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수(李德洙)
[생졸년] 1577년(선조 10) - 1645년(인조 23)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관직] 조선 후기, 대사간, 강원감사,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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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당(怡愉堂) 이공(李公) 묘표
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洙)의 묘는 상당성(上黨城: 청주의 옛 이름)의 아래에 있는데 어느덧 구목(丘木)이 아름드리가 되었다.
세상에서는 모두 귀로 듣는 것만 높이 여기고 눈으로 보는 것은 낮게 여겨, 언제나 지금 사람은 옛사람만 못하다고 하는데, 공 같은 이야말로 참으로 지금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각박하게 잘하는 것을 능(能)한 것으로 여기는데 공은 인후(仁厚)함에 마음을 두었고, 세상 사람들은 비굴하게 굽실거림을 숭상하여 명분(名分)으로 여기는데 공은 진실함을 근본으로 삼고 행실을 돈독하게 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은 편리함만 힘쓰는 것으로 어질다 하는데 공은 순정(醇靜)함으로 덕을 이루었다.
공은 이런 몇 가지를 몸에 갖추어 집안에서 행(行)하고 종족에게 신임을 얻고 조정에서도 신임이 두터워, 살아 있을 때는 헐뜯고 비방하는 말이 몸에 미치지 않았고 죽은 뒤에는 애통하게 여기고 오래도록 사모했다.
아, 지금이 아니고 옛날이라도 공(公) 같은 이를 어찌 쉽게 얻어 보랴. 대저 음식을 높이 쌓아 놓고 먹어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는 어렵고 공(功)이 온 세상을 덮어도 한 지어미의 마음을 얻기는 어려운 것인데, 공 같은 사람은 이에 가깝다 하겠다.
충신(忠信)과 성각(誠慤)의 진실함이 없다면 이같이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이 하찮은 나를 언제나 송(宋) 나라 때 이 문정(李文正 이적(李廸)의 시호)이 손명복(孫明復 손복(孫復))을 대하듯이 하였으므로 이것이 인연이 되어 출입한 지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노하는 빛이나 편인(褊忍)한 말을 듣거나 보지 못하였다.
나의 성격이 매우 편협하고 박잡한데 언제나 덕 있는 모습을 뵈면 거칠고 조급한 행동이 나도 모르게 융화되어 없어져, 물러 나와 생각해 보면 황연(怳然)히 얻은 바가 있는 듯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덕이 융성한 공(公)의 모습을 바라보아 그 만에 하나라도 본받으면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리하지 못함이 한스럽다. 들으니 공이 후생을 훈계하기를,
“사람이 충신(忠信)하지 못하면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족히 볼 것이 없다.”
하고 또,
“사람을 너무 심하게 논하지 말 것이니 너무 심하게 하면 실수하기가 쉽다.”
하고 또,
“사람은 차라리 너무 후(厚)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너무 각박하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가만히 공의 평생을 살펴보면 그 수용(受用)한 바가 또한 이와 같았기 때문에 공은 항상 차분하고 원만하시어 규각(圭角 언어 행동이 모나서 남과 서로 맞지 않음)이 드러난 일이 없었다. 또 이해를 따져서 취사하지 아니하였으니, 시세를 따라 이리저리 잘 맞추어 행동하는 무리들이 공을 보면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그러기에 벼슬은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로지 않았으나 임금의 신임을 받았고, 모든 대신들이 흠모하였다. 심지어 김 문경공(金文敬公 김집(金集)의 시호) 같은 분은 당대의 인물을 논할 때면 반드시 공을 진실한 군자라고 평하였다. 나는 이런 점에서 공을 신복(信服)함이 까닭이 있어 거짓됨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공(公)의 선조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69세를 살았는데,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살아 있는 햇수는 응당 우리 선조와 같을 것이다. 오는 을유년은 내가 죽을 해이다.”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는 공이 정후(靜厚)하고 순명(純明)하여 정신이 밝아, 능히 오는 일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공을 신복하는 것이 유독 당시 군자들의 말에서만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스스로 믿게 되었다. 공은 일찍이 상당(上黨)의 서편에 집을 짓고 이유당(怡愉堂)이라 편액을 써 붙이고 날마다 부모 형제들과 같이 지냈는데, 특히 중형(仲兄)인 감찰공(監察公) 덕렴(德濂)과 막내인 도사공(都事公) 덕사(德泗)와 미망인이 된 누이와 함께 지내는 것이 옛날 양춘(楊椿 후위(後魏) 때 사람)과 양진(楊津)의 형제처럼 우애가 깊었다.
그의 종질(宗姪)인 상방장(尙方丈 상의원(尙衣院)의 정(正)) 성연(聖淵)도 그의 가족들을 거느리고 와 좌우에서 즐거이 모셔 활기차고 화목한 얘기들로 나날을 보냈다. 나는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한집안의 화락한 가풍의 아름다움이 족히 세상을 선하게 만들고 풍속을 후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하면 큰 붓으로 이유당(怡愉堂)의 이름을 크게 써서 집집마다 문에 걸어 두어 이 각박한 풍속을 깨우쳐 볼 수 있을까. 오늘날의 풍속은 날로 각박해져 가는데 공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으니 세상을 위하여 장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이제 공의 큰아들 관찰사(觀察使) 홍연(弘淵)이 행장을 나에게 보여 주면서, “선인(先人)의 사적은 김 문정공이 지은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지만, 선인(先人)의 마음을 아는 이는 지금 그대밖에 없으니 몇 마디 적어 후인에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내 진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또한 차마 사양하지 못하여 보고 들은 몇 가지 사실을 모으고, 또 마음으로 좋게 여기던 바가 위와 같았음을 묘표(墓表)의 뒤에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이 모두 이유당 이공의 묘(墓)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 <끝>
송자대전 제191권 / 묘표(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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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怡愉堂李公墓表
怡愉公葬在上黨城下。噫。丘木已拱矣。世皆尊耳而卑目。以爲今人終不如古人。若公者眞非今世之人矣。世人喜忮刻以爲能。而公仁厚以存心。世人尙夸毗以爲名。而公本實以敦行。世人務便利以爲賢。而公醇靜以成德。公以此數者。有於己行於家。信於宗族而重於朝廷。故其生也。訾詬不及於身。其沒也。哭者哀而思者久焉。嗚呼。匪今而古。公豈易得哉。夫食丈於前而不能無愧於內。功蓋一世而難得匹婦之心。若公其庶矣乎。非有忠信誠愨之實。難乎其語此也。公視余無似。一似李文正之於孫明復。故因緣出入。不爲不久。而未嘗見其忿怒之色褊忍之言。余性甚偏駁。每承顏覿德。則其粗厲卞急之擧。不覺其潛融而默消。旣退則怳然若有所得也。自恨不得朝夕望公之盛德容貌。師法其萬一不遂。爲小人之歸也。蓋聞公訓戒後生曰。人不忠信。則雖有絶人之才。無足觀也。又曰。論人不可太深。太深則易失。又曰。人寧失於厚。毋失於薄。竊窺公平生。則其所受用。亦只如此。故公循循渾厚。圭角不露。亦不擇利害以爲之趨捨。其爲機變之巧者。亦可以自省而頸赤矣。故官不至卿相。而主上信任之。搢紳希慕焉。而至於金文敬公則論一時人物。必以公爲善信君子也。余於是益信其所以服公者有徵而不誣也。公先祖牧隱公壽年六十九。公嘗自言吾之視。當視吾先祖矣。來歲乙酉者。其吾歸盡之期乎。其言果驗。豈公靜厚純明。故神識不昧而能知來物耶。斯亦異矣。余益自信其所以服公者。不獨徵於當世之君子也。公嘗作堂於上黨之西。扁以怡愉。日與私親仲季監察公德濂,都事公德泗及其未亡金氏妹。聚會如春津。其宗姪尙方丈聖淵率其群從。左右娛侍。朝言夕言。洩洩嘻嘻。余竊念天下之樂無以易此。而一家風誼之美。足以善世而厚俗矣。顧安得巨筆大書此堂之名。遍揭有家之門。以警薄俗也。目今風俗日偸。而九原不可作矣。益爲世道長歎也。今公胤子觀察使弘淵授余以狀曰。先人之事。金文正公旣詳于大碑之文矣。知先人心事者。今世莫如子。盍記數語以示後人乎。因哽塞而涕滋。余固不敢當。而亦不忍辭。略撮其所耳目而心所悅者如此。俾刻于表陰。使後之人皆知爲怡愉堂李公之墓云。<끝>
[주기]
[주01] 擧 : 擧恐氣
[주02] 春 : 春從木
宋子大全卷一百九十一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