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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9:1-2절
벧전2:21-25절
십자가의 의미
2011.10.23일
▣ 올 5월 1일 문경 채석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신이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창원에서 살던 김씨는 문경까지 와서 예수님이 골고다에 십자가에 메달리신 것처럼 자신도 양발과 양손에 못을 박고 옆구리에 칼을 꽂고 자살한 사건입니다. 죽음 김씨는 간이식을 해준 아들이 죽자 절망에 빠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방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기독교를 알게 되고 자신이 예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죽기로 결심하고 준비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독교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예수라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인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에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누가 십자가에서 죽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먼저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의 사건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잇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여기서 ‘화해’라는 말은 ‘서로 반목하는 두 편이 하나가 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화해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 화해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흉내 낼 일이 없는 것입니다. 화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화해의 실행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화해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것입니다.
▣ 오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베드로전서를 통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기록한 말씀인데, 베드로가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 노예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하였습니다. 그스도인 노예들 주인 중에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리스도인 노예들에게 억울한 일을 겪게 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19절에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그 고난을 참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 고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을 겪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우리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베드로는 2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첫 번째로 예수 십자가의 죽으신 사건은 본으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21절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여기서 사용한 ‘본’이라는 헬라어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선생의 습자책(copybook)'이라는 단어입니다. 학생들이 글씨를 배울 때 선생의 필체를 그래도 흉내 내어 쓰는 글씨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나다라를 배우려면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모범에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를 죽는 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실패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복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자고 한 말은 더욱 우리들에게 용기가 됩니다.
▣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를 때리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합니다. 반드시 당한 만큼 갚아 주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피해를 그대로 받고 원수를 사랑하며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올 때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죄 없는 분이 억울하게 십자가의 죽으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과 누명을 쓰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묵상해야 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진실은 밝혀질 것입니다. 23절에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밝혀지지 않고 나의 마음을 몰라 줘도 언젠가는 진실은 드러나게 되고 알게 될 것입니다. 정의를 승리합니다. 진실은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본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예수 십자가의 사건이 단순히 우리들의 고난 당한 것에 본의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인류의 죄를 담당한 사건인 것입니다. 24절에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우리는 여기서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신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대신 동물들이 죽어야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6장 22절에 “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물들은 대신 죄를 짐어 지는 것입니다. 바로 구약의 모든 제사의 동물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의 희생제물은 동물들이었지만 이제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once and for all) 죽으심으로 모든 희생제물이 되신 사건인 것입니다. 두 번도 필요 없고 단 한번으로 완전한 죄를 용서받게 된 사건이 2000여년 전에 골고다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의 죄와 자신을 동일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죄악까지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 육신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가 되셨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이것이 바로 ‘대속’인 것입니다. 대신 죄를 짐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바를 버리셨나이까(막15:34절)”의 절규는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라는 형벌을 우리 대신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절규의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졌고, 막힌 담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성전의 휘장을 찢어 갈라 버리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 우리들은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무한이 감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할 저주를 대신 지신 그 사랑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은혜 아래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오늘 이 시간이 감격이고 축복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지신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매 주일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주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 세 번째로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나타낸 곳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을 향한 사랑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 주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를 내어주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의 죽음을 대신하여 우리를 자녀로 삶으신 그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어주신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 무한한 사랑을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중한 사랑 받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침묵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본이 된 사건이며,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한 사건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십자가 사건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4복음서에 보면 십자가 사건을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진정한 복음이 바로 예수 십자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가장 현실에서 잘 표현해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는 이 시에서 ‘쫓아오든 햇빛’을 민족의 희망인 독립으로 보았습니다. 이 희망이 십자가에 걸려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너무 높고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 결단을 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게 될 경우가 온다면 작지만 피를 흘리면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자신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이제 주님처럼 작은 십자가을 짐어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이 시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작은 예수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우리들을 통해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자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