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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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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았다.(1977년 입영 신체검사 164.5센티)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부터 키가 큰 편에 속했고(1925년생, 170센티) 동생들도 작지 않았는데 나만 그랬다. 초딩 6년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가서 자취를 하는 바람에 영양 상태에 문제가 있었을 게 확실하다. 특히 중학교 때 작았으니 사춘기가 늦게 온 것도 이유가 된다. 다행히 고딩 때 해마다 6센티씩 커서 3년 동안 18센티가 자랐고 재수생 때 2센티가 더 컸다.
소년 시절의 나는 '결핍'과 '희생' '절약' 같은 단어들을 뇌리에 바리게이트 치고 살았다. 밥을 너무 굶은 것도 그 이유이다. 특히 야간 중학생 시절, 연탄불이 꺼지면 형과 누나가 그냥 밥을 굶은 채 학교에 갔고 나는 오후 3시 30분 등교할 때까지 쫄쫄 굶으며 시간을 보냈고 또 학교에서도 빈 곱창을 다독이며 수업을 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안 만큼 몸에 대한 우를 범했으니 업보를 받은 셈이다.
교실마다 나보다 작은 벗들이 몇몇 있긴 했으나 3월 초 번호 매길 때마다 ‘몇 번이 될까’가 두근두근 궁금했다. 더러는 운동화 뒤꿈치에 종이를 구겨 넣어 조금 큰 척하며 뒤로 서기도 했다. 그래서 5번이 넘으면 안심을 했고 그 아래로 떨어지면 기가 죽기도 했다.
1번도 한 적이 있다. 줄을 가늠해보니 3번쯤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보다 4센티쯤 작은 아이가 '딱 한번이라도 1번을 면해보고 싶다'며 나에게 사정을 했다. 그래서 '아휴, 그냥 2번이라도 해야지' 하면서 바꿔줬는데 갑자기 1번 아이가 밴드부에서 부른다며 튀어나가더니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 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출석부만 들면 '언제 부를까'하며 조마조마했다.
고3 때는 14번을 했으니 드디어 둘째 줄로 진줄한 것이다. '3214' 그렇게 3학년 2반 14번으로 두 자리 숫자로 교복 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또 1번이 되었다. 국문학과에다 '강 씨'이니 교련 시간마다 가장 먼저 부르는 바람에 출석부 긴장으로 두근두근했다. '가 씨'와 '감 씨'가 없었으니 무조건 내가 1번이 되었다.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키 순서로 번호를 먹인 것이다. 지금은 심각한 인권 침해로 금지된 규정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일까, 작은 애들은 작은 애끼리 친했고 큰 애들은 큰 애끼리 노는 경우가 많았다. 또 있다. 작은 애들은 교실 앞문으로 들어갔고 큰 애들은 교실 뒷문으로 들어갔다. 작은애들은 초딩처럼 장난을 좋아했으나 큰애들 중에는 벌써 연애 편지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부류도 있었다.
국민학교 때는 생년월일 순으로 번호를 먹였고 대학 시절에는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주었다. 그리고 가끔은 스승의 취향처럼 성적순으로 번호를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고딩 시절에는 대개 키 순서였고 아이들은 몇 칸이라도 뒤로 줄을 서고 싶어했다.
가장 작은 벗이 1번이고 가장 큰 벗이 60번일 경우 내 번호 평균이 6번 정도 되었으니 평균 10% 아래 번호의 단신短身에 속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엄칭이 작은 건 아니고 수시로 작다는 소리를 평생 달고 산 몸이다. (1976년 남자 평균 신장 167센티, 2024년 174.5센티)1975년 경찰이나 헌병을 뽑을 때 165센티 이상으로 경계를 그었으니 나는 아슬아슬하게 탈락이거나 살짝 까치발 서서 통과되었을 수도 있다. 그 대신 사관학교나 ROTC 장교 기준은 162센티 이상이었으니 통과가 된다. 그러니까 1956년 생으로 164는 작긴 해도 아주 작은 키는 아니다. 지금은 청년들의 평균 신장이 7-8센티 더 늘었으니 규정이 몇 센티 이상 올라갔을 것이다.
중3 때 번호는 3번이었다. 1번이 박종렬이고 2번이 조의연이고 내가 3번이었다. 그러다가 조의연이 자퇴를 하는 바람에 내가 두 번째로 불리게 되었다. 영어 시간에는 한 명씩 스스로 영어 번호로 소리치며 출석을 체크했다. 종렬이가 “완.”하면 나는 “투 결 쓰리.”하고 짧게 끊으니 영어님께서 "쟤처럼 씩씩하게 소리치라." 칭찬도 했었다.
그 다음으로 “훠.”“파이브.”하다가 “식스티 원.”으로 끝나곤 했다. 그렇게 조의연이 사라졌으므로 박종렬이 짝꿍처럼 친해졌다. 중딩 시절, 고양시 어디쯤 벗의 집에 찾아가면 키가 더 큰 남동생이 있었고 (나도 그랬지만)먹머루처럼 눈빛이 고운 여동생이 생글생글 웃었다.
종렬이는 키가 작았지만 힘이 세었다. 나도 힘이 세어 키의 중간 번호인 30번 이내에서는 별로 져본 적이 없는데(중학교 때가 신장과 물리력의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시기임.) 그는 확실히 나보다 강했다. 펀치가 좋았고 기세도 약하지 않아 눈빛에서 광채를 뿜기도 했다. 어느 날, 서로 주먹 장난을 쳤는데 그의 펀치가 옆구리에 닿았다. 그 순간 숨을 못 쉴 정도로 아팠지만 체면상 태연스레 웃어주었다. 그래서일까, 그후로도 늘 붙어 다녔지만 몸싸움 장난은 가급적 피했던 것 같다.
시내버스 안내양을 하는 그의 누나를 만난 것도 특별한 스토리이다. 어느 날 야간 수업을 끝나고 부랴부랴 올라탔는데, 차장 누나가 자꾸 교복 입은 종로통 밤거리 학생들을 기웃기웃 보는 게 뭔가 찾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나에게.
"너도 중동이니?"
"네."
"종렬이 아니?"
"네."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되어 이따금 운좋게 그 버스를 타면 차비를 받지 않는 즐거움이 짭잘했다. 그리고 원효로에서 무교동까지 노닥거리며 오는 시간이 그리도 행복했다. 언젠가 몰래 버스표 열장을 찔러주어서 그대로 종렬이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나에게 수고비로 한 장을 줘서 그 표를 들고 학교 앞 포장집에서 오징어 튀김으로 교환해서 먹기도 했다.
이따금 키 큰 벗이.
'느넨 왜 그리 작으냐?"
슬쩍 놀리면.
"짜샤. 너흰 사춘기가 빨리 온 만큼 빨리 죽게 될 거야. 몸의 회전 속도가 빠르다는 얘기거덩."
맞받아치는 순발력도 발휘했다. 실제로 그런 줄 알았다. 몸의 발육 순환이 빠른 만큼 노화도 빨리 오게 되므로 늦게 크는 만큼 오래 사는 줄 알던 중딩시절이었다.
그가 수송공고로 진학하면서 몇 차례 만나다가 스무 살 이후 한동안 본 적이 없었는데.(그에 대한 글은 성장소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작은숲)』에 여러 차례 기술한 바 있다.)
15여 년 전쯤 어느 날(그러니까 졸업 후 30년 후),
그가 아내와 함께 불쑥 공주에 찾아오는 바람에 30년 만에 재회를 했으니 놀라운 사태이다. 겔로퍼를 끌고 등장했고 일산에서 금은방을 한다고 했다. 키는 여전히 크지 않았으나 단단한 대추방망이 몸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예뻤고 그의 꽃미남 얼굴도 드라마처럼 화사했다. 금은방은 ‘개점 휴업처럼 장사가 안 되지만 전시된 물품을 모두 팔면 아파트 몇 채 값’이라고 했다. 얼마 후 인형 같은 딸 셋이 모두 시집을 갔는데 두 번 정도 참석하면서 중학교 동창 몇몇을 오랜만에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어리둥절했다. 큰 종합 병원에서의 수술 도중 의료 사고라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더 이상 파고 들지 않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고등학교는 1차를 떨어지고 후기로 들어갔다.
고1 때 내 번호는 5번이었고 6번은 이성근이었다. 그는 기타 치며 노래를 잘 부르는 낭만파였다. 소풍 오락대회 때 '빈대떡 신사'를 불러 1등상을 받았지만 평소에는 'Beatful sunday'나 'mother of mine' 'you mean everything to me' 같은 팝송도 잘 불러 나를 뭉클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폭설이 쏟아지는 날에는 창밖을 보며 노트에 "내 심장이 유리창을 때린다."는 시도 쓰는 문학 소년 심성도 보였다. 이상하다. 눈발이 유리창을 때리는 건 이해가 가는데 심장이 유리창을 때린단다. 그게 의인화이고 사물의 눈으로 시인을 보는 거란다. 시적 화자와 배경의 교환 배치이니 그게 시적 기법의 하나가 되겠다. 그를 보며 나도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는 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숙맥이었다. 그는 내가 전혀 모르는 ‘여자의 몸’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다가 중간에서 딱 끊어서 침을 바싹바싹 마르게 만들기도 했다. 도봉산 소풍 때 둘이만 계곡에서 따로 도시락을 먹으면서.
"사랑을 하면 키스도 할 수 있다."
나는 설레설레 도리질쳤다. 그건 졸업 후 대학생에게나 가능한 거지만 그것도 영화에서 나오는 스크린일 뿐이다. 나는 결혼 첫날 밤까지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강변했다. 네가 처녀와 결혼하길 원하듯 너도 숫총각으로 첫날 밤을 보내야 한다. 따라서 첫날 밤은 '가장 순결한 영혼과 영혼끼리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남산도서관이나 마포도서관도 함께 다니면서 나에게 수시로 성교육 이론 공부를 시키며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 키스를 한다면 너와 절교하겠다' 그렇게 마음만 먹었으나 토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가끔.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는데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집안이 기울었어.”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고향 서해안 바닷가 풍경을 들려주며 외로움을 나누려고 했다. 내 고향 서해안에서는 행복했으나 서울 유학 이후의 고독한 감정을 누구에겐가 발설하고 싶었으므로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원효로 자취방에도 여러 차례 데리고 올 만큼 친했으나 그가 공주를 아주 열심히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비감의 감성이 가장 비슷했던 것 같다. 졸업 후 각자 다르게 진학하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고3 졸업반 직전 열 명 가량이 ‘정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다. 정우회는 앞뒤 번호가 섞여 큰놈과 작은놈의 합체였는데 비교적 착하고 공부를 그럭저럭 조금은 잘하는 무리들의 모임이었고 나는 그 공간이 좋았던 것 같다. 언제부터였나, 그들도 만나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SNS로 연락이 닿아 역시 수십 년 만에 그 멤버들을 보게 되었다. 사춘기 럭비공들이 장년의 모습으로 변했었고 거기에서 성근이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조금 늙은 모습이었지만 나를 엄청 반가워해주면서 심정적 교류가 특별히 가까워졌다. 모임 술자리가 끝나고 각자 귀가 지하철을 탈 때 그의 동네로 옮겨서 1대1 따로 마신 기억도 있다.
그는 육군 소령으로 제대했는데 '아내가 수술을 두 차례 하면서 퇴작금을 모두 날렸다'고 토로했다. 딱 하나, 며느리의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볼 때가 그나마 행복하다 했던가. 고층건물 유리창 닦는 일당직으로 살아간단다.
어느 날 남해안 진도에서 석달살이 중인데 그가 갑자기 전화를 했다.
“내일 네가 사는 공주에 가서 한 잔 마시고 싶다.”
“어쩌나, 나는 요즘 진도에서 살거든.”
그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유리창 일당직 호출이 대폭 줄었다며 불안감을 나타내었다.
"너 같으면 30대를 쓰지 나처럼 70이 다 된 늙은일 쓰겠냐?"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올까 말까' 갸웃갸웃 포기했다. 공주는 고속버스로 두 시간 이내 도착이 가능하지만 남녘 땅 진도는 그보다 두세 배 이상 걸리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왠지 목소리에서 힘이 없다는 느낌으로 전화를 끊고서도 마음이 심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열흘 뒤 그의 부음訃音을 받았으니 분하고 어리둥절한 소식이다. 사망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외로움도 있었을 거라는 후일담이다. 여기서는 생략하고.
중고딩 시절 두 명의 짝꿍이 먼저 떠났다는 부음을 두어 달 사이에 모두 남녘의 작가촌에서 받았다.
‘너무 빨리 떠났다’는 생각과
‘이제 하나씩 떠날 연륜이 되긴 했나?’
‘왜 하필 소싯적 짝꿍들이 하늘나라로 떠났을까’
'사춘기가 빠르게 왔던 애들이 빨리 죽는 게 아니구나' 등등 온갖 상념으로 뒤숭숭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허한 감성이 더 깊어가지만,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리고 잊으려고 노력하겠다.
(담양 ‘글을 낳는 집’
나를 보고 전혀 짖지 않는 어미 개 ‘까뮈’그리고 담배 피울 때마다 도망칠까 말까 갈등하는 고양이 두 마리를 괜히 올려본다. 비 내리는 7월 초록빛 세상이 푸르고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