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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3 편
사마리아를 거쳐서
. 중도자 위원회
. 활동시기 : 서기 27년 6월말 ~ 8월 중순
. 활동장소 : 사마리아 지역
143:0.1 서기 27년 6월 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가 점점 커지자, 예수와 열두 사도는 자신들의 텐트와 개인 소지품을 나사로의 집에 보관하기 위해 베다니로 보낸 후, 예루살렘을 떠났다. 사마리아 북쪽으로 들어가서, 그들은 안식일 동안 베델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그들은 고프나와 에브라임에서 온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복음을 전파했다. 아리마대와 탐나에서 온 시민들이 예수를 그들의 마을로 초대하기 위해 왔다. 주와 사도들은 이 지역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가르치는데 2주 이상을 보냈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멀리 안티파트리스로부터 와서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었다.
143:0.2 남부 사마리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사도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을 상당 부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유다가 이 사마리아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7월 마지막 주에 예수와 동료들은 요단강 가까이, 새로운 그리스풍의 도시 파사엘리스와 아켈라이스로 떠날 준비를 했다.
1. 아켈라이스에서 전도하다
143:1.1 8월 초순에 사도 일행은 그리스 도시인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 본부를 두었고, 유대인들이 살지 않는 이 두개의 그리스 마을에서 -거의 이방인들만의 집회- 그리스인, 로마인, 시리아인들에게 처음으로 전파하는 체험을 가졌다. 이러한 로마 시민들과 접촉하면서 사도들은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반대에 부디쳤다. 사도들과의 많은 저녁 회의 중 하나에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에 대한 반대 이유를 주의 깊게 들었는데, 열두 사도들이 개인적 수고에서 상대하는 사람들과의 체험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143:1.2 빌립의 질문은 그들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빌립이 말했다: “주님, 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들은 이런 가르침이 약하고 노예 같은 사람들에게나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종교는 힘세고 튼튼하고 공격적 성격을 얻는데 영감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가르침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약해빠진 수동적인 무저항자가 되게 만들어 결국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 그들은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의 가르침이 하늘같고 이상적이라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종교가 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며,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주님, 이 이방인들에게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143:1.3 예수는 토마스, 나다니엘, 열심당원 시몬, 마태로부터 하늘나라 복음에 대한 비슷한 반대 의견을 들은 후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143:1.4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랑하는 성품을 온 인류에게 드러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형제들아,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 오늘날의 유대인, 이방인, 혹은 다른 세대들이 내 가르침을 어떻게 오해하든지 간에 나는 반드시, 이것 하나를 실행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신성한 사랑에도 엄한 훈육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종종 자식의 어리석은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아버지가 압박하도록 하게 한다. 그 아이는 현명하고 사랑스런 아버지의 훈육 동기를 항상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사랑의 힘으로 우주의 우주를 다스리신다고 선언한다. 사랑은 모든 영 실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다. 진리는 해방하는 계시이지만, 사랑은 최상의 관계이다. 그리고 오늘날 너희 동료들이 세상을 어떻게 관리하든지 간에, 다가올 시대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은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인간 진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경건하게 인정하는 것이며, 인간 형제애를 사랑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143:1.5 “하지만 누가 내 복음이 오직 노예와 약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느냐? 나의 선택된 사도들이 약자처럼 보이느냐? 요한이 약자처럼 보였느냐? 내가 두려움의 노예가 된 것을 너희는 보았느냐? 이 세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가난한 자를 소홀히 여겼으나, 내 아버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가난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회개하고 아들을 받아들이라는 부름에 응답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유대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에게 그리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똑같이 전파되어야 한다.
143:1.6 “내 아버지가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 베풀기를 기뻐한다 해서, 하늘나라의 봉사가 단조롭고 쉬운 일이라 생각지 말라. 파라다이스로의 상승은 모든 시간 속에서 최상의 모험이며, 영원의 험난한 성취이다. 땅에서의 하늘나라 봉사는 너희와 동료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용기 있는 인간성을 요구할 것이다. 너희 중 많은 사람이 이 나라의 복음에 대한 충성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육체의 싸움터에서 싸우는 동지들이 있어 용기가 강화될 때 죽는 것이 쉽지만,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더 높은 형태의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 침착하게 홀로, 자신이 사랑하는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143:1.7 “오늘날, 믿지 않는 자는 무저항의 복음을 전도하고 비폭력 삶을 사는 너희를 조롱 할 수 있지만, 너희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진지하게 믿는 자의 긴 대열에서 처음으로 나선 자요, 이 가르침에 영웅답게 헌신한 것에 온 인류가 놀라워 할 것이다. 세상의 어떤 군대도 너희와 너희의 충실한 후계자들이 보여줄 용기와 용감함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인간 형제애의 복음을 선포할 것이다. 육체의 용기는 가장 낮은 형태의 용기이다. 정신적인 용기는 더 높은 형태의 인간 용기이지만, 가장 높은 최상의 용기는 깊은 영적 실체를 깨달은 확신에 대한 타협 없는 충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용기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영웅다운 정신이다.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정말로 인자(人子)의 개인적인 동료이다."
143:1.8 예수가 그때 한 이 말씀은 전부가 아닌, 말씀의 서론이다. 예수는 이 선언을 확대하고 예를 들면서 아주 자세히 말했다. 이 말씀은 예수가 일찍이 열두 사도에게 가장 열심히 하신 연설 중에 하나였다. 주는 뜨거운 감정이 눈에 뜨일 정도로 사도들에게 말씀한 적이 거의 없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뚜렷한 감정과 더불어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는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였다.
143:1.9 사도들의 공적인 설교와 개인적인 사역의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바로 그날부터 그들의 메시지는 새로운 용기 있는 우위의 톤을 띠게 되었다. 열두 사도는 하늘나라의 새로운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정신을 점차적으로 습득해 나갔다. 이날 이후로 그들은 주님의 다각적인 가르침에서 부정적인 미덕과 수동적인 명령을 전파하는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
2. 자아-정복에 대한 교훈
143:2.1 주는 인간의 자기 통제력을 보여주는 완벽한 표본이었다. 그는 모욕을 당했을 때에, 모욕하지 않았고; 고통을 당할 때, 괴롭히는 자들에게 위협을 하지 않았으며; 적들에게 비난 당할 때, 그는 단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로운 심판에 자신을 맡겼다.
143:2.2 저녁 회의에서 안드레는 예수에게 물었다. “주님, 우리는 요한의 가르침대로 금욕을 실천해야 하나요? 아니면 당신이 가르치는 자아-정복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요? 당신의 가르침과 요한의 가르침은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은 정말로 자기 조상의 빛과 율법에 따라 의의 길을 가르쳐 주었고, 그것은 자아-성찰과 금욕의 종교였다. 그러나 나는 자아-초월과 자아-통제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계시하신 생명의 길을 보여 줄 것이다.
143: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아를 정복하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크다. 자아-정복은 사람의 도덕적 성품을 재는 척도이며, 영적 성장의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이다. 옛 체제에서 너희가 금식하고 기도했으나, 다시 태어난 영의 새로운 생명존재로서 너희는 믿고 기뻐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옛 것은 사라져야 한다. 보라, 모든 것이 어떻게 새로워질지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졌음을 너희가 세상에 확신시켜야 한다.
143:2.4 “옛 길로는 너희가 삶의 규칙을 억제하고, 복종하며, 따라야 한다; 새로운 길은 너희가 먼저 진리의 영에 의해 변화를 체험하고, 그 결과 너희 내면의 혼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어 강해지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져, 완전한 뜻을 확실하고 기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잊지 말라―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을 개인적으로 믿는 것이, 네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한다. 이처럼 너희의 믿음과 영의 변화로, 너희는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의 영이 너희 안에 실제로 거하게 된다. 만약 그 영이 너희 안에 거한다면, 너희는 더 이상 육체의 종이 아니고, 영의 자유롭고 해방된 아들이다. 자아를 구속하는 두려움과 금욕에 노예가 되는 옛 율법 대신에, 영의 새로운 법은 자아-정복의 자유를 너희에게 부여한다.
143:2.5 “너희가 나쁜 일을 했을 때, 여러 번, 너희 행위를 악한 자의 탓으로 돌리려고 생각했으나, 실제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서 잘못된 길에 빠졌을 뿐이다. 오래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인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로는 지독하게 사악하기까지 하다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스스로 속고, 그리하여 어리석은 두려움, 약간의 탐욕, 비굴한 쾌락, 악의, 질투, 아니 복수하려는 증오심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우냐!
143:2.6 “구원은 자기-의의 육체의 행위가 아니라 영이 다시 태어남으로 얻는다. 너희는 두려움과 육체의 금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은혜로 친교한다. 다만, 영으로 태어난 아버지의 자녀들은 언제나 자아와 육체의 욕구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정복한다.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진정한 평화를 갖게 된다. 이 하늘의 평화의 길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영원히 진보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봉사에 헌신하게 될 운명이다. 이제부터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완전을 추구하는 한편, 너희 mind와 몸의 모든 악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고귀한 특권이다.
143:2.7 “너희의 아들 신분은 믿음에 기초하며, 두려움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너희의 기쁨은 신성한 말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며, 그러므로 너희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들을 진정한 회개로 이끈다. 자아-정복의 비결은 사랑으로 항상 역사하는 깃드는 영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이 구원하는 믿음조차 너희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너희가 이 살아있는 믿음의 자녀라면, 더 이상 자기의 종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승리한 자들, 해방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143:2.8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다면, 금욕하고 육체의 욕망을 경계하는 삶의 자아-의식 속박에서 벗어나 즐거운 영의 나라로 옮겨지고, 일상생활에서 영의 열매를 자발적으로 맺게 된다. 영의 열매는 가장 높은 종류의 즐겁고 고귀한 자기 통제의 본질, 즉 땅의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참된 자아-정복이다.
3. 오락과 휴식
143:3.1 이 무렵 사도들과 그들의 직계 제자 동료들 사이에 매우 긴장되고 감정적인 긴장 상태가 심화되었다. 그들은 함께 살고 일하는 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 유대인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예수가 요즘에 하신 말씀은 그들의 정신 상태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안드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문제와 복잡한 일을 가지고 주에게로 갔다. 사도의 수장이 걱정거리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안드레, 사람들이 이런 일에 연루되고,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격한 감정으로 도달했을 때에, 너희는 그들의 곤혹스러움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할 수 없다. 나는 너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나는 이러한 개인적인 사회적 어려움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너희들과 함께 휴식과 긴장을 풀면서 3일간의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이다. 너희 형제들에게 가서 너희 모두 나와 함께 사르타바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하루나 이틀 쉬기를 원한다고 전해라.
143:3.2 “이제 너는 각각 열한 형제에게 가서,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하며 말하여라: '주가 한동안 쉬고 긴장을 풀려고, 우리만 그와 함께 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최근에 많은 마음의 번민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으므로, 이 휴일 동안에는 우리의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를 제안한다. 이 일에 대해 너는 나와 함께 협력하겠느냐?' 이렇게 각 형제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라." 그리고 안드레는 주의 지시대로 그대로 했다.
143:3.3 이것은 그들 각자의 경험에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갔던 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여행 내내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도달하자 예수는 그들을 주위에 앉히며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휴식의 가치와 이완의 효과를 배워야 한다. 때때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시 그것들을 버려두는 것이다. 너희가 휴식이나 예배에서 새로워져 돌아올 때, 문제를 더 명확한 생각과 더 안정된 손길로, 그리고 더 결단력 있는 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 다른 경우로, 너희의 mind와 몸이 쉬는 동안 문제의 크기와 비율이 줄어든 것을 발견할 때도 많다.”
143:3.4 다음날 예수는 열두 사람에게 각각 토론할 주제를 정해주었다. 그날 하루는 회상과 종교적 업무와 관련 없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데 할애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점심으로 빵을 먹을 때, 감사 기도를 하지 않자 잠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그런 예식을 무시하는 것을 처음 본 것이었다.
143:3.5 산으로 올라갔을 때, 안드레의 머리는 문제투성이였다. 요한은 마음속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야고보의 혼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방인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기금이 모자라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야고보는 마음속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베드로는 과로해서 평소보다 더 신경질적이었다. 유다는 과민과 이기심에 시달렸다. 시몬은 그의 애국심을 인간 형제애와 조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에 대해 유별나게 화가 났다. 빌립은 일이 돌아가는 방식에 점점 더 당황했다. 나다니엘은 이방인들과 접촉한 이후 유머가 줄어들었고, 토마스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오직 쌍둥이들만이 평범하고 동요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요한의 제자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143:3.6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진지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들은 많은 인간의 혼란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많은 긴급한 문제들은 과장된 공포와 증대된 두려움의 산물이라는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들은 그러한 모든 혼란은 버림으로써 가장 잘 처리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훌쩍 떠남으로 그런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도록 버려두었다.
143:3.7 이 휴일이 끝나고 돌아온 것은 요한의 추종자들과 사이가 크게 개선되는 기간이 시작되었음을 가리켰다. 생활의 일상적 임무에서 떠나 사흘 동안 휴가를 보낸 결과로, 그들이 모든 사람의 정신 상태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 신경과민에서 해방된 것을 바라보았을 때, 열두 사도 중 다수가 정말 기뻐했다. 인간 접촉에서 무의미한 것은 분란과 충돌을 확대시킬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143:3.8 그리스 두 도시인 아르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의 많은 이방인들은 복음을 믿지 않았지만, 열 두 사도들은 이방인들만 있는 그들의 처음 확장된 일에서 귀중한 체험을 얻었다. 그 달 중순, 어느 월요일 아침, 예수는 안드레에게 말했다: “우리는 사마리아로 간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야곱의 우물 근처에 있는 시카 시(市)로 향했다.
4.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143:4.1 유대와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육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마리아인들과 원수 지간이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이 반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BC 약 700년경,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은 팔레스타인 중앙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이스라엘 북왕국의 유대인 25,000명 이상을 포로로 끌고 갔고, 그 자리에 거의 같은 수의 큣, 세파르브, 하마트 족속의 후손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아슈바니팔은 또 다른 이민자들을 보내 사마리아에 거주하게 했다.
143:4.2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종교적 불화는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이 돌아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알렉산더의 군대를 친절히 도와줌으로 유대인들의 기분을 건드렸다. 이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산더는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 산에 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야웨와 부족 신들을 섬기고,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체제를 비슷하게 좇아서 희생물을 바쳤다. 적어도 마카비의 시절까지 이 예배를 계속했고, 그때 요한 히르카누스는 게리짐 산에 있는 그들의 성전을 파괴했다. 예수가 돌아가신 뒤에, 사마리아인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사도 빌립은 이 옛 사마리아 성전 터에서 많은 모임을 가졌다.
143:4.3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의 불화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깊다. 알렉산더 시대 이후로 그들은 점점 더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열두 사도는 데카폴리스와 시리아의 그리스 및 다른 이방 도시들에서 전파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지만, 예수가 "사마리아로 가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주에 대한 충성심을 재는 심각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와 1년 넘게 지내는 동안,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편견을 초월하는 개인적인 충성심을 발전시켰다.
5. 시카의 여인
143:5.1 주와 열두 사도가 야곱의 우물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잠시 이 지역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에, 예수는 여행의 피로로 우물 옆에서 쉬었고, 빌립은 시카에서 음식과 텐트를 나르는 일을 도우려고 사도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수와 함께 남고 싶어 했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말라; 이 사마리아인들은 친절할 것이다. 오직 우리 형제들인 유대인들만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형제들과 함께 가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여름 저녁 6시가 가까워질 무렵, 예수는 사도들이 돌아올 때까지 우물 옆에 앉아 기다렸다.
143:5.2 야곱의 우물물은 시카의 우물물보다 광물이 적어서 마시는 물로 가치가 높았다. 예수는 목이 말랐지만, 우물에서 물을 얻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시카의 한 여인이 물 항아리를 들고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 준비하자, 예수는 그녀에게 “내게 물을 주겠느냐.”고 말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모습과 옷차림으로 예수가 유대인인 줄 알았고 말씨로 보아 갈릴리 유대인이라 짐작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날다’였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자는 유대 사람이 우물가에서 자기에게 말을 걸어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 당시에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공공장소에서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었고,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날다는 예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는 대답했다: “나는 정말로 물을 달라고 했지만, 만약 네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너는 나에게 생명의 물을 달라고 청할 것이다.”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 당신은 물을 길을 도구가 없고, 우물은 깊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의 물을 어디서 얻을 수 있나요?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가요? 그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셨고, 그와 아들들, 가축들도 이 물을 마셨습니다.”
143:5.3 예수는 대답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살아있는 영의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물은 그 안에서 샘물이 되어 영생에 이르기까지 솟아날 것이다.” 날다가 말하였다: "이 물을 주셔서 내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이곳에 와서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하소서.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훌륭한 유대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143:5.4 날다는 예수가 자신과 대화하려는 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여자는 주의 얼굴에서 올바르고 거룩한 사람의 빛을 보았지만, 친절을 흔히 있는 친숙함으로 착각했고, 예수의 비유를 자기에게 접근하려는 의도로 잘못 해석했다. 품행이 단정치 않은 여인이었던 그 여자는 드러내놓고 예수를 유혹하려 했는데, 그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예수는 명령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여, 가서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이 명령에 날다는 정신을 차렸다. 주의 친절함을 그릇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그의 말투를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두려웠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 애쓰며 큰 혼란 속에서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남편이 없어서 남편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진실을 말하였다, 네가 한때는 남편이 있었을지라도, 지금 함께 살고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 내 말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 오늘 내가 너에게 주는 살아있는 물을 구하라.”
143:5.5 이때 날다는 정신을 차렸고, 그녀의 좋은 자아가 깨어났다. 그녀는 전적으로 의도해서 부도덕해진 것이 아니었다. 남편에게 모질게 또 부당하게 버림받고, 막다른 골목에서 한 그리스인과 결혼 없이 살기로 동의했지만, 여전히 결혼은 하지 않았다. 날다는 이제 예수에게 무심코 말한 것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고, 깊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주께 말했다: “내 주여, 제가 이렇게 말한 것을 후회합니다. 당신은 거룩한 분이시거나 선지자이신 것을 깨닫습니다.” 주께 직접 개인적으로 도움을 막 구하려고 할 때, 그 여자는 허다한 사람이 그전에도 그 후에도 한 것과 같이 행하였다―구원의 문제를 피하고 신학과 철학 토론에 주의를 돌렸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필요로부터 신학 논쟁으로 전환시켰다. 게리짐 산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런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장소는 어디인가요?”
143:5.6 예수는 그 여자의 혼이 창조주와의 직접적인 깊은 만남을 피하려는 시도를 알아차렸지만, 그녀의 혼 안에 더 나은 삶의 길을 알려는 소망이 있음을 보았다. 결국, 날다의 마음 속에 생명의 물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여자여, 네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를 예배할 날이 올 것이다. 너희는 지금 많은 이방 신들과 이방 철학들의 종교가 섞인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누구를 예배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예배를 한 분의 하나님, 야웨에 집중시켜 모든 혼란을 제거했다. 그러나 너는 진정하게 예배하는 사람이 모두 영으로, 진실로 아버지를 예배할 때-심지어 지금도 올 것이라고 하는 내 말을 믿어야 한다, 이는 아버지가 바로 그러한 예배자를 찾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너의 구원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또는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지 않고, 내가 지금 너에게 주고 있는 이 생명의 물을 네 마음에 받아들이는데 있다.”
143:5.7 그러나 날다는 땅에서 자기의 개인 생활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혼의 처지에 관한 거북한 질문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다시 한번 애썼다. 한 번 더 일반 종교에 관한 질문을 택하고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요한은 교화자가 오는 것에 대해 전파했는데, 그는 구원자로 불릴 것이요, 그가 오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포하실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예수는 날다의 말을 막으며, 놀라운 확신으로 말했다, “네게 말한 그가 나이다.”
143:5.8 이것은 예수가 땅에서 자신이 신성한 본성을 지닌 아들 신분임을 처음으로 바로, 분명히 감추지 않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 여자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순간까지 남자들 눈에 의심스러운 성품을 가진 여자에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성한 눈은, 자신이 원해서 죄를 짓기 보다는 반대로 죄를 짓도록 강요된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지금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하여 구원을 바라는 인간 혼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143:5.9 날다가 더 보람 있고 고귀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는 진정한 개인적 소망을 막 말하려 했을 때, 마음속의 진정한 소망을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열두 사도가 시카에서 돌아왔고, 예수가 이 여자와 함께 ―이 사마리아 여자와, 그것도 두 사람만― 아주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그들은 재빨리 물품을 놓아두고 옆으로 비켰고, 아무도 감히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한편 예수는 날다에게 말했다: “여자여, 네 길을 가라.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생명의 물을 받았으니, 새로운 기쁨이 네 혼 속에서 솟아나겠고 너는 최고자의 딸이 될 것이다.” 그 여자는 사도들이 비난할 것을 눈치채고, 물동이를 남겨두고 성으로 달아났다.
143:5.10 도시로 들어가면서, 만난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야곱의 우물로 가세요, 빨리 가세요,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살아왔던 모든 것을 말해준 사람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교화자가 될 수 있을까요?” 해가 지기 전에, 큰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야곱의 우물에서 모였다. 그리고 주(主)는 생명의 물, 깃드는 영이 주는 선물에 대하여 그들에게 더 말씀했다.
143:5.11 사도들은 예수가 여자, 그것도 의심스러운 성품을 가진 여자, 아니 부도덕한 여자와도 기꺼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 받은 충격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했다. 여자, 아니 이른바 부도덕한 여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택할 수 있는 혼을 가졌고, 이로써 하나님의 딸이요 영생을 받을 후보자가 된다는 것을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치기는 무척 어려웠다. 19세기가 지난 뒤에도 많은 사람이 주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꺼려하는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조차 그리스도의 삶의 진리가 아니라, 그가 죽은 사실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쌓아 올렸다. 세상은 예수의 비극적이고 슬픈 죽음보다 행복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143:5.12 날다는 이튿날 이 이야기를 전부 사도 요한에게 말했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고, 예수도 열두 사도에게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143:5.13 날다는 요한에게 예수가 자신에게 "내가 살아온 모든 일을" 말했다고 전했다. 요한은 여러 번 예수께 이 날다와 이야기 한 것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예수는 그녀에게 단 한 가지 자신에 대한 사실만을 말했지만, 그의 눈빛과 그녀와의 대화 방식이 그녀의 복잡한 삶을 한순간에 회상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모든 자아가 드러남을 주의 눈빛, 말씀과 연결지었다. 예수는 그녀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네 명의 다른 남자와 살았고, 그 순간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깨닫게 된 순간, 과거가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후 그녀는 요한에게 예수가 정말로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6. 사마리아의 부흥
143:6.1 날다가 시카에서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이끌어낸 그날 저녁, 열두 제자는 음식을 갖고 막 돌아왔고, 그들은 종일 음식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으므로, 예수에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곧 어두워질 것을 알았고, 사람들을 보내기 전에 그들과 이야기할 결심을 굳혔다. 안드레가 예수에게,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전에 잠시 음식을 드시라고 설득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 사도들이 이 말을 듣고,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혹시 누군가가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나? 그 여자가 물 뿐만 아니라, 음식도 주었나?” 예수가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 사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다. 너희는 더 이상 '추수 때까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사마리아인들의 성읍에서 우리의 말을 들으러 나오는 이 백성을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추수를 위해 이미 들판이 하얗게 되었다. 추수하는 자는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이로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한다. 여기에서 `하나는 심고, 다른 하나는 거둔다.' 는 말이 참되다. 내가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리라. 다른 이들이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 관한 말이었다.
143:6.2 예수와 사도들은 시카로 들어갔고, 게리짐 산에서 캠프를 세우기 전에 이틀 동안 전도했다. 시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세례받기를 청했지만, 예수의 사도들은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다.
143:6.3 게리짐 산에서 야영하던 첫날 밤에 사도들은 야곱의 우물에서 그 여인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에 예수가 그들을 꾸짖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심이 되는 실체"에 대한 기억에 남을 말을 해주었다. 어떤 종교에서든 가치가 불균형을 이루고 이 사실들이 신학에서 잔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매우 쉽다. 십자가의 사실은 후일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온 종교의 중심 진리가 아니다.
143:6.4 예수가 게리짐산에서 가르친 주제는 이러했다. 예수가 형제요 친구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이자 친구로서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리는 이러한 신성한 관계를 관찰한 것에 대하여 위대한 선언인 것처럼, 사랑은 세상에서-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관계라는 것을 그들에게 재차 강조했다.
143:6.5 예수가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렇게 자신을 한껏 선언한 것은 그가 안전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려고 사마리아의 심장부로 그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43:6.6 예수와 열두 사도는 8월말까지 게리짐 산에서 진을 쳤다. 낮에는 사마리아의 도시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밤에는 캠프에서 보냈다. 사마리아의 이 여러 도시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한 일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많은 혼을 얻었고, 예수가 죽고 부활한 후,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을 모질게 박해함으로 사도들이 땅 끝까지 흩어지고 나서, 이 지역에서 빌립이 놀라운 일을 하도록 길을 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7. 기도와 예배에 관한 가르침
143:7.1 게리짐 산에서 저녁 회의가 있을 때, 예수는 위대한 진리를 많이 가르쳤고 특히 다음을 강조했다:
143:7.2 참된 종교는 창조자와의 자의식적인 관계에서 개별 혼이 행하는 행위이다; 조직화된 종교는 종교주의자들의 개인적 예배를 사회화하려는 인간의 시도이다.
143:7.3 예배―영적인 것을 깊이 명상하는 것―은 물질적 현실과 접촉하는 봉사(예배)와 번갈아 있어야 한다. 일하고 노는 것을 번갈아 해야 한다; 종교는 유머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심오한 철학은 리듬감 있는 시로 완화되어야 한다. 삶의 긴장-성격이 긴장하는 시간-은 예배하는 안식으로 완화되어야 한다. 우주에서 성격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불안한 감정은 아버지를 향한 믿음의 깊은 명상과 Supreme(최상위)의 실현 시도로 해소되어야 한다.
143:7.4 기도는 인간을 덜 생각하게 만들고 더 많이 깨닫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은 지식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통찰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143:7.5 예배는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예상하고, 그 새로운 영적 의미들을 현재 삶에 반영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기도는 영적으로 지탱해 주지만, 예배는 신성하게 창조적이다.
143:7.6 예배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의 영감을 주어 유일한 분을 찾게하는 기술이다. 예배는 혼이 물질 우주에서 얼마나 분리되었는지, 동시에 모든 창조의 영적 실체에 얼마나 안전하게 붙어 있는지를 재는 척도이다.
143:7.7 기도는 자신을―되새기는―숭고한 사고이다. 예배는 자신을―잊는―초월적 사고이다. 예배는 수고 없는 집중, 참되고 이상적인 혼의 휴식, 편안한 영적 노력의 한 형태이다.
143:7.8 예배는 부분 자체와 전체를 동일시하는 행위이다; 유한과 무한; 아들과 아버지; 시간과 영원이 발맞추어 나가는 해위이다. 예배는 아들(son)이 신성한 아버지와 개인적 으로 하는 소통이며, 인간 혼-영이 신선한, 창조적인, 형제적인, 애정을 가진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143:7.9 비록 사도들이 캠프에서 그의 가르침 중 몇 가지만 이해했지만, 다른 세계는 이해했으며, 땅의 다른 세대들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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