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삼악산을 다녀와서!
오늘은 아름다운 산행동호회에서 유명대장님의 안내로
강원도 춘천시 서면과 신동면에 걸쳐 있는 삼악산을 오르기 위해
오전 여덟시에 집에서 출발 버스로 1호선전철과 7호선지하철 경춘선
전철을 이용하여 집결지인 강촌역에 도착하니 집결시간 5분 늦은 열시
사십오분 미리 도착한 일행11명과 합류하여 강촌식당차로 산행들머리인
의암매표소오에 가서 입산요금을 내고 정상 용화봉까지 오르던 길은
상원사 위의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중간지점부터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괴석(怪石)의 형태인 기암(奇巖)과 백년은 됨직하고 온갖 풍상을
다 겪은 형태의 고송(古松)들이 어우러진 험한 길을 올라가니
데크로 잘 짜여진 쉼터가 있어 날씨가 시계(視界)가 맑은 편이여서
산과 강의 대자연속에 인위적인 도시가 시야에 펼쳐지는듯 조망(眺望)
되었고 소양강은 1973년 댐을 건설하여 춘천을 아름다운 호반(湖畔)의
도시로 볼꺼리가 많고 곳곳에 쉼터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명승지가 되었고 인제군에서 발원하여 북한강 지류로 흐르다가 양평
두물머리에서 합류하니 중부권에 사는 수천만 사람들의 젖줄이란
생각을 하니 흐르는 소양강 물이 비단결같고 아스라히 카메라에 잡히는
호반의 춘천은 가장 살기좋은 도시로 부각되는 느낌을 갖게했습니다.
한 시간 이십분이면 서울에 올 수있는 수도권전철이 개통되면서
춘천의 상권이 타격을 겪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소비패턴이 변화
되어 어류는 삼척, 강릉, 속초 등의 동해산을 선호하고 육류는
횡성의 한우와 강원내륙에서 길러지는 닭으로 만들어지는
닭갈비 등을 선호하고 의류와 건축등의 내장재는 선택의 폭이
넓은 서울에 와서 구매를 하니 멀기만했던 춘천이 이제는
수도권의 신흥도시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데크 한 쪽에 자리펴고 앉아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배낭을 열어 먹꺼리들을 펼쳐 놓았는데 보리대장님도 많이
해오고 쥐띠방장 영지니님의 배낭(背囊)을 열으니 양도 푸짐한 진수
성찬이 구미(口味)를 돋구어서 옆사람의 구수한 숭늉을 얻어마셔가며
먹다보니 정작 내 배낭은 풀지도 않은 상태여서 미안한 마음에 술이며
김밥을 풀어놔도 누구 한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되짊어지고
내려오면서 쥐띠방 사람들 방장은 참 잘 뽑아놨네. 저렇게 많은 먹꺼리를
무겁게 지고 올라와서 넉넉하게 베풀어주는 마음이 고맙다는 생각을
하다가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내마음이 배부르게 해주니까
고마워 한다는 생각이 사내답지 않게 간사스럽다는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했답니다.
654m의 삼악산 정상의 용화봉에서 사진촬영을 하고선 오는
길에 흥국사를 경유하여 크고작은 폭포수가 흐르는 계곡으로
내려오는데 요즘 늦가을 비가 자주 와서인지 제법 물이 흐르면서
폭포소리가 요란한 물길따라 내려오노라니 오랜 세월 흐르는 물에
페어들간 협곡을 만나게되고 그 협곡내의 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낙차(落差)의 거리가 6~7미터 정도는 되보이는 등선폭포가
오늘 산행의 보람을 느끼게 했습니다. 정류소 앞에 도착한
식당차로 강촌역 인근에 있는 강촌식당에 와서 닭갈비와
신사임당 막걸리로 뒤풀이를 하고 가던길로 집에
돌아오니 저녁 여덟시 십분이었습니다...









소양강
소양강은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서
발원하여 춘천시에서 북한강에 합류하는 북한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강이다. 춘천시 신북면의 북한강
합류지점에 소양강댐이 1967년 4월 착공, 1973년
10월 15일 준공되었다. 지류중 인북천은
지방하천으로 북한 지역에서 발원한다.
소양댐
1967년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된 다목적댐이다.
높이 123m, 길이 530m인 한국 최초의 중앙차수벽식 사력
댐으로, 중앙에 진흙으로 심지를 박고 그 양쪽을 모래와
자갈만으로 쌓아올렸다. 소양강수력발전소는
연간 3억 5,300만kWh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완공 당시의 발전용량은 한국 총수력발전용량의
1/3에 해당되어, 국내 전력난 해소에 도움을 주었다.
홍수예보설비, 관개용수설비, 전산 시스템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 댐에서 발전된 용수는 하류에 있는 의암·청평·팔당
발전소에서도 이용된다.댐 건설로 조성된 남한 최대의 인공호인
소양호는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이 70㎢, 총저수량이
29억t, 유역면적이 2,703㎢에 이른다. 소양호는 민물고기의
어종이 다양하여 낚시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출처: [한국정신문화백과사전]









































소양강 처녀
반야월 작사
이 호 작곡
주현미 노래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 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노래 중 한 곡인
'소양강 처녀'는 1970년 반야월 작사, 이호 작곡, 김태희 노래의 작품으로 발표되었습니다.
1951년생이신 김태희 선배님이 19세때 다른 선배님들과 함께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하게 되는데
총 8곡의 수록곡 중 당당히 '소양강 처녀'가 타이틀 곡으로 선정되었지요.
이 앨범에는 나훈아, 차중광, 은수란 선배님 등의 노래들이 실려있습니다.
1970년 8월에 성음레코드를 통해 발매했던 이 앨범은,
발매 직후 대박을 예감한 제작진들에 의해 10월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다시 발표되는데요.
당시 신인 가수로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나훈아 선배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앨범 자켓으로 실어 홍보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예상대로 결과는 대히트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인 1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게 되지요.
김태희 선배님은 이 곡으로 1970년 연말 T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게 되기도 합니다.
1992년에는 가수 한서경 씨에 의해 리메이크 된 버젼이 크게 인기를 끌게 되는데,
1992년은 한국 전역에 노래방 붐이 일어난 해였답니다.
추세와 맞물려 노래는 더욱 대중의 애창곡으로 자리잡게 되고
1993년에는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신 김태희 선배님, 작사가인 반야월 선생님, 작곡가 이호 선생님 외에도
'소양강 처녀'와 관련해서는 한 분을 더 소개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소양강 처녀의 주인공으로 거론되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1968년 서울 을지로에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 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윤기순이라는 분은 이 곳에서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장차 가수가 될 꿈을 가지고 이 곳에 들어갔던 것이지요.
열정이 넘치는 젊은 작곡가들은 이 18세의 꽃다운 소녀에게 무료로 레슨을 해주고
도울 길을 함께 찾아주기도 했답니다.
고마움에 보답할 길이 없던 윤기순 님은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했는데,
여러 선생님들을 자신의 고향인 소양강에 초대하고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양강에서 민물고기를 잡는 어부였고,
고향집에서 매운탕과 토종닭을 대접하여 조금이나마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모임의 회장이었던 반야월 선생님은 그 곳에서 시상이 떠올랐고
이 후 그 때 느낀 감정을 옮겨 '소양강 처녀'의 가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 가사를 접하게 된 작곡가 이호 선생님은 본인이 작곡을 하겠다고 자청했고
노래는 당시 가수 지망생 중에서 김태희 선배님이 선택되었습니다.
보통 2절까지의 가사는 익숙하지만 3절은 웬지 낯선 느낌이 드실텐데요.
1997년 춘천시에서 소양강 처녀 노래비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야월 선생님이 3절을 추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곡은 2절로 되어있었지만 원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가사이니
정확한 기록을 위해서는 3절까지 부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따라부르시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져서
원래 3절로 되어있던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현재 소양강에는 소양강 처녀상과 노래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춘천은 서울에서도 가까운 관광도시이니
여행이 생각난다면 한번쯤 방문하여 소양강 처녀에 관한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2015-11-2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