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0. 9. 23:46
[생졸년] 이유언『李惟彥, 1611년(광해군 3) ~ 1677년(숙종 3)』
[향년] 66세
[세 계] 국당공후 정순공파
익찬 이공유언묘표(翊贊李公 惟彦 墓表)
권상하(權尙夏, 1641~1721) 撰
공은 휘가 유언(惟彦)이요. 자(字)는 미재(美哉)로서 경주인(慶州人)인데, 시조는 신라(新羅) 개국의 원훈(元勳) 알평(謁平)이다.
그 뒤에 휴(攜)라는 이가 아조에 와서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세를 건너 휘(諱) 구정(龜禎)이 별제(別提), 휘(諱) 주(魚+壽)는 만호(萬戶), 휘(諱) 양국(良國)은 금부 도사(禁府都事)였는데, 이상이 공(公)의 고조ㆍ증조ㆍ조부이다.
별제의 아우는 군수 구서(龜瑞)인데, 구서가 사의(司議) 즉(鯽)을 낳고, 즉은 봉사(奉事) 대방(大邦)을 낳고, 대방은 첨지(僉知) 탁(啅)을 낳았다. 첨지가 도사공의 양자로 가서 장사랑(將仕郞) 최기수(崔耆壽)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만력(萬曆) 신해년 1월 15일 공을 낳았다.
공(公)은 문재(文才)가 뛰어나 10여 세(歲) 때부터 시부(詩賦)를 잘 지었고 을미년에 벼슬길에 올라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는데, 학도가 매우 많아 뒤에 통현(通顯)한 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기해년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옮겼다가 곧 금오랑(金吾郞)으로 낭천현(狼川縣)을 맡아 나갔다. 갑진년에 해직되어 광릉(廣陵)의 삼전포(三田浦)로 돌아왔다가 신해년에 익찬(翊贊)이 되었고, 정사년 6월 29일 병으로 세상을 마쳐 광주(廣州) 가락동(可樂洞) 신향(辛向)의 둔덕에 장사 지내었다.
공(公)은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마음이 깊었으며 생산(生産)을 일삼지 않고 서사(書史)를 즐겼는데, 집 안이 썰렁하게 가난한 것도 개의하지 않았다. 호수 위에 작은 정자를 지어 ‘관어(觀魚)’라 이름하였는데, 도사공이 살던 터의 곁에 위치하였다.
옛날 도사공이 율곡(栗谷)ㆍ사암(思菴) 박순(朴淳)과 그 정자에서 서로 시를 읊고 함께 놀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공이 할아버지 뒤를 이어 다시 정자를 세우고 고명한 벗 좋은 친구들과 항상 시 읊고 술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면서 강호(江湖)에 흠뻑 취한 채 세상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공의 그러한 점을 가상히 여겨 계방(桂坊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을 제수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마지 못해 응하긴 했으나 물러 나오는 즉시로 호상(湖上)에 달려가 벼슬에 연연하는 생각이 없었다. 함께 노닐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대인(大人)ㆍ군자(君子)들로서 예를 들면 동춘(同春)ㆍ우암(尤菴)ㆍ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형제와 같은 이들이 가장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처음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주부 경창(慶彰)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녀가 없었고, 두 번째로 고성 이씨(固城李氏) 충의위(忠義衛) 순고(循古)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다가 홍기욱(洪箕勗)에게 시집보냈으며, 세 번째로 문화 유씨(文化柳氏) 학생(學生) 시화(時華)의 딸을 맞아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옹(顒)ㆍ원(願)ㆍ효(顤)ㆍ예(預)이고 딸은 송정채(宋廷采)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측출(側出)로 아들 신(䪿)과 사위 김경성(金慶星)이 있다. 손자 단필(端弼)ㆍ단좌(端佐)ㆍ단룡(端龍)과 권세형(權世衡)의 아내가 된 손녀는 맏아들 소생이며, 손자 단보(端輔)와 생원 정형주(鄭衡周)ㆍ신헌(申憲)ㆍ윤명주(尹命周)의 아내가 된 손녀들은 둘째 아들의 소생이고, 손자 단현(端玄)과 송재현(宋載顯)ㆍ임성필(任聖弼)의 아내가 된 손녀들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다.
그리고 사위 홍씨는 아들 회(懷)를 두고 딸은 이무(李堥)에게 시집보냈으며, 사위 송씨의 아들 국빈(國賓)은 생원이다. 나는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소년 시절부터 공을 자주 찾아 뵙고 그에게서 옛날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는 것을 적이 우러러보아왔던 터인데, 지금 단필 형제가 찾아와 묘도문을 부탁하는 것을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대략 이상과 같이 적어 비에다 새기게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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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翊贊李公 惟彥 墓表
遂菴 權尙夏 撰(수암 권상하 찬)
公諱惟彥字美哉。慶州人。上祖新羅開國元勳謁平。其後有曰携。入我朝判漢城府事。歷一世有諱龜禎別提。諱䲖萬戶。諱良國禁府都事。是公之高曾祖也。別提之弟郡守龜瑞。龜瑞生司議鯽。鯽生奉事大邦。大邦生僉知晫。僉知出後於都事公。聘將仕郞崔耆壽女。以萬曆辛亥正月十五日生公。文才邁倫。十餘歲便能詩賦。乙未筮仕爲童蒙敎官。學徒甚盛。後多通顯。己亥遷司僕主簿。尋以金吾郞出宰狼川縣。甲辰解歸廣陵之三田浦。辛亥爲翊贊。丁巳六月廿九日。以疾終。葬廣州可樂洞辛向之原。公寬厚宏深。不事生產。以書史自娛。環堵蕭然。不以爲意。築小亭於湖上。扁以觀魚。是都事公舊基傍也。都事公昔與栗谷,思菴相與唱酬於斯亭。遺迹尙存。公能肯堂。每與高朋佳友。觴詠自適。跌宕江湖。世念都灰。朝論嘉之。有桂坊之除。公雖僶勉應命。公退卽出湖上。不屑屑於宦情。所與遊皆當世大人君子。如同春,尤菴,老峯兄弟。最其相厚者也。初娶東萊鄭氏。主簿慶彰女無后。再娶固城李氏。忠義衛循古女。有一女適洪箕勖。三娶文化柳氏。學生時華女。擧四男,願,顤,預。一女適宋廷采。側出男䪿。女金慶星。孫男端弼,端佐,端龍,權世衡妻。長房出也。男端輔,女鄭衡周生員,申憲,尹命周妻。次房出也。男端玄,女宋載顯,任聖弼妻。三房出也。洪壻男懷,女李堥。宋壻男國賓生員。余公之戚屬也。自少拜公頗款。竊仰其有古長者風懿。今端弼兄弟來乞墓文。義不敢辭。遂略記如右。俾刻于石。<끝>
출전 :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묘표(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