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으로 창립 30주년을 맞으며, 교인수가 물경 5만 명을 상회하는 소망교회는 곽선희 목사(이하 ‘곽 목사’)께서 개척하셨다. 2003년
10월에 은퇴하신 곽 목사는 현재 소망교회 원로 목사이면서 동시에 예수소망교회 동사목사로 시무하면서 서울장로회신학교 이사장,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등으로 활동하신다. 평자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곽 목사의 설교 사이트에 접속해보니 요즘도 매주일 설교하고 계셨다. 상식적으로 원로 목사는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단에 서지 않으며, 선다고 하더라도 뜸하기 마련인데, 곽 목사는 예외였다. 이상하다 싶어 좀더 자세하게 그 사정을 살펴보니
그의 설교는 소망교회가 아니라 예수소망교회에서 행한 것이었다. 예수소망교회의 ‘동사목사’라는 게 아마 담임인 곽요셉 목사와 동역한다는, 특히
설교 부분에서 동역한다는 뜻인 것 같다. 동일한 본문과 동일한 제목으로 곽선희, 곽요셉 부자(父子) 목사님이 5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
예수소망교회의 주일공동예배 설교를 분담하고 계시는가 보다. 곽 목사는 지금도 현역처럼 왕성하게 설교자로 활동하신다. 평자는 인터넷에
올라온 곽 목사의 동영상 설교 중에서 작년 12월분과 금년 1월분을 시청했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십여 년간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영성신학』도 설교의 토대라 할 영성에 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소망교회에서 26년 동안 설교자로 활동하면서 출판한 설교집은
수십 권에 이른다. 주마간산 격으로 그것을 검토해본 결과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고, 그 많은 분량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서 평자는 시기별로
나누어 세 권을 집중적으로 살피기로 했다. 1991년에 나온 『궁극적 관심』(이하 ‘관심’), 1996년에 나온 『내게 말씀을 주소서』(이하
‘말씀’), 그리고 2004년에 나온 『지식을 버린 자의 미로』(이하 ‘지식’)가 그것이다.
실존적인 신앙 곽 목사의 설교를
일단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청중들의 심령을 편안하게 만드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청중들에게 교회생활의 방식이나 요령을 강요함으로써
피곤하게 만드는 법이 없다. 그 대신 그는 신앙 자체를, 더 정확하게는 신앙적인 삶이나 태도를 전하는 일에 중심을 둔 설교를 한다. 그의
설교에서 기복적인 요소나 신비주의적 요소, 또는 감상주의적인 요소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강단에
올라서기만 하면 헌금해라, 새벽기도회 나와라, 전도해라, 교회봉사 해라 등등, 거의 잔소리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기에 바쁜 오늘의 설교풍토에서 곽
목사의 설교는 애초부터 신선했고, 격이 높았다. 곽 목사가 기독교인의 구체적인 삶과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곧 그의 신앙과
설교가 실존적인 성격을 매우 강하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실존적 영성이 그의 설교를 추동해가는 힘의 원천이다. 실존을 가리키는 라틴어
existentia는 ex(로부터)와 sistere(존립하다)의 합성어다. 즉 실존은 어떤 대상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의
독자적 생존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사건 자체를 가리킨다. 기독교 신앙은 환경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몫이라는 곽 목사의 주장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곽 목사의 표현을 그대로 따른다면 “문제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으며”,(관심 40) 세상살이는 모두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험악했던 시절을 본인이 그런 신앙으로 버텨온 탓인지 “환경을 묻지 마십시오. 세상의 문제가 아닙니다.”(지식 148, 207) 하고 강조할 때가
많다. 투쟁이나 혁명이라는 구호에는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그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내부에서 해결하라고 주장한다. 이런 호소는 그의
설교에 지천인데, “평강이 지키시리라.”(빌 4:4-7)는 설교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심과 불안은 내 병일뿐입니다. 그것은 장애입니다. 이제 중생함으로 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환경을 묻지 마십시오. 세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내 마음, 내 영혼 상태의 문제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그리고 그가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그 평강으로 충만한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지식
148)
평자는 그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환경이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찾기 전까지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동일한 고백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곽 목사의 설교는 한국교회의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영성을 실존적 영성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설교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곽 목사의 실존적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한다는
키에르케골의 입장과 통하는 것 같다. 즉 그의 실존적 영성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리킨다. 그 궁극적인 것은 곧 하나님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들이다. 그래서 그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있다.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관심의 초점을 생명문제로 돌려야 합니다. 잘 살고 못 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명예롭고
수치스럽고 …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말씀 166 쪽) 어차피 우리는 다 알 수도 없고, 다 가질 수도 없고, 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중에 제일이 무엇인지, priority number one,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이것은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른다면 나머지 것은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지식 64)
곽 목사가 강조하는 ‘궁극적인 관심’은 원래 폴
틸리히가 언급한 신학개념이다. 그가 실제로 폴 틸리히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제목을 설교집의 제호로 삼았다는 사실과 그
설교의 전반적인 기조를 놓고 볼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폴 틸리히의 신학은 그가 활동한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했는데, 그 신학의 특징을 세 가지로 줄인다면 문화,
상관관계, 실존이다. 이런 세 가지 특징은 곽 목사의 설교에 그대로 나타난다. 곽 목사는 대중적인 설교자로서는 드물게 폴 틸리히와 비슷한
지성적인 포즈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실존적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유상성이 유별나다.
여러분, 영생의 문제는 행함의 문제라기보다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to do’의 문제가 아니라 ‘to be’의
문제입니다. ‘becoming’의 문제가 아니고 ‘being’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관심 69)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된 자가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독일어로 하면 게보르덴
자인(geworden-sein)이 아니라 베르덴 자인(werden-sei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죄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관심 113)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른 설교자들은 도덕적인 타락을
직접 공격하지만 곽 목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깊이에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의 설교가 지성적 청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된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이라거나, 아니면 성서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설교가 아니라 성서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할 인간의 실존에 천착하는 설교는 삶의 실존적 차원을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현대 지성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다. 소망교회가 한국에서 가장 전형적인 지성적 교회로서 자리매김 된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궁극의 무늬 오늘 평자는 그가 말하는 궁극적 관심이 과연 궁극적인가에 대해서 질문하려고 한다. 이 질문은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실제로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평자가 이렇게 시비 걸듯이 질문하는 이유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궁극적인 언어가 거침없이 선포되지만 그 내용이 전혀 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화들짝 놀라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구원, 창조, 종말, 사랑, 칭의, 하나님 나라, 회심, 섭리, 예정, 성령, 삼위일체 같은 궁극적인 용어들이 중구난방으로 선포될 뿐이지
실제로는 그것의 궁극적 현실성을 상실한 설교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계시 받았다”고
선포하는 이들의 설교는 싸구려 약장사나 보험회사 외판원의 선전문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곽 목사가 말하는 궁극적 관심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reality)인가, 관념(idea)인가? 그것은 생명을 담지한 세계인가, 공허한 언어에 불과한가? 더 정확히 말해서 곽
목사는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해들은 말을 요령껏 전달하고 있을 뿐인가? 우선 그가 인류의 역사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웬만해서 남의 탓을 하지 않고 비판도 하지 않는 곽 목사가 공산주의와 북한문제만 나오면 냉소적인 태도를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그가 역사 문제를 궁극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피상적인 현상에 머물러 있는 건지 모호해 보인다. “해방의
노래”라는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결국은 지식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요, 교육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풍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사회주의 국가는 지긋지긋하리만큼 못삽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마 이만큼 못살겠지 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못합니다. 그렇게 못살 수가 없어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못삽니다. 왜 못
사느냐고요? 사회주의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거지주의’라고도 풍자합니다. 그 주의가 사람을 변질시켰습니다. 일을 해도
육체노동만 고무했지 정신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으니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관심 130)
곽 목사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설교하는 분인데, 이런 대목에서는 그 논리가 매우 편파적이다.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니까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두라고 호소하던 분이 무슨 이유로 공산주의 정권의 가난을 조롱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평자도
공산주의와 현재 북한체제를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우리가 정치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계획과 통치에 영혼을 의지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현재 잘 살고 못사는 결과만으로 어떤 사상과 정치이념들을 재단할 수는 없다. 곽 목사는 위에서 인용한 언급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겪은 여행담을 이렇게 술회한다. 곽 목사가 아는 사람이 자동차를 후진시키다가 아이를 치어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서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하겠다고 하자, 그 아이 어머니가 그 애 말고도 자식이 많은데 뭘 그러시느냐고,
괜찮다고, 그냥 가시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곽 목사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난하고 왜 이렇게
비참해졌겠습니까?”(131) 그리고 이어서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정신적 기아 상태는 신앙의 문제, 종교의 문제라고 했다. 종교가 잘못되면 사상이
잘못되고, 사상이 잘못되면 교육이 잘못되고, 교육이 잘못되면 인간이 잘못된다면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은 마침내 물질에까지도 풍부하고
여유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상적으로 잘못되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때에 가난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관심 131, 132)라고
강조하고 있다. 평자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을 전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관을 청중들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곽 목사의 설교가 무늬만 궁극적이지 실제로는
전혀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자기 아이를 죽인 외국인 여행객과 멱살잡이를 하면서 한밑천 뜯어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어느 가난한 동남아 여인을 보고 왜 그렇게 정신적으로 비참해졌는가, 하고 핀잔을 주거나 연민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될까? 이런 문제를
종교의 차원까지 끌고 나간다는 것은 전형적인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경제, 문화의 차원에서 우리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일본이
신사(神社)의 나라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남의 불행을 딛고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신앙의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일반화의 함정 이 문제를 분명하게 따라가기 위해서 『궁극적 관심』에 실린 설교 중에서 두
편을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하겠다. 하나는 그가 이 설교집의 제호로 삼은 “궁극적 관심”(마 6:25-34)이다. 곽 목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인 게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고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야 한다고 설교했다. 이
설교를 들은 소망교회 신자들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분산되었던 자신들의 삶을 다시 교회 중심으로, 신앙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지 모른다. 이것으로 설교자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라면 곽 목사의 설교는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리라. 그러나
평자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일반화에 꽁꽁 묶여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거의 의식주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는 그 현상을 적절하게 분석하면서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곽 목사의 주장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설교가 그런 단계에서 멈춤으로써 그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세계가 닫히고 말았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대로 일반화의 함정이다. 예컨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충성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악한 세상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
등등, 이런 일반적인 주장이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설교가 이런 일반론에 고착되면, 그래서 심화의 과정이 없으면 결국 죽는다. “설교하고
있네!”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사태를 가리킨다. 곽 목사가 의식주 문제에 치중하는 현대인의 삶을 아무리 적나라하게 파헤친다고 하더라도 그 설교를
듣는 현대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신들이 늘 들었던 당연한 설교를 약간 재미있게, 또는 약간 더 세련되게 들은 것 말고는 아무런
감동이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시늉을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목사들은 신자들이 오히려 목사를 위해서 설교에
은혜를 받는 척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눈치채야한다. 이런 상태에서도 교회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청중들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의 설교에도 많은 민중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역설에서,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의 말씀에도 청중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설교는 아니다. 물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설교가 옳은 설교라는 말도 아니다. 평자의 생각에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은혜가 아니라 은혜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신비에 영적인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왜 다른 차원인지 아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곽 목사가 이런 일반론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 세상의 삶을 부정하고 “저 세상”을 아주 막연하게, 아주 모호하게 강조하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진술을 보라.
무너지는 세상을 그리워하지 말 것입니다.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가까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을 것입니다. 무너지는 장막집을 제쳐두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영원한 집을
생각합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우리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관심
23)
독자들도 생각해 보시라. 사람이 죽을 것이며, 인간의 역사도 간단히 해체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시골
장바닥에 좌판을 깔아놓고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들이나 막노동꾼들도 훤히 아는 사실이다. 이런 일반론적 시각을 단지 성서를 근거로 전달하는 게
설교라고 한다면 설교자와 인생론 강사와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마 곽 목사는 자신이 그런 일반론에 떨어진 게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초기 설교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궁극적인 것에 관해서 실존적으로 설교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만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설교에서 궁극적인 세계가 열리는 걸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대답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먹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입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영광도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관심 18) 이런 주장은 당연하며, 또한
옳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명과 그 유지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곽 목사의 이런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일반적 원칙론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않음으로써 결국 변죽을 울리는 설교로 떨어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설교는 원래 이런 신앙의
일반적인 원칙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내 말이 트집 잡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평자는 지금 언어의
궁핍을 느낀다. 평자가 보기에 곽 목사는 궁극적인 것이 왜 의식주 문제와 다른 지평인지를 해석하지 않았으며, 또한 궁극적인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해석하지 않았다. 어림짐작으로 곽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다. 공연히 세상의 욕망에 시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잘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설교라는 말인가? 곽 목사가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간곡하게 권고하고 있는 의식주 문제는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가신 모습도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것 같았다는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를 보면 예수님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코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떡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변증법적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 곽 목사가 말하듯 “제쳐 두라.”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설교자들은
인간의 삶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말고 정곡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 FTA, 빈부양극화, 신자유주의, 부와 가난의 세습, 무죄한 자의 불행 등등,
청중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돈이 없어서 병 치료를 제 때에 못 받는 이들이나 자녀들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이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부인들을 향해서 세상일은 별 거 아니니까 궁극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라고 설교할 수는 없다. 기도하기만 하면 그런 문제들이 모두
일시에 해결된다는 마술적인 처방을 내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청중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을 제시하되 구체적인 삶의 깊이를 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곽 목사의 설교는 개개인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무게를 너무나 간단히 기독교 신앙의 일반론 안으로 해소시켜버린다. 인간이 겪는 염려의 문제를 언어유희로 진술하고 있는 이 설교의 결론 부분을
보라. 궁극적인 것이 곧 3F(three F)라는 것이다.
첫째 F는 믿음(Faith)입니다. 염려를 이기는 길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둘째 F는 아버지(Father)입니다. 모름지기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셋째 F는 무엇이 먼저인가(the First)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먼저요,
이웃이 먼저요, 나는 나중입니다. 이 순서가 분명해야 합니다.(23)
사람들의 실존 문제를 비장한 어조로 분석한 것에 비해서 이
결론 부분은 너무 빈약하고 공허하며, 그리고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접근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영어 이니셜을 통한 언어유희로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우주론적 역사의 무게를 살짝
벗어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믿음만 해도 그렇다. 믿음자체는 그렇게 궁극적인 게 아니다. 이미 바울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도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 규정했다.(고전 13:2) 곽 목사가 궁극적 관심의 핵심이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가리키는 생명의 실체로
파고들어가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는 이유를 평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베테랑 설교자의 설교가 이처럼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신앙의 추상성 평자가 다루려고 하는 두 번째 설교는 “가장 큰 은사”이다. 이 설교는
소위 사랑예찬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울의 편지(고전 12:31-13:3)를 본문으로 한다. 곽 목사의 설교가 늘 그렇듯이 그는 이 설교에서도 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일반론을 펼친다. 에로스는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괴하며, 아가페는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창조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일반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이것은 곧 곽 목사가
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일단 사랑을 아가페, 필로스, 에로스라는 헬라어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형식적으로 그런 구분이 필요하더라도 그 개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에로스는 인간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문명을 살리는
원초적 능력이기도 하다. 자신을 무화(無化)시킬 정도로 열정적인 에로스가 없다면 인류의 존속도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는 설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그가 설교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그 아가페적인 참사랑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아가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출발하여 자기희생을 방편으로
삼고, 그리고 창조적으로 역사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본문은 사랑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카리스마’ - 신령한 선물이라고
합니다.(관심 30)
곽 목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은사를 열거한 다음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1)는 진술에 근거해서 사랑을 은사로 착각한 것 같다. 사랑은 은사(카라스마)가 아니다.
본문비평의 차원에서 볼 때 12:31a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은 12장에 속하고, 12:31b절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은 13장에 속한다. 바울은 12장에서 열거한 은사와 13장에서 해명한 사랑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제시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곽 목사가 설교의 제목으로 삼은 “가장 큰 은사”가 결코 아니다. 만약 사랑이 방언, 가르침, 설교, 봉사 같은
여러 은사 중에서 가장 큰 것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라는 명제는 틀렸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써
우리가 최대한 가꾸고 확장시켜야할 대상이지만 사랑은 그런 인간학적 범주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이럴 경우에만 곽 목사가 인용한 “믿음도
기적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합니다. 희생도 봉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바울의 말은 옳다. 하나님 자체인 사랑을 은사로
오해하는 일은 사실 곽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목사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텍스트로 설교하는 사람은 많은 수고가
들어가겠지만 일단 성서비평에 철저해야 한다. 그런 작업 없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설교하는 경우에 우리는 위에서 보는 것처럼 사소한 것 같지만 매우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 설교의 내용을 조금 따라가 보자. 곽 목사는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태를 나름대로 세밀하게
분석했다. 이런 점은 그의 탁월한 설교 능력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신앙적 처방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나이브하다. 그는 설교의 결론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 세상은 험한 세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맙시다.
문제는 나요, 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큰일은
못해도, 이렇다 할 업적, 이렇다 할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불붙는 사랑 - 이것만은 온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그 큰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나의 인간됨이 있고, 그것이 성도의 소재(所在)이며, 거기에 믿는 사람이
가는 영광의 길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관심 35)
평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설교의 한 토막만
뚝 자를 경우에 왜곡될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곽 목사의 설교가 왜 궁극적이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가에 대한 대답만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설교 “궁극적 관심”도 궁극적인 데 관심을 기울이라고 강변하면서도 정작 궁극적인 것의 현실(리얼리티)을 해명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서도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로 설교의 주제를 가볍게 처리하고 말았다. 그의 설교에서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이
명확하지가 않다. 아니 그것을 해명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험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설교는 공허한 외침이
아닌가. 설교자는 말씀의 당위론이 아니라 말씀의 존재론 두 발을 딛고 서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일반화와 이로 인한 설교의 추상성은 곽
목사를 비롯한 대개의 명망 있는 설교자들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들은 인간 삶에 개입되어 있는 우주론적 무게를 살짝 건드리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감으로써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럴듯한 모양만 갖추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역사 앞에서 매우 무책임하게
살아가도록 방기하거나 부추긴다. 설교에서 이것은 두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을 기복적 욕망과 일치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성과 교양의 욕구에 상응하는 것이다. 여기서 곽 목사의 설교는 두 번째 방향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설교가 현대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얻는 이유는 지성적 욕구에 만족을 주면서 동시에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는
사회현상의 문제를 분석, 비판하는 것으로 지성적인 만족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세상에 관심을 접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
전념하면 된다는 식으로 사회와 역사변혁 위한 그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퇴각로를 제공한다는 말이다.
장광설에 빠진
설교 곽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고 있는 평자의 기분은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지금까지 평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독자들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그것이다. 실존주의적 포즈를 취하면서 궁극적 관심을 외치고 있는 그의 설교가 단지 무늬뿐만
그렇게 보일뿐이지 실제로는 궁극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나, 그의 설교가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로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요소들은 근본적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더구나 소망교회에서 목회 하던
시절에 교회재정을 75%나 교회 밖으로 지출할 정도로 곽 목사는 개혁적일 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목회자 아닌가. 이런 정도로 설교하고, 목회하고,
교회를 성장시킨 목사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뭐가 못마땅하다고 나는 이렇게 끝까지 투정을 부리는 걸까? 나에게 어떤 성격적인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의 설교에 위에서 지적한 것 이외에 훨씬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경솔하다는 말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평자는
지금의 이 찜찜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야겠다. 툭 까놓고 말해서, 곽 목사는 너무 많은 것을 설교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세련된 설교로 들렸는지 모르지만 평자에게는 아는 척 많이 하는, 지성적인 척 멋을 부리는 설교로 들렸다. 이게 평자를 답답하게 만든
주범이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앞서 평자가 제기한 문제들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궁극의 실질은 전혀 없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궁극적인
것을 말해야 할 사람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길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진리와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교리의 일반론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비로운 영성의 세계를 말해야 할 사람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숙명이 아니겠는가. 평면적으로만 보면 그의 설교행위는 득음(得音)의
경지에 들어선 소리꾼처럼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몰아치듯 청중들을 압박해 들어가기 때문에 잘하는 설교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실체를 가리는 몸짓이 아니겠는가. 성서의 ‘놀라운 세계’는 오간데 없고 삶의 정보와 태도를 전하기에 바쁜 그의 설교는 평자에게 장광설로 들렸다.
그가 한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세상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설교는 베드로전서 4:7-11절이
본문이다. 본문은 “만물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로 시작해서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토록 무궁토록 있으니라. 아멘”으로
끝난다. 그는 이 한편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구겨 넣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의미를 서론으로 제시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몇 가지
단어, 즉 은사, 청지기, 서로, 열심히, 대접하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한 다음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중세기 수도사 베르나르 드
끌레르보의 『하나님의 사랑』, 미국의 『대통령의 어머니들』에 대한 내용을 적절하게 소개한 다음, IQ EQ HQ JQ OQ를 설명하고, 상담학자
클라인 벨의 Well Being에 관해서 다시 설명한 다음, 일본에서 중소기업을 하다가 망해서 막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모음집인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라는 작은 책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의 설교에서 성서말씀은 구박받는 콩쥐 신세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면
됩니다.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지식 191)
도대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대접이고, 무엇이 봉사인지 나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평소에 신자들에게 사랑하라는 말도 섣불리 꺼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하듯이 사랑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성의 대가들인 성서기자들의 생각을 내가 인식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조금씩 전달하기에도 숨이 차다. 그런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럼 말을 거침없이, 끊임없이 쏟아낸다. 거의 모든 설교가 이런
방식이다.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또 한편의 글쓰기가 필요할 것 같다. 최근의 설교 한편만 더 예로 들어야겠다.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 2007년 1월 21일에 행한 설교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산상수훈의 한 대목인 마태복음 6장 25-34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본문은 앞에서 한번 다루었던 설교 “궁극적 관심”에서 다루어진 것이다. 이 본문은 곽 목사의 십팔번이라고 봐도 좋다. 그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불평불만에 가득한 사람에게 랍비가 조언한 이야기이다. 집안에 염소와 닭을 들여놓고 살게 했다가, 얼마 후에
그것들을 내보내게 하니 “이제는 우리 집이 궁전 같습니다.” 하더라는 이야기이다. 이어서 E.M. Gray의 The Common
Denominator of Sucess에 나오는 ‘성공의 공통분모’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성공한 사람은 열심히 산다. 둘째, 기회를 잘
포착한다. 셋째, 인간관계가 아름답다. 넷째, 소중한 것을 먼저 한다. 이 네 번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라는 칸트의 경구를 인용했다. 그는 이 경구를 수십 년 전부터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이 경구에
근거해서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운전면허를 딸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주례사 이야기를 하고, 마태복음 16장에서 나오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라고 주장했다. 그가 전하려는 설교의 핵심은 환경이나 남을 탓하지
말고 자기 일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곽 목사는 이어서 본문말씀을 정말 간략하게 설명했다. ‘구한다’는 헬라어 ‘제테오’는 기도한다,
노력한다, 힘쓴다는 뜻이라는 게 설명의 모든 것이다. 그는 또 다시 신혼초의 주도권 쟁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나라를 자기의 나라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라는 것이다. 곽 목사의 설교는 계속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세상살이에 관한
요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독자들은 지루하더라도 평자의 설명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란다. 곽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이 말씀이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마태복음 24장 14절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재난도
있고,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전쟁도 있고 지진도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협력해야
하고, priority No.1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렇게 비장한 자세로 설교하다가 후반부에 가서 느닷없이 한편의 우화를 전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소원의 응답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째,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 원했다. 둘째, 남녀노소에게서 사랑받는
것이 실제로는 고통스러워서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했다. 셋째, 무엇을 구해야 할지 그것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라면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겠노라.” 짧지 않은 이런 우화를 통해서 곽 목사가 말하려는 핵심은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인가?”였다. 그것에 대해서 곽 목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대답했다. 14살부터 새벽기도에 나갔는데, 어느 비오는 날 나갔다가 비가
새는 교회당 안에서 울며 회개하는 장로의 기도를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우리 집 지붕은 수리하고, 교회당 지붕은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곽 목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교회가 먼저에요.” 결론도 이와 똑같았다. 북미로
이주한 퓨리턴들이 교회를 제일 먼저 짓고,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마지막으로 자기 집을 지었기 때문에 지금 미국이 부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지막 멘트를 들어보시라. “내게 최우선이 뭔가, 최우선 절대우선 이것이 바로 될 때 축복의 문이 확 열립니다. 이 모든 것을 더 하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위의 설교 본문은 열일곱 패러그래프로 구성되어있는데, 그중에서 한 패러그래프만 본문을 다루었을 뿐, 나머지는 온통 세상
이야기였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세상이야기 말이다. 곽 목사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특히 지성적인 무늬를 갖춘 이야기꾼이다. 설교자가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한다는 것은 은사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영적인 설교를 죽이는 독이기도 하다. 이야기 전달 능력만으로 청중들을 쉽게
다룰 줄 아는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존재론적으로 담겨 있는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동산 임대업이나 돈놀이로
쉽게 돈을 버는 사람은 땀 흘리는 노동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법이다. 젊은 설교자들은 제발 스피치 연습에 힘을 쏟지 말기
바란다. 그런 연습을 매춘이라고 일축한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옳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곽 목사 식의 설교 준비가 얼마나 쉬운지
가르쳐드리겠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예화모음이다. 감동적인 국내외 이야기를 수집하라. 우화, 동화, 영화, 드라마, 휴먼 스토리, 성공담,
과학정보, 독후감, 신기한 동물의 세계, 최신 뉴스, 연예 이야기 등등, 끝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정보들은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중대형
교회 목사라고 한다면 설교 도우미를 쓸 수도 있다. 한 주일에 20편의 괜찮은 이야기를 수집한 다음에 설교 주제에 맞는 것만 추려내라. 곽
목사의 설교 유형에 맞추려면 10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은 다음에 적당한 위치에 성경구절을 쑤셔 넣으면, 그것으로
설교준비 끝이다. 설교의 성패는 이제 입담에 달려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설교 명망가이면서 뛰어난 행정가이고 성공한 목회자이신 대선배
목사님에게 오늘 결례가 많았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은 곽 목사를 향한 게 아니라 젊은 목사들을 향한 것이다. 사실 곽 목사는 자신의
시대에 충실한 것인지 모른다. 어느 철학자의 표현처럼 돌진근대주의라 일컬어지는 지난 20세기 후반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서 곽 목사는 좋은
의미로 일정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말이다. 그의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젊은 설교자들은 더 이상 그의 설교를 흉내
내지 마시라. 무늬만 궁극적인 게 아니라 실질(reality)이 궁극적인 영성을 구도(求道)하는 설교자들이 이 땅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기를!
정용섭 l 목사는 서울신대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과 계명대학교(Ph. D.)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좬말씀신학과
역사신학좭, 좬기독교를 말한다좭가, 역서로 판덴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신학과 철학』, 등이 있으며 최근에 설교비평서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펴냈다. 현재 샘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구성서아카데미(http:쬤dabia.net) 원장으로 영남신대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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