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님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야기에 천막극장이 나와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어렸을 때 얘긴데요. 우리 고향 김제는 곡창지대라 알부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해서, 써커스나 유랑극단 또 유명 연예인 극장공연이 자주 있었습니다.
읍내에 극장이 세개나 있었구요.
우리집은 읍내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방이 여러개 있어서 써커스나 유랑극단 사람들이
한달씩 월세를 내고 우리집에 세를 들때가 종종 있어서, 써커스나 천막극장에서의
공연은 그 내용이나 배우얼굴을 익힐 정도로 많이 관람했죠.
한데, 어느 해인가는 가설극장이 들어오긴 했는데 우리 집에서도 멀고 또 아는 인맥도
전혀 없는 겁니다. 그 공연을 보고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레퍼토리도 다양하고
무대의상이 화려한 데다 또 배우들 얼굴도 무지 예쁘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들을 하는 겁니다. 한, 두번 그곳에 간적은 있습니다. 우리 국악원 강종철선생님께서
자기 친구분이 악사로 그곳에서 반주를 한다면서 한번 인사차 가자하셔서 따라갔었습니다.
정말, 지금도 유명 국악인으로 활동하시는 그런 분들이 즐비하더라구요.
선생님은 그분들과 인사하고 나서 또 유망한 애들이라면서 나와 동생, 쌍동이 자매를
그 분들에게 소개하며 인사를 드리라 해서 인사를 했죠. 그리고는 극을 관람했습니다.
한데, 정말 의상이 화려하고 배우들도 세련되고 멋있더라구요.
무대 장치도 예전 단체들보다는 훨씬 좋아졌구요.
아마, 장화홍련전을 관람했죠?
문제는 다음날 입니다.
그 사회자가 어찌나 다음 공연을 못보면 후회한다며 허풍을 떠는지 궁금증이 나 살수가 없는 겁니다.
인상이 험악한 사내가 입구에 떡 버텨서서 보호자 없이 오는 애들을 쫓아 보내니
방법이 없던 차에 마침, 우리동네에서 살다 이사간
백은숙이라는 친구를 그 천막극장 앞에서 만난 겁니다.
"야, 정숙아! 너 저기 들어가고 싶냐?"
"말이라고? 너는 안 그러냐?"
"야, 나는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본다야. 거짓말 같으면 나를 따라와 봐."
은숙이 뒤를 따라가니 그애가 저희집 뒤안으로 가더니 나를 안아 올려주며 뒷담을 넘으라는 겁니다.
은숙이 말대로 담에 배가 걸려있는 상태에서 오른쪽 다리를 올리려다 보니
밑에 썩혀서 밭에 주려고 파놓은 똥구덩이가 있는 겁니다.
물론 바로 밑에 발 하나 디딜정도의 마른 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만 부주의했다간
똥통에 영락없이 발을 적실 수도 있겠더라구요.
하지만 그런 정도에 망서릴 이 보라돌이가 아닌지라 대담하게 담을 넘었습니다.
그 똥통을 비껴서 넓은 밭을 뛰어가는 기분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죠.
슬쩍 포장을 들추고 경비가 다른 곳에 있을 때 들어가 앉으면 게임은 끝나는 겁니다.
물론,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는 모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옆에 가까이 앉아 손녀행세라도
해야 하지만 까짓 담을 넘고 똥구덩이 지나오는 것에 비하면 그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죠.
그날 이후로 내 동생, 내 동생의 친구들, 내 친구들 할것 없이 죄 모아서는 백은숙네 집 뒷담을
뻔질나게 넘나들었답니다. 가끔은 백은숙이 집에 없을 때도 내집 드나들듯 그렇게 말입니다.
가끔은 모질이같은 동생 친구가 그 똥구덩이에 발이 미끄러져 굿도 못보고 울면서 저희 집으로
돌아간 일도 있긴 했지만, 별 무리없이 거의 한 달간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렇게 국극을 관람했답니다.
매일 다른 레퍼토리로만 공연하는 건 아니고 간혹, 재방송하듯 되풀이 공연되는 것도 있었지만
우린 개의치 않았답니다.
그 선녀같은 배우들의 춤이며, 악사들의 자지러진 아쟁, 젓대소리, 그리고 저정그러지는
동살푸리 장단에 마냥 신이 났었죠.
그런데, 이젠 무료 초대권이 날아와도 아는 사람 공연이 아니면 안가게 되더군요.
어렸을 적의 그 신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첫댓글 저도 마차다리 하천에 천막극장이 오면 엄마가 날데리고 저녁 마실을 갔어요. 그들이 떠나고 천막이 보이지 않았을 때의 섭섭함이란.. 구경을 위해서라면 똥통 정도야 건너 뛰어야죠. 지금은 그 어느 재미나고 유명한 오페라을 본다해도 그때 그 시절처럼 흥미롭고 가슴이 조마 조마하게 지켜봐야 하는 서커스나 연극은 없더라고요. 아날로그 시대가 왜이리 갈수록 그리운지.. 그 시절에는 가난해도 지금보단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라돌이님 강습회을 보면 신명이 나요 ^^
초심님, 천막극장 특별 게스트였던 당대의 명창 조농옥(국극스타 조금앵씨의 언니)여사가
우리 집에 한달 정도 세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조 선생은 남편,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며 순회공연에 참여하고
있었죠.초등 2년때 쯤 이었을까요? 어느날, 그집 식구가 없는 틈을 타서 항상, 댓돌 밑에 고이 모셔둔 조선생의
구찌구두를 신어 봤습니다. 지금 추측컨대, 까만 송아지 가죽에 앞코가 둥그스럼하고 굽은 중간 굽, 적당한
광택과 단정한 디자인이 참 품위있고 고급스런 모양이었죠.
" 야, 너네들 조심해서 신어야 한다. 신발이 꺽이면 안되니까..."
울언니가 먼저 신고 부엌 한바퀴, 다음은 나, 동생...그리곤 감쪽같이 제 자리에...
정말 천상소리꾼이시네요. 어렸을때부터 예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네요.
과찬이세요. 천상 소리꾼 깜은 아니구요. 그냥 딴따라 쟁이의 신명이 좀 있었던가 봅니다.
천상소리꾼이었다면 중도에 근 십오륙년을 포기하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쯤 큰 명창이 돼있겠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푼동이님에게 어릴 때 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이 주어졌더라면
아마, 큰 예술가가 돼 있겠죠?
에구.. 저 사는 동네에도 천막극장 같은건 없었답니다.
맨날 총소리 대포 소리.. 쌕쌕이 소리뿐...
그러나 동네 할아버지 태평소 소리에 국악에 관심을 가졌지요
소중한 추억이십니다^^*
대단하세요. 그닥 풍요로운 예술적 풍토가 아닌 고향에서
그토록 예술적 감성을 키워오신걸 보면요.
서진님 고향에서도 경기소리며 농악은 꽤 행해졌었죠?
그러니 태평소 소리의 추억이 남아있는 겁니다.
네 보라돌이님!
아랫마을로 시집을 왔는데 몇년동안 농악놀이가 있더군요!
농기대 꽂고 모내기도 하구 상모 돌리며 집집마다 다니며 축원하며 다니는걸 봤어요^^*
제가사는 부천에도 예전에는 이렇게 국극단이들어오면 동내에서 그중 큰쌀방앗간 마당에 힌천막을치고
공연이들어오면 한달정도는 공연을하면서 약도팔고 비단도 팔곤했지요 화장을 진하게 해서인지 그사람이
그사람같더군요 무슨극인지 기억응 않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칼로 주인공인지 악인인지는 모르지만
그칼로 사람을 찔로는데 잔짜로 칼이 안으로 쑥들어가기에 어린저는 억하고 소리를 냈담니다
지금생각해보니 그칼이 칼집안으로 들어가는걸 그때는 알리가 없지요 그때 저나이가 6세나 7세 때로
기억나내요 보라돌이 사부님 글을 보니 아나도 이렇한 기억이 있었지 해서 덩달아 그때에 기억으로 ㅋㅋㅋ
역시 달구지님도 어렸을 때 국극을 보셨군요.
맞습니다. 국극배우들은 분장스타일이 따로 있죠?
거의 경극 배우처럼, 또는 일본의 가부끼 배우처럼 분장을 하는 경향이 있었죠.
6세, 7세 정도면 배우가 무대에서 쓰러지면 정말로 죽는 줄 알기도 했을 겁니다.
저희땐, 그렇게 순진했었죠.
69년 중1때..광주 태평극장에서 여성국극을 보았는데요..
주인공이 어렴풋이 ..김진진씨라고 하던가 ?. 가물 가물..
단골 여주인공이 김진진씨, 남자역활 주인공은 임춘앵, 조금앵 등등....
사실, 그땐 농악, 국극외에 별 볼거리가 없긴 했었죠?
ㅎㅎㅎ 스릴이 있었겠습니다.
냇갈가에 백포장 치고 이동 영화가 들어왔었지요.
너네 큰오빠가 영화 보여줬단 말을 듣고 나는 쫓더니 화가 단단이 나서 엄머니께 난 큰오빠 내기 낳으면 절대 안봐줄거라고 말했더니 보여 줬는데 고뿔만 엄청 들고 말았습니다.영화 제목도 생각이 안나고 움직이는 동영상만 봤습니다.그리고 국극이라 여겨지는데 나주 세지면 동창에서 한 달을 넘게 공연을 했는데 삼삼차, 경옥고, 껌을 팔았지요.암튼 그걸 보려고 십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심청전을 하는데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에서 소품으로 배도 나오고 물을 튀겼다는것 아~~~~~
국사봉님도 무지 좋아했을 것 같아요. 영화, 국극, 농악공연 할것 없이 말이요.
맞아요. 천막극장에서 국극만 한게 아니지요. 반드시 약을 팔았습니다. 막간을 이용해 약을 판다지만
어찌나 약팔기에 열을 올리는지 기억력 흐린 분은 전막의 내용을 잊을 정도로 그 시간이 길기만 했죠.
우리 때는 여러 약을 팔았는데 그 중 기획상품이 바로 '카프리차'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소화제, 피로회복제 정도의 약일 건데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과대선전을 하곤 했죠.
오죽하면 내동생이 어머니날 저금통 털어서 그 약을 사다 엄마한테 줬겠어요.
엄마는 동생의 정성에 감동했던지 그 약을 식후에 꼭 복용했었다우.
그 약맛 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