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재개척과 칙령 제41호
숙종 이후 시행된 수토정책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적극적인 영유권 행사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수토정책이 점차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 어민의 울릉도 독도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일본인들의 출입 역시 이루어져 그들의 불법적인 수탈이 점차 노골화되었다. 이에 고종은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하여 자세히 조사하게 한 다음 그의 보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서 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다음은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를 조사한 후 보고한 내용(고종실록 권19)의 일부이다.
敎曰: “其地若開拓, 則民可樂從否?” 奎遠曰: “船漢藥商等處, 試問之, 多有樂從之意。” 敎曰: “吾邦人多入去, 采藥造船乎?” 奎遠曰: “湖南人最多。 全爲造船採藿採鰒, 其外他道人, 皆以采藥爲主矣。” 敎曰: “日人立標, 謂之松島, 不可無言於彼。” 奎遠曰: “彼立標木, 書以松島, 松島云者。 自前相語者也。 不可無一次公幹於花房義質處, 亦不可無致書於日本外務省矣。” 敎曰: “以此意言於總理大臣及時相也。 以今觀之, 不可一時等棄, 雖片土, 不可棄也。” 奎遠曰: “以此傳敎, 這這傳諭於總理大臣及時任大臣矣。 雖尺寸之地, 乃是祖宗疆土, 何可等棄乎?” 敎曰: “非但通于彼, 開拓事, 亦速爲之可也。”
(고종이) 하교하기를,
“그곳을 만약 개척하면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가겠는가?”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뱃놈과 약재 상인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니, 대부분 즐거이 따라갈 뜻이 있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들어가 약재도 캐고 배도 만들던가?”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호남인(湖南人)이 제일 많은데 전부 조선(造船)을 하거나 미역과 전복을 따며 그 밖의 타도 사람은 모두 약재 캐는 일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인(日本人)이 푯말을 박아놓고 송도(松島)라 한다는데,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그들이 세워놓은 푯말에는 송도라고 하였습니다. 송도라 한 데 대해서는 이전부터 서로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차로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에게 공문(公文)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일본 외무성(外務省)에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내용을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時任) 재상들에게 이야기하여 주어라.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이 전교를 일일이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 대신(時任大臣)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설사 한 치의 땅이라도 그것은 바로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어떻게 등한히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단 저들에게 통지할 뿐만 아니라 개척하는 일도 속히 하는 것이 좋겠다.”
1882년 조선정부는 이규원의 보고를 바탕으로 종래의 수토정책을 폐기하고 울릉도에 설읍(設邑)을 결정하였다. 당시 설읍의 방향은 백성을 모아 개간을 권장하여 5년간 면세하고, 영·호남의 조운선을 울릉도에서 조선하는 방안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잡폐를 방지하기 위해 관리인격인 도장(島長)직을 신설하여 전석규(全錫奎)를 임명했으며, 울릉도를 종래 강원도의 울진현에서 평해현(平海縣)으로 이속시켰다. 이듬해인 1883년 3월, 조선정부는 평소 울릉도의 개척과 임업 및 어업개발을 주장한 개화파의 영수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에 임명하고 본격적인 주민의 이주를 추진했다. 첫 울도 도장(島長)으로 임명된 전석규가 1884년 비리로 파면되자 도장제를 첨사제(僉使制)로 바꾸어 삼척영장(營將)이 울릉첨사(僉使)를 겸하게 했으며 이후에는 평해군수(平海郡守)가 울릉첨사를 겸했다. 1888년 2월, 고종은 보다 효율적으로 울릉도를 관리하기 위해 첨사제를 다시금 도장제로 바꾸었으며, 평해군 월송진(越松鎭)에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어 서경수(徐敬秀)에게 울릉도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이는 비록 겸직이지만 종래의 도장제와는 달리 종4품의 정부 관원이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한 개화파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수토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1895년에는 종래 도장의 명칭을 도감으로 고쳐 판임관(判任官)의 직급으로 변경, 배계주(裵季周)를 초대 도감으로 임명하고 울릉도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이후 육지 사람들의 울릉도 이주가 계속되어 1897년 3월에는 12개 동리(洞里)에 397호, 1,134명이 거주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울릉도 개척과 지속적인 이주가 이루어지는 한편으로 일본의 불법침입 또한 노골화되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일본인들의 불법어업과 삼림벌채가 자행되자 대한제국은 일본인의 침입실태를 파악하고 이에 관해 일본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침탈에 대한 대한제국의 항의를 무시로 일관했다. 노골화 되어가는 일본의 침탈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됨에 따라 고종 황제는 1900년 10월 24일 「칙령 제41호」를 반포했다.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에 의해 먼저 울릉도는 정식적인 군현단위인 울도군으로 승격되어 강원도의 군현 27개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울도군수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도와 죽도(竹島) 및 석도(石島:현재의 독도)로 규정함으로써 세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2일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定)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를 내각회의에 제출하였으며 10월 24일 의정부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10월 25일 「칙령 41호」가 반포되었다. 「칙령 41호」는 울릉도를 울도로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울릉도를 정식 지방관제에 편입하고, 제2조에 울도군수의 관할 구역으로 석도(石島)를 명시했다. 이는 대한제국이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공식 선언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4년여 앞선다. 또 관보에 게재되지 않은 회람용 문서인 「시마네현 고시」와 달리 「칙령 41호」는 발효 2일 뒤 관보에 게재, 국내외에 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출처 ; 독도박물관
https://www.dokdomuseum.go.kr/ko/page.do?mnu_uid=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