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이 향 숙
친정어머니는 딸 넷에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딸을 낳을 때마다 삼신할매를 원망했지만 키워서 사위를 얻고 보니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타고 아들을 낳으면 리어카도 타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그렇다고 사위들이 외국 여행을 보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나름 행복해 하신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어머니의 첫 사위는 처갓집 말뚝에 절한다는 말의 표본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은 자주 시골에 와서 농사일도 돕고 추수철에 인천의 지인들에게 직거래를 해주었었다. 둘째 사위는 내성적인 성격에 말이 없어선지 약간 어려운 손님이고 셋째 사위는 처가의 일은 발 벗고 나서서 손수 시골집을 개량해 주기도 했었다. 농사철에는 자주 인천에서 홍성을 오가며 도왔었다. 지금도 가까이 살면서 아예 맏사위 노릇을 하고 있다.
넷째인 나의 남편도 처가의 일이라면 제일을 제쳐두고 앞장선다. 그가 결혼 후 주말마다 서울에서 홍성으로 어머니를 도우러 내려갔었다. 농사일을 도와주던 윤진 아저씨가 가족에게 돌아가고 혼자 농사지으시는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단다. 토요일 저녁 늦게 도착하여 어머니 곁에서 말벗도 되어주고 일요일은 새벽부터 들에서 일하고 막차시간에 맞춰 서울로 올라오곤 했었다. 나도 한번 따라 나섰다가 멀미도하고 일이 얼마나 고된지 새삼 남편이 고마웠었다. 남편이 공주는 거리적 거린다면서 다시는 데려가지 않았다. 청주로 내려오기 전까지 남편의 주말은 늘 어머니에게 헌납 했었다. 지난여름 고향을 찾았을 적에 동네 어르신들은 남편이 당신들과 함께 일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보다 더 반가워했었다.
어머니가 큰 아이를 돌보려고 우리와 함께 살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호칭도 남편은 ‘엄마’로 부르고 어머니는 ‘영국아, 종원아범’이었지만 주로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질투가 날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다. 남편은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 엄마”하고 부른다. 안아주고 볼에 뽀뽀하며 막둥이처럼 살갑게 군다. 아이들도 아빠를 따라서 외할머니라면 사족을 못쓴다. 어머니의 치매도 제일 먼저 발견했던 것이 딸인 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전에 없이 산만해진 어머니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남편은 검사를 권했었다.
십 여 년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 병원으로 달려간 남편은 “향숙아. 엄마 돌아가신대.” 수화기 너머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큰 병원으로 옮긴 어머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셨다. 남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문안을 가서 말벗이 되어 드리고 간호를 했다. 가해자의 보험이 있긴 하였지만 간병비와 기나긴 투병생활동안 비 보험 치료비도 남편이 내드렸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프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 두 사람도 다투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아이들 교육문제였다. 아이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어머니와 사랑의 매를 드는 남편은 다시는 안볼 사람처럼 치열하게 싸우고는 채 십분도 안돼어 언제 그랬느냐면서 같이 드라마를 보고 깔깔 거렸었다. 다른 한 가지는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이 내 이름을 동생 이름 부르듯이 한다고 싫다하셨다. 아내로써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졌는지 남편과 가끔 언성을 높였지만 내 색시 내 맘대로 부른다며 결혼 20년이 흐른 지금도 남편은 내 이름을 부른다. 어머니도 이제는 젊은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고 살기도 하는구나 하신다.
고부(姑婦)지간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장서(丈壻)지간 이란다. 유명인들이 처가에서 강제로 1박2일을 지내는 TV프로가 있다. 결혼 후 20여년이 넘도록 단 한 차례도 처가에서 잠을 자본적이 없는 사위도 있고 아예 방문조차 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열 달 품어 낳아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냈는데 20년이 넘도록 사위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그런 반면 총각 때부터 제집처럼 드나들며 동생까지 데리고 예비 장모에게 밥상을 받던 사람이 결혼 후에도 자주 찾아뵙는 경우도 있었다. 장모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운동을 도우며 살갑게 구는 모습에 그는 국민 사위가 되었다. 자녀가 많지 않은 요즘세태에 자연스럽게 앞서가는 프로그램이다. 패널로 나온 아내는 남편이 친정부모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보고 소원했던 부부관계도 좋아지고 자연스럽게 시부모에게 더 잘하게 되었단다.
나에게는 아들만 둘이 있다. 아이들이 결혼을 하면 고부(姑婦)가 되겠지만 장서(丈壻)는 만들 수 없다. 내 남편이 그랬듯이 가슴 따스한 사위노릇을 할 것이다. 그런 만큼 나는 외로울 것 같다. 지금 아이들과 누리는 사랑 소중히 간직하고 서서히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해야겠다. 지천명이 코앞인 이 나이에 딸을 낳는다는 것은 그저 나의 욕심이겠지. 우습지만 지금부터 좋은 시어머니가 될 준비를 해야겠다.
첫댓글 멋진사위!! 저도 이리되고 싶네~요
잘하고 계시자나요~~
나도 저런 어른되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