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 시간이 아주 긴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한국적인 정서에서 '본전은 뽑았네'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때 단체 관란 영화로 보았던 <벤허>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작정하고 휴식시간을 배치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음악회나 연극에서 인터미션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경험해 보았지만 이 영화는 15분 정도를 헤아려 가며 관객의 생리적 현상과 허리뼈의 이완과 다리의 혈전 예방에 대한 배려를 드러내고 있다.
작년에 보았던 <퍼펙트 데이즈>의 분위기하고는 또 다른 느낌의 영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와 서사적인 연결 고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유대인 혹은 사회적 약자인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니까. 우리 사회의 상황이나 현재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지정학적, 경제적, 사회적 파장들과도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브루탈리즘이라는 것이 건축학의 사조에 해당하는 것임을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건축에 대한 무지함에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 부디 그 호기심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마멸되지 않기를! 호기심이 없는 인간은 죽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과 같이 기능과 핵심적인 요소에 집중하는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 작품으로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의 건물도 떠올릴 수 있다. 다른 많은 작품들도 있겠지. 바르셀로나에 가면 사람들이 꼭 찾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고딕적인 특징을 이어 받고 있다고 할 때 모든 건축이나 예술은 연속성과 단절성이라는 극점을 부동하고 있는 것이겠다.
아무튼 이 영화는 다소 우울하다. 건축을 담당하고 있는 건축가의 삶은 시대적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고통을 받고 있다. 개인은 상처받고 쓰러지고 사라지며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선 한 마리 사마귀의 저항과 같은 몸짓으로 자신의 영혼에서 토해 낸 재료로 무언가를 남긴다. 밀턴의 <실낙원>, 단테의 <신곡>,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카프카의 <변신> 등등.
제3제국의 히틀러는 바우하우스나 모더니즘적인 예술 건축을 퇴페적이라고 낙인 찍었고 유대인들과 집시들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도 데사우 출신으로 나온다. 헝가리에 살던 유대인으로. 그리고 그의 아내와 조카도. 그들은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과 내상을 나는 주인공을 통해서 본다. 프리모 레비가 동명의 시집 그리고 <구조된 자와 가라앉은 자>, <이것이 인간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주기율표> 등을 쓴 것은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엘리 위젤도 그러하고 파울 첼란도 그렇다. 빅터 프랭클은 또 어떠한가? 수많은 영화와 예술 작품들이 이런 경험의 반향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은 에스페란토어처럼 만국공통의 언어다. 한강의 작품이 세계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그렇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방>은 어떤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은? 같이 연관지어 보면 좋을 작품들이다.
그리고 건축과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서는 '시적 정의'라는 개념이 있다. <춘향전>에서 독자는 이 도령의 암행어사 출도와 춘향이의 행복한 삶으로 마무리된다. 독자는 누군가의 시선을 택하여 작품을 수용하게 마련이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이 역사적 서사에서 우리는 누구의 논리와 시각을 따라 읽어나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많은 사람들의 언행을 통해서 가해자와 피해자, 파괴자와 수호하려는 자, 정직한 자와 견강부회하는 자,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자와 초지일관하는 자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인생은 길게 보아야 한다. 죽어서 이기는 자가 있고 살아서 죽은 자가 있는 법이다. 두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