. 음..."
"사귀는 남자 있니?"
"네."
"응? 넌 남자 친구는 많아도 사귀는 사람은 없다고 했잖아."
"이젠 있어요."
"누군데?"
"아빠도 한 번 봤잖아요."
"언제?"
"제 졸업식때요."
"으엉? 그 남자애?"
"네."
"걔 너보다..."
"네, 두살 연하에요."
"허허."
"왜 웃으세요?"
"너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네."
"너 걔하고 결혼 할 마음도 있는거야?"
"아직은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못할 건 없잖아요."
"그 애 아버지가 한의사라고 했지?"
"네."
"더 깊이 생각해 봐라. 그리고 기회 있으면 걔 한 번 집에 데리고 와."
"나중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난 뒤에 데리고 올게요."
"그래, 넌 아직 학생이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네."
왜 이런 말을 물어 봤을까. 대학원 졸업하려면 아직 일년 반도 더 남았는데.
배 선배가 했던 말이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었나 보네요.내 가까운 한 사람에
게라도 철수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싶었나 봅니다. 그게 아빠였다.
제목 연하가 뭐 어때.49회
누나와 연인 사이가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 기간 누나를 대하는 데 있
어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가끔 뽀뽀 한 번씩 한다는 게 예전과 달라진
것이다. 쿠쿠, 뽀뽀 한 번 한다는 거. 그걸 단지라고 말하다니 내가 주제 파악
을 잠시 못했나 보다. 감히 가슴 떨리는 일이라 꿈에 조차 잘 나타나지 않는 그
런 일을 두고 단지라고 말하다니... 생 후 처음 와 보는 이런 낯선 곳의 여관 방
에서 하룻밤을 묵을려니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른다.
병장 되기 꼴랑 한 달 남겨 두고 탈장인가 뭔가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승헌이를 보러 이 곳에 왔지만 그 새끼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난 지금 낯선 여관 방에 혼자 누워 냄새 나는 베개를 꼭 껴안고
누나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잘난 여자가 내가 뽀뽀 하자고 하면 한다. 처음엔 장
난 같기도 했는데, 요즘은 결혼 얘기도 나오는 것이 나를 진짜 애인으로 생각하
는 것 같다. 나는 누나와 애인하기로 했지만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는 아직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헤어짐이 오면 웃어 줄 것이라 다짐하고 누나는 언젠가 딴
남자의 여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연애와 결혼은 항상 같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최근들어 누나에 대한 그런 내 생각이 많이 틀려지고 있다. 누나와 키스하면서
눈을 말똥히 떠고 누나의 표정을 살폈던 적이 있다. 그 잘난 여자는 내게 뽀뽀
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수줍고 행복한 여
인의 모습이 바로 누나에게 있었다. 한 남자에게 입술을 맡긴 채, 잠시 세상의
일은 한 쪽으로 치워두고 그 남자만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은 모습, 누나도 그랬
다. 조르는 동생에게 마저못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누나는 나를 느끼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딴 사람에게 줄 수 없을 것 같다. 장하다 박
철수,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정말 수고 많았다.
베개를 꼬옥 더 껴 안았다. 헤헤...
그래서 그럴까? 예전에는 누나가 어떤 모르는 남자와 팔짱을 껴고 걸어 가던,
같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조금 서운했던 적은 있지
만 질투심 나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들이 암만 그래봤자 누나
는 나하고 더 친하다. 이렇게만 생각했었다. 근데 더 친하게 된 연인사이가 되었
는데 요즘 누나하고 친한 척 하는 놈들이 보이면 불안하고 질투심나고 기분 나쁘
다. 분명 요즘이 예전보다 더 친해졌고, 더 가까웁게 지내지만 예전보다 태연하
지 못한 것 같다. 그 새끼... 한 번 날 잡고 싶은 새끼가 있다. 그 자식 참 밥
맛 없는 놈인데 누나 곁에 오래 붙어 있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여전히 불안한 사람이 있다. 예전 누나의 연인이었던 사람, 승주 형. 승주
형이 돌아 와서 누나 곁에 나타나면? 나는 예전처럼 그냥 삐친 모양으로 나 혼
자 내 기분을 삭일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조금 떨어져 주면 더 편할 것이라 생
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누나에게 따지고 들지도 모른다.
껴 안았던 베개를 풀었다. 베개를 머리 쪽으로 옮기고 이불을 덮었다. 한 여름
이 가까이 왔는데도 난 이불을 덮고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잠이 들었다.
"꼬끼 오~"
율전 그 촌 동네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겁나
게 촌 동네인거 같다. 새벽 동이 밝아 온다. 내가 누나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
고 이렇게 일찍 일어 날 필요 없다. 다시 잤다.
"삐리리~"
잠결에 전화 벨 소리를 들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방 빼야죠?"
"아, 지금 몇시인데요?"
"12시 다 되었어요."
내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다. 나, 덮었던 이불을 돌돌 말아 껴안고 있었다. 후
후, 이불 말고 자는 건 은정이 누나가 하던 짓인데...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군발이 면회 가는데 외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아무리 겉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가지만 군
발이 보다는 확실히 잘 나 보일거다.
면회하는 매점에 앉아 승헌이를 기다렸다. 외모에 좀 신경을 써고 오는건데 그
랬다. 제법 예쁜 아가씨 둘이가 내 가까운 곳에 앉아 나를 흘깃 쳐다 본다. 그
려, 나 금방까지 자다 온 사람이여.
승헌이가 나왔다. 몇 일동안 세수 안한 모습, 그 짧은 머리가 한 쪽은 눕고,
한 쪽은 섰을 정도니 물 근처를 아예 안 간 것 같다. 초라한 국군 병원 복을 입
고 플라스틱 딸딸이에 다리를 절며 반가운 모습 반, 아픈 모습 반으로 나에게 오
는 데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저기 앉아 있는 여자들이 날 쳐
다 보아도 된다. 왜? 나 확실히 승헌이 보다는 몰골이 괜찮아 보일 것이기에.
"어찌 된거냐?"
"응? 탈장. 탈장은 말년에는 잘 안 걸리는데..."
"탈장이 뭐냐?"
"한 마디로 장이 탈났다는 거지. 장이 밑으로 떨어져서 수술해서 끄집어 올려
야 되는 병."
"왜 걸렸냐?"
"낸들 아냐."
"병원에 얼마 동안 있은거냐?"
"2주 다 되어 간다. 모레 수술 날짜 잡혔다."
"다리를 절던데?"
"다리가 아픈게 아니고 아랫배가 결려서 그런거다.너 다음주에 한 번 더 와라.
심심해 죽겠다."
"이 더운 날 훈련 안 받고 병원에 있으면 더 좋지 않냐?"
"그건 그렇지만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전화 했었냐?"
"응."
"그 사자 머리더러 자주 오라고 하지?"
"헤헤, 의정이 걔랑은 당분간 모른 척하고 지내기로 했다."
"걔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냐?"
"아니다. 그 애인 사이라는게 말이다. 자꾸 속박하려고 해서, 내가 좀 괴롭더라
구. 걔가 뭐하고 지내는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신경 써 줄 처지가 못되었잖
아. 그래서 그냥 모른 척 내가 의정일 피했어."
"그럼 니가 군화 거꾸로 신은거냐?"
"하하, 그런 셈이지만 사회로 나가면 다시 시작해야지. 친구는 오래만에 만나
도 어색하지 않지만 연인사이는 다르거든."
"군발이다운 생각을 하는군."
"야, 나는 메인 몸인데 애인이 딴 남자 만나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 봐. 기분
어떻겠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먹을 거나 좀 사와."
"지금 내 복장이 이런데 내가 돈이 있을 것 같냐?"
"야, 비싼 차비 들여가며, 어제 면회가 안 되어 비싼 여관방 신세까지 지며 너
만나러 왔으면 대접을 해야 할 거 아냐."
"진짜 싸가지 말년 병장 군기보다 더 없네. 아픈 놈 면회 왔으면 니가 날 대접
해야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대접도 못할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날 불렀냐?"
"너 내 친구 맞어?"
"다른 놈들이나 부모님 오셔서 뭐 먹을 거 사다 놓고 갔을 거 아냐. 그거라도
좀 가져 와."
"여기가 무슨 민간 병원인 줄 아나. 잔말 말고 빨리 먹을 거 사 와."
"나 진짜 돈 없어. 어제 여관비 내고 나니까 돌아 갈 차비 밖에 안 남더라."
"참 내. 그럴려면 뭐하러 왔냐?"
"그래, 나 갈게."
"야. 나 심심해. 그럼 커피라도 한 잔 뽑아 와."
승헌이 녀석하고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두 시간을 앉아 놀았다.
"너, 모레 수술하고 나도 일주일 더 여기 있어야 하거든? 다음 주 수요일 쯤에
여기 한 번 더 와라."
"그때 오면 잘 대접해 주냐?"
"면회 오는 사람이 대접하는 거 아니냐?"
"고정관념을 버려라 임마."
"그건 그렇고 너 요즘도 나이 많은 여자들하고 노냐?"
"응."
"너 그러다 빨리 늙는다? 너 이런 심보 가진 것도 아마 나이 많은 여자들 영향
일거야."
"승헌아."
"왜?"
"너 은정이 누나 알지?"
"자가용 타고 다니던 누나 말이지?"
"응. 그 누나 어떻던?"
"예쁘긴 한데 남자를 잡고 살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더라. 우리 큰누나와 비슷
해."
"하하, 예쁘긴 하지?"
"졸업했지 않냐?"
"대학원 다녀. 푸하하."
"왜 웃어?"
"너 여자랑 뽀뽀해 봤어?"
"야이씨,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의정이하고 근 육개월 사귀다 군에 들어 온 나
다."
"해 봤구나."
"못해봤다. 흑흑. 다른 놈들은 군대 들어오면서, 와서도 잘만 하더만..."
"불쌍한 놈. 너 진짜 공대만 안 들어 왔으면 진짜 잘난 남자 됐을거야. 내가 봐
도 넌 잘 생겼어. 어쩌다 삶이 그렇게 꼬였냐?"
"공대가 어때서 임마."
"넌 눈이 아주 낮잖아. 그 잘난 외모로 그 사자머리하고 사귄걸 보면."
"니가 몰라서 그렇지 의정이 걔 참 예쁜 여자야. 근데 갑자기 뽀뽀 얘기는 왜
했냐?"
"그 사자머리보다 백 배는 예쁜 은정이 누나가 내 애인이다. 그 누나하고 나 시
도때도 없이 키스하고 그런다."
확실하게 기를 죽이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본다.
"푸헬헬! 거짓말 치지마. 그 잘난 여자가 대가리 총맞았냐 너하고 키스하게. 술
먹고 장난삼아 뽀뽀 해 준걸로 너 뻥치는거지?"
왜 안 믿지? 그럼 좀 더 강한 거짓말로...
"내 애인 맞다니까. 나 누나 가슴도 만져 봤어."
"뭐! 가슴을 만져?"
야이, 저 옆에 아가씨들이 다 듣잖아.
"아니, 찔러 봤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누나가 내 애인이라니까."
"야, 나이 많은 여자는 나이 어린 놈에게 종종 애인처럼 잘 대해줄 때가 있어.
거기에 속아 넘어 가면 넌 하인되는 거야. 내가 힘으론 우리 누나들 셋이 다 덤
벼도 이기지만 막내 누나에게도 쩔쩔 매는 것은 다 그런 그녀들의 수법에 넘어
갔기 때문이야."
"이 새끼 군발이 되더니 의심만 늘었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너 혼자만 아무도 몰래 그렇게 생각 해. 쯔쯧. 나
중에 아픔이 커겠구만."
"나 수요일 날 다시 온다. 그때 보자."
"야, 좀 더 놀다 가, 삐쳤냐? 다섯시까지 있다 가."
"너 혼자 놀아 새꺄."
내가 은정이 누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친구가 믿어 주지 않았다. 별로 기분 나
쁜 것도 없다. 하지만 누나가 나와 애인사이 된 것이 대가리 총맞을 정도인가?
내가 내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 누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랗게 느껴졌나?
지하철 역으로 들어 가 화장실을 찾았다. 내 모습이 별 볼일 없어 보였다. 히
죽 웃었다. 은정이 누나에게 이런 내 모습이 잘 어울릴까?
집에 와서 바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친구 면회 갔었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너네 아버님이 그러시더라."
"우리집에 전화 했었나 보네요?"
"응."
"누나 내 애인 해 주기로 했죠?"
"해 주기로? 그거 너 싫어하던 말이었잖아."
"하여튼. 내 애인 맞죠?"
"왜 자꾸 그런 걸 묻니?"
"그 새끼가."
"좋은 말 좀 쓰라. 면회갔던 친구 말하는거니?"
"응."
"걔가 왜?"
"누나가 내 애인이라고 막 자랑했는데 그 새끼가 막 놀렸어. 거짓말하지 말라
고."
"후훗, 너 장난스럽게 말했지?"
"씨, 누나 수요일날 바빠요?"
"바쁘진 않지만 연구실에 있어야 돼."
"그때 결석해요."
"왜?"
"나랑 그 새끼 면회 갑시다."
"응?"
"가서 내 애인 맞다고 좀 말해줘요."
"너 이럴 때보면 참 어린 애 같다."
"내가 누나보다 두살 적다고 그러는거지?"
"또 삐칠려고 그런다."
"갈거야 말거야."
"꼭 가야 되니?"
"응. 내가 오늘 참 많이 수모를 당했단 말이에요."
"너 아직 불안한거지? 그런 생각 언제 떨쳐 버릴래?""
"에?"
"그래, 가서 확인시켜 줄게. 화요일날 서울 올라 오지 뭐. 하루 정도 빠진다고
날 제적시키겠어 어쩌겠어."
"정말 갈래요?"
"가자며?"
"하하, 그럼 내가 화요일날 누나 데리러 갈게요."
"흠. 철수야."
"왜?"
"두 살차이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마. 그리고 내가 너보다 대단한 사
람이라고도 생각지 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보여요?"
"응, 많이."
"그게 보여요?"
"응."
보이나? 어떻게 해서 보이지? 두 살 많다고 나보다 제법 많이 아네. 그건 그렇
고 푸하하, 승헌아 수요일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