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서류 뭉치를 컴퓨터 옆에 놓고 나갔다. 컴퓨터 앞의 그녀는 얇게 한숨을 쉬며 서류를 분류했다. 모든 게 순조롭고 문제가 없다. 처음 들어와 방황하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친 여동생을 대하듯 친절했고, 일도 그녀의 범위에서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다만, 요즘 회사 뒤로 퍼지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직원들의 얼굴을 대하기 조금 민망할 따름이다. 그렇게 신경 쓸 일도 아니지만 엄연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아무 생각 없이 서류를 넘겼다.
“정신을 어디 놓는 겁니까?”
정수리로 전해오는 차가운 느낌. 피리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곳에서 가장 얼굴을 대하기 꺼림칙한 남자가 말짱히 서 있었다. 머리위에 꽁 하며 올려놓았던 캔 커피를 책상위에 둔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오류를 지적해 주었다.
이남자다. 소문의 요주. 요즘 변변치 않은 스캔들의 주인공. 신입 때부터 이상하게 피리아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또 그렇다고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있는 눈치도 없다. 거기다가 집도 같은 동의 오피스텔이라 출퇴근도 거의 같이하게 된다. 단지 직장 동료인 것 밖에 없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직원들이 오해를 사자 피리아로서는 아주 죽을 맛 인 것이다.
“이쪽이 아니라 여기잖아요.”
“아......”
잠시 딴 생각으로 범했던 오류를 찾아 고쳐준 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얼떨결에 정리된 서류뭉치를 받은 그녀는 멍하니 그의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시원한 캔 커피. 컴퓨터 옆의 그것을 잠시 바라본 그녀는 맥없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분명 그녀만이 아닌 다른 직원들의 책상에도 있을 것이지만 이런 식의 배려가 그녀에겐 더 부담을 줄 뿐이었다. 무심결에 시계를 바라본 피리아는 퇴근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고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또 늦게 가면 뭐라 할 거야.
어느새 그와의 저녁식사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그 또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
Kiss Day
---------
“어서오세요”
평소처럼 저녁을 함께한 그들은 아웅다웅하다 결국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의 부추김 이였지만 주선자인 피리아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식사 후 요기를 위해 평소 피리아가 자주 가던 카페로 갔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미가 느껴지는 세련되고 잘 정돈된 가게. 처음 와보는 이들의 소감이다. 문 앞의 직원은 둘을 반기며 빈 자리로 안내했다. 여기저기의 커플들이 달콤한 분위기를 내며 속삭이고 있었다.
“좀.... 바뀌었네요.”
이곳이 눈에 익은 피리아는 직원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확실히 처음 오는 그가 봐도 이 곳은 다른 곳과는 분위기가 틀리다. 아니, 구조가.. 가족단위의 손님을 받을 수도 있을 법 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3, 4인용 식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조그마한 2인용 원 테이블에 둘러진 것은 큰 소파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2명이 앉으면 딱 들어맞을 소파에는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조리 연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즉, 이 카페에는 연인들 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아담한 플랭카드. 제로스는 왠지 모를 웃음과 한숨을 한번에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응큼하군요? 피리아씨.”
“.......네?”
아직 못 봤나보다. 제로스는 킥킥 웃으며 딴청 하였다. 피리아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사이 웨이트리스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마지막 손님? 저희 카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곧 ‘이벤트’가 시작 될 테니 간단한 차를 주문하시겠습니까?”
“..........이벤트.......라뇨?”
제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예 고개를 돌려 소리 없이 킥킥거렸고 피리아는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이 웨이트리스에게 물었다.
“어머! 모르셨나요? 오늘은 손님들 같이 ‘아름다운 커플’들을 위한 특별 이벤트를 저희 카페에서 마련했답니다.”
“.....커, 커플...?”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반론하려던 참에 웨이트리스 뒤의 조그마한 플랭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아담하고 귀여운 그것은 피리아의 안색을 대번 바뀌게 하였다.
[KISS DAY EVENT]
그녀는 뭔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느꼈다.
---------
Kiss Day
---------
“저기.....주문안하시겠습니까?”
“.............레몬 티 두 잔으로 할게요.”
어느새 제로스가 대신해 주문을 했고, 웨이트리스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곧 떠났다. 옆의 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물론 어딜 둘러봐도 커플들뿐이다.
도대체 왜 이런 거야!
“제로스, 우리 그만 가요.”
드디어 알아차린 겁니까.
반응이 즐거운 옆의 아가씨를 두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 웨이트리스가 가져온 물 잔을 집어 들었다.
“왜요? 벌써 주문했잖아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피리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로스가 눈치 챈걸 알리 없는 그녀는 초조해 하며 그에게 다그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잘못 들어온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럴 수도 없겠는데요?”
그런 피리아와는 다르게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반응을 즐기던 그는 카페의 입구를 가리켰다. 만원이라는 [Full]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Closet]이라는 표지판이 함께 걸려있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반갑습니다. 여러분. 곧 이벤트가 시작될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이 곳을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즐겁고 달콤한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아. 난 몰라.
---------
Kiss Day
---------
「간소하게나마 저희가 준비한 이벤트가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정각에 가까워지는군요. 하이라이트겠죠? 그럼 마지막을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얼떨결에 참석한 둘이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속으로 울고 있었다. 사실 진심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이는 하나일 것이다. 마지막을 즐기라는 진행자의 말을 끝으로 레스토랑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밝고 화기애애하던 조명들이 하나 둘 꺼지고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몇 개의 조명만이 희미하게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벤트의 진행을 돕던 직원들이 사라지고 곧 커플들 사이에서는 그들만의 사랑스런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왔다.
영문도 모른 체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피리아는 주위의 행동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이렇게 된 이상 즐기기로 해요.”
“아, 아니! 난 그게-.”
즐기긴! 무엇을!
아까부터 시무룩한 그녀와는 다르게 즐거운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익숙한 행동은 피리아를 더 당혹스럽게 했다.
“직원들이 쳐다보잖아요? 우리만 ‘떨어져’ 있다구요.”
떨어져있다니! 뭐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슬쩍 피리아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피리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 이었다.
“눈 감아요.”
이게 아닌데!
속으로 외쳐보지만 누군가 그것을 들어줄 리가 없다. 제로스의 손길에 의해 팔이 그의 목에 둘러지고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리고 어두운 그들의 그림자가 맞닿았다. 주위의 어느 것도 그들을 방해하는 자는 없었다.
---------
Kiss Day
---------
월광으로 모자란 어둠을 밝혀주는 도시의 불빛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지럽게 사람들을 잡아 이끄는 현란한 불빛과는 다른, 단지 밝히기만을 위한 소박한 빛이 그와는 좀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고, 벌써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빛을 상실한 곳도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조용하고 한적한 그곳을 감상하든 걷는 두 사람 중 한사람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네? 뭐가-”
그리고 역시 낮게 울리는 반응.
“카페의 이벤트 말이에요. 알고 일부러 있었던거죠?”
적막한 골목 사이사이로 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가로등을 지날 때 마다 반짝이는 똑같은 모양의 링. 자연스럽게 손목에 감겨진 그것이 반짝이며 흔들렸다.
“아뇨-. 전 피리아씨가 가자는 곳으로 간 것 밖에 없고 그곳 일도 우연이었던걸요. 하하.”
“.............”
말을 말자.
얇게 한숨을 쉰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입술로 다가갔다. 좀 전의 감각을 일깨우듯 그곳이 화끈거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음, 다 왔네요”
“아, 벌써.”
시가지를 벗어나 한참을 걸어온 그들의 앞에 또 다른 도시를 연상케 하는 큰 건물들이 늘어져있었다. 큰 건물들 사이로 계속 걸어가던 그들은 갈림길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럼 어서 들어가요. 시간도 늦었으니.....”
가벼운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려던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뭔가 허전한 듯 스치는 이 느낌은..? 순간적인 느낌에 홀려버린 그녀는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제로스 또한 떨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그녀를 마주하였고, 둘은 그렇게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스륵」
가볍게 스치는 바람과 그의 옷자락이 마찰음을 냈다. 그와 함께 살짝 들춰지는 검은 머릿결의 흔들림에 먼저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피리아씨?”
아직 멍한 상태의 피리아가 그의 목소리에 크게 반응했다. 잠시 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가렸다.
“아, 아니... 저기.. 그럼, 잘 가요. 제로스-!”
그리고 급히 옮겨지는 발걸음.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금발의 잔영에 그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
Kiss Day
---------
“피리아씨, 어제 카페 이벤트에 갔었다며? 제로스씨랑?”
분주하게 움직이던 피리아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당황한 기색이 열렬한 표정은 ‘어떻게 알았느냐’라는 말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 덕에 옆의 리나는 서류를 엎질러버리는 실수를 범하였다.
“푸헉, 뭐야. 그럼 정말 둘이 사귀는 거야?”
“제르가디스씨랑 아멜리아가 어제 갔었데요. 거기서 봤다던데.. 아, 그래 그 팔찌. 카페에서 줬던거죠?”
직원의 손가락은 정확히 피리아의 손목을 향하였다. 그에 따라 시선을 옮긴 리나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에- 그러고 보니 오늘아침 제로스도...”
뭔가 변명을 하려 허둥거리던 피리아는 곧 할 수 없게 되었다. 어깨를 감싸오는 단단한 팔. 피리아와 똑같은 링이 걸려있는 그 팔의 주인은....
“하하. 들켜버렸군요?”
“제로스-!”
동시에 그를 쳐다본 리나는 서류뭉치를 탁탁 모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피리아는 무슨 짓이냐며 팔을 때어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제로스는 더욱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야-”
피리아는 아니라며 팔을 흔들었고, 옆의 여직원은 눈을 말똥 말똥거리며 둘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제로스는 한껏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피리아씨보러 왔죠.♡"
리나는 애써 정리한 서류들을 던지며 제로스를 쫒아냈고, 제로스는 그 상태로 피리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열받아하는 리나와는 달리 초롱초롱한 눈빛의 여직원은 부러움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바둥거리는 피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이 나간 곳을 어김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리나는 흐트러진 서류들을 다시 모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