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평화
어제 저의 레지오 피정프로그램 땜시 마누라와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구 태능 45번 종점을 지나 철문을 입구로 양쪽 수확된 배밭 사이길로 간만에 성당앞에 안착했습니다. 노란 잔디밭에 뒤로는 가을의 불암산,앞으로는 벌판(?)의 배밭, 이곳은 본디 수도원자리가 아니고 80년 중반당시 어느 노여사의 별장자리였는데 돌아가심에 임박해 가톨릭에 기증하려했는데 본인의 유지가 가톨릭 중 일하면서 기도하는 수도원에 기증하고 싶아했는데 마침 베네딕도 사훈(?)이 “ 일하면서 기도하라”가 수도원 설립 성인의 뜻과 일치하여 베네딕도 수도원에 기증하게 되었고, 첫 책임자로 금주 금요일에 뵙게 될 강순건안토니오신부님이셨습니다. 강신부님은 70년 중반 이 후 저희 우니타스를 지도하셨고 뱀띠형,누님들과 동거동락하셨고 저희는 그저 2차 자리만(?) 쫓았다녔고 78년 부제직을 모두 마치시고 사제서품을 받으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분도출판사 근무,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의 리얼 비디오를 찍어 수도원에 은익,독일로 밀반출 수괴로 당국의 눈총을 받아 잠시 독일에 가계시다 귀국 장충동 분도수도원 원장 및 피정의 집을 맡아 일하시다 요셉수도원 책임신부님(보임지는 뒤바뀔 수 있음)으로 태능에 수년간 계셨는데 기증 받은 노후된 주택과 넓고 넓은 배밭을 몇몇 수사님과 공동생활을 하시면서 수도원으로 가꾸셨습니다. 성당도 전통식 잔치상같은 제대에 신자들도 방석에 앉아 미사를 볼 수 있게 했고 특히 입당시 제대에 인사를 제사때 절하듯 한국식으로 머리를 바닥에 “꽉”박는 모습이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수년 동안 성당 짓고,배밭 가꾸시고…
당시 정말 고생많이 하셨답니다.
신부님이 왜관 계실 때 전 군입대를 앞두고 2-3일 왜관에 머무른적 있었습니다.아시다시피 군입대로 인한 가족과 사회와의 격리(특히 우니와 성모),두려움등…당시 신자도 아니였지만 수도원 손님방에 머무르면서 저녁에 신부님이 긴 옷거름사이로 숨겨온 그때엔 먹기도 힘든 죠니 불랙으로 밤새 저의 고충에 따스한 말씀해주시던 기억,
요셉수도원에 계실 때는 보고 싶으면 무조건 찾아가 성당 앞 벤치에서 울먹거리며 신부님에게 “대면고백성사”를 드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제 인생의 중요한 몇장면으로 뇌리에 각인된 칼라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참으로 눈이 맑고 말쌈도 잘하고,냉정하게 보이지만 “따뜻한 사제”이십니다.
10월초 출근 도중 “강신부님 부친이 돌아가셨고, 서울대 병원에서 오늘 발인이라고”만… 서울대 병원 영안실 가보니 웬걸 이미 돈암동 성당으로 가셨네 겨우 돈암동성당 장례미사 끝자락을 보며 고인을 위해 귀중한 영성체를 모셨죠.근데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남,녀수도자분들이 많이 오셨더군요.평소 고인의 성당에 대한 사랑과 인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근데 상중에 연락이 없었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고 최근 불특정다수에게 횡포를 부리는“묻지마 ××”같이 그 날은 하늘보며 불특정 다수에게 쉰소리좀 했습니다. 결국 부메랑은 네게 오지만…
신부님에게 참으로 죄송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결국 나, 더나아가서는 우니일반회와의 그간 결과라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다시한번 강신부님의 부친이신 강술호요셉옹의 명복을 빌며 기도드립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겸손되이 간구하는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강신부님의
부친이신 강슬호요셉옹을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으소서”
추신 : 강신부님 만날 장소를 물색 중 한정식으로 동대근방“산유화”란 한정
식집을 후배 동국대 교수가 추천했는데 혹 그 외 괜찮은 곳있으면 추
천요망.날짜가 다가오 니 어찌해야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