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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택향토사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바다
목욕의 역사, 목욕하는 생활
1.목욕은 사치였다
어릴 때는 목욕이란 것이 귀했다.
어쩌다 목욕을 하려면 동네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서 가마솥에 끊인 뒤 큰 플라스틱 함지박에 물을 퍼 담아야 가능했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해서는 목욕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목욕이란 말 자체를 몰랐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 어른들은 목욕 대신 등목을 많이 했다.
등목을 하기가 어려웠던 어머니나 누이들은 어른들 눈을 피해 뒷물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여름철 바닷가에서 멱을 감는 것으로 일 년 목욕을 해결하였다.
그러다보니 겨울이면 손발에서 허옇게 가루가 떨어졌고, 잠자리에 들 때면 여기저기서 벅벅 긁어대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우리집에서 씻는 문화가 정착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다.
아버지는 큰 맘 먹고 마당 한 구석에 우물을 팠다.
우물파기는 도둔리 동리마을의 기술자가 일을 맡았다.
기술자는 아들과 아들친구 등 두 명의 인부를 인솔하고 우리집 건넌방에 상주하며 보름쯤 일을 하였다.
먼저 곡괭이와 삽으로 어른 키 다섯 길쯤 파내려가자 봉우재 쪽으로 커다란 물구멍이 나타났다.
물구멍이 발견되었는데도 기술자는 한 두 자쯤 더 구덩이를 팠다.
물구멍 한 개 가지고는 수량이 적어 오래 쓸 수 없다는 거였다.
물구멍이 두 세 개쯤 나타나자 두레박으로 고인 물을 퍼내고는 납작한 돌로 아래서부터 쌓았다.
다 쌓은 뒤에는 맨 위에 노깡을 올려놓고는 공사를 마쳤다.
우물이 생겼다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칠구지 공동우물까지 물을 길으러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우리보다 몇 년 먼저 우물을 팠던 주막집 고모의 잔소리에서 해방되는 것도 의미하였다.
우물이 생기자 부엌 한쪽에 놓여 있던 물항아리는 용도 폐기되었다.
수 십 년 함께 했던 물지게도 할 일이 없어졌다.
사실 1970년대만 해도 물은 대단한 자산이었다.
가정생활에서 식량, 땔감과 더불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식수였다.
겨울에 김양식을 할 때는 더더욱 중요했다.
바다에서 채취한 김은 반드시 민물에 다시 씻은 뒤 작업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팔고 남은 물고기나 잡어들을 손질할 때도 물은 반드시 필요했다.
우물이 생기자 아버지는 주막집 대신 우리집으로 물 길러 오는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렸다.
혹여 쌀을 씻다가 흘린다거나 길어 올린 물을 흘리면서 가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호통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웃 사람들은 아무소리도 못했다.
그만큼 식수가 갖는 위력이 컸기 때문이다.
우물이 생기면서 목욕이란 걸 하게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쯤 하는 연례행사였지만 생전 목욕을 모르고 살았던 우리 가족에게는 획기전인 발전이었다.
여름에는 웃통을 벗고 등목도 자주 하였다.
아버지는 등목을 하면서 ‘어이 차거워, 어씨~’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어머니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얇은 속옷만 입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끼얹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많은 집들이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끌어올려 자가 수도를 설치하였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칠구지 공동우물에도 뚜껑이 덮이고 파이프 수도관이 길게 드리워졌다.
각각의 우물이 생기고 공동우물이 사라지면서 동네사람들은 만나고 부대낄 이유도 없어졌다.
간혹 우물가에 앉아 빨래를 하며 진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머리끄댕이잡고 싸우는 광경도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2.‘목욕’은 서양에서도 오랜 전통
목욕은 서양 역사에서도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목욕은 일종의 사교행위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손님이 방문하면 목욕으로 예우하는 풍습이 있었다.
손님이 욕조에 들어가면 주인은 시녀를 시켜 따뜻한 목욕물을 몸 위에 부어주었고, 다 씻은 뒤에는 양모로 짠 수건을 몸에 두르게 하였다.
연간 강우량이 매우 적어 먼지가 많았던 팔레스타인에서는 손님에게 손을 씻을 수 있는 물을 제공하거나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다.
성서에는 예수를 사모한 여인이 자신의 긴 머리칼로 발을 씻기고 귀한 향유를 발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는 토목과 건축이 발달한 나라였다.
대리석으로 지은 로마의 건축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특성 때문에 지금까지도 건재하여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에 속했던 여러 국가들에게 짭짤한 관광수입을 제공하고 있다.
로마의 대중목욕탕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로 재산을 많이 소유했던 황제나 부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제 전통에 따라 대형 목욕탕을 지어 사회에 기증하면서 제정 말기에는 850여 개의 대중목욕탕이 건축되었다.
대중목욕탕 중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와 네로황제의 목욕탕이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카리칼라의 대중목욕탕은 부지면적 12만 4,400㎡에 2,100명이 동시에 목욕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또 목욕탕 안에는 대형 욕실과 함께 도서관과 상점, 운동경기장을 고루 갖추고 있어, 귀족들은 목욕을 하면서 정치문제를 논의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등 다양한 활동을 겸할 수 있었다.
로마 최대의 목욕탕은 기독교를 국교화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지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무려 3천 명이 동시에 목욕을 할 수 있는 대형목욕탕을 지었는데, 이곳에서는 수영과 사우나, 향유바르기, 체조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거대한 목욕탕이 건축되고 목욕이 일종의 사교나 오락과 같은 기능을 하면서 남녀혼욕의 풍습과 함께 음란하고 퇴폐적인 목욕문화가 나타났다.
로마 말기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맛사지를 즐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성기 맛사지’였다.
귀부인들이 건장한 남자 노예들에게 전신 맛사지를 받거나 성행위를 제공받기 시작한 것도 로마제정 말기의 퇴폐적 풍습이었다.
로마제국의 목욕풍습은 지나치게 금욕적이었을 것 같은 중세시대까지 전승되었다.
중세 귀족들이나 기사들도 목욕을 할 때 여자들의 시중을 받았다.
남녀 혼탕의 풍습도 전승되었다.
여자들이 시중을 들 때는 남자의 몸을 볼 수 없도록 장미꽃을 띄웠는데, 이것이 후대에는 귀족들의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중세 말 서유럽이나 북유럽에서 대중목욕탕은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시설이었다.
당시의 목욕탕은 오전에는 여자가, 오후에는 남자가 이용하였다.
목욕탕에서 매매춘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었던 목욕탕에서는 공공연히 매매춘을 하여 사창가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프랑스 아비뇽의 목욕탕은 간판만 ‘목욕탕’일 뿐 욕탕은 없이 침대만 들여놓고 매매춘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목욕탕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져서 영국에서는 증기를 뜻하는 스튜(stew)가 ‘사창가’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14세기 독일에서는 목욕탕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목욕을 하며 결혼식 피로연을 하였다.
로마제국에서 성행했던 여성 때밀이와 맛사지도 여전했다.
상류층의 중요한 사교와 오락장이었던 대중목욕탕은 르네상스 전후 흑사병과 매독으로 철퇴를 맞았다.
땔감의 고갈과 온수가격의 상승도 대중목욕탕 운영을 어렵게 하였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향수와 화장품이 유행하게 된 것은 목욕문화의 쇠퇴와 직접 관련이 있다.
목욕문화가 쇠퇴하면서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불결해지기 시작하였다.
17, 18세기에 터키탕과 러시아탕이 유입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목욕문화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포도주로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씻었을 뿐 평생 동안 단 한 번밖에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목욕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 후 3세기부터였다.
하지만 대중목욕탕에 비해서 인기가 없었다.
집집마다 개인목욕탕을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뒤 경제력이 향상되면서부터다.
결국 서양인들이 일상적으로 샤워하고 목욕하면서 폼 재는 풍습은 근대 이후에서나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동양에서 목욕은 신성한 의식
동양에서 목욕은 불교의 영향으로 발달하였다.
물론 백옥같이 흰 피부를 숭상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로 볼 때 불교 이전에도 목욕의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전해지는 사료(史料)가 없다.
불교에서 목욕은 일종의 정화의식이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이후 불교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사찰에는 대형욕탕이 만들어졌다.
귀족가문에서는 개인적으로 목욕시설을 만들기도 하였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죄수에게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에서 목욕의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상류층의 경우 하루에 서너 차례 이상 목욕을 즐겼다고도 한다.
당시에는 성문화도 개방적이어서 남녀 혼욕의 풍습도 있었으며, 여성들은 피부미용을 위해 난초나 복숭아 꽃물과 같은 향신료를 넣어 목욕하기도 하였다.
유교가 발달한 조선시대에도 이 같은 문화가 전승되어 청결은 양반가의 선비나 규수가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졌다.
양반들은 세수를 하고 의관을 정제하지 않은 상태로 손님을 맞는 것은 큰 결례로 여겼다.
그래서 집안에 ‘정방’이라는 목욕시설을 갖추었고 형편이 여의치 못할지라도 아침마다 세수만큼은 거르지 않았다.
온양온천이나 서울 상도동의 한증막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온천욕이나 증기탕도 즐겼다.
혼례를 앞둔 처녀는 살갗을 희게 하기 위해 인삼탕, 창포탕, 봉숭아잎탕에 몸을 담그거나 쌀겨나 쌀뜨물, 밀가루를 세정제로 사용하여 목욕하였다고 한다.
민간에서도 엄숙함과 청결함이 요구되는 제사와 의례에는 반드시 목욕재개를 하였다.
정월이나 칠월 또는 10월에 마을에서 동제(洞祭)를 거행할 때에도 제관은 새벽마다 당샘의 맑은 물로 목욕을 하였다.
상민이나 천민들은 시냇물에 몸을 씻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들은 낮에 목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자들은 어둠을 이용하여 씻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 이후에는 서양문화의 영향과 근대시설이 갖춰지면서 목욕시설도 함께 발달하였다.
1900년에는 부산 동래에서 온천수가 발견되면서 대중온천탕이 처음으로 생겼다.
1924년에는 평양에 최초의 일반목욕탕이 만들어졌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도 생겼다.
우리나라 대중목욕탕문화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때밀이’ 문화다.
때밀이 문화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에는 한국 목욕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목욕문화가 생산한 특허품으로는 ‘이태리 타월’ 이 있다.
이태리 타월은 1964년 부산동래온천에서 일본 관광객이 버린 꺼칠꺼칠한 수건을 때밀이 수건을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것을 상품화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하였고, 타월을 이태리식 연사기로 직조하면서 상품명에 ‘이태리’가 붙게 되었다.
우리나라 개인주택에 목욕탕이 만들어진 것은 1970, 80년대 아파트건설의 영향이 크다.
그 뒤로 경제수준이 향상되고 주택이 개량되면서 일반주택에도 목욕탕이 설치되었고 이제는 대중들의 친숙한 일상이 되었다.
4.목욕탕과의 어색한 만남
내가 처음으로 목욕탕을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다.
초등학교가 있었던 도둔리나, 서면소재지, 중학교가 소재한 비인에는 목욕탕이 없었다.
우리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하시는 목욕탕이나 수세식 화장실에서의 에티켓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받아들였다.
고등학교가 소재하였던 장항읍에는 신창동과 창선동 두 곳에 목욕탕이 있었다.
나를 목욕탕으로 이끈 것은 고등학교시절 내내 절친이었던 홍수였다.
홍수는 항상 이른 새벽에 목욕탕에 갔다.
일찍 가야만 물이 깨끗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늦게 가면 욕탕 안에 떼가 둥둥 떠다녀서 때밀이들이 뜰채로 건져낼 때가 많았다.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 외에도 가족탕이 따로 있었다.
가족탕은 가족들만 단체로 입장하였는데, 나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처음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기억에 생생하다.
남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난감함, 갈아입은 지 오래된 팬티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신발은 어디다 둬야할 지, 샤워를 하고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욕탕에 먼저 들어가서 때를 불린 뒤 샤워를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던 기억, 낮선 아저씨가 갑자기 다가와 내 등짝을 쓱쓱 밀어주더니 엄청 넓은 자신의 등짝을 들이밀며 때를 밀어달라고 했을 때의 놀라움...
나는 첫 경험의 당혹스러움 뒤에도 오랫동안 목욕탕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숨 막히게 뜨거운 온탕과 목욕탕 안의 공기도 답답했고, 친구처럼 선뜻 때를 밀어주겠다며 말을 걸지도 못했다.
내가 낮선 이웃들과 함께 목욕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택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하면서다.
힘든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기숙사에 기거했던 모든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샤워실로 뛰어갔다.
경쟁이란 놈은 참 묘한 성질이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렇게 적응하려고 해도 잘 안되던 것이 늦으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기자마자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기숙사에는 인원이 많다보니 십 수 명이 함께 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료들 중에는 샤워를 끝내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기숙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살아내면서 나의 몸을 타인들 앞에 내보이는 것에 면역이 생겼다.
그것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군대에서는 샤워장 시설이 없어서 냇가에서 몸을 씻었다.
민간인이라고는 눈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민통선 안이어서 타인의 눈길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냇물이 꽁꽁 얼어버린 겨울에는 냇가 목욕도 중단해야만 했다.
우리부대에서는 화목을 태우는 난로 옆에 큰 드럼통을 놓고 파이프로 난로를 둘둘 감아 물을 데웠지만 그것으로는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기에도 부족하였다.
전역을 한 뒤 한겨울에 대학교 총학생회실 시멘트 바닥에 스치로플을 깔고 겨울을 났다.
머리맡에 스토브를 켜놓고 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추운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지만 배고픔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학교 앞 영희아줌마네 식당에서 외상을 해주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할 뒤에는 빨래문제가 난제로 대두하였다.
사실 자취생에게 가장 힘든 일은 다름 아닌 빨래다.
난감했던 빨래문제를 해결해 준 곳은 학교 앞 대중목욕탕이었다.
나는 목욕을 갈 때마다 빨래감을 한보따리씩 가지고 갔다.
하지만 목욕탕에서는 무법자같은 빨래쟁이들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과다하게 물을 소비하면서 다른 손님들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빨래쟁이들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달가웠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주인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다른 손님들 생각해서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던 주인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며 쫓겨나기도 여러 차례 하였다.
때밀이 체험을 한 것은 교사가 되고 난 뒤였다.
20여 년 전에 친했던 우리학교 인쇄실의 O씨는 때밀이 마니아였다.
나는 O씨의 손에 이끌려 자주 목욕탕에 갔다.
내가 처음 때를 밀었던 곳은 평택시 합정동에 소재한 태양탕이었다.
초보 경험자였지만 태양탕의 때밀이는 솜씨가 좋았다.
때밀이는 일정한 절차와 순서에 따라 때를 밀었다.
먼저 얼굴과 귀밑을 닦은 뒤에는 양팔을 닦았고, 몸의 오른쪽 면에서 가슴과 배를 거쳐 왼쪽 면 그리고 등과 발을 순서대로 닦았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결 따라 닦는다고 하였다.
몸을 닦은 뒤에는 몸 전체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간단하게 안마를 해주었다.
그러고서 받는 요금이 5천원쯤이었다.
결혼 후에는 좀처럼 때밀이를 이용하지 않다가 최근 비교적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원인은 때밀이에 맛을 들인 아들놈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태리타올로 직접 닦아주었는데 손이 거칠고 아파서 제 딴에는 고통스러웠던 가 보다.
그러다보니 목욕을 기피하게 되었고, 유혹하는 수단으로 ‘때밀이’를 조건으로 내걸면서 이제는 하나의 관습처럼 되어버렸다.
요즘 때밀이 요금은 목욕탕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남자는 12,000원, 여자는 16,000원쯤 한다.
아내는 때밀이 요금까지 남녀차별을 두는 것에 불만이 많다.
남탕에 비해 여탕에서는 수건과 목욕타월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도 불평을 한다.
남탕에서는 당연하게 제공하는 화장품도 여탕에는 없다고 한다.
여탕에 수건을 비치하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두 없어진다는 목욕탕 주인의 푸념도 나름 일리가 있지만 내가 생각해도 차별이 심한 것은 분명하다.
남탕 여탕의 차별은 있어도 목욕비는 차이가 없다.
목욕비는 찜질방을 겸한 사우나에서는 목욕비만 5천원이고 찜질을 할 경우에는 6천원에서 8천원을 받는다.
찜질방을 갖추지 않은 일반 목욕탕의 경우에는 대략 3천원 내외를 받는다.
요즘엔 진헌와 목욕탕에 간다.
우리는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을 매우 귀찮아해서 대부분은 집에서 샤워를 하거나 목욕을 하고 목욕탕은 한 달에 한 두 번씩만 이용한다.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은 시장통에 있는 자수정 사우나다.
물론 값이 싼 대중목욕탕에 가도 되지만 몸 전체에 용무늬를 그려진 깍두기들을 몇 번 만나고 난 뒤로는 시설 좋은 사우나에만 간다.
우리는 욕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간다.
자수정사우나는 최근 개수공사를 하여서 온탕과 열탕 외에 편백나무탕을 새로 만들었다.
아산온천 대목욕탕에는 노천탕까지 갖춰져 있다.
열탕 옆에는 보통 두 가지 정도의 사우나가 있다.
사람들 중에는 60~70도에 달하는 사우나에 들어가서 땀을 뺀 뒤 커다란 냉수욕조에 몸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에도 목욕탕에 갔다.
여름 내내 집에서 샤워와 목욕만 하다가 물경 3개월만에 찾은 목욕탕이었다.
우리 부자는 오랜만의 방문을 기념할 겸, 묵은 때도 벗겨낼 겸해서 때밀이에게 몸을 맡겼다.
때밀이는 능숙한 솜씨로 때를 밀어낸 뒤 전신에 비누칠을 하고는 간단히 맛사지까지 해주었다.
그래서인가 오늘은 기분이 상쾌하다. (2011.10.2)
첫댓글 우수개 소리인지 ..
옛날에는 못자리 할때 목욕한다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나네요..
너무 재미 있는 글이네요. 저는 사실 때밀이 요금이 남,여가 다른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ㅋ
우리마로님! 바다님은 풍도해전 유적지 답사로 다녀온 기억이 나는 그 평택 해설사님은 아니신지요?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옛날 일을 쓰셨나요. 1958년 처음 온 수원 역전 매산로 구길에도 목욕탕 더운물에 전신을 담그고 머리만 내 놓은 사람들이 때를 불리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방앗간, 술도가가 시골 부자라하는데 그때 목욕탕 주인도 돈 벌었겠습니다. 평택향토사이야기로 들어가 봤습니다. 노가바를 읽으며 눈이 적셔지고 前頭換 프랑카드가 너풀거리는 남대문 대로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언젠가? 평택분들과 만나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