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혼인잔치
피터 브뢰겔
피터 브뢰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우스꽝스러운 농부의 그림을 주로 그린 화가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도덕적인 주제를 쾌활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농부 주제를 이용했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풍자적인 그림에 영향을 받아
주로 민속, 속담, 격언들에 바탕을 두고
하나의 풍경 속에 농촌생활로부터 받은 영감을 화폭에 담았다.
기록에 의하면 브뢰겔은
농부로 가장하고 시골의 결혼식에 직접 가서 피로연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가 묘사한 혼인잔치의 장면은
떠들썩하고 흥청거리는 축제의 장면이다.
그가 그린 <농부의 혼인잔치>를 보면
신부 측의 큰 곳간 안은 연회 준비로 한창 분주하다.
혼인잔치 주인공인 신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커다란 녹색 휘장을 배경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식탁 앞에 앉아 있다.
뺨을 붉힌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당시 풍습대로
머리를 양어깨에 늘어뜨리고 머리에 붉은색 띠 형태의 화관을 두르고 있다.
신부의 모습은 브뢰겔의 판화 작품 <결혼식의 춤>에 언급한
“저 새아씨는 뚱보이며 귀엽구나.”라는 시와 같이 건강미가 넘쳐흐른다.
신부는 연회의 주인공으로서 영예롭게 좌석에 배치되어 있다.
신부 옆, 의자에 앉은 노인과 그 옆에 있는 부인은 신부의 부모이다.
물론 잔치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이 참석했다.
신부 부모의 오른쪽에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복장을 한 사람은
당시 성직자를 혼인잔치에 초대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검은 옷에 긴 칼을 찬 사람은
이 마을의 대표로 혼인의 증인 역할을 한다.
또한 축제의 흥을 돋우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악기 연주가들이
긴 식탁 옆에 서 있다.
멀리 문 입구에는 떠들썩한 연회장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농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신랑은 어디 있을까?
중앙에 앉아 있는 신부는 쉽게 알 수 있지만 신랑의 위치는 불확실하다.
네덜란드에서는 신랑이 하객을 접대하는 것이 관습이기에
음식을 나르거나 음료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신랑의 모습을 압축할 수 있다.
신랑은 식탁 가장 끝에서 음식 접시를 나눠주고 있는 붉은 모자를 쓴 사람,
그림 중앙에서 흰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고 있는 남자,
왼쪽 앞에 예복을 잘 갖춰 입고 맥주를 작은 항아리에 붓고 있는 사람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예복을 갖춘 남자는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6만 명의 군사와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브뤼셀에 급파하여
네덜란드의 민중 봉기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억압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브뢰겔은 이러한 극한적인 피의 학살을
민중들의 생활 안에서 풍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스페인의 간섭과 민중들의 자유로운 축제 장면으로
애국심을 담고자 한 의도도 담겨있다.
그림은 사회적 풍자와 함께 화가 개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나타난다.
<농부의 혼인잔치>를 그린 후 몇 달 뒤에 죽음을 맞이한 화가는
자기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그림 안에서 신부에 적합한 신랑의 모습을 예복을 차려입은 겸손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신부를 교회의 상징으로 볼 때,
신랑인 화가는 그에 적합한 예복을 갖추고자 한 것이다.
그는 잔치의 주인 몫으로 윗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
초대 손님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나누어 주려고 준비 중인 남자로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벽의 쇠갈퀴에 매달려 있는 밀짚 두 단은
수확의 맨 나중 것으로 추수가 끝났음을 알린다.
이미 추수를 통해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였듯이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희망적인 모습은 남자의 바로 옆 바닥에 앉은 아이이다.
아이는 다 먹고 난 빈 접시를 들고 손가락을 빨고 있다.
이 행동은 기근이 닥쳤던 당시 네덜란드 상황을 암시하고
배고픔에 대한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커다란 모자가 푹 덮어져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모자 뒤에 달린 공작새 깃털이 눈에 띈다.
공작새 깃털 끝에 달린 눈은 하느님의 눈으로 영원 불멸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어린이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눈이 아닐까?