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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Korean Broadcasting System, KBS, 韓國放送公社]
「방송법」 제4장에 의거하여 운영되는 공영 방송사.개설
통칭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라고 부른다. 한국방송공사는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고 전국에 방송 시청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방송문화 발전과 공공복지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법인체(公法人體)이다.
연원 및 변천
한국방송공사의 시발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호출부호 JODK, 주파수 690kHz로 방송무선전화 시설 인가를 받은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1927년 2월 16일 첫 방송 전파를 발사했으며, 같은 주파수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함께 사용하는 혼합방송이었다. 일본어로는 주로 경제시황(經濟市況)을, 한·일어 공용으로는 물가시세·일기예보·공지사항 등을, 한국어만으로는 창(唱)·민요·동화·고담(古談) 등을 방송하였다. 경성방송국은 1932년 4월 7일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朝鮮放送協會)로 개칭되었으며, 1933년 4월 26일부터는 한국어와 일본어 방송을 분리, 제1방송은 일본어, 제2방송은 한국어 방송을 하는 이중방송을 시작하면서 출력도 1㎾에서 10㎾로 증강시켰다.1935년 9월 21일에는 최초의 지방방송국인 부산방송국이 개국된 데 이어, 1945년 8월 15일까지 평양·익산·함흥·대구·대전·춘천·목포·마산·광주·해주·청진·강릉·청주·장전에 지방방송국이 차례로 개설되었다.
이러한 방송망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통치와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통제와 검열이 가해졌다. 그러나 한국인 방송인들이 해외 단파방송을 통해서 입수한 일본의 패전소식을 퍼뜨려 수십 명이 옥고를 치른 이른바 ‘방송국 단파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경성방송국은 JODK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같은 해 9월 9일에는 미군정청에 접수되어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편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방송업무는 공보처 방송국으로 이관되어 국영방송(國營放送)으로 탄생, 명실상부한 한국 방송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6·25전쟁으로 남한의 10개 방송국 중 8개 방송국이 파괴되어 서울중앙방송국은 부산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한편, 동란중에는 일본 NHK를 이용한 한국어 특별방송과 선박을 통한 해상 이동방송을 실시, 적치하의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는 심리전 기능도 담당하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방송업무는 국무원 사무처 소관이 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후에는 공보부 방송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61년 7월에는 해외 및 대공방송(對共放送)을 전담하는 서울국제방송국이 개국되었고, 같은 해 12월 31일에는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을 개국하여 텔레비전 방송의 첫 전파를 발사하였다.
1968년 7월 25일 정부는 공보부를 문화공보부로 개편하면서 서울중앙방송국·서울국제방송국·서울텔레비전방송국을 중앙방송국으로 통합, 발족시킨 데 이어, 1972년 12월 30일에는 방송문화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방송의 공공·공익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문화공보부 소속 중앙방송국과 16개 지방방송국을 공영체제로 전환시키는 「한국방송공사법」을 공포하고, 이듬해 3월 3일 창립식을 가짐으로써 국영방송시대의 막을 내렸다. 1976년 12월 1일에는 현재의 여의도 종합청사가 완공됨에 따라 남산에 있던 모든 시설을 이전하였다. 1980년 12월 1일에는 한국방송협회의 결의에 따라 동양방송(東洋放送)·동아방송(東亞放送)·한국FM·전일방송(全日放送)·서해방송(西海放送) 등 5개 민간 방송사를 인수하는 등, 본격적인 공영방송체제를 확립함과 아울러 텔레비전의 컬러방송을 시작하였다. 또한, 1990년 8월 18일 2년여의 시험방송을 끝내고, TV문자방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1990년 7월에 확정된 정부의 방송구조개편계획에 따라 같은 해 12월 27일 TV와 라디오의 교육방송 채널을, 1991년 3월 11일에는 라디오 서울채널을 각각 정부에 반납하였다. 한편,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 개최와 함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주관방송사(主管放送社, Host Broadcaster)로 지정받아 올림픽 방송 수행을 위한 국제방송센터(IBC)를 1985년 12월 28일에 건립하기 시작한 후, 1988년 올림픽 개최 직전에 완공하여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세계에 올림픽 중계방송을 실시하였다. 또한 1994년 11월 1일 ABU 이사기관에 선임되었으며, 1997년 7월 1일 위성시험방송을 개시하였다.
현황
최고의결기관으로 이사장을 포함하여 11인의 이사로 구성되는 이사회가 있으며, 집행기관으로는 사장 1인, 부사장 2인, 10인 이내의 본부장 및 감사 1인을 두고 있다. 2015년 현재 직원은 총 4,529명이다. 본사에 편성·보도·TV·기술·시청자·정책기획 본부 등과 라디오센터, 제작기술센터, 글로벌센터 등이 있다. 방송망은 서울 본사를 비롯하여 부산·창원·대구·광주·전주·대전·청주·춘천·제주의 방송총국, 울산·진주·안동·포항·목포·순천·충주·강릉·원주의 방송국 등이 전국을 연결한다. 또, 해외에는 미주 총국(워싱턴)·유럽 총국(파리)·아시아 총국(동경)이 있고, 7개 지국(워싱턴·뉴욕·로스앤젤레스·런던·도쿄·베이징·파리) 13개 지역에 특파원을 상주시키고 있다. 제1텔레비전·제2텔레비전의 2개 채널과 제1라디오·제2라디오·제3라디오·제1FM·제2FM·케이블방송·국제방송·지상파 DMB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1981년 11월에 설립된 KBS문화사업단과 1989년 4월에 설립된 KBS시설관리사업단, KBS제작단·KBS아트비전, KBS영상사업단을 운영함으로써, 각종 문화사업과 시청자 봉사업무, 방송기능의 효과적 확산을 위한 출판물 간행 및 프로그램 판매, 프로그램 제작 및 제작 지원업무, 방송시설 관리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있다.
이 밖에 방송연구 및 교육을 위하여 방송연구원과 기술연구소가 있으며, KBS교향악단과 KBS국악관현악단은 정기연주회 및 산업체·대학 순회연주 등을 통하여 고급문화의 대중 전달 및 음악예술문화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1) 제1텔레비전: 우리나라의 기간 텔레비전방송으로 보도·교양·오락이 종합 편성되며 보도와 교양 부문의 비중이 높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연속으로 특별 생방송하여 1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을 재회시켜 세계 여론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세계 방송사상 최장의 텔레비전 생방송 기록과 함께 텔레비전방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2) 제2텔레비전: 원래 수도권 중심의 채널로 시작했으나 점차 가시청권이 전국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종합 편성하여 건전한 대중문화 창달을 위한 채널로 운영되고 있다. (3) 제1라디오: 라디오의 기간 방송으로 보도·교양·오락 등을 종합 편성하고 있으며, 농어업 정보와 기상 정보, 지역방송 등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국악프로그램 등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데도 힘쓰고 있다. (4) 제2라디오: 종합 방송으로 주부 및 여성·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며, 음악·드라마·스포츠·오락 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이 제1라디오보다 높다. (5) 제3라디오: 장애인과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복지 채널로 운영되고 있다. (6) 제1FM: 순수음악 및 전통음악을 방송하고 있다. (7) 제2FM: 대중음악과 외국 가요를 주로 편성하고 있어 청취자들의 음악기호에 따른 선택의 폭이 넓다. (8) 우리나라의 국제 전파사절로서 세계 각 나라 국민들과 해외동포들을 위한 해외 방송이며,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전통·발전상 및 국내의 주요 뉴스를 소개하고 국제간의 유대 강화와 이해 증진을 위한 사업을 펴면서, 한국어를 포함하여 영어·일본어·중국어·러시아어·스페인어·프랑스어·인도네시아어·독일어·아랍어 등 모두 10개 언어로 세계 전 지역에 방송하고 있다.= 한편, 한국방송공사는 방송업무와 더불어 사회·경제·학술·체육·문화·예술 등 각 분야에 걸친 사업을 전개하여 공영방송으로서의 구실을 제고하고, 국가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주요 사업 및 행사로 환경보호, 교통문화캠페인 등 생활문화 정착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이 밖에 매월 시청자위원회를 개최하여 시청자 의견을 수렴하고, 국민 생활시간 조사 및 시청률 조사를 통하여 프로그램 수준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본사 사옥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기업연합회[The Federation of Korean Industries, 韓國企業聯合會]
민간 경제인들로 구성된 경제인 단체.
개설
한국기업연합회의 이전 명칭은 전국경제인연합회[全國經濟人聯合會, 약칭: 전경련(全經聯)]이다. 한기련은 경제인 및 경제 각 부문의 연결을 도모하고 산업·경제 전반에 걸친 의견 종합 및 구현을 위해 노력하며, 아울러 주요 산업의 개발과 국제경제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건전한 국민경제의 향상,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별법에 의하여 설립된 단체가 아니므로 가입·탈퇴에 강제성은 없으나 일반 경제단체와 대기업에 한하여 가입할 자격이 있다. 2017년 한국기업연합회(약칭: 한기련)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원 및 변천
1961년 1월 경제계의 대동단결과 경제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한국경제인협의회로 발족하여 회장에 김연수(金秊洙), 부회장에 전택보(全澤珤)·이한원(李漢垣)이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재계 유지 13명이 모여 경제재건촉진회(經濟再建促進會) 창립총회를 열고, 회장으로 이정림(李庭林)을 선출하였다. 첫 사업으로 시멘트·제철·비료·합성수지·통신케이블·나일론공업 등 10대 기간산업건설 계획안을 세워 당시의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에 제안하였다. 같은 해 8월 16일에 이름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었다. 1968년 3월 28일에는 20여 경제단체를 비롯한 주요 민간기업체 및 금융기관·국책회사 등을 망라하여 전국 규모로 회원을 확충하고, 한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9년 11월에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8번지에 연건평 5만 975㎡의 전경련회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자본주의의 장래와 한국의 기업』이란 주제로 국제심포지엄 개최한 바 있고, 1994년에는 한미산업기술협력재단을 창립하였으며, 1997년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위원 (APEC) 기업인 자문위원회(ABAC) 한국위원회 사무국을, 자유시장경제이념의 홍보·확산을 위해 자유기업센터를 설립하였다. 창립 당시 13명이던 회원이 2000년 말 470개 회사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경제단체로 성장하였다. 2000년 말 현재 전경련은 회장·이사·감사가 있고, 사무국 밑에 8개 부와 2개의 실이 있으며, 국제협력재단·전경련국제경영원·(주)FKI미디어 등 3개 부설기관과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의결기구에는 총회와 이사회가 있고 25개 위원회, 2개 특별위원회가 있다. 2017년 정경유착 근절·투명성 강화·싱크탱크 강화의 혁신안을 마련하고 이름을 한국경제인연합회(약칭: 한기련)로 바꾸었다.
기능과 역할
전경련은 우리나라 공업화와 경제 발전에 미친 영향은 컸다. 아직 정부의 정책수립 태세가 채 정비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기에는 전경련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경제계의 경험과 우수한 인력이 동원되어 계획단계에서부터 근대화의 청사진을 직접 마련하는 한편,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 걸쳐 발전의 기틀을 구축하고 국제화시대를 여는 다각적인 대외협력활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에는 수출산업촉진위원회(輸出産業促進委員會)를 설립하여 서울특별시 구로동에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창설하고, 1969년에는 마산임해공업지대, 1970년에는 여수·광양 임해공업지대의 조성도 주도하였다. 1967년에는 산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제금융공사(IFC)·국제개발협회(IDA) 및 미국·일본의 주요 은행과 합작투자로 국제개발금융기구가 되는 장기신용은행의 전신인 한국개발금융회사(韓國開發金融會社)를 설립하였다.
1977년에는 기업 부설 실업학교 설립을 권장하여 산학협동증진과 기능공 양성에 이바지했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급속히 변화하는 국제경제사회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산업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조사와 국제 경쟁력 강화 대책을 세우는 한편, 중동을 비롯한 해외에 다각적인 기업의 진출을 촉진하였다. 그리고 경제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정책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창의와 능률을 바탕으로 하는 민간 주도의 자율경제 운용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여 정책 전환의 계기를 조성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세계 불황의 여파로 감량 경제의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기술 우위의 신개발전략이 필요하며 외자의존적인 개발단계에서 저축을 통한 자립경제의 실현을 촉구하는 범국민적 건전경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1990년대에 들어와 정보·통신 산업 육성의 육성과 사회적 공헌을 위한 경제활동 및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1999년 신기업윤리헌장의 채택은 그 추진방법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전경련사업보고서』(전국경제인연합회, 1986)
『전경련발전의 자취』(전국경제인연합회, 1984)
『전경련 20년사』(전국경제인연합회, 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5-0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