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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
사천 이근배 시인은 시조시인을 ‘특무상사’라 했다. 이 말의 본의가 어디에 있건 나는 시조라는 ‘자율적 정형시’를 쓰는 시인들은 ‘자유시’를 쓰는 시인보다 시 앞에 더 경건해야 하며, 시 쓰기에 더 좋은 지평에 있다고 해석한다. 시 앞에 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은 시조라는 제기(祭器)를 모국어로 받들어 올려야 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조라는 제기는 ‘율격’이라는 여과와 제련 장치를 구비하고 있다. 이 장치를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시인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한 조건은 아니다. 율격의 능란한 운용과 그 운율에 실리는 시어의 유려한 조탁은 장인정신과 통한다. 시조시인은 시인의 우두머리, 장인(匠人)이다.
우리 시대 시조는 과연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하고 있는가. 율격이라는 여과와 제련 장치를 거친 장인의 시어는 능란하게 조율되어 자연스러운 리듬을 타게 되어 있다. 시조의 율격은 판에 박은 듯 3·4조나 4·4조를 도식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종장 첫 구를 제외한 나머지 마디(음보)는 4음절 기준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지 4음절로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조는 전통적으로 구어(口語)로써 노래해 왔다. 묘사나 진술에서 일상담화 방식 그대로 발화한다는 것이다. 일상담화에서 4음절로 맞추어 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지난해 가을, 전남 나주 정촌 고분에서 백제계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금제 귀걸이와 금제 장신구, 마구, 화살촉 등 중요 유물이 발굴됐는데 석재를 쌓아 만든 돌방무덤 중 제일 큰 무덤에서 금동 신발이 나왔다고 한다. 발등에는 용 모양 장식, 발목에는 금동판 덮개가 붙어 있고 부릅뜬 눈, 크게 벌린 입, 도깨비의 몸체가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발굴된 어떤 금동 신발보다 완벽한 상태로 출토되었다니 더 귀하고 반갑다.
생전에 짚신 한 켤레 못해드린 울 엄니
쉰 해 전 먼저 떠난 지아비 찾아가시는 길
어쩌나 신발 못 챙겨드리고 이리 늦게 땅을 치면,
김매랴 나무하랴 벗은 발로 사시더니
멀고 먼 돌 가시밭길 신 없이도 어이 가셨나
머리올 다 삼아드려도 풀리잖을 이 뉘우침
눈부셔라 천오백 년 잠을 깬 백제금동혜
황룡이며 귀면이며 그물 짜낸 저 솜씨 좀 봐!
그 옛날 그 사랑 보면 나는 지푸라기도 아니지.
— 이근배 〈백제금동혜(百濟金銅鞋)〉(《유심》 1월호)
《유심》 2002년 겨울호에는 사천의 시조 세계에 대한 논구 〈풍골 그리고 문자향〉이 있다. 이 글에 인용한 첫 시집 《노래여 노래여》의 서문을 참조하면 사천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상(事象)을 추출해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서 오늘의 삶의 인식수단으로 삼는 일-그것이 내가 최근에 천착하고자 하는 시 세계”라며 “참으로 우리의 역사는 무한한 문학의 자원”이라 했다. 사천에게 ‘역사’라는 이 자원은 역사적 인물과 고동서화(古董書畵) 탐색으로 나타나고 이 기조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천오백 년 시공을 초월하여 사천에게 다가온 백제 금동 신발은 사천을 만나는 순간 ‘백제금동혜’로 명명되었으니, ‘혜’는 짚신이나 목이 짧은 신을 가리킨다. 이 시의 ‘짚신/ 울 엄니/ 지아비/ 김매다/ 나무하다/ 머리올 삼다/ 황룡/ 귀면/ 지푸라기’와 같은 토착적 소도구와 토속어 이미지는 전래적 생활문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적 가치에 대한 경탄을 깔고 〈백제금동혜〉에서는 이미 여과와 제련을 거쳐 흘러넘치는 사천의 육성이 들려온다. 사천은 이 아름답고 귀한 신발을 신겨드려 먼저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시게 했더라면 하는 “뉘우침”을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돌려놓고 있다. 그러면서 백제금동혜의 예술적 성취와 백제가 “천오백 년” 전 고인에게 바친 이 부장품을 “그 옛날 그 사랑”이라고 본다면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지푸라기도 아니”라고 겸허한 자성을 보여준다. “짚신 한 켤레 못해드”렸다거나 “머리올 다 삼아드”린다는 말은 간난 속 못다 한 효성이 보이는 모국어의 발현이다. 모국어 아니고서는 노래할 수 없는 능란한 장인의 발화가 눈부시다.
제주 시조
돌, 바람, 여자. 삼다의 섬 제주는 강하다. 강한 제주 땅에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몰려들고 있다는데 기쁘지만은 않다. 토박이 제주 사람들이 굳건하게 지켜주길 바라는 건 뭘 몰라서 하는 말일까. 제주는 강하다. 제주의 시조는 강하다.
아침밥상
갈치국에
어머니가 생각난다
울음 깊은
세월 보다
자식 위해 올려주신
그 바다,
자맥질한 생애
눈물로 간 맞춘다
— 이용상 〈어머니〉(《제주시조》 2014)
제주 사람에게 갈치국이 별미일까만 “아침밥상”을 마주한 시인에게 “어머니가 생각”나게 하는 오늘은 특별한 국이다. “그 바다”에서 “자맥질한 생애” 허기진 당신은 못 드시고 아들 밥상에 “갈치국”을 “올려주”셨다. 이 시조에 눈길이 멎는 것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우리의 감정과 정서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시조를 읽으며 나의 어머니가 떠오르고 나도 “눈물로 간 맞”추는 시인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내 인생에 도두봉이
그리 멀 줄 몰랐네
아내가 전해주는
산자락 애기동백
영혼의
불을 켜려고
등대처럼
서 있을까
— 이용상 〈도두봉 안부〉(《제주시조》 2014)
함께 발표한 〈병실에서〉를 보며 근간에 병마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두봉 안부〉를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아내와 산책하던 어영공원에 이제 갈 수 없는 시인에게 “도두봉”이 “그리 멀 줄 몰랐”다. 올레 17코스가 지나는 섬머리, 전망대가 있어 시내 풍경도 내려다보이고 멀리 한라산도 보인다. “산자락 애기동백”이 피었다고 전하는 “아내”의 말에 “내” “영혼의/ 불을 켜려고” 동백은 “등대처럼 서 있”겠다는 상상을 펼친다. 생각한 대로 행하고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 산자락 애기동백은 시인의 “영혼”에 환한 불을 밝혀 쾌유의 새 기운 새날을 맞으라고 지금 등대처럼 서 있다.
제 마디 제가 꺾으며
빈자리 내주는 풀
석 달 가뭄에도
돌 틈에 뿌리 내리며
단 한 번
하늘에 대고
구걸하지 않았다.
— 김정숙 〈영농일지 35-달개비〉(《제주시조》 2014)
제주에는 감귤을 키우는 시인들이 많다. 영농일지 연작을 쓰는 김정숙 시인은 어떤 농사를 지을까. “제 마디 제가 꺾으며”는 달개비의 생태를 보여주는 적절한 묘사다. 꺾이는 지점이 달개비의 도드라진 관절일까. “석 달 가뭄에도/ 돌 틈에 뿌리 내리며” 사는 달개비의 생명력을 제주의 시인들은 닮았다. “단 한 번// 하늘에 대고/ 구걸하지 않”는다는 강골의 기개가 제주의 시인들에게는 있다.
몸으로 시 쓰는 법
달팽이에게서 배운다
가는 듯 머무는 듯 살다 간 돌담 밑
한줄기 은빛 기록이
삶 사 삶 사 빛난다.
— 김정숙 〈영농일지 34〉(《제주시조》 2014)
“가는 듯 머무는 듯” 그렇게 느릿느릿 “살다 간 돌담 밑”에서 “한줄기 은빛 기록”으로 “삶 사 삶 사 빛”나는 건 숨 쉬지 않는 달팽이의 모습일까. 몸 낮추고 쪼그려 앉아 한동안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시조시인이기에 달팽이의 일생을 “삶 사 삶 사(3 4 3 4)” 압축할 수 있다. 시조를 생각하는 농부에게만 허여된 축복이다.
작명술
이름 없는 풀꽃은 없다. 이름 없는 새도 없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 두두물물 명명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몰라 이름 부르지 못할 뿐. 들길의 강아지풀도 생김새와 빛깔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 예컨대, 보통 강아지풀보다 술이 길고 축 늘어진 것은 가을강아지풀. 채가 짧고 곧은 술이 금빛을 띤 것은 금강아지풀. 붉은 술에 길고 늘어진 모양은 수강아지풀이고 수크령은 유난히 큰데 붉은 것도 있고 술이 곧고 길다. 양재천이나 한강 같은 수변공원에서 무리 지어 핀 조경용 수크령을 보았다.
시의 제목을 잘 붙이는 것도 시를 돋보이게 하니 기술이다. 어떤 제목은 의미 내용을 상징하고 어떤 제목은 시의 일부가 되어 시를 견인하기도 한다. 어떤 제목은 시를 해설하거나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의 내용을 제목이 압축한 경우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는 제목이 시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며 시의 내용은 제목이 표상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남다르게 긴 제목이 또 이목을 끈다.
팔다 만 귤 바구니가 구둣발에 동그라진다
솟구치는 서러움을 울컥 토해 냈다가
죄보다
죄목이 더 큰
그런 죄를 지었다
— 김영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
(《시조시학》 2014년 겨울호)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못다 판 귤이 놓인 좌판을 노점단속반이 걷어찼다. 좌판을 걷어차는 단속반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수차례 치우라는 명령을 어긴다고 홧김에 걷어찼단 말인가. 어쨌거나, 그 광경을 본 화자가 항변했던 모양이다.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되는 순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이라 했으니 항변이나 몸짓만으로도 죄가 되나 보다. 왜 이러느냐, 이럴 것까지 있느냐고 소리 한번 질렀다가 공무집행방해죄를 둘러쓰게 되었으니 죄보다 죄목이 더 큰 것은 분명하다. 의분이 화를 부른 이 슬픈 시에서 정의로운 화자의 따뜻한 마음이 보인다.
잠자리를 박차고
창문 활짝 열어봅니다
떼로 나온 잠자리들
꼬리 물기 한창이고
매미도
마음이 급한지
연신 짝을 부릅니다
잠자리는 잠자리가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바람만큼 뜨거워 두려운 게 없습니다
확 트인 투명 침실엔 하늘 한 겹뿐입니다
— 김영철 〈풀잎은 흔들리고 나무 등은 딱딱하고〉(《열린시학》 2014년 겨울호)
잠자리는 동음이의어. 하나는 청령(蜻蛉)이라는 근사한 별칭까지 있는 우리 유년의 친구. 다른 하나는 물론, 잠을 자는 자리 곧 남녀 또는 부부가 함께 자는 일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려니.
왜 잠자리를 박차고 창문 활짝 열어보는 걸까. 창문을 열고 보니 확 트인 하늘에 떼로 나온 잠자리 쌍쌍 꼬리 물기 한창이다. 설상가상 매미도 다급한 마음에 연신 짝을 불러대고 있으니 귀 시끄러워 잘 수가 있나. 아, 그래서 잠자리를 박차고 나왔구나. 음, 그렇구나. 에고, 그런데 저 잠자리들은 좋겠다. 흔들리고 삐거덕거리고 딱딱한 잠자리 같은 거 필요 없이 확 트인 하늘 한 겹 두르고 모였다 흩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꼬리 물면 그게 잠자리라니.
“풀잎은 흔들리고 나무 등은 딱딱하고” 해서 잠자리들은 잠자리를 하늘에다 펼친다는 시인의 발칙한 생각이 참신하고 재미있다. 시선을 끄는 제목과 남다른 발상이 시 앞에 머뭇거리게 한다. 머뭇거리며 시를 읽고 의미를 잡아내며 아, 그렇구나 하고 끄덕이게 한다. 이 낯선 어법이 좋다. 콩나물시루에 물이 빠져나가듯 읽히는 시는 잘 읽히는 시이나 좋은 시는 아니다. 다소간의 모호성, 머뭇거림, 망설임의 간극이 있다는 건 여백이 있고 여운이 있다는 말이다.
벌릴 대로 벌려버린 입술을 오므리면
갈무리한 배추밭 바람길이 푸르다
하늘도 들어와 앉아 살 오르는 가을 안쪽
— 정희경 〈상강-지슬리 15〉(《시와문화》 2014년 겨울호)
지슬리. 예쁜 이름이다. 지슬리 연작 열다섯 번째 〈상강〉은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지슬리의 배추밭을 보여준다. 시월도 하순이면 무럭무럭 자란 배추를 언제 뽑을까, 출하일자를 점치게 된다. “벌릴 대로 벌려버린 입술”처럼 무성하게 자란 배추 잎사귀를 “입술을 오므”리듯 볏짚 두어 가닥으로 묶어주면 배추는 얌전한 규수처럼 앉아 출하를 기다린다. 그런 풍경을 시인은 “하늘도 들어와 앉아 살 오르는 가을 안쪽”이라 했다. 귀한 표현이다.
땡볕을 쩍 가르는 매미 울음 따갑다
눈물이 고여 있다, 금방 흘러내릴 듯
온종일 되새김질한 해는 아직 붉은데
꼬리를 치켜세운 네 발에 힘이 간다
핏발 선 눈동자 위 매미 소리 딱 멈춘다
물컹한 주머니 하나 지상에 내린 순간
뜨거운 혓바닥이 세상을 닦아내면
드디어 일어선다 비틀거린 핏덩이
어미소 산 같은 등이 노을을 끌고 있다
— 정희경 〈출산-지슬리 22〉(《불교문예》 2014년 겨울호)
남의 시에서 멋진 표현을 여기저기서 따다가 조각보 잇듯 붙여놓고 몇 마디 자기 이야기를 얹어 새로운 시라고 내놓는 글에는 어떤 진정이 들어 있을까.
이 시는 지켜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작품이다. 지슬리 연작 스물두 번째 〈출산〉은 소의 출산 장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관념의 해설이 아니라 삶의 구체와 현장 체험적 진실이다.
지켜본 사람은 안다. 송아지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어미 소가 겪는 고통을. 땡볕을 쩍 가르는 듯한 고통에 어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눈물이 고여 있다. 통증을 온종일 되새김질하며 저물녘까지 버티어온 어미. 머리 쪽으로 뻗어 올린 앞발이 보여야 사람이 그걸 잡아당겨 출산을 도울 수 있다. 그때까지 핏덩이를 밀어내려고 꼬리를 치켜세운 네 발에 온 힘이 쏠린다. 눈동자에 핏발이 서고 아뜩한 순간, 물컹한 주머니 하나가 지상에 내려진다. 고통은 잊고 어미는 벌써 새끼를 혓바닥으로 핥아 일어서게 한다. 산 같은 어미의 몸이 노을을 끌고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과문한 탓일까, 소의 출산을 소재로 한 시조는 지금까지 읽은 기억이 없다. 그만그만한 시들을 따돌리고 이 직핍한 표현을 끌어낸 무던한 집중에 박수를 보낸다.
왜, 이것이 시조인가
한 언론계 인사에게서 요즘 시조를 두고 “왜, 이것이 시조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왜 이것이 시조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은 어디서 오는가. 그 앞에서 황진이의 시조와 대중성을 확보하여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게시된 단시조 몇 수를 낭송했다. “그건 시조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시조 같은 시조’를 잊어서는 안 된다. 시조가 노래라는 것도 변치 않는 법이고, 율격이라는 공감의 법칙도 지켜야 시조다. 몇 글자 더하고 덜어내는 일이 시조의 가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고시조라는 역사적 산물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시와 달리 온유돈후하고 노래다운 시어 운용의 격조가 있어야 시조다. 편편이 새로운 운율 효과가 번져내는 리듬의 격조가 있어야 시조다. 소리와 뜻에 격조가 있어야 ‘시조 같은 시조’가 된다. 시조시인은 리듬과 이미지 사이에 망설임의 간극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장인이다. 콩나물시루에 물 빠지듯 읽히는 시도 여운이 없다. 여백에 떠 흐르는 여운이 있어야 좋은 시조다.
홍성란 srorchid@daum.net /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 등이 있고, 시조선집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애인 있어요》 시조감상에세이 《백팔번뇌-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시조대상 등 수상.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