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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귀 撌귀 龜귀 崔 建 次
서문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이 된 그해 겨울 귀국하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탐진강 상류에서 살았다. 이듬해 초부터 좌경분자들이 야밤에 경찰관을 살해하고 우익인사들과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해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고 휴전이 되던 해까지 이념과 사상투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참상을 숱하게 보고 겪었기에 그런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간도 여러 사람이 쓴 남한 빨치산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았다. 모 유명작가 쓴 장편소설은 자기가 지향하는 이념과 사상을 미화한 픽션이었다. 그래도 체험으로 쓴 글들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자신이 활동했던 지역과 남한 빨치산의 아성인 지리산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살았던 탐진강 상류는 내륙의 깊은 산골이어서 한때 좌경분자들의 아지트였다. 그간도 그곳에 대한 글들이 별로 없고 피로 얼룩졌던 역사가 묻혀가면서 댐이 생겨 그 현장의 일부는 깊은 물속에 잠겨 버린 상태다. 이제 세대가 두 번이나 바뀌어 진 시점에서 나도 어릴 때 그곳에서 겪고 보았던 사실들을 밝혀두려고 오래된 기억의 빗장을 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빨치산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해방 후 내가 살았던 지역에서는 밤에 활동하는 좌경집단의 사람들을 <밤손님>또는 <산사람>이라고 했다. 장꾼들을 털어먹는 산적들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 그 다음 1948년 10월 여수14연대에서 일어난 반란군들의 일부가 들어와 합세하면서 <반란군>이라고 했다. 그리고 6‧25전쟁 때 낙동강 전투에서 패주한 인민군들까지 끼어들어 함께 유격활동을 할 무렵부터 <빨치산>이라고 했다. 이후 군경합동으로 빨치산토벌작전이 전개되어 궤멸단계에 접어들 때는 그들을 <공비>라고 했다. 이렀듯 남한에서 활동했던 북한공산주의의 비정규군들은 밤손님-반란군-빨치산-공비로 끝났다.
좀 더 정리하자면 그 첫 번째는 1945년 광복이 된 이후 대한민국정부에 반기를 들고 야간에만 활동 하는 좌경세력들을 밤손님 또는 산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어느 정도 배운 사람들로 일제에 대한 감정과 이승만 정부를 탐탐치 않게 여겨 좌익으로 돌아선 자들이었다. 그들은 군인과 경찰관을 포함해서 우익인사들과 지주들을 밤에 나타나 해치면서 세를 불려나갔다. 반란군이나 빨치산 그 보다 못한 공비들과는 다른 수준이었지만 결코 밤손님을 좋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다만 얽히고설킨 집안내력과 가족관계를 고려해서였다. 그리고 잘못 보여서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는 심사로 쉬쉬하면서 밤도둑놈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밤손님들이 설치는 중에 여수14연대의 반란사건이 일어나 그 일대를 일시적으로 장악했었으나 곧 진압되고 말았다. 반란군들은 투항했거나 사살된 자들이 많았었지만 주모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일부가 지리산과 회문산이나 유치산과 같은 여러 깊은 산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바로 기존의 밤손님들과 연합하여 휴대한 국군의 최신 무기로 지서를 습격하면서 파괴적인 활동을 할 때부터 밤손님이라 하지 않25고 그들을 싸잡아서 반란군이라고 했다. 내가 살았던 유치면에는 광주 20연대 2개 중대가 내려와 6‧25직전까지 반란군 소탕작전을 펼쳤었다.
세 번째로는 6‧25남침 때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인민군들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고 후퇴하게 되었을 때다. 정규군 부대의 기능을 상실한 그들의 일부가 역시 지리산과 유치산 등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인민군패잔병들이 기존 반란군에 편입되었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부대로 유격활동을 할 때부터 그들 전부를 빨치산이라고 했다. 러시아 어의 파르티잔(partizan)이 우리식 발음으로 빨치산이 되었다. 같은 뜻의 에스파냐 어의 게릴라(guerrilla)역시 적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는 소규모의 비정규 부대 또는 그 부대에 속한 전투원들의 명칭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밤손님도, 반란군도, 빨치산도 아닌 공비(共匪)다. 공산주의 이념에 빠져 파괴와 살상을 일삼는 비루한 자들이다. 지리산과 각 지방에서 암약했던 빨치산들이 종래에 와서는 오직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식량을 강탈하려고 살인을 해대는 자들로 전락했다. 그런 자들을 망실공비 또는 잔비(殘匪)라고 했는데 사살되었거나 자수하지 않는 자들은 겨울 산에서 굶주려 죽었다.
이와 같은 비참한 역사가 있었음에도 그 노선을 유지하고 따르려는 자들이 지금은 떵떵대며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바뀌지 않는 사상의 디엔에이를 가진 후예들이거나 감상적 선동에 휘말린 자들이다. 대한민국이 이루어 놓은 자유와 풍요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빨치산도 아닌 공비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
<< 산 >>
1. 밤손님
나는 지금도 늘 혼자서 낯선 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념과 사상의 투쟁이 극열했던 틈바구니에 끼어 살면서 생사의 문제가 심각했을 때였다. 빨치산들에게 휘둘려 토벌대를 피해 높고 깊은 산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었다. 요즘도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을 찾아 등반을 즐기면서도 가끔은 무슨 생각 끝에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등골이 오싹해 질 때가 있다. 이는 어릴 때 산속으로 숨어 다니면서 끔찍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겪었기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고장은 탐진강 상류의 깊은 내륙으로 근래에 와서 다목적댐이 생겼다. 내 목측으로는 면의 사분지의 일 정도가 댐 조성으로 수몰되어 버린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유치면 소재지인 송정리와 강동마을도 물속에 잠겨버렸다. 유치면에는 많이 높은 산은 없지만 장흥군 부산면, 장동면, 장평면, 영암군 금정면, 강진군 옴천면, 화순군 도암면 등 모두 4개 군 6개 면의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드넓은 분지 형이다. 면단위로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넓은 곳으로 시냇물을 끼고 있는 가파른 산이 많고 골이 깊어서 온갖 산짐승과 양질의 물고기와 산나물, 약초가 많고 깊은 곳에서는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은 일본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맨 먼저 부산(釜山)에 도착했다. 일본 돈을 환전한 다음 장흥군 부산(夫山)면에 사는 외가에 우선 귀국인사차 들렸는데 임신 중인 어머니가 외갓집에서 애를 낳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처갓집 신세를 지기 싫다며 해산날이 임박한 어머니와 사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부산으로가 배표를 사왔다. 장흥군에서 활동을 많이 하시고 특히 유치면의 유력가였던 외할아버지는 맏딸인 어머니가 몸을 풀고 회복되거든 일본으로 들어가라며 말리셨다. 아버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선산과 토지가 있는 유치면에 있는 논과 밭 다섯 마지기와 우선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두고 온 집이 있어 다시 들어가려던 계획이 어머니와 외갓집 때문에 무산되자 집에 계시지를 않았다. 할 만한 일을 찾아본다며 전국으로 다니면서 가지고 나온 돈을 다 써버렸다. 이 무렵 태어난 딸아기가 독감에 걸리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설득해 유치면의 호적서기가 되게 했다.
우리 집은 금성리 앞 보림사와 장평면으로 넘어가는 피재 입구의 삼거리에 있었다. 나는 매일 일본에서 먹었던 사탕을 내놓으라고 때를 쓰면서 말썽을 부렸다. 피재에는 낯에도 산적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돈과 물건을 빼앗고, 밤이면 그 옆 아흔아홉이나 된다는 엉골에서는 호랑이가 나온다고 했다.
현해탄을 건너와 외갓집에까지 들렸다가 태어난 아기가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괴로워 하시면서도 무심하신 척 면으로 출근을 하시고 어머니는 형, 누나, 나, 누이동생까지 사남매를 데리고 아기를 묻으러 나섰다. 엉골 입구 외갓집 선산이 있는 노루목 고개 양지바른 곳에 땅을 팠다. 아기를 묻을 때 어머니는 불은 젖을 흘려주면서 아기를 목매여 부르고 흙으로 덮으면서 다함께 통곡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큰 배낭을 메고 나를 데리고 금성리 뒤 골짜기를 올라 이웃 장평면으로 쌀을 사러 나섰다. 아버지는 아무도 다니는 않는 산길로 해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 쌀을 배낭에 가득 차게 담고 값을 치룬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까 지나왔던 그 산길을 한참 가다가 쉬자면서 담배를 피우시려다 “아차, 내가 지갑을 놓고 왔구나”라며 찾아올 터이니 여기서 배낭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배낭을 더 잘 지키려고 붙잡으려다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무거운 배낭이 떼굴떼굴 굴러서 아래 계곡으로 처박혀 버려 그곳으로 내려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와 보니 아이와 배낭이 보이지 않아 “쇼짱, 쑈짱 어디 있느냐”라고 불러댔다. 나는 “아버지 나 여기 있어요” 라고 소리를 쳐 아버지가 내려와 행여 산적에게 당하지 않았나 싶었다고 했다. 배낭이 튼튼했고 끈을 잘 메어 두어서 쌀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밤이면 호랑이가 눈에 엄청 밝은 불을 켜고 다니기 때문에 다른 짐승들이 겁을 먹고 오줌을 저린 다고 했지만 볼 수가 없었다. 여우는 대낮에도 집 주변을 힐끔대며 닭을 잡아먹으려고 다니는데 밤에는 무덤을 파고 들어가 송장을 꺼내 먹는 다고해서 징그럽고 요사하게 보였다.
나는 모든 게 신기해서 머슴을 따라 산에 다니기를 좋아했다. 머슴이 따준 언 고염을 먹고 가재를 잡아 구어 먹는 게 마냥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산적과 다른 <밤손님>이라는 자들이 밤중에 살짝 나타나 순경과 나쁜 사람을 죽이고 부자들을 혼내기도 하고 억지로 끌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우리 가족은 일본에서 나왔고 아버지가 면서기인데다가 큰외가집이 부자여서 걱정이 됐다. 큰외가집은 유치면 용문리 일대의 논과 밭을 상당히 소유한 대지주였는데 동학란 때 피해를 많이 입고 그곳을 떠나 장흥읍에서 가까운 부산면 용두리로 옮겨 갔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에서 나왔을 때도 머슴을 둘씩이나 두고 식모가 있는 부자였다. 큰외삼촌이 강진군과 영암군을 아울러서 장흥군에 있는 재판소의 유일한 사법대서소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 더 부자가 됐었다는 것이다. 막내 외삼촌은 후일 도의원이었고, 중간 외삼촌이 선산과 토지를 관리했다.
1946년 이른 봄 우리가 살았던 금성리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밤손님들이 나타나 동네에서 세도를 부리는 구장과 왜정 때부터 경찰관이었던 그의 큰아들을 칼과 몽둥이로 무참하게 죽였다. 그 날 밤 나는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대고 사람들이 쫒기 듯 달려가는 소리를 들었었다. 구장이 마당으로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할 때 큰아들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우리 집 옆으로 난 냇가 둑길로 도망쳐가다가 뒤따르는 그들에게 잡혀 길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초여름 둑길 가에는 찔레의 새순과 딸기가 많았는데 그가 죽음을 당한 자리에는 그 사람의 피가 엉켜있는 것처럼 붉게 익은 딸기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어느 날 미군 지프차 한 대가 들어와 우리 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흑인병사가 운전을 하고 백인 병사 두 명이 소총을 들고 내렸다. 꿩과 노루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사냥을 오지 않았나 싶었는데 얼마 전 밤에 있었던 사건을 모르는 것 같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지프차에서 내린 미군을 처음 보고서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가 기겁을 하고 숨어버렸다. 나는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면서 한가롭게 낚시질을 하다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미군들이 생각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미군들은 내게 초코레트와 둥근 사탕을 한줌 쥐어주고 주위를 한참을 둘러보다가 가버렸다. 그들이 무사히 나갔기를 바라고 있는데 숨어 있던 아이들과 어른들까지 내게로 와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내게 있는 것을 골고루 나누어 주자 미국 초코레트와 사탕을 처음 먹어본다며 좋아들 했다.
2. 반란군
그 무렵 유치초등학교 교감인 사촌외숙이 밤손님들에게 납치 되어간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그 친족 중 한사람이 먼저 입산자가 되어 조카 벌되는 교감을 끌어드리려다가 안되니까 부하들을 시킨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우리 집을 포함한 외가 집이 불안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 집은 금성리 입구에 있는 집을 팔고 면소지에서 가까운 송정리의 물가에 있는 강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해 가을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고종형님이 근사한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며칠 후 국군 헌병과 경찰이 찾아와 그의 행적을 쫒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수14연대의 반란사건 때문이었다. 형님께서는 반란군에 합류하지 않으려고 피해서 왔는데 정부에서는 14연대 출신들을 체포하려 들어 부득이 피해 다니다가 밤손님들과 함께하는 어처구니없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군경토벌대에게 자수하여 또다시 군에 재입대하여 전방에서 싸우다 부상을 당했다.
여수14연대의 반란군들은 진압군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일부가 유치산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국군의 최신무기 M1소총을 가지고 밤손님들과 합세하면서 부터 세가 더 커져 지서를 습격하고 파괴와 살상을 일삼아 그들을 밤손님이라 하지 않고 <반란군>이라며 두려워했다. 1949년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이었던 그해 초여름 유치지서의 경찰관이 자기 집에 들였다가 반란군들에게 피살당했다. 그 경찰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가가 있는 영암군 금정면으로 가기위해 지서장, 면장, 경찰관들이 탄 3/4톤 트럭이 덤재를 넘다가 백주에 습격을 당했다. 반란군들은 전원을 살해하고 시체에다 휘발유를 뿌려 불태운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
곧 바로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20연대의 2개 중대가 내려와 학교 주변에 주둔했다. 미군전투복에 최신형 8연발M1소총을 휴대하고 운동장에서 펼치는 제식훈련은 대단히 멋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에 커서 저런 군인이 되어야지 라는 마음이었다. 군인들은 열심히 각개훈련을 하면서 토벌작전을 펼쳤으나 산이 워낙 험하고 골이 깊어 별효과를 못 보면서 토벌을 나갔다가 기습을 당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사한 군인의 시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장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저리고 떨려 원수를 꼭 갚아야지 라고 다짐을 했다.
어느 날 저녁 광주에서 대대장이라는 높은 군인이 내려왔다며 면민들을 학교운동장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반란군 소탕에 관한 군인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이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든 속히 신고를 해 달라는 것이다. 이어서 준비한 활동사진을 돌렸는데 광화문거리에 꽃전차가 다니고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이 손을 흔드는 장면이 보이고 조금 지났는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영사기가 고장 나 더 이상 활동사진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대대장께서 아쉽게 됐다는 사과의 말을 하고 돌려 보 낼 때 모두가 활동사진이라는 것을 처음 봤다며 신기하다는 이야기들로 꽃을 피웠다. 나는 일본에서 살 때 어머니를 따라 교토의 작은외할아버지 댁에 가서 일본 사무라이들이 칼로 싸우는 무성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해 1949년 7월 윤달에 막대누이동생이 태어났다. 면 사람들의 성명을 한자로 기록하고 이름을 지어주시기도 했던 아버지는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태어난 전주 최씨 가문의 장남으로 할아버지가 영보정 훈장이셨다. 막내딸을 아버지는 호적에다 공순이라고 올려놨지만 집에서는 윤자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돌이 갓 지난 것을 업고 산으로 피난을 다녀야 했는데 아기울음소리 때문에 은신처가 발각되어 참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 어떤 이들은 아기가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심지어 목을 눌러 질식시키는 비극이 발생했다. 어머니는 우리 막내 아기를 살리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외진 곳에 숨었다. 그 애가 자라 60년대 여군중위였고 나는 대위여서 친 오누이가 장교로 복무했었다.
언제부터인가 군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밤중에 떠났는지 살짝 가버리고 지서에는 전투경찰들이 와 있었지만 무장 자체가 구구식과 삼팔식이라는 일본군이 쓰던 단발식 소총이어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더욱이 경찰들은 툭하면 주민들을 불러다가 닦달을 하고 엉뚱한 일로 행패를 부리는 통에 어떤 이들은 오기로 반란군 편이 되기도 했다. 참으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줄서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자칫 잘못하면 반란군과 내통했다고 경찰에게 불려가 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찰 쪽에 섰다고 반동으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경찰들은 반란군들의 습격에 대비해 지서 외벽에 돌로 방벽을 쌓고 토치카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했다. 지배하는 세력이 자주 바뀌는 판국이라 지서에 가서 일을 하면 반란군들에게 반동으로 잡혀 죽을까봐 약삭빠른 주민들은 산속으로 멀리 피해버렸다. 우리 집은 어찌되어 가든 간에 지서에서 시키는 대로 형이 부역을 나가게 되었다. 지서에서는 토치카 앞을 깊게 파 대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바닥에 박아두고 물이 흐르는 해자를 만들고, 그 밖으로는 대나무를 겹으로 역어 세운 울타리를 밖에 초소를 만들어 민간인들로 경계를 서게 하려는 작업이었다. 어머니는 점심을 새로 지어 싸주시면서 형에게 가져다주고 오라고 내게 심부름을 기키셨다. 한날도 나는 형이 먹을 점심을 싸들고 지서에 가 형이 밥을 다 먹은 빈 그릇을 보자기에 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물래방아간 모퉁이를 지나서 집이 빤히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길 양쪽으로 경계를 하며 내려오던 군인들이 나를 불어세웠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며 어디를 갔다 오느냐는 것이다. 나는 지서에 일하러간 형에게 점심을 가져다주고 다 먹은 빈 그릇을 가지고 간다고 했더니 집이 어디냐고 또 물었다. 내가 손을 들어 우리 동네를 가리키려는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저기 연기가 나는 곳이 우리 집이라고 했다. 내게 말을 시키던 군인이 나를 데리고 중대장에게 달려가 사실을 보고하니 중대장께서 빨리 가서 불을 지르지 말고 타고 있는 불을 빨리 끄라고 다급하게 명령했다. 중대장이 내 손을 잡고 급하게 달려 마을에 도착하여 진화작업을 독려했다. 다행이 담장에다 불을 지르고 차츰 헛간이 타고 있는 중에 군인들이 철모를 벗어 소변 통에서 오줌까지 퍼 다가 불을 다 끄게 되었다. 진화작업이 끝난 후 군인들이 모이고 동네사람들 앞에서 중대장은 나를 불러 세워놓고 “오늘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이 마을은 잿더미가 될 번했습니다. 우리는 지서에 부역을 하지 않고 반란군에 협조하는 마을들을 소각해버리라는 명령을 받았었습니다.”라며 앞으로 지서에서 지시하는 대로 잘 협력하라는 말을 강조하고서 떠났다.
모두가 6·25전에 발생한 일로 이듬해 여름 38선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느 날 장흥읍에서는 무장한 경찰이 덮개를 한 트럭에다 사람들을 잔득 실고 들어왔다. 면소재지에서 좀 떨어져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우리가 사는 곳으로, 더 들어간 트럭은 총소리를 요한하게 내고선 빈차로 급하게 나갔다. 두 차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우리가 처음 살았던 금성리의 안 골짜기와 그 다음은 우리 동네에서 바로 물 건너 공수평 마을에서 또 물 건너 대밭 골짜기였다. 지서에서 멀지 않은 늑용리에서 우리 동네 쪽으로 있는 외진 강변에도 시체가 널려있었다.
3. 빨치산
소위 적색분자로 취급되어 보도연맹이라고 붙잡아 들렸던 사람들을 경찰관들이 급하게 처형해 버린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그 한이 아직도 그 지방에는 넓이 깔려있어 정부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섭섭함이 쉬 가시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이를 이용한 일부의 좌파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한 편을 들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국을 혼란케 하는 것은 반역을 도모하는 짓이다.
얼마 후에 동네 개들과 우리 집 누렁이가 강변을 돌아다니다가 무엇을 물고 다니면서 집에서 주는 밥도 먹지 않고 불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전과 같지 않고 이상해진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강변의 송장을 뜯어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나가버린 누렁이를 동네사람이 잡아 보신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한여름이었다. 인민군들은 잠간만 보였다가 다른 데로 가버리고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우리는 인공기가 펄럭이는 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읍에서 온 중학생들이 가르쳐주는 북한노래와 김일성을 찬양하는 빨치산노래를 열심히 배우면서 소년단 교육을 받았다. 노래 가락이 경쾌하고 배경 설명이 그럴듯하여 재미있게 배웠고 잘 익혀두어야 했다. 매일같이 소년단 훈련을 받으면서 토벌대가 간헐적으로 휩쓸고 가는 적지의 마을에 은거하고 있는 빨치산 조직책을 만나 매포(러시아어로 전문이라는 뜻의 메모)를 전달하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허리춤에 매포를 감추고 또 한명의 소년단원과 출발했다.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중에 토벌대가 들어와 작전을 펴고 있는 산등성이를 통과해야 했다. 소년단 교육을 받을 때 ‘♪매포를 전달하고 쓰러진 동무…♪’라는 비장한 소련 군가를 배웠는데, 전선으로 매포를 전달하러갈 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사상교육이었다. 그날 총알이 빗발치는 산등성이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무사히 돌아왔다.
그해 겨울 토벌대가 반란군을 물리치고 면소재지를 경찰이 지배했다. 지서에서는 우리가 살던 강동까지의 작을 마을들을 송정리로 다 소개시켰다. 우리 집은 송정리에서 강동이 가까운 길가 집에 방을 얻어 임시로 머물렀다. 빨치산들이 지서를 습격할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자 경찰들은 매일 밤 민간인들을 동원해 외곽 보초를 세우고 자기네들은 해자 건너 토치카 안에서 경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리가 와있는 집 앞 논가에 이상한 바지게가 젊은 여자들이나 입는 남색 치마에 덮여있었다. 수상하다 싶어서 가까이 가보니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어 놀라 아버지께 알렸더니 조용히 하라고 했다. 다름이 아닌 공수평 고모 댁 친족 중의 한 여자가 지서에 붙들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일을 당한 여인은 일대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규수였는데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장흥중학교에 다니다가 6․25로 원치 않게 입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빨치산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유치지서로 통하는 전선을 끊고 도로를 봉쇄했다. 어느 날 저녁 지서를 멀리 두고 사방에서 횃불을 돌리면서 징을 울리고 꽹과리를 쳐대며 압박해 들어갔다. 경찰들이 마구 총을 쏘아대는 통에 솜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구경을 했다. 빨치산들은 군인들을 누렁개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지만 경찰들을 검둥개라며 얕보고 조롱했다. 낮에 잠간 쉬었다가 다음날 밤에 계속되는 공격으로 지서가 함락되었다. 경찰관 전원이 살해 되고 지서, 면사무소, 학교가 불에 타고 그들은 경찰의 무기와 양곡 및 필요한 것들을 약탈해 갔다.
우리 집은 큰외가와 아버지의 전직 때문에 자칫하면 반동으로 몰릴 판이라 그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래서 형과 나는 열심히 소년단 일을 하면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어느 날 밤 우리 마당에는 장작불을 피워 놓고 빨치산들이 어디서인지 노인 부부와 젊은 며느리처럼 보이는 여인과 어린 아이를 붙잡아 놓고 있었다. 잠시 후에 빨치산 간부가 형과 나더러 집에 있지 말고 마을 앞에서 경계를 서라고 했다. 초겨울 바람이 차가운데 형과 나는 밖으로 나가 퐅밭골(팥밭 골짜기) 입구 밭둑아래 있는 수수깡더미에 숨어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인기척이 나서 살펴보니 우리 집 마당에 있던 민간인들을 빨치산 둘이서 퐅밭골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들리는 덧 하더니 한참 후에 빨치산 두 녀석만이 뭐라고 두런대면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갔다.
짐작컨대 아까 마당에 잡혀 와 있던 군인이나 경찰가족을 칼로 죽인 것이다. 힘없는 형과 나로서는 어떻게 구해줄 수없는 처지여서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우리 동네는 적들이 점령해 사는 해방구가 되었고 우리 집에는 낙동강에서 쫓겨 온 인민군의 높은 군관과 장흥군당 간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몰려들면서부터 반란군이라는 용어가 빨치산으로 바뀐 후였다. 그해의 늦가을 어느 날 아침 군당 간부들이 저녁때쯤 ○○부대가 여기로 온다고 했다. 미리정보를 받았는지 삼백 여명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고 아침부터 남자 이십 여명을 동원해서 짚신을 되도록 많이 삼도록 독촉을 해댔다. ○○부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고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부녀자들은 밥을 짓기 위해 분주했다.
그날 해가 질 무렵 어디서인지 생전에 보지 못했던 인민군 장군이 말을 타고 부하들과 함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먼저 와있던 인민군 군관들과 군당간부들이 절절매는 모습으로 그들을 맞아 밖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짚신을 진열해 놓았다.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주먹밥까지 싸서 배낭에 넣은 인민군들은 헐어빠진 신발대신에 자기 발에 맞은 짚신을 찾아 신고 여분을 배낭에 매달고서는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은 인민군들 중에서 막강하기로 이름난 방호산부대라는 인민군 제6사단으로 낙동강전투에서 부대가 절단 나고 남은 자 들이었던 것이다. 사단장 방호산은 1개 중대 남짓의 부대를 인솔하고 그 밤에 속절없이 가버렸다.
이듬해 봄에도 우리 동네는 그들의 해방구였다. 어느 날 백여 명이 먹을 점심을 또 준비하라는 당 간부의 명령이 떨러졌다. 지난 밤 용맹한 빨치산부대가 어느 면 지서를 까부시고 노획한 무기와 식량 및 여러 보급품을 그곳 주민들을 동원해 밤새껏 옮겨오는 중이라는 것이다. 점심때쯤 도착할 예정이라고 독촉을 하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어 마을 앞 빈 밭에 솥을 걸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일 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동구 밖 물가에 나와 있었다.
멀리서 등짐을 멘 민간인들이 오고 있었다. 전리품을 상당히 노획한 빨치산들이 의기양양하게 쌀가마와 알 수 없는 짐들을 멘 인부들을 인솔해 들어와 짐을 부렸다. 쌀가마와 다른 짐들은 점심을 먹고 나서 암천리 사령부로 옮겨 갈 것이라고 했다. 아까부터 나는 마을 앞 냇가를 바라보는데 이쪽으로 돌출된 곳에서 무언가가 살짝 살짝 움직이는 것이 내 눈에 띠였다. 시력이 나빠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아버지께 자세한 설명을 하고 곧 바로 마을로 들어가 군당간부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내 말을 건성으로 듣고 하는 말이 용감무쌍한 노령산부와 장흥군기동대가 인근을 다 경계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냐며 묵살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말씀을 드리고 미심쩍지만 모두들 점심을 먹기를 시작하는 중이라 우리도 점심을 먹으려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건너편에서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지서가 습격당한 후에 경찰특공대가 은밀하게 추격을 해왔던 것이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모든 것을 그대로 버리고 마을 뒤로 난 골짜기로 각자가 알아서 도망을 쳤다. 그 때 아버지는 내 손아래 누이동생을 업고 뛰다가 오른편 발등에 총을 맞았다, 다행하게도 뼈는 상하지 않고 관통했기에 산속에서 겨울 내내 늙은 호박 속을 꺼내 환처에 부쳐서 염증을 제거하고 두 달여 만에 다시 걷게 되었다. 그날 나는 기관총 탄환이 한참 날아오다가 그쳤다 하는 틈새를 이용해 골짜기로 뛰다가 앞에 있는 작은 암벽을 넘을 수가 없어 주춤대고 있었다. 그 때 인민군 복장을 한 빨치산이 암벽을 막 넘으려고 해 그의 발을 붙잡고 따라 넘으려는데 기관총탄이 날아와 내가 붙잡고 있는 빨치산이 총에 맞아 나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얼마동안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보니 나 혼자였고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몸을 털고 일어나 이전에 다녔던 길이라 계곡을 지나 산 너머에 있는 대삼마을을 찾아가 아는 동네사람들과 형을 만나게 되었었다.
형을 따라 집에 와보니 온 동네 집들과 우리 집이 불에 타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친 상태로 넋이 나간 듯이 불가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불타버린 집터 뒤에 움막을 지으려고 뒤 골짜기로 가다가 어제 행방불명이 된 이웃집 인배 어머니가 머리에 총을 맞아 골이 허옇게 쏟아진 채로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고 군경토벌대에 밀려 더 깊은 산간 마을로 들어갔다. 또 다음날 토벌대가 이곳으로 온다는 정보에 집밖에 숨겨두었던 돈과 증권과 귀중품과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가죽트렁크를 대밭에 숨겼다. 그리고 아침부터 화순군 도암면까지 쫓겨 갔다가 밤중에 돌아와 보니 모든 게 불타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맨 몸이 되어 홀가분해 졌지만 목숨을 어떻게 부지할지가 문제였다. 며칠 전 전라북도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회문산이 무너지면서 그 쪽의 빨치산들과 민간인들 일부가 무작정 이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암천리에서 가까운 죽동에 있었는데 내일부터는 군경토벌대가 이 일대를 참 빗질하듯이 소탕작전을 펼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이에 아버지는 우리 여덟 식구가 한곳으로 몰려다니다 일을 당하면 누가 우리 가족의 시신을 처리해주겠느냐는 것이다. 이제는 한사람이라도 살아서 가족의 뒤처리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4. 공비
빨치산토벌이라는 말이 공비토벌로 바뀌어 진 시점으로 군경토벌대들은 주간에만 작전을 펼쳤다. 우리 집 여덟 식구는 새벽에 물에 불린 생쌀을 조금씩 먹고 네 패로 나뉘어 아버지가 미리 지정해둔 곳으로 일찍 암치 들어가 몸을 숨겼다가 밤에 만나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날이 밝아오자 산골짜기를 무너뜨릴 것 같은 포성과 기관총소리가 진동했다. 아버지와 나는 개활지가 훤히 보이는 산 중턱 바위틈에 숨어서 멀리서 전개되는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과 경찰토벌대가 막강한 화력으로 겨울야산에서 토끼몰이를 하듯이 타지에서 쫓겨드는 빨치산들과 함께한 피난민들을 암천리 앞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때의 처참한 광경이 떠올려지면 몸이 떨리고 움츠려든다.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 시 인디언들이 자기네 영토를 지키려고 기병대들과 맞서다가 몰리면서 최후를 맞이하는 광경처럼 이었다. 악몽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골짜기에 그늘이 드리우자 토벌대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사방이 정적으로 휩싸였지만 집들이 불타 내려앉고 곡식과 김치 타는 냄새가 역겹게 풍겨왔다. 시체가 뒤엉켜 있는 데를 지나가야 하는데 한 여자 빨치산이 총에 맞아 비틀거리며 “동무, 날 좀 살려주기요”라며 애써 매달리려고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아비규환의 현장을 벗어나 우리 가족이 모이자는 곳으로 갔다.
우리 가족은 오늘도 무사했지만 내일이 걱정됐다. 빨치산사령부가 박살이 나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밤중에 그 곳을 빠져 나가 토벌대를 찾아 가기로 했다. 온 식구가 일열 종대로 죽동고개를 넘어 후방으로 빠져 나가는데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곳에서 “누구냐 손들러”라면서 빨치산이 총을 겨누고 길을 가로 막아섰다. 순간 간이 철썩하고 떨어질 것처럼 되어 이제는 죽었구나싶어 손을 들고 있는데 빨치산 쪽에서 먼저 아는 척했다. 외가로 먼 친척이 되는 이웃 동네 청년이었다. 그는 한때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이었는데 성품이 좋아서였던지 이런 말을 했다. “아제가 지금 어디로 가시는 몰라도 여기는 이제 다 된 것 같소. 이대로 나가 용문 앞 냇물을 건너 일단 엉골로 들어갔다가 토벌대에게 자수를 잘하면 살수가 있을 것이요”라는 말을 하고서는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우리가족은 그날 밤 탐진강 상류 용문리 앞 차가운 냇물을 조심스럽게 건너 엉골로 들어갔다.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 인기척이 있어 숯 굴로 찾아가 보니 공수평 사는 고모집 식구가 모여 있었다. 토벌대들이 암천리 쪽으로 작전을 펼치는 중에 이곳은 안전지대였다. 연기가 잘 나지 않는 마른 비사리 나무로 불을 피워 밥을 짓고 가재를 잡아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이삼일을 그렇게 지냈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 곧 소탕작전이 있게 될 것이라고 것이다. 다음날 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엉골 밖 공수평 마을의 빈집에 들어가 있다가 이른 아침부터 일부러 불을 때 연기를 피웠다. 한 참 후에 총소리가 나고 메가폰으로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두 손을 머리에 얻고 지금 곧 밖으로 나오면 살려줄 것이다. 만약에 숨거나 도망을 치면 사살하겠다는 소리를 듣고 이내 밖으로 나가 보호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일단 경찰의 조사를 받고 미군천막으로 된 수용소 생활을 했다. 나는 그냥 있지 않고 토벌대들에게 연락병처럼 따라다니며 탄피도 모으고 전리품을 챙겼다. 초여름이 된 어느 날 암천리보다 더 먼 곳까지 가 엽 담배 한 뭉치를 메고 돌아왔는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눕게 되었다. 수용소에는 이미 역병이 돌고 있어서 걸리는 쪽 신고를 해 격리 조치가 되고 있었다. 나 역시 역병으로 판정이 되어 환자들을 모아두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환자들이 개인용 초막에 있다가 죽게 되면 예방차원에서 그 초막과 시신을 함께 불태운다고 했다.
내가 그곳으로 옮겨진 그 날 밤 아버지가 몰래 찾아와 나를 업고 빈재를 넘어 부산면 구룡리에 있는 큰외가집으로 갔다. 큰외가 식구들은 더 안전하게 읍내에서 살고 있어 우리 식구는 수용소를 나와 통째로 비워 있는 큰 집 안채를 사용했다. 또 다른 친척분이 찾아왔는데 그 집 처녀도 앓고 있었다. 우리 집은 나로 인해 누나와 내 밑에 누이동생도 앓아눕게 되었다. 한 여름에 군불을 땐 방에서 솜이불을 덮고 땀을 흘리고 나서 일단 나은듯했다가 재발하면서 고생한 끝에 회복되었는데, 문간채에서 앓고 있던 처녀는 땀을 흘리지 못해 그만 죽고 말았다. .
우리 가족은 그해 가을 유치면 옛 집터로 돌아와 집을 임시로 짓고 살았다. 겨울이 되었는데 양식이 떨어져 종일 굶주리고 있는 밤중에 헌 누더기 차림의 두 사람이 찾아와 우리를 깨웠다. 자기들은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며 식량을 있는 대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대로 먹을 양식이 떨어져 이렇게 굶고 있다고 식량이 어디 있는지 찾아서 가져가라고 했다. 그들은 식량을 찾아봐도 없고 우리의 몰골을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치지는 않겠다며 그냥 가버렸다. 그 때가 1952년 겨울이었는데 아직 남아 있는 공비들도 식량이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밤에 내려와 식량과 옷가지들을 약탈해 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지서에서는 인민군 출신의 ‘용호대’라는 특공대원들을 앞세워 마지막 남은 잔비들 소탕에 나섰다. 매일 밤 공비들이 내려올 만한 곳과 정보가 있는 곳에 매복을 서면서 한 명을 사살하고 두 명을 놀쳤다고 했다. 계속 추적을 한 끝에 이듬에 봄 보림사 절이 있는 동산리 뒷산에서 햇볕을 쬐며 이를 잡고 있는 공비 한명을 또 사살했다. 추정 상 남은 한명을 잡기위해 매일 밤 그물을 치듯이 매복을 섰는데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오던 공비가 사살됐다.
백선엽 장군이 33세에 별을 네 개단 육군 대장이 된 1953년 봄, 제임스 딘 소장 석방 촉구와 휴전을 반대하는 궐기대회가 있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길가에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들것이 보였다. 거기에는 간밤에 산에서 내려오다 매복조에 사살됐다는 신장이 커 보이는 공비의 시체가 훤히 보이게 있었다. 하필이면 우리 동네 앞 길가에다 방치해 두고 이틀이 지났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가족처럼 보이는 노인 부부와 젊은 사람 몇이 와서 그 시신을 거두어갔다. 그게 탐진강 상류에 은거해 있었다고 추정되는 마지막 공비였다.
나는 6‧25로 초등학교 3학년 여름부터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빨치산들이 학교교사를 불태워버려 1952년도에 가교사를 짓고 학교가 문을 열었다. 두 학년씩 합반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 나는 나이와 학년연도가 맞게 4,5학년 반에 들어가 공부를 대충하고 6학년 때부터 독립반이 되어 제대로 공부를 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택시운전을 하여 돈을 보내주어 공부하는 데는 지장이 없게 살아 담임선생의 독려로 광주사범병설중학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장흥중학교에는 합격했다. 등록을 하지 않고 곧바로 부산으로 달려갔으나 그해 1차 진학시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차로 미션계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크리스천이 되었고 후일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목회 길로 접어들어 어느덧 정년을 맞았다.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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