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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씨 고택 및 감포 대왕암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6월7일 답사여행을 가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다. 이것 저것 준비물을 챙겨서 출발지(하나은행 앞)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먼저 도착해 계신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곧 이어 출발하니 모두 15명이다.
그간 여러가지 사정으로 5년여 만에 갖는 야유회(野遊會) 행사이건만, 오늘도 개인사정으로 불참회원님들이 많으시다. 조직의 활성화(活性化)는 적극적인 참여에 있으며 의미 또한 각자의 정성에 비례하는 것이리라.
김상철 회장(총무)님께서 많은 음식들을 준비해 오셔서 골고루 나누어 드시며 모두들 정담(情談)을 나누시는데, 차는 신나게 달려 어느새 영천, 안강을 지나 건천IC에서 다시 4번국도를 따라 경주시내로 진입합니다.
율동(栗洞)을 지나 서악동 일대에는 신라 삼국통일의 대 위업을 이룬 29대 ‘태종무열왕릉’이 담장 너머로 태산처럼 다가온다. 봉분(封墳)이 커야 권위와 위엄이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슴니다 그려!
아직은 시간이 일러서인지 비교적 한산하며 차는 미끄러지 듯~ 서천교(西川橋)를 지나 교동(校村,校洞)입구 주차장에 당도하니 시계는 9시 30여분을 조금 지나 있다. 고적(古蹟)의 도시 경주의 향기를 느끼며 남천(南川)을 따라드니 “교촌(郊村)”이라 새겨진 거대한 비석이 우리 일행들을 반갑게 맞아 주심니다.
몇 걸음을 나아가니 반월성(半月城) 끝자락에 공사중인 월정교(月精校)’가 “南川”을 가로질러 미완성인 채 아름다운 자태로 다가옵니다.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진행하니 요석궁, 교동법주, 최가밥상 등 비즈니스 간판(看板)들이 즐비합니다.
그 옛날 이 부근에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거처한 ‘요석궁(瑤石宮)’이 있었다는데~ 당시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서라벌 거리를 누비며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나에게 준다면, 내가 하늘을 떠 받칠 기둥을 만들겠는데)”라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아마도 원효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하면서, 하루는 스님이 월정교 다리를 지나가는데 왕이 아랫사람을 시켜 짐짓 부딧치면서 개울에 빠져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에 과부가 되어 홀로 있는 요석공주에게 들게하여 훗날 아들을 낳으니 그가 설총(薛聰)이다.
안내문에 월정교 복원사업은 "사업비 235억원, 시공회사 2개사, 감리회사 2개사, 길이(L)= 66.15m, 폭(B)=9.0m, 높이(H)=8.25m"라 적혀있으며, 다리 위 누각에는 오색단청(五色丹靑)을 하여 보는 눈이 현란 할 정도다.
경주향교를 지나 긴 골목길을 들어서니 “경주 최씨 고택”의 문간방은 수리중에 있으며, 이른 시간이라 그리 붐비지는 않는다. 사랑채 벽에는 “용암고택(龍庵古宅:용의 정기가 스며드는 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14세 종손 우산(愚山)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라 한다.
그 옆으로 “대우헌(大愚軒:크게 어리석다)”은 12대 최부자 中 9대 최세린(崔世隣)의 號이며, “둔차(鈍次:재주가 둔하다)”는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崔竣.1884~1970)의 부친 최현식(崔鉉軾)의 號라 한다.
최씨고택(민속자료 제27호)은 본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1700년 경에 교동으로 옮겨 건립되었으며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터 였다고 전해진다. 건물을 지을 당시 향교 유림들의 반대가 심하여 향교보다 2계단 낮게 파서 지었다고 하며 원래 99칸으로 지었다 한다.
2006년에 복원한 큰 사랑채에는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면암 최익현,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의친왕 이강공 등 많은 유명인사들이 다녀 가셨다 하며, 노(老)종손은 친절하게도 방문을 열어 보여주신다.
작은 사랑채는 불탄 이 후 아직 복원되지 않았으며, 그 유명한 “곳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으로 지어져 있고,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안채”는 ‘ㅁ’자 형태로 지어 졌으며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남향이다. 원래 8채 99칸으로 지어졌으나 현재 3채만 남아있다. 이 곳은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생활공간 이었으며 장독대가 지금도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뜰에는 ‘최씨가’의 여러 안내자료들을 전시 해 놓았으며 그 중에서 9대 진사(進士)와 12대에 걸쳐 만석군의 부자로 지낼 수 있었던 ‘가훈’이 있다.
육훈(六訓:여섯가지 행동지침)
*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연하여 “육연(六然:여섯가지 修身)”이 있는데, * 자처초연(自處超然:혼자 있을 때 초연하게 지내라) * 대인애연(對人靄然:다른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라) * 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 유사감연(有事敢然:유사시에는 과감하게 대처하라) * 득의담연(得意淡然:뜻을 얻었을 때 담담히 행동하라) * 실의태연(失意泰然:실의에 빠져도 태연히 행동하라)
하나 같이 범상하지 않슴니다 그려! 부자로서 지식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를 철저히 실행하여 “경주의 최부자”라는 명성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아울러 9대 진사 12대 마지막 부자로 문파(汶坡) 최준(崔竣.1884~1970)선생은 이 곳 교촌에서 출생하여 일제시대 때에는 많은 독립자금을 대어 준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백범 김구선생 아래에서 독립활동을 하셨으며,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후학지도(後學指導)에도 힘썼고 오늘날 “영남대학교”로 통폐합 되는 과정에서 전재산을 헌납하여 지금은 그냥 이 집에서 살고만 있다고 귀뜸 해 주신다.
솟을 삼문(三門)을 나와 바로 옆의 “교동법주(校洞法酒)”를 만드는 공장은 문이 굳게 닫혀있어 볼 수 없으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이웃하여 “독립유공자 최완(崔浣)선생 생가”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합니다.
최완(崔浣. 1889~1927) 선생은 이곳 교촌에서 출생 했으며, 독립운동가 최준(崔竣) 선생의 아우이다. 1909년에 안희제, 이원식, 윤병호, 서상일 등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新民會) 계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堂)”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모진 고문 끝에 그 후유증으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이 후 1990년 나라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문이 잠겨있어 집밖에서 둘러보며 우측으로 돌아나와 약간의 둔덕위에서 주위를 조망(眺望)합니다. 뒷산은 낮은 둔덕으로 나무를 심어 조림(造林)하였고, 청룡(靑龍)쪽으로는 반월성의 끝자락이 어느정도 가리워져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백호(白虎) 방향에는 역시 비보림(裨補林)을 조성하여 잘 가꾸어져 있다. 앞으로는 지근한 거리에 남천(南川)이 좌에서 우로 휘감아 흐르며, 그 너머로 넓은 명당을 지나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에는 부봉(富峰:金星)이 여러개 보인다.
담장이나 정원에는 유월의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아늑하고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며, ‘민속찻집’에는 ‘고운님 오시는 길’이라고 씌여 있어 정감이 갑니다. 돌담을 따라 한바퀴 휘~ 돌아 나오니 큰길 바로 옆에는 최씨가의 “기와 가마터”가 복원되어있다.
차내에서 경주국립박물관, 반월성, 황룡사지를 멀리서 바라보며 다시 4번국도를 따라 골굴사 방향으로 신나게 달리다가, 지나는 길에 보문단지 잔디밭에서 휴식도 할겸 가져온 음식들을 잠시 나누어 드시고 다시 출발합니다.
답사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유익한 것이어서 모두들 동심(童心)의 세계로 돌아가서 얼굴에는 화기(和氣)가 넘쳐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슴니다.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6학년 7학년에 들어있으며, 일찍이 상계(商界)에 몸 담아서 각 지구별 ‘번영회 회장’을 역임하시고 ‘서문시장 발전과 활성화’에 많은 공헌을 하신분들로 봉사정신 또한 많은 분들이다.
구~불~ 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비탈진 길을 따라 달리는 기분(氣分)이며~ 6월의 녹음(綠陰)이 우거진 협곡(峽谷)의 경치는 그야말로 끝내줍니다 그려! ‘추령(秋嶺) 터널’을 지나 골굴사(骨窟寺)에 도착하니 시계는 거의 12시가 다 되어간다.
일주문을 지나 간이 주차장 한켠에는 ‘포대화상’과 ‘동아보살 상’이 세워져 있다. ‘달마석상’에는 성구(聖句)가 새겨져 있는데...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香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 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나무 석가모니불!
또 그 옆에는 보기드문 “동아보살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동아(冬兒)”는 설적운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던 1990년 겨울에 태어났다고 하며, 어릴적부터 새벽예불과 탑돌이 등 신도들을 안내했다고 한다.
평소 살생도 하지 않았으며 KBS, MBC, SBS, 외국 TV 등에 여러차례 방영되어 유명세를 탓고, 또 20여 차례 새끼를 분양하여 1200여만원의 수익을 얻어 사내(寺內) ‘대적광전과 선무도 대학’ 건립에 희사(喜捨)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불기 2554년(서기2010년) (음) 2월 15일 죽는날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으며, 절에서는 사후(死後) 49재를 올려주고 이날을 기념하여 매년 기제사(忌祭祀)를 모신다고 한다. 중국에 조주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허언(虛言)이 아님니다 그려! 오늘날 세인(世人)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슴니다. ‘부모에게는 봉양(奉養)할 줄 모르면서도 개는 업고 다니는 세태(世態)이니...’ 할(喝)!!!
다시 몇걸음을 오르니 좌 우에 2기의 금강력사(金剛力士)가 퉁방울 같은 두눈을 부릅뜨고 있어 잡귀(雜鬼)는 얼씬도 못하겠슴니다 그려! 아마도 천왕문(天王門)을 대신해서 세운 석상(石像)인가 봅니다.
연하여 마하지관원(摩訶止觀院), 일심당(一心堂), 종무소(宗務所)를 지나 높은 축대위에 세워진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이르니, “선무도 공연”이 진행중에 있다. “매일 2회 공연 월요일은 쉬고, 오전(AM) 11:30, 오후(PM) 15:30” 마침 공연시간에 맞게 도착하여 ‘선무도(禪武道)’를 볼 수 있어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1997년도에 “원효결서”의 저자 ‘미조 김중태’ 선생과 국내 많은 인사들이 함께 모여 1박 2일동안 수련했던 그 때보다 많은 발전과 홍보(弘報)가 되어서 인지 관람객이 넘치고 넘쳐남니다.
여러 동작들을 디카에 담으며 시연(試演)이 끝나고 많은 탐방객들과 기념촬영도 하신다. 감사의 정성을 표하고 우측 언덕으로 오르니 예 보던 ‘오륜탑(五輪塔)’이 지금도 여여(如如)합니다.
오륜탑은 청정법신(淸淨法身) 대일여래불(大日如來佛)을 상징하는 만다라(曼茶羅)로서 모든 덕과 지혜를 갖추었음을 뜻하여 오지륜(五智輪)이라고 한다. “밀교(密敎)에서는 물질계(地水火風)와 정신계(空)의 조화를 의미하며, 중생의 육신과 五大를 대응시켜 자기 몸안의 오처(五處)에 오륜(五輪)을 관(觀)하여 육신이 곧 법신(法身)임을 체득케 한다.” 아울러 탑신내에는 태국에서 모셔온 불사리(佛舍利) 3과(三果)를 봉안했다.
선채로 예를 올리고 대적광전 뒤를 돌아 마애불에 이르니, 천인단애(千仞斷崖)한 절벽에 거대한 마애불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오랜 풍화작용으로 마모가 심하여 여러 곳이 떨어져 나갔으며, 위쪽으로 유리 보호막을 설치하여 디카에 담기도 용이치 않슴니다.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은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 윤곽이 뚜렷하며, 귀는 커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백호(白毫)는 구슬이 없어 움푹하다. 잔잔한 미소에 굳게 다문 입술, 오른손은 떨어져 나가고 무릎부위도 손상이 심하여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작품으로 보기도 하고, 또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에는 12개의 천연석굴이 있다고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20개도 넘어 보이며, 크고 작은 석굴마다 산신각, 관음전, 지장전, 나한전, 약사굴, 칠성단 등 끝이 없슴니다. 골굴사(骨窟寺)는 1500여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원효스님의 열반지(涅槃地) 혈사(穴寺)로 추정하고 있다.
아울러 주지 설적운 스님이 1990년 이후부터 오늘날의 가람으로 중창했으며, 선무도의 총본산으로서 전통무예의 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마애불에서 내려다 보는 풍광은 참으로 장쾌하고 속이 다 시원합니다. 동해바다를 향해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산맥들이 산첩첩(山疊疊) 물겹겹 그야말로 중중포리(重重袍裡)다!
조심 조심 많은 돌계단을 나려와 도량(道場)을 걸어 나오니, 대부분의 전각들이 긴 계곡의 좌 우에 단순 배치되어 있어 전체 전각의 수는 상당합니다. 싱그러운 마음으로 6월의 짙은 숲 그늘을 걸어나와 감로수(甘露水) 한잔으로 목을 축이니 몸과 마음이 다 시원합니다. 더는 시간이 여의치 못해 ‘기림사’의 답사는 훗날로 미루고 감포읍내 수산시장으로 달려 시장끼를 달램니다.
점심후 봉길리 “대왕암” 방향으로 20여 분을 달려서 “이견대(利見臺)”를 잠시 답사합니다. 이견대(利見臺:사적 제159호)는 신라 문무왕(661~681)의 혼이 깃든 대왕암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문왕(681~691)이 즉위하여 호국용이된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그 다음 해에 감은사 앞 바다에 작은 산이 떠 내려왔다.
며칠 뒤에 왕이 그 산에 들어가 용을 만나 “검은 흑대”를 받았으며, 아울러 산에 있던 대나무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어 나라의 보물로 삼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피리를 불면 전쟁이 그치고 질병이 없어지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바람과 물결을 잦게 하는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연하여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周易)’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정자는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근래에 지은 것이다.
다시 자리를 옮겨 “대왕암”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바닷가에서 여러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 혹은 수중릉(水中陵)”으로 알려진 작은 바위산을 바라봅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의 대 위업을 달성하고 동해 바다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내가 죽거든 화장하여 동해 바다에 뿌려달라. 용이되어 동해 바다를 지키리라!”하는 유언에 따라 모셨다고 전해진다.
실재 대왕암(사적 제158호)은 한 변의 길이가 약 3.5m 되는 작은 연못 안에 길이3m, 폭2.2m 크기의 석관(石棺)이 놓여 있는데 사방(四方)으로 물길이 열려 있으며, “난디아바타라”라고 해서 만(卍)자 모양의 태을수(太乙水)가 흐르고 있다.
연하여 1997년 미조(彌照) 김중태(金重泰)가 지은 “원효결서(元曉訣書)”에 의하면... 이 모두가 우리 한민족의 미래와 인류의 운명과 후천세계를 이끌어 갈 천손족 “해도금묘진인(海島金卯眞人)”의 비밀을 동해의 수구(水口)인 문무대왕암 석실(石室)에 봉안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해, 스스로 파계해서 당시 서라벌 장안의 이목(耳目)을 가리기 위해 꾸민 권사(權辭)라는 것이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경주시청 기획실장이었던 한달조(韓達祚)가 문무대왕암의 뚜껑을 비밀리에 열어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석관 벽에 5장의 오석판(烏石板)이 있었는데 그 中 한 장을 꺼내 촬영해서 나온 것이 지금의 467자로 됀 “원효결서(元曉訣書)”이다.
한 장은 청와대에 보고하고(16자는 지움), 또 한 장은 윤태첨(尹泰瞻:역학자)이라는 친구분에게 전해져, 윤노인이 오랜세월 연구 하였으나 그 해답을 풀지 못하고, 그후 1980년 중반에 미조 김중태 선생에게 전해져 십 수년간 연구(硏究) 기도(祈禱) 끝에 1997년 “상,하 2권” 의 책으로 세상에 발표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문무대왕암의 모습은 백두산 천지(天池)와 흡사하고, 도끼 자루가 빠진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따님인 요석공주와 결혼한 원효스님은 무열왕의 사위요, 또 그의 아들 법민(30대 문무왕)의 매형이요, 스승이시다. 이런 인맥 속에서 신인(神人)이신 스님의 “원효결서”를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문무대왕에게 전하시니...
신의 문장을 받은 31대 신문왕(神文王)으로부터 146년이 걸려 42대 흥덕왕 2년(827)에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있던 “원효결서(해도금묘장)”을 문무대왕암((경주 양북면 봉길리)에 봉안 되었다.
본문에 “십구정미 시유세파(十九丁未 始有世播)”(60년*19정미=1140년), 827년으로부터 정확히 1140년이 지난 1967년 정미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니며... “고각분토 삼팔중분(孤角分土 三八中分)”(한반도가 38선으로 나누어 진다.)는 예견이며, “경자신축 남어난박(庚子辛丑 南於亂朴)”[1960년,1961년 양해에 남쪽에 박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킨다.(5.16혁명)]라는 대목에 이르면 기절초풍 할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원효결서 말미에 선천세계(先天世界)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자전과 공전을 통해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만, 후천세계(後天世界)는 지구의 축이 남북 일직선으로 서게 되어 사계절의 변화도 없는 온화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며...
또한 중국의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감숙성, 신강유오이자치구, 청해성, 내몽고자치구를 비롯하여 쏘련의 바이칼호 부근까지...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포함한 거대한 새로운 대륙이 생겨나 우리의 천손족(天孫族)인 한민족[(桓,韓.汗)民族]이 인류세계를 주도 해 갈것이라 하시니...
다가올 “후천세계”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간절히 요망(要望)된다 하겠슴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 하루 빨리 문무대왕암(文武大王巖)에 남아 있는 나머지 넉장의 “해도금묘장(海島金卯章)”의 비밀이 밝혀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다음 행선지인 하서리, 읍천리의 “양남 주상절리”가 있는 곳으로 달림니다.
한민족(桓民族)의 장래와 인류의 앞날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파계(破戒) 하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시고
동해의 수구(水口)에서 1,300여 년을 벙어리가 되시니
海島金卯眞人으로 다시 태어나셔 한민족을 이끌어 주소서!
양남면의 긴 터널을 지나 읍천리 일대의 주상절리(柱狀節理) 조망공원에 도착하니, 비교적 많은 답방객들이 붐빈다. 오늘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영향인지 가는 곳마다 비교적 한산하여서 조용한 답사를 하였다.
본래는 ‘읍천항공원’부터 출발하여 산책하는 것이 순서 이지만 원로회장님 내외분들의 답사를 고려하여 제일 마지막 ‘부채꼴주상절리’부터 역으로 탐방을 진행합니다. 입구에는 “대왕의 꿈 촬영지”라고 입간판(立看板)이 세워져 있으며,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참으로 장관이다!
모두들 이~야! 이~야! 하시면서 여기는 처음와 본데이~ 하시는데... 이럴 땐 괜히 기분이 우쭐하고 좋아서 잰걸음으로 앞서 나아갑니다. ‘부채꼴주상절리’의 아름다움과 탁 트인 동해바다의 시원함이 함께 어우러지니 막힌 가슴이 일시에 확 열리는 기분이라! 보는자는 느낄 것입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C 이상의 뜨거운 용암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과 접촉하는 하부와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된다. 빠르게 냉각하는 용암은 빠르게 수축하게 되어 그 표면에는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오각형 혹은 육각형 모양의 틈(節理)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냉각수축 작용으로 생긴 틈이 수직한방향으로 연장되어 발달하면 기둥모양(柱狀)의 틈(節理)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라 한다. 신생대 말기에 이 지역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은 흔히 관찰되는 수직주상절리는 물론, 경사지거나 심지어 누워있는 주상절리뿐 아니라 국내외 적으로 희귀한 부채꼴 주상절리와 같이 다양하고 독특한 주상절리들을 형성하였다. (이상 안내자료 참조)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해변을 따라 서서히 읍천항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대자연(大自然)! 크게 스스로 그러하다!”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출생한 우리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여 大自然을 닮아가고 있슴니다 그려!
‘포토존’과 ‘출렁다리’를 지나 ‘읍천항공원’에 이르니 차와 사람들이 넘쳐나고, 어촌의 담벼락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정박됀 고깃배들과 어우러지니~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으다.
6월의 긴 하루해도 어느 듯 기울어서 시계는 17시를 조금 지나있다. 귀갓길에 오늘의 마지막 답사처인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感恩寺址)’로 떠남니다. 주차장에 당도하니 우리 일행들 뿐이다.
텅~ 빈 넓은 대지(大地) 위에 동, 서 두 탑이 장중하고 상승비례감 있게 세워져 있다. 오전에 ‘골굴사’에서는 충만됀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 곳 ‘감은사지’에서는 공허(空虛)의 아룸다움을 만끽합니다!
감은사(사적 제31호)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 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완성한 절이며,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낸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게끔 금당(金堂) 밑을 물길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동서로 서 있는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은 높이가 13.4m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탑이며, 1959년에 서탑을, 1996년에 동탑을 해체 복원 하였는데, 이 때 화려하고 섬세한 ‘금동제사리함(金銅製舍利函)’이 나와서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었다.
또 감은사탑은 종래의 평지 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최초의 것이라 한다. 아울러 이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石材)로 조립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 양쪽에 우주(隅柱)가 있고 탱주(撐柱)가 3주씩 있으며, 지붕돌의 구성은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각기 따로 조립되어 있는데 모두 8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의 상륜부에는 1장의 노반석(露盤石)이 남아 있고 현재 약 3.9m의 쇠로된 찰주가 꽂혀있다.
두 탑을 배경으로 회원님들에게 단체 기념촬영을 해드리고 탑을 한바퀴 휘~ 돌아 나오니, 천년의 세월이 어제런 듯~ 불가(佛家)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이라)드니... 사실이 그렇슴니다! 억!!!
단기 4348년(서기2015년) 6월 7일
경주 최부자 고택 및 감포 일대를 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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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간 강녕하신지요?
지난 6월7일 "서원회" 답사여행의 후기를 올려봅니다~
벌써 6월도 중순에 접어드네요~
모든님들! 건강에 유의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람니다!
고문님덕분에 역사공부를 너무잘하고 갑니다 존경합니다^^.
경숙님이 다녀 가셨군요~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오늘의 위정자들이 깊이새겨듣고
육훈의 행동지침 명심하고 실천하도록 해야될것 같습니다.
긴장문 쓰시느라 수고많으셨고 덕분에 역사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보잘 것 없는 답사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추억을 되새긴다는 의미로 써 봅니다~
벽송님의 건강과 가내 행복을 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