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무엇으로 시작해서 무엇으로 끝날까요.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나오는 화면이 크레디트, 보다 정확히 ‘오프닝 크레디트 타이틀’입니다. 통상 코닥·돌비 등 영화장비업체로 끝나는, 영화 후 크레디트는 클로징 크레디트로 불립니다. 한마디로 영화 제작에 기여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영화인들은 자기 이름이 처음 크레디트에 오르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하네요. 크레디트를 뜯어보면 영화제작 시스템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영화 크레디트의 비밀을 찾아보겠습니다.
양성희 기자
크레디트란=사전적 정의를 옮겨봅니다. ‘영화의 시작과 종료 후에 자막으로 나타나는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과 회사의 리스트. 제작사·배급사·제작자·프로듀서·연기자·감독·촬영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음악감독, 그 외 모든 기술진을 포함한다.(필름 2.0, 『영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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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폭스 2 소니픽쳐스 3 워너브라더스 4 쇼박스 5 파라마운트 6 CJ엔터테인먼트 7 드림웍스 8 JK필름의 리더 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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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첫 크레디트 …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무려 25분
할리우드 고전 흑백영화를 보면 ‘The End’ 자막이 나오고 끝나버리는 영화가 있습니다. 스태프 소개를 전부 오프닝에서 끝내는 두괄식 크레디트 영화들이지요. 영화 칼럼니스트 김세윤씨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는 엔딩 크레디트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헐크바지는 왜 안 찢어질까?』). 당시까지는 스태프 수가 굳이 오프닝·엔딩을 나눌 정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책에 의하면 최초로 크레디트를 선보인 영화는 1906년 프랑스 앙드레 하우제 감독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영화 제목이나 크레디트의 형태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네요. 1910년 이전의 영화에서는 크레디트에 아예 배우들의 이름이 없었다고도 합니다. 관객들에게 배우의 이름이 알려지면 배우들의 몸값이 높아질 것을 우려한 제작자들 덕분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영화산업이 발달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크레디트에 오를 스태프 수가 많아졌고, 특히 시네마스코프가 등장한 1060~70년대 와서는 많은 정보를 소화하기 위해 엔드 크레디트가 나왔습니다. 주요 스태프가 아니라 스태프 전원을 소개하는 관행도 70년대 들어생겼다고 하네요.
할리우드 영화의 평균 크레디트는 5~10분. 그러나 최근에는 컴퓨터 그래픽 스태프 소개만 5분에 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영화사는 러닝타임을 잴 때 크레디트 포함, 미포함 두 버전으로 나누죠.
지금까지 최장의 엔드 크레디트 영화는? 남들은 엔드 크레디트를 잘 안 달던 56년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무려 25분짜리 엔드 크레디트를 선보였습니다. 3시간이나 되는 상영시간 때문에 내용을 관객이 다 기억하지 못할까 봐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한 서머리 스토리보드를 엔드 크레디트로 제공했답니다. 정말 믿거나 말거나죠.
감독 두번째 장편까지 A Film by~, 세번째부터 A~Film
규정이나 법칙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프로듀서, 혹은 감독 마음대로입니다. 혹시라도 빠져서 섭섭한 사람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리스트를 크로스 체크합니다. 순서는 관례일 뿐입니다. 보통 영화 제작 순서에 따라 프리 프로덕션 스태프에서 후반 프로덕션 스태프 순으로 소개됩니다. 오프닝에는 그야말로 이 영화 제작의 핵심 인력인 투자·배급·제작·주연·각본·감독 정도가 소개되고요.
오프닝 크레디트는 배급사→메인 투자사→제작사 순입니다. ‘리더 필름’이라 불리는 회사를 상징하는 짧은 인트로 동영상이 함께 나옵니다. 횃불을 들고 있는 여성상(소니픽쳐스), 서치라이트(20세기폭스), 포효하는 사자(MGM), 느낌표 물음표가 튀어나오는 상자(쇼박스) 등이죠.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시크릿’의 예를 들어볼까요. ‘시크릿’의 경우는 배급 및 메인 투자사가 CJ엔터테인먼트이고 제작사가 ‘해운대’를 만든 JK필름과 애초 아이디어를 개발한 그린피쉬픽쳐스로, 이들 세 회사의 리더필름이 연이어 나옵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CJ엔터테인먼트·쇼박스·롯데엔터테인먼트가 3대 배급사 겸 투자사지요. 영화를 만들도록 돈을 대고, 완성된 영화를 극장에 걸고 마케팅을 하는 회사입니다. 투자·배급·제작이 수직계열화돼 명실상부 스튜디오 시스템이 뿌리내린 할리우드와 달리 직접제작은 제한적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워너브라더스가 보내드리는(present)’ 이라는 표현이 ‘제공’에 해당하는 투자·배급사입니다. 그 다음이 ‘제작사(production)’이죠. ‘produced by 톰 행크스’라면 톰 행크스가 제작한 영화란 뜻이고요. ‘○○○감독 작품’에 해당하는 ‘A ○○○ Film’은 통상 세 번째 장편 작품부터 표기합니다.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까지는 ‘A Film by ○○○’이라고 차이를 둔다네요.
여기서 헷갈리기 쉬운 것이 프로듀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작자와 프로듀서를 구분해 제작자는 영화사 대표, 프로듀서는 제작 부문의 실질적인 현장관리 담당자를 일컫는데요, 할리우드에서는 프로듀서가 곧 제작자입니다. 영화의 기획·제작·배급·상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이끄는 실질적인 작품의 산파죠.
예를 들면 ‘아마겟돈’ ‘캐리비안의 해적’의 제리 브룩하이머가 프로듀서입니다. 이 프로듀서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이그제큐티브(executive) 프로듀서, 라인(line) 프로듀서, 어시스턴트(assistant) 프로듀서, 코(co) 프로듀서 등이 있습니다.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라면 직접 현업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를 일컫고, 라인 프로듀서는 현장에서 재정적인 측면을 총괄합니다. 미국식 프로듀서 시스템이 어정쩡하게 들어와 있는 충무로에서는 영화사 사장의 해외 명함에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라는 호칭을 쓰고, 미국식 프로듀서의 기능을 기획, 총제작, 프로듀서 등이 나누어 가집니다.
등장 순서, 할리우드서는 계약하고 한국서는 눈치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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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크릿’의 엔드 크레디트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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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역할을 한 사람들이 크레디트에 오르는 순서는 아주 미묘한 문제입니다. 감독→조수 순이면 문제가 없는데 동급의 인물이나 회사가 여럿일 때, 특히 배우들 간에는 신경전이 대단합니다. 남녀 순이냐, 연령 순이냐, 인기 순이냐,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많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아예 크레디트 순서, 포스터에서의 위치 등을 ‘빌링 블록(billing block)’이라고 해서 계약서에 명기합니다.
그런 조항이 없는 충무로에서는 배우들의 신경전을 조율하다가 담당자의 피가 마르는 일이 허다합니다. 눈치껏 크레디트에서는 A가, 포스터에서는 B가 메인이 되는 절충안을 내놓기도 하고, 포스터 촬영 시 도대체 누가 주연인지 애매모호한 각도를 해법으로 제시한다고도 하네요.
우정출연이나 특별출연 같은 것도 있습니다. 유명인의 카메오 출연이나 배우의 평소 지명도에 비추어 적은 비중, 적은 개런티일 때 특별출연이라고 합니다. 또 원래 촬영분보다 최종 편집분에서 비중이 현격히 작아졌을 때 배우의 체면을 고려해 특별출연으로 돌리는 편법을 쓰기도 하고요. 우정출연은 보통 인맥으로 섭외해 개런티가 전혀 없는 경우를 뜻합니다.
배우와 관련해서는 유독 우리 영화에만 있는 관행이 있습니다. 바로 스타 배우들의 매니저들을 크레디트에 챙겨주는 겁니다. 배우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니 영화에 참여한 것은 확실하지만, 스타들의 몸값이나 발언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2000년대 들어 전격적으로 생겨난 일이랍니다.
제작사서 가위질 당한 감독들 Alan Smithee로 이름 올려
그냥 이름만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 수 없는 직무를 중점적으로 알아볼까요. ‘프로덕션 수퍼바이저’는 최근 한국 영화 크레디트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투자사에서 파견돼 자금 흐름 등을 체크하고 매일 투자자에게 현장을 보고하는 인력인데요, 예전 같으면 스파이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껄끄러운 시선은 사라졌다고 하네요.
VFX는 시각효과를 뜻합니다. DI는 색 보정, 밤에 촬영한 화면 색감을 조정해 낮으로 바꾸는 마술사들입니다. 촬영부서 중 그립(grip)은 촬영·조명장비의 운송·설치·조작 담당자입니다. 이 중 리더를 키 그립이라고 부릅니다. 개퍼(gaffer)는 조명팀장입니다. 자연광만으로 촬영하던 초기, 긴 막대기(gaff)에 큰 막을 끼워서 태양을 가리며 빛의 양을 조절하는 사람에서 유래했다네요. 물론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조명부서 크레디트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촬영감독이 조명감독을 겸하며 영화의 비주얼을 총괄하는 DP(Director of Photographer) 시스템 때문입니다.
‘알란 스미시(Alan Smithee)’는 누굴까요. 과거 할리우드 감독들이 제작자의 과도한 간섭으로 영화가 터무니없이 잘리면 자기 이름 대신 크레디트에 올렸던 익명의 감독입니다. ‘가명의 남자(Alias Man)’의 철자를 재조합한 겁니다.
시각적 효과 극대화한 ‘예술 작품’ 등장하기도
앨프리드 히치콕, 마틴 스코세이지의 파트너로 유명한 사울 바스는 영화 제목을 포함해 오프닝 크레디트 자체가 예술이 되는 시대를 연 선두주자입니다. 영화장면 위에 크레디트를 얹는 데서 나아가 독자적인 시각 표현의 영역을 개척했지요. 최근에는 모션 그래픽의 거장 카일 쿠퍼가 그를 잇고 있습니다. ‘세븐’ ‘미션 임파서블’ ‘스파이더맨’ 등 할리우드 대작의 크레디트 시퀀스 연출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 때 처음 오프닝 시퀀스 감독을 따로 기용했지요. CF 감독 출신인 용이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최대한 군더더기를 빼려고 오프닝 크레디트를 축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는 배우 이름만 나오고 10분이 지나야 제목과 오프닝 크레디트가 나왔습니다. 흥행 돌풍중인 ‘아바타’는 영화제목과 감독이름 등이 본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나오고요.
청룽(成龍)은 클로징 크레디트에 NG컷을 넣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처럼 영화가 끝나자 마자 뛰쳐나가는 성질 급한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 엔드 크레디트 이후에 나오는 짤막한 보너스 영상을 ‘Post-credits scene’ 혹은 ‘credit cookie’ 줄여서 ‘쿠키’라고 합니다.
참, 극장들은 왜 엔드 크레디트를 충분히 즐기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무시하고 불을 켤까요? 관객들의 안전이 이유라고 하네요.
이 기사는 CJ엔터테인먼트, JK필름, 영화칼럼니스트 김세윤씨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