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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시인은 1958년 충남 부여 태생으로, 1983년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경쾌한 유랑』은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으로 2011년 3월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출판했습니다. 이재무시인의 시의 경향은 자아와 타자(세계)와의 일체화라는 서정시의 일반적 정의에 부합됩니다. 시인의 오랜 연륜과 깊은 성찰이 한편 한편의 시속에 무리없이 스며들어, 편안하면서도 넉넉하고 깊은 시의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나무 한 그루가 한 일
강물 내려다보이는 연초록뿐인 언덕 위의 집
홀로된 노인 과실수 한 그루 구해 심으니
바람 몰려와 우듬지 흔들다 가고 햇살 잎잎마다 매달려 잉잉거린다 가지 끝 대롱대롱 빗방울 무수한 벌레들의 남부여대 껍질 속 세 들어 살고 꽃 피자 벌 나비 붐비고 구름 커튼 두껍게 그늘 치고 불콰한 노을 귀가에 바쁜 걸음 문득 멈추게 하고 이슬 내린 밤 열매의 소우주에 둥지 틀다 가는 별과 달
나무 한 그루 불쑥 들어선 이후
강물 눈빛 더욱 깊어지고
갑지기 살림 불기 시작한 언덕
부산스레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돌로 돌아간 돌들
돌 속으로 들어가 돌과 함께
허공 소리치며 날던 때가 있었다
번쩍이는 것들,
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을 부수고
헬멧 만나면 푸른 불꽃 피워 올리며
맹렬한 적개심으로 존재를 불태웠던
질풍노도의 서슬 퍼런 날들이 가고
돌들은 흩어져 여기저기 땅속에 처박혔다
돌 속에서 비칠, 어질 사람들이 나오고
비로소 돌로 돌아간 돌들
저마다 각자 장단 완급의, 고요한
풍화의 시간 살고 있다
말 없는 나무의 말
이사 온 아파트 베란다 앞 수령 50년 오동나무
저 굵은 줄기와 가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성진 가락과 음표 들 살고 있을까
과묵한 얼굴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마주 대하고 있으면 들끓는 소음의 부유물 조용히 가라앉는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과묵한 그에게서 그러나 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나도 모르는 전생과 후생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구업 짓지 말라는 것과 떠나온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인과에는 반드시 응보가 따른다는 것을
옹알옹알 저만 알아듣는 소리로 조근거리며
솥뚜껑처럼 굵은 이파리들 아래로 무겁게 떨어뜨린다
동갑내기인 그가 나는 왜 까닭 없이 어렵고 두려운가
어느 날인가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밤은
누군가 창문 흔드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보니
베란다 밖 그가 어울리지 않게 우람한 덩치를 크게 흔들어대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 무슨 말 못할 설운 까닭으로
달빛 스산한 밤 토방에 앉아 식구들 몰래 속으로 삼켜 울던 아버지의 울음을
훔쳐본 것처럼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예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시치미 딱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데면데면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생활에 지고 돌아온 저녁 그가 또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참 이상하다 벌써 골백번도 더 들은 말인데
그가 하는 말은 처음인 듯 새록새록,
김장 텃밭에 배추 쌓이듯 차곡차곡 귀에 들어와 앉는 것인지
불편한 속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그의 몸속에 살고 있는 가락과 음표 들 절로 흘러 나와서
뭉쳐 딱딱해진 몸과 마음 구석구석 주물러주고 두들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문신
복도는 온몸이 귀가 되어
신발이 내는 소리의 미세한 결들을 본다
물기 빠져나간 통나무 같은 복도의 몸에
자취 남기며 무수히 오가는 신발들은 알까,
문 나선 신발들이 문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홀로 우는 것들 중에 복도가 있다는 것을.
또 그런 밤에 복도의 식솔이 되어버린,
어제의 신발들이 남긴 낡은 소리들도
들썩들썩 도대체 바깥이 궁금하여
복도의 천장 열고 나와
바람 부는 대숲처럼 수런, 수런댄다는 것을.
그러다가 희미하게, 신발 끄는
소리의 빛 보이면 재빠르게 표정 지워내고
저를 무두질해오는 신발의 무게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을. 딱딱해지는 복도가
또 아프게 몸 열어
날 선 소리 하나를 끌어안는다
사금파리가 지나간 유리의 표면처럼
늙은 근육에 태어난 문신이 아프다
눈
찬비에 젖은 비석처럼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눈
비 다녀간 강물처럼 불어난 생의 슬픔을 글썽대는 눈
풍경 담은 호수처럼 깊어지는 눈
사금파리로 창 긁는 소리 연실 뱉어내는 연인의 눈빛 앞에서 바람 만난 촛불로 일렁대는 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숯불처럼 맹렬하게 적의로 불타는 눈
잘 익은 여자의 관능 게걸스럽게 훔쳐 먹으며 검불 삼킨 듯 붉게 충혈되는 눈
혀보다 먼저 음식에 손을 대는 눈
정당한 권위 앞에서 머루알처럼 순해지는 눈
거짓말 애써 감추려 커서처럼 깜박거리는 눈
들킨 비밀로 놀라 동자를 지우고 눈 밖으로 흘러나올 듯 흰자위가 번지는 눈
맛보고 소리 내고 냄새 맡고 느끼는 눈
이 능청맞고 뻔뻔하고 사악하고 변덕스럽고 천연덕스러운 데다 깊고 솔직하고 겸손하고 재애롭기까지 한 눈 감고 잠을 청하는 밤,
망막 속의로 외화의 자막처럼 숨 가쁘게 지내온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술이나 빚어볼거나
올가을엔 만사 제치고
내 고향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나 가서
철없던 유년 소풍 갔다가 보물찾기로 받은
호루라기 종일 불다가 잃은 뒤로
빛과 색 더욱 무성해진 풀밭에 빈 항아리로 누워
산그늘 덮고 한 달포 자다 깨다 하면서
저 잘난 세월에 농이나 걸까
그러다 여우비 내리걸랑 고스란히 아껴두었다
한량 같은 구름 몇 살 오른 별 몇
동동, 동치미처럼 띄워놓고
산달 앞둔 여자 둥근 배 같은 달도 푹 담가 띄우고
떼로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삼태기로 쓸어 담아
꾹꾹 눌러 쟁이고
오명가명 수박씨인 양 툭툭,
내뱉는 누룩 내 나는 사투리도 몇
함께 절여서 도수 높은 술이나 빚어볼거나
명리에 밝은 샌님들 불러들여
인사불성될 때까지 대작할거나
펜에 대하여
마른 땅 파 들어가는 삽이여,
묵은 논 갈아엎는 쟁기여,
고랑 타고 앉아 풀 매는 호미여,
돌멩이에 날[刀]찍혀 우는 쇠스랑이여,
이마에 한 톨 두 톨 돋는 땀이여,
경작의 노고보다 헐한 소출이여,
백둔정방 요양원에서
늦은 아침 기척에 놀라 두근거리는 울퉁불퉁한 산길 아내와 내외하지 않고 오른다
산수유나무 가지마다 통통 물오른 젖 활짝 드러내놓고 발칙하게 흔들어대는 농염을 아내는 처음인 양 반색하며 호들갑 떤다
오래전 보이지 않는 꽃 속에 무덤 파고 들어가 누운 사내가 있었지
뵈는 꽃은 물질이므로 누구라도 그 속에 들어가 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산달의 나무가 전력투구로 피운 꽃송이 송이 그러나 꽃의 졸업이 모두 열매로 새 학년을 맞는 것은 아니다
그사이 아내에게는 쉽게 감동하는 버릇이 생기고 웃음도 많이 헤퍼졌다
열심히 사는 것과 안달하는 것은 다르다 안달을 배웅하고 난 뒤 자연에 자주 마중 나가는 아내의 몸에서 산더덕 내가 훅, 끼쳐왔다
세상에는 존재만으로 흔혜 베푸는 것들이 있고 새끼같이 귀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마음 앓는 나로부터 몸 앓는 아내까지는 손 뻗어도 가닿지 못하는 거리가 있다
이것은 간절함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몸과 몸 간의 거리와 몸과 마음 간의 거리와 마음과 마음 간의 거리를 어찌 셈본으로 측량할 수 있으랴
시간의 텃밭에서 자란 관계의 풋것들은 서로의 발소리에 얼마나 민감했던가
계곡 타고 흐르는 물줄기로 빗자루 엮어 알뜰히 쓸어낸 귀의 골목 속으로 갓 태어난 말랑말랑한 말들 뒤뚱뒤뚱 걸어 들어온다
꽃들의 향기 깔깔깔 박수 쳐대며 허공으로 산개하고 있다
雪夜
눈 내리는 겨울밤
담배 한 대 피우고
동치미 한 그릇 뚝딱 비우고
까칠까칠한 얼굴 마른 손으로 거푸 쓸어내리고
창문 열었다 닫고
들숨 날숨 길게 마셨다 내뿜고
갱지 한 장 꺼내
물컹물컹한 말들 써본다
봉해놓은 묵은 서랍을 연다
몽당연필, 부러진 양초, 향나무 한 토막, 소인 찍힌 편지 봉투, 미완성 초고 시편, 쓰다 만 연애편지, 고장 난 손목시계, 촉 없는 만년필, 녹슨 못, 세금 고지서, 고인된 선배와 함께 시골 간이역 배경 삼아 찍은 흑백사진, 마른 꽃가루
요술 상자인 양 어제가 불쑥불쑥 민얼굴 내밀어온다
험한 잠을 자는지 아내의 잠꼬대 소리 요란하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 녀석
덮어준 이불걷어차며 잠이 달기만 한데
자정 너머의 시간 새하얗게 덮으며
분분분 눈은 내리고
내려서는 층층층 쌓이는데
마음의 국경 지대 배회하며
오래 굶주린 적막이라는 짐승,
부욱북 광목 찢듯 하늘 찢는 울음소리 요란하다
무중력 저울
그는 달고 재는 일로 세상 이치 궁구하던 자
꼼꼼하게 저를 다녀가는 세세한 차이들
눈금으로 읽어내 존재들 가치를 증명해왔다
슬쩍 바람이 몸 앉기만 해도
파르르 진저리치며 파동 보이던,
바늘 촉수를 누구라서 감히 눈속임할 수 있었겠는가
경중에 따라 위계 매겨온 냉혈한
무게들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해왔다
그렇게 평생 판단하고 재단하는 일로 살아온 그가
어느 날 문득 중심축 잃고 난 뒤
기관들 신경 줄 끊어지고 감각들은 몸을 빠져나갔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애써 지켜온
추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스스로 부인하였다
생에 위반과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무게의 차이는 가치의 서열일 수 없으므로
기능 상실한 추를 떼어낼 것
세계 안의 편재하는 사물은 각자 저마다의 무게로
고유한 최대치의 절대성을 지녀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무게의 이력들을 더 이상 개관하지 말 것
그리하여 그렇게나 많이 주렁주렁 길고
무거운 전력 담은 벽보와 전단지 인생들의 발길
끊어지고 철저히 버려진 채 그는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추수
끝난 벌판의 검불처럼 속진의 셈본으로부터
벗어나 생애 처음으로 무력한 자유가 주어졌다
저녁 산책
숲 가운데 앉아 서산낙일 바라다본다
저곳은 내 미래의 거처
누군가 부르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밭 일궈 골라낼 돌 아직 수북한데
벌써 홑이불 되어 고랑 덮어오는 산그늘 서늘하다
삶은 여윌수록 두껍게 죽음을 껴입는다
달군 쇠처럼 뜨겁던 속도 다 한때,
불 떠난 굴뚝처럼 식어가는데
그토록 오래 떠돌았으나
결국 나 또한 붙박이 나무에 지나지 않았던 것
맨살 추워 보이는 건초들아
너희도 사랑 잃고 추위 떨며
신음처럼 낮게 노래 불러본 적 있느냐
오고 가며 요란한 것들아,
사람의 한평생
산밭 산개한 자갈 두어 삼태기 골라내는 일밖에 무엇 있으랴
내 몸속에는
두 마리 서로 다른
짐승과 동물이 산다
그러나 이들이 사이좋게
이웃하며 산 적은 없다
순종이 안에서 한가롭게 어슬렁대면
야만은 밖에서 갈 데 없이 배회를 하고
광기가 저 홀로 미쳐 날뛰면
복종은 천애 고아가 되어 눈치만 본다
개와 늑대
이 오랜 유전의 숙명을 어쩔 수 없다
사랑의손길에 길들여진
순한 귀와 탐스런 꼬리
분노의 발길질에도 순응을 모르는
성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
내 낡은 집 속에는
도무지 양보를 모른 채 으르렁대는
두 마리 서로 다른
인내와 충동이 산다
간절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주름진 거울
거울 속 굵게 팬 주름들 곁,
갓 태어난 잔주름들
어느새 일가를 이루었구나
저 굴곡과 요철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만든 것
주름 문장을 읽는다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눈에 거듭 밟히는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만지면 촉촉이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 소리가 있다
이마에서 발원한 주름 물결
번져서 온몸을 덮으리라
시소의 관계
놀이터 시소 놀이하는
아이들 구김살 없이 환한
얼굴 넋 놓고 바라다본다
저 단순한 동어반복 속에
황금 비율이 들어 있구나
사랑이란 비율이 만드는 놀이
상대의 무게에 내 무게를
맞출 줄 알아야 한다
엇나가기 시작한 관계들이여,
놀이터에 가서 어린아이로
시소에 앉아보아라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들은
그러자는 약속, 다짐도 없이
서로의 무게를 받들 줄 안다
수평선
수평은 고요가 아니다
수평은 정지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선 안팎 넘나들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격렬한 몸짓,
소리 없이 포효하는 함성을
저, 잔잔한 수평 안에는
우리가 어림할 수 없는
천연의 본성이 칼날을 숨긴 채
숨, 고르고 있는 것이다
저 들끓는 정지와 고요가
바깥으로 돌출하는 날
수평은 날카롭게 찢어지리라
제 속 들키지 않으려
칼날의 숨 재우고 있는
저 온화한 인품의
오랜 침묵이 나는 두렵다
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
일요일 밤 교복을 다린다
아들이 살아낼 일주일 분의 주름
만들며 새삼 생각한다
다림질이 내 가난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제의 주름이 죽고 새로운 주름이 태어난다
아하, 주름 속에 생활의 부활이 들어 있구나
아들은 내가 다려준 주름 지우며
불량하게 살아가리라
주름은 지워지기 위해 태어나는 것
주름을 만들며 나를 지운다
저녁, 교정에서
등나무 벤치에 앉아 시들어가는 초가을
저녁 해 바라다본다 산에서 흘러내려온
그늘 발등 위로 출렁, 출렁거린다
서른 해 전 병든 노모 두고 입소해야 한다고
느타리버섯처럼 쓸쓸히 웃던 친구는
끝내 캠퍼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등과 어깨 말없이
두들겨주었던 그 자리엔 새 주인들이
눈부신 얼굴로 앉아 이어폰 귀에 꽂고
어깨 흔들며 발장단 치고 있다 세상은
의지와 상관없이 요동치며 흘러갔지만
연연해하거나 노하지 않기로 한다
그사이 연륜 배인 줄기와 가지
그늘의 평수도 훨씬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저 적막의 차일 속으로 얼마나
많은, 부은 마음들 다녀갔을 것인가
먼 곳에서 천둥처럼 들려오던 각혈의
기침 소리로 울컥, 생목 가래톳 돋던
무수한 밤들 뒤로 저렇듯 오늘의 벤치는
몰라보게 환해진 것 아니냐
방언 같은 말들 핑퐁처럼 주고받으며
마냥 즐거워하는 저 푸른 생활 속에도
언어 바깥의 내막들은 잠복해 있을 것이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시들어가는 초가을
저녁 해 따라 등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걸어가는 훗날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직과 수평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 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랑의 수평도
마음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웃음의 배후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밥 먹으면서 풉풉 길 걸으며 낄낄
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
수업하다가 허허 차 타면서 헤헤
잠자다 깨어 웃고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죽여 웃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몸에 난 사만 팔천 개의 구멍을 열고
비어져 나오는 웃음의 가래떡
찡그리면서 웃고 이죽거리며 웃는다
웃는 내가 바보 같아 웃고
웃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
이렇게 언제나 나는 가련한 놈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볼펜이 웃고
웃음의 인플루엔자에 전염된
꽃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애완견과 밤 고양이가 웃고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웃음이 장판 무늬들
그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묵언의 빛깔
- 정림사지 오 층 석탑에 부쳐
부소산 에돌아가는
강물 퍼서 더운 몸 식히고
탑돌이하며 천년 묵언 듣는다
흐르는 물 소리쳐 울게 한,
마음의 냇가 솟은 돌들의
뼈아픈 시간들을
탑신 흘러내려온 그늘에 담근다
항아리속
오래 묵힌 간장 같은
적막, 먹빛으로 번진다
샛강
꽁꽁 얼어붙은 샛강
크고 작은 돌들 무수히 놓여 있다
먼저 다녀간 누군가들이 던진 돌들이리라
강은 매번 얼 때마다 저렇듯 팔매질을 당한다
돌을 부르는 차고 딱딱한 것들
날아온 돌 은빛 강철 몸으로 튕겨내면서
감춘 제 속 보여주지 않는 강
간류에서 벗어나 유속 잃은 뒤
물고기 한 마리 품지 못하고
결빙으로 존재 증명하지만
입춘 경칩 지나 활짝 봄 열리면
지독하게 냄새 풍기며 백일하에 본색 들키고야 말
샛길, 샛길로만 파고드는 강
맑은 물은 바닥을 감추지 않는다
이십 년 전 홍천강에 풍덩 빠져서는 속진을 벗고 천진과 무구를 즐기던 중 그만 귀인으로부터 하사받은 손목시계를 물속에 빠뜨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지 우리가 논 곳은 물가였는데 시계는 물살에 휩쓸린 탓인지 강 가운데 놓여 있었다. 물이 맑지 않았다면 아무리 눈이 밝은들 어찌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주인의 심사와는 하등 상관없이 시치미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정좌한 그 자를 꺼내기 위해 눈짐작만으로 얕아 보여서 성큼 들어섰다가 어른 키보다 깊은 물에 그만 와락 감겨 목숨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지금은 고물이 되어 서랍 속에 처박힌 채 무 시간을 살고 있는 그 자를 어쩌다 늦은 밤 대면하는 날이면 홍천강 그 세 모래와 눈이 부시도록 투명한 물이 눈에 거듭 밟혀온다.
흐린 물은 바닥을 감추지만 맑은 물은 바닥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바닥만으로 깊이를 어림할 수는 없다
클릭
햇살 가지에 와서 클릭,
클릭할 때마다 수피 뚫고 나온
연초록 이파리들의 부리
콕, 콕, 콕 허공 쪼아대고
햇살 꽃나무에게로 와서
자판 두들겨대니 복제되는
꽃말, 꽃 문장
천방지축 날뛰는 방향(芳香)
자글자글 몸속에서 끓는다
푸른 거처
나무 속으로 내 사랑 들어갔네
나무 속으로 들어간 내 사랑
잎으로 돋고 꽃으로 피어나
사계를 살았네
나무 속에는 푸른 방이 있고
나무 속에는 푸른 마당이 있고
나무 속에는 푸른 창이 있다네
어느 날은 서럽게 울고
어느 날은 환하게 울고
어느 날은 명주 올보다 더
가늘게 귓속 골목을 파고드는 노래
저 나무 속 내 미래의 거처엔
오래전 내 곁을 떠나간
사랑이 살고 있다네
경쾌한 유랑
새벽 공원 산책 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 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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