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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시대의 역사
우리 역사에도 창세(創世) 이야기가 있음이 신라때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가 최근 발간 됨으로서 알려졌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마고성(麻姑城)의 여신(女神)인 마고에게 두 딸이 있고 이들에게서 황궁, 백소, 청궁, 흑소씨의 남녀 각 1명의, 8명이 태어났고, 이들이 각각 3남 3녀를 낳앗는데, 이것이 인간의 시조이며 몇대를 지나 자손이 30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성(城)안의 사람들은 품성이 순수하여 능히 조화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가 맑았고 수명은 한없이 길고 누구나 스스로 지키는 자재율로 질서를 이루었다.
어느날 백소씨의 일족인 지소씨가 지유(地乳)대신 포도를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먹게 함으로써 5미(味)의 맛에 취하고 다른 생명을 취함으로써 천성을 잃게 되고 수명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들은 성에서 쫒겨나게 되었고 성안에도 지유(地乳)가 끊어져 모든 사람들이 풀과 과일을 먹게 되었다.
이런 사태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어른인 황궁씨가 책임을 지고 마고 할머니 앞에 복본(復本: 근본으로 돌아감)을 서약하고 모든 사람의 4파로 나누어 성을 떠남에 있어 황궁씨는 일행을 이끌고 북쪽 문으로 나가 동북 아시아 지역의 천산주(天山州)로 갔다.
황국씨와 그의 자소니인 유인씨 그리고 유인씨의 자손인 한인씨가 천년씩 3천년동안 복본을 위해 몸과 마음을 열심히 닦은 결과 기후가 안정되고 사람들의 의식이 상승하여 인성
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桓國)에 관한 기록은 <한단고기(桓檀古記 )> 삼성기(三聖記)에,
[우리 한(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어느날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왔다. ...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한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젼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3,301년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여 한국이라 하며 나누어 말하며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선비이국, 수밀이국으로 보두 12국이다]라고, <한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이로부터 한인의 영제 아홉분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皇), 64(民)이라 한다]고 하였다.
12국중 일부의 이름이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한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5만리에 이르는 한국(桓國)은 아시아 거의 전부에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미쳤음을 짐작 할 수 잇다. 또 12국 중 수밀이국은 메소파타미아 지역의 슈메르(Sumer)로 해석되고 있는데 슈메르는 현재 가장 빠른 문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슈메르인들은 동방의 고원 산악 지대에서 이동해 온 민족으로서 검은 머리를 한 황색인종이며, 이들의 유적지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대량 발견되었다.
<배달국 개요>
* 국 호 : 배달(혹은 밝달, 박달로서 ‘밝은 땅’이라는 뜻)
* 성 격 :
* 존속기간 : 서기전 3898 - 서기전 2334(1,565년간)
* 역대한웅 : 시종 한웅(桓雄) 거발한(居發桓) - 18대 한웅 거불단(居弗檀)
* 강 역 :
* 도 읍 지 : 신시(神市)
* 고고학적 시대 : 신석기 시대 후기 - 청동기 시대 초기
<<배달국의 건국>>
<삼국유사>, <한단고기>, <삼성기>, <태백일사> 등에서는 배달국의 건국에 관하여 한웅께서 지상에 홍익인간하여 광명 세계를 열고자 천부인(天符印) 3개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일반적으로 백두산으로 봄)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한다.
한운은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 하였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교화하고 인간 세상을 크게 도왔으니 사람들이 한웅천왕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을 보면 당시 중국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 쪽에는 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치우(蚩尤)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을 일컫는 마린데 치우란 우레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며, 동양의 군신(君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보면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투구와 갑옷을 입은 모양) 중국의 화아제(皇帝 : 중국 역사의 시작인 3황5제중 5제의 첫째를 연전연파하여 청구를 개척하고 땅을 넓혀 중국 땅이 대부분이 우리에게 속했다.
중국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 하였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4천년전...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구려(九黎)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이다’,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산동반도)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丈)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등으로 적고 있다.
한웅천왕이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 되었다. 3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 명의 제왕을, 5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3황5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 들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 사학자들이 공동 편찬한 <고사변(古史辯)>에서는 은(殷)나라 사람이 동이(東夷: 조선족)와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고 하고, 삼화오제 가운데 태호, 제준, 제곡, 제순, 소호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라고 한다.
우리의 기록인 <한단고기><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3황 중 태호 복희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한웅의 12아들 중 막내이며 염제 신농은 웅씨(熊氏)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5제 중 요.순 시대라 하여 태평 성대의 대표로 꼽는 요임금과 순임금에 관하여 보면 요임금은 배달국의 말기와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에 걸쳐 있었는데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제위를 불려 주었고 순임금은 상국(上國)인 조선에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단군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보내 오행치수법을 전해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고조선 개요>>
* 성격 :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민족 국가이며 아홉갈래의 한족(桓族 : 조선족) 부족들을 모이 이룬 통일 연맹체‘
- 거수곡(제후국) : 2000년 동안 많은 거수국들이 명멸하였으나 임둔, 현도, 숙신, 청 구, 옥저, 비류, 한(韓)등이 대표적
* 존속기간 : 서기전 2333년 - 서기전 237년(2,096년간)
* 역대단군 : 시조 단군 왕검 - 47대 단군 고열가
* 강역 : 현재 중국 하북성, 요녕성의 난하 일대로부터 내몽고 자치주 및 그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및 한반도 전역.
* 도읍지 : 아사달이 당초 도읍지였으나 후에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등으로 옮김.
- 첫 도읍지 아사달에 관하여 신채호는 송화강변 완달산 하얼빈이라 하고 윤내현
교수도 조선족의 기원지는 백두산 지역일 가능성을 전제하여 건국 시기의 평양은 심양 근처로 추정.
* 고고학적 시대 : 청동기 시대(고조선 전, 중기) - 철기시대 초기
(서기전 7-8세기 이후, 고조선 후기)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곰과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부족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느 부족을 뜻하는지 확실 하지는 않으나 윤내현 교수는 곰족은 고구려족, 호랑이족은 예(穢)족으로 간주한다.
단군왕검에 관해 많은 우리 역사서들이 실재 역사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일례로 <단군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여왕이다. 신묘년(서기전 2370년) 5월 2일 박달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무진년(서기전 2333) 중국 요(堯) 임금때 단국에서 아사달 단목의 터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이 천제(天帝)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이에 구한(九桓)이 하나로 통일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는 멀리까지 비쳤다....... 神市의 옛 법규를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고조선의 정치>>
고조선의 최고 통치자는 단군으로 제정(祭政) 일치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다.
고조선은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봉건제 통일 연맹 국가였는데 전국토를 셋으로 나눠 3한(三韓)이 관경(管境)이 되었다. 3한은 진한, 마한, 변한으로서 진한은 단군이 겸하였고 마한, 변한은 비왕(婢王)이었다.
<한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제왕운기> 등을 보면 중앙 행정 조직으로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3사(師) 및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 주병(主兵)의 6事가 있었으며 이는 후대(後代) 여러 나라의 3성6부제, 3정승 6판서 등의 원형이 되었다.
3한의 각 하위 조직으로는 5가(加)가 있어 화백 회의의 주된 구성원이 되었는데 우가(牛加) 마가(馬加) 구가(狗加) 저가(豬加) 양가(羊加)를 말한다.
이외에 고조선의 관직으로는 상(相) 상장(上長) 상장(上將) 장군(將軍) 태재(太宰) 수재(首宰) 태자태부(太子太傅) 호군(護軍) 욕살(褥薩) 제후(諸侯)박사(博士) 제가등이 있었다.
<<고조선의 종교, 사상>>
고조선의 최고신은 하느님이었는데 하느님은 원래 고조선 건국의 중심 종족이며 최고 지배족이었던 조선족의 수호신이었다. 하느님은 광명을 뜻하는 ‘환님’, 하나뿐인 큰 신이라는 뜻의 ‘한님’등으로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기록하면 한인(桓因)이 되었다.
선교(仙敎)는 사람이 사회와 역사의 주체임을 천명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인본주의의 종교로서, 그 추구하는 목표는 건국이념에 나타난 ‘홍익인간 제세이화(弘益人間 在世理化)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선교(仙敎)의 종교 사상은 모든 것을 화합과 조화로 파악 하였으며 서로 다른 것을 대립이나 반대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호 보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주 요소는 3이며 사물이 변화 하는 과정도 3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는데 이는 3.1 사상으로 불리워진다.
사람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금기를 통한 수련과 건강식을 이용한 섭생을 실천했다. 그리고 사람이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구체적 도덕 규범으로서 어버이에 대한 효도,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과 봉사, 일을 함에 순리를 따르는 것,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것, 착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며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등이 있다.
<<고조선의 풍속. 사회>>
◎의.식.주
식생활에 있어서는 다양한 나무그릇, 질그릇과 함께 숟가락도 사용 하였으며 음식의 주재료는 오곡과 나물, 해산물, 육류 등과 소금, 술, 식초 등도 사용 되었다.
주택은 농촌의 경우 지상식 건물도 있었으나 대개 지하 50-60 센티미터의 반지하 움집이었고 주위에 흙이나 돌로 담장을 설치 하였다. 난방 시설도 점차 발전하여 후기에는 온돌이 출현하였다.
◎ 사회
고조선의 마을은 가족공동체가 기초가 되어 형성된 씨족마을로서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내용이 도덕과 법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가장 기본되는 도덕, 윤리의 덕먹이었으며 이는 유교가 수입되기 이전부터 고조선사회 고유의 규범이었다.
범금8조(犯禁八條)가 있어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 보상하며 도적질 하면 노비가 되는데 50만을 내면 면죄가 되었다. 신분제와 재산사유제가 확립되어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가 있었지만 차별 의식은 심하지 않았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으면 신분 차별없이 모여 함께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고조선의 경제>>
고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으며 5곡을 비롯한 대마, 황마 같은 섬유 직물이 재배 되었다. 농토가 많이 개간되어 구획 정리와 관개 시설이 되어 있었으며 농기구도 널리 보급되었다. 토지 제도는 균전제를 채택 하였고 조세 제도는 수확의 20분의 1을 거두어 들였다.
농업과 함께 길쌈과 목축, 사냥과 고기잡이도 활발 하였으며, 발달된 청동기, 철기 문화는 여러 방면의 수공업을 발전 시켰다.
수공업의 발달은 결과적으로 상업의 발달을 가져와 고조선은 일찍부터 활, 화살, 화살촉 등의 무기와 모피의류, 모직의류, 표범가죽, 말곰가죽 등의 생활 사치품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이러한 교역을 통하여 고조선은 외화를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는 고조선 시대의 여러 유적에서 명도전, 포전, 반량전 등의 중국 화폐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교환경제의 발달에 따라 고조선의 화폐도 패전, 패엽전, 자모전, 공방전, 일화전등이 사용 되었으며,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 즉 쌀되와 저울 등을 통일 하였다.
<<고조선의 문화>>
◎ 문자(文字)의 창안
가림토문자는 일본에 전해져 신대문자인 아히루문자가 되었으며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문자로,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트 알파벳과 구자라트문자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과학.기술
천문, 기상, 치수, 토목, 의학지식과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특히 청동과 철에 대한 지식과 응용기술은 뛰어났다. 청동기의 용도에 따라 합금비율을 달리 하였으며 주조 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출토 유물에 대한 현미경 관찰에 의하면 기포가 전혀 없고 분자의 조직이 매우 고르다. 철기는 서기전 7-6세기경에는 선철, 서기전 3세기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