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하양 현감 수졸당 이공 묘지명 병서(河陽縣監守拙堂李公墓誌銘 並序)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의잠(宜潛)이며 자는 병연(炳然)이고 호는 수졸당(守拙堂)이다. 본관은 여강(驪江)으로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선생 휘 언적(彥迪)의 손자이며, 판관(判官) 벼슬을 지냈으며 호가 수암(守庵)인 휘 응인(應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옥산 장씨(玉山張氏)로 세마(洗馬) 벼슬을 지낸 응기(應機)의 따님이며, 계비(繼妣)는 모관(某貫) 모씨(某氏) 모(某)의 따님이다. 4남을 두었으니, 공은 막내이다. 공은 위의(威儀)와 외모가 옥과 같았으며 또 총명하고 비범하였다.
겨우 4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아버지 판관공의 자애로운 양육과 의로운 가르침〔義敎〕을 잠시도 가슴에 잊은 적이 없었다. 이미 성장함에 무첨당(無忝堂)과 설천(雪川) 두 형과 함께 항상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독서하며 더욱 힘써 매진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에 일본이 침략해오자 판관공을 모시고 산으로 피난하여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가을에 경주부(慶州府)의 의병대열에 달려갔는데, 사림들이 성무(聖廡 문묘(文廟))의 위패를 옥산서원에 모셔 받들고자 하니, 공이 삼가 받들어 수호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공이 역병에 걸렸지만 가까스로 일어나 스스로 힘써 정성을 다하여, 염하는 것과 빈소를 차리는 것을 예도에 맞게 하였으며 여묘살이하며 삼년의 상제를 마쳤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의병을 창도하였는데, 참봉(參奉) 손엽(孫曄), 남포(藍浦) 최계종(崔繼宗), 참봉(參奉) 권응생(權應生)이 이구동성으로 공과 함께 토벌하여 많은 적을 죽였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대암(大庵) 박 선생(朴先生) 우거지인 청부(靑鳧 청송(靑松))에서 그를 좇아 배워 의심스럽고 어려운 곳을 강론하고 질의하였다.
이 해 가을에 공산회맹(公山會盟)에 참여하였고, 그 다음 해 가을에는 병사를 이끌고 곽망우당(郭忘憂堂)의 의진(義陣)에 달려가 적을 방어하는 계책에 도움을 주었다.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와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舍生取義〕’ 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언론이 매우 알맞고 적절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 32)에 지산(芝山) 조 선생(曺先生)을 배알하여 《주역》과 《시경》 그리고 《심경(心經)》을 배웠고, 또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을 좇아 배워 학업을 마무리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음보로 참례 찰방(參禮察訪)이 되었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 동래 온천(東萊溫川)으로 행차하던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께 인사를 드렸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에 내직으로 들어가 내시(內寺)가 되었고 얼마 후 하양 현감(河陽縣監)에 임명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주(公州) 행재소에 달려갔다.
을축년(1625, 인조 3)에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자, 하양현 백성들이 초상화를 그려 사모의 마음을 붙였다. 고향 처소 옆에 하나의 서재를 짓고 수졸당(守拙堂)이라 편액하고, 시렁에 많은 서책을 꽂아두어 학문의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조부의 《회재집(晦齋集)》 〈부록유례(附錄類例)〉를 편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나의 선조 여헌(旅軒) 선생에게 품의하여 확정하였다. 아, 공의 선량한 행실과 훌륭한 공적은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을 만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조그만 고을살이를 하는데 머물렀으며, 수명도 덕망에 부합할 만큼 장수하지 못하였다. 또 유문(遺文)도 불에 타서 남은 것이 천백에 겨우 하나 둘 정도이니, 애석하구나.
공은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태어나서 인조(仁祖) 을해년(1635, 인조13)에 죽었으며, 달전(達田) 중강(中岡) 자좌(子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세계와 자손록에 대하여는 묘갈명에 갖추어져 있다. 공의 8세손 재종(在鍾)이 칠십의 나이〔耄年〕에도 불구하고 20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가장(家狀)을 갖추어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묘갈명을 약간 수정하여 이 글을 짓고 명으로 이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아름답구나! 공의 덕망과 학문이여 / 猗歟公德學
선조를 계승하고 스승에게 도움을 받았네 / 承祖資師
충과 효를 스스로 극진히 함에 / 忠孝自盡
험난한 것과 평이한 것에 한결같이 하였네 / 一險夷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대할 때는 다친 사람을 본 듯하니 / 撫臨如傷
백성들이 공의 모습을 살펴 초상화를 그렸네 / 審惟肖
온축함이 있는 것은 반드시 발현함이여 / 有蘊必發兮
공의 후손들이 성하고 빛남이 마땅하겠네 / 宜爾後之熾且耀也
<끝>
[註解]
[주01] 무첨당(無忝堂) : 이응인의 아들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의 호이다. 자는 수연(睟然)이다.
[주02] 설천(雪川) : 이응인의 아들 이의활(李宜活, 1573~1627)의 호이다. 자는 호연(浩然)으로 1618년(광해군10) 문과에 급제하였
다.
[주03] 손엽(孫曄) : 1544~160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청허재(淸虛齋)이다.
[주04] 최계종(崔繼宗) : 1570~1647.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승(慶承), 호는 육의당(六宜堂)으로 최진립(崔震立)의 동생이다. 임진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하여 남포 현감(藍浦縣監)에 제수되었으나 1618년(광해
군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사건 때 벼슬을 거역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풀려나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
다.
[주05] 권응생(權應生) : 1571~164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생(命生) 또는 명세(命世), 호는 노헌(魯軒)으로 1605년(선조38) 진
사가 되었다.
[주06] 대암(大庵) 박 선생(朴先生) : 박성(朴惺, 1549~1606)을 말한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으로 1567년
(명종22) 진사가 되었다.
[주07] 공산회맹(公山會盟) : 서사원(徐思遠)과 정사철(鄭師哲) 등이 대구 팔공산(八公山)에서 회맹을 맺고 의병활동을 벌인 것을 말한
다.
[주08] 곽망우당(郭忘憂堂) :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유(季綏), 호는 망우당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일컫고 왜적을 무찔렀다.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화왕산성을 지
켰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09] 최동보(崔東輔) : 1560~1625. 본관은 경주, 자는 자익(子翼), 호는 우락재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당시의 상황
을 일기로 기록한 《신협일기(神篋日記)》가 전한다.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대구 평천사(平川祠)에 제향 되었다.
[주10] 지산(芝山) 조 선생(曺先生) :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을 말한다. 본관은 창녕,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이다. 퇴계의 제
자이며, 시호는 처음에 정간(貞簡)이었으나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
[주11] 내시(內寺) : 임금의 수레와 말을 관장하던 관아이다.
[주12] 이괄(李适)의 난 : 1624년(인조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등공
신으로 책봉되었으며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일을 말한다.
[주13] 부록유례(附錄類例) : 《회재집(晦齋集)》 별집에 있는 〈유례(類例)〉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14] 耄 : 원문에는 ‘髦’로 되어 있으나 ‘耄’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15] 백성들을 …… 듯하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다친 사람을 보듯 백성을 가엾게 여겼다.〔文王視民如傷〕”라는 말
이 나온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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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河陽縣監守拙堂李公墓誌銘 並序
公姓李氏。諱宜潛。字炳然。守拙號。驪江貫。文元公晦齋先生諱彥迪之孫。判官守庵諱應仁之子。妣玉山張氏。洗馬應機女。繼妣某貫某氏。某女。有四男。公於序季。儀貌如玉。英悟異凡。甫四歲。喪母夫人。判官公慈育而義敎。未嘗頃刻忘懷。旣長 。從無忝雪川二兄。常讀書于玉山先院。益勵征邁。壬辰夏。値島訌。陪判官公。避地山中。忠養備至。秋。赴本府義陣。士林奉聖廡位牌于玉院。公恪謹奉守。癸巳。丁憂。遘癘甫起。能自力殫誠。殮殯稱禮。廬墓終制。乙未。倡義旅。孫參奉曄。崔藍浦繼宗。權參奉應生。同聲共討。多所斬獲。丙申。從大庵朴先生于靑鳧之寓所。講質疑難。是秋。參公山會盟。翌秋。領兵赴郭忘憂陣。贊防禦之策。與崔憂樂東輔。論舍生取義。言甚剴切。己亥。謁芝山曺先生。受易詩心經。又從愚伏鄭先生學以卒業 。壬子。升司馬。丙辰。蔭補參禮察訪。丁巳。乞暇還鄕。拜寒岡鄭先生于溫井路次。辛酉。入爲內寺。尋除河陽縣監。甲子适變。奔公州行在所。乙丑。呈病解官。縣人圖像而寓思焉。起一書樓於所居之傍。扁之曰守拙。架揷羣書。探賾義理。壬申。編刊先集附錄類例。稟定于吾先祖旅軒先生。噫。公淑行懿蹟。克趾世美。不幸棲遲下縣。壽不稱德。遺文又火。僅一二存於千百 。惜哉。萬曆丙子公生。仁廟乙亥卒。葬達田中岡負子原。其世系若子孫錄。於碣具焉。公八世孫在鍾。以髦年。不遠二百里。齎家狀。責福樞以墓銘。義不敢辭。畧加櫽栝。係以銘。銘曰。
猗歟公德學。承祖資師。忠孝自盡一險夷。撫臨如傷審惟肖。有蘊必發兮。宜爾後之熾且耀也。<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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