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젼(vision). 하나님의 뜻인가, 인간의 욕망인가?
“비젼”이라는 말이 교회 안에서 유행한지는 꽤 되었습니다. 특히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에서는 비젼이라는 말이 빠지면 설교나 강의가 안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교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비젼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비젼의 도입
비젼이라는 말의 발상지는 성경도, 교회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도 비젼이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영어로는 ‘vision’ 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주로 ‘묵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비젼은,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목표, 꿈, 소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혹은 계시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전혀 다른 뜻입니다.
비젼은 1980년대 후반부터 회자되면서 90년대에 유행처럼 한국 교회 안에 번지기 시작한 말로, 경영학에서, 특별히 리더십 분야에서 들어온 개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경기침체와 더불어 리더십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고, 리더십의 핵심덕목이 조직(혹은 기업)의 비젼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돌입하면서 정글 같은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조직의 핵심가치, 곧 비젼을 명확히 하고, 이것을 구성원들에게 확실히 주지시켜야 하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조직의 역량을 한 곳으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개인에게 적용하면, 지금과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성공하려면,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이른바 비젼이라 일컬어지는, 삶의 확실한 꿈, 이루고자 하는 확고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90년대부터 침체일로를 겪고 있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맞물렸고, 대안을 찾고 있던 한국 교회에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서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비젼이라는 말이 교회가 수용하기에는 너무 인본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비젼은 인간의 주도권, 능동성을 강조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는 그만큼 좁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말 자체가 인생의 계획을 자기가 세우는 것이므로 인본적인 냄새가 많이 풍깁니다. 이런 비판이 일자 그후로는 비젼이라는 말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여졌습니다. 자기가 세운 비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젼을 갖자, 가 모토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문제는 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자기가 만들어낸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신학적 합리화
어떤 개념을 교회 안에 도입하려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타당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비젼을 합리화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본문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야기입니다. 요셉이 모진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꿈, 곧 비젼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젼을 갖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같은 해석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요셉이야기는 “인간의 악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주제입니다. 요셉설화를 통해서 성경이 하고싶은 말은, 꿈을 갖자, 비젼을 품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가입니다. 둘째는,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를 비젼으로 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의 꿈을 갖고 보디발의 종으로 들어가고, 감옥에 갇히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힘에 의해 애굽의 총리대신 자리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꿈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한참 후, 역사가 진행된 다음에 그 꿈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습니다. 요셉이야기를 비젼에 대한 증거구절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자기주장을 합리화하는, 즉 자기 생각을 펴기 위해 성경을 갖다 맞춘 대표적으로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비젼의 내용
그렇다고 비젼이라는 말에 대해 트집 잡고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규모있게 이끌어 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허송세월하며 낭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젼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적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이 주를 이룹니다. 그럴싸한 미사여구와 기독교적 용어로 잘 포장되어 있을 뿐이지, 그 실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운, 그리고 알게 모르게 내재화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탐욕과 욕망의 극대화가 삶의 목표이고 비젼입니다. 이 사회에서 출세하고 성공하여 사회계급의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는 것,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부(富)를 소유하고 인기와 명예를 구가하는 것, 이것이 비젼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도덕이나 정서상으로 속보이고 께름직하니까 괜히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들을 돕는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탐욕을 숨깁니다. 이게 무슨 비젼입니까? 개인의 욕망이고 탐욕이자 내면화된 자본주의 정신의 발현이지. 하나님의 비젼 운운하지 말고, 그냥 소박한 개인의 바램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사명의 회복
삶의 목표를 심어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비젼은 필요합니다. 이제 교회는 개인의 탐욕을 부추기는 비젼은 지양하고, 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비젼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숨쉬고 발딛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할 지,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어떤 모습을 띠어야할 지, 그리고 성경에 토대를 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에 대한 비젼을 성도들에게 심어주었으면 합니다. 구한말 기독교의 초창기와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교회는 민족의 비젼을 제시했습니다. 그때 교회는 비록 숫자적으로는 적었지만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기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더 탐욕스럽다는 비난을 받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비젼이라는 말 대신에 보다, 더 심원한 의미를 갖고 있고, 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내공을 가진 말이 교회에 있습니다. “사명”입니다. 비젼이 자기중심적이고 작위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라면, 사명은 훨씬 하나님 중심적이고 신앙의 진지함과 무게가 담겨있는 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예민하며 사명을 다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출처:클래식 음악과 크리스찬
*요즘 교회명으로 비젼, 드림 등 영어명이 줄을 잇는데 기복적이며 성공주의적 발상 및 행태라 여겨진다. 세종대왕이 알면 땅을 칠 노릇이다.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이면 교회명에 외래어를 남발하는지.... 그렇게 이름 짓는 작자들 정신상태가 좀 문제라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