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눌(徐訥)은 성종 15년(996)에 〈과거에서〉 갑과(甲科)로 뽑혔고, 현종(顯宗)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상서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尙書吏部侍郞 兼左諫義大夫)가 되었다가, 국자좨주 지이부사(國子祭酒 知吏部事)로 옮겼다.
왕이 서눌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고, 서눌에게는 중추사 우산기상시(中樞使 右散騎常侍)를 제수했다가 차례를 건너뛰어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이부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吏部事)로 임명하였다.
덕종(德宗) 초에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하였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하였다. 정종(靖宗) 때에는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가 되었다.
왕이 호부낭중(戶部郎中) 유선(庾先)을 거란(契丹)에 보내어 안무(安撫)에 대한 사의를 표하려 하자, 서눌이 아뢰어 이르기를, “지난해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과 보루를 증축하고서 이제 와서 다시 화친하려고 하니, 유선이 가는 길에 표문을 부쳐 파기할 것을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정종〉 7년(1041)에 〈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였고 중대광(重大匡)을 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2번 표문을 올려 사직을 간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서눌이 병들어 지장사(地藏寺)에서 머물렀는데, 왕이 우승선(右丞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어 문병하였고, 어의(御衣) 2벌, 곡식 1,000석, 말 2필을 사원에 시주하여 복 받기를 빌게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친히 문병하고서 제서를 내려 삼중대광 내사령(三重大匡 內史令)으로 올리고, 자손에게는 영업전(永業田)을 하사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애도하고, 간경(簡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선종(宣宗) 3년(1086)에 선왕(先王)의 시호를 피하여 원숙(元肅)으로 고쳤다.
애초에 서필(徐弼)의 아버지 서신일(徐神逸)은 시골에 살았는데, 사슴이 도망하여 〈그에게〉 의탁하므로 서신일이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감사하며 말하기를, “사슴은 바로 내 아들입니다.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고관대작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신일은 나이 80에 서필을 낳았고, 서필·서희(徐熙)·서눌이 과연 이어서 재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